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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신학

마태복음과 이방인

마태복음과 이방인 
조병수 교수
요약
마태는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방인에 대하여 두 가지 입장을 제시한다. 이방인은 선교의 대상일 뿐 아니라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다. 마태는 이러한 이중적인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추진하고 이방인에 의한 영향을 방지하는 이첨판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태가 이러한 역할을 마태가 자신의 상황에서 스스로 체득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수용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방인에 대한 이중적인 입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고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교회들이 이방인과 관련하여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는 현재의 서기관으로서 과거의 예수와 미래의 교회를 연결하고 있다. 마태는 주인의 양식을 집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이다 (마 24:45).
Explaining the transition from a Jewish mission to a Gentile mission, Matthew expresses some ambivalence in attitude towards the Gentiles. For him they are seen as the fundamentally positive object of the Christian mission. But he also views them warily. The ambivalent position of Matthew plays a role of bicuspid which entails a Gentile mission on the one hand and protects a Gentile influence on the other. Important is that Matthew ascribes this role not to himself but to Jesus Christ. On the basis of two diverse positions of Jesus Christ concerning the Gentiles Matthew makes a decision of his own attitude towards them as well as shows which way the church of the future should go in relation to the Gentile world. In this sense Matthew as a scribe of the present connects Jesus Christ of the past with the church of the future. Matthew is the faithful and wise servant who gives the food of his master to his household at the proper time (Mt 24:45). 
서론
마태가 어떤 상황에서 복음서를 기록했는지를 재구성해보려는 대부분의 노력은 실제로 상상에 의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실은 단지 마태가 자신의 현재적 상황에서 예수의 과거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는 무엇을 목적으로 예수의 과거를 기록했을까? 그 가능성은 첫째로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기록하려고 했든지, 아니면 과거와 현재를 접목시키려고 했든지 (마태의 신학으로 예수 이야기를 형성하려고 했든지, 예수 이야기로 마태의 신학이 형성되었든지), 아니면 과거를 현재의 통로로 미래에 연결시키려고 했든지 이다. 첫째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마태가 과거의 사실을 자신의 현실적인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의지를 가졌다는 점에서 마태의 기록은 단순한 과거진술이 아니라 현재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둘째 가능성에 큰 타당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와의 접목으로 마태의 기록의 의미가 끝나고 만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마태는 자신의 현실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같은 미래의 사건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세 번째의 것이다. 사실 마태가 제시하는 시간범위는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마 1:1-17),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재림이라는 불명확한 미래에까지 확장된다. 
과거 현재 미래
아브라함 마태의 오늘 재림
(1:1-17) (27:8; 28:15) (19:28; 24:29ff.; 25:31ff.)
이렇게 볼 때 마태는 세 가지 시간에 직면해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 마태는 이런 시간범위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장차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특히 “오늘”이라는 현재와 “재림”이라는 미래 사이에 놓여있는 자신의 공동체 (독자)에게 진로를 제시해야 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마태는 먼저 자신의 현실을 똑바로 직시했을 것이다. 아래서 언급하겠지만 마태의 현실은 특히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잘 나타났다. 강도가 어떻든지 간에 마태의 공동체는 유대교와의 마찰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게 되었고 자신의 길을 설정해야 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이스라엘 민족의 핵심으로 이해했던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었고, 이제 스스로 새로운 방향을 정립해야 했다. 마태복음은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이러한 새로운 방향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그런데 마태는 미래의 길에 발을 내딛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마태를 미래의 길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다. 마태는 샘물이 시내를 거쳐 바다로 흘러가듯이 과거는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간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과거의 샘물은 현재의 강을 거쳐 미래의 바다를 결정한다. 그래서 마태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자신으로 하여금 미래의 길을 가게 만드는 과거의 사실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는 현재 뿐 아니라 미래를 결정하는 과거에 집착하게 되었다. 마태는 현재와 미래의 길을 위하여 과거를 신뢰한다. 마태에게 그 과거의 샘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유일한 스승이었던 그 공동체에게는 (23:8) 바로 예수에게 방향정립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역으로 말하자면 마태는 현실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과거를 의뢰하여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시도를 하였던 것이다. 마태에게는 미래의 길에 발을 내딛기 위해서 철저하게 과거로 귀환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마태의 이러한 시도는 무엇보다도 이방인에 대한 입장과 관련하여 잘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에서 이방인에 대한 마태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이런 시도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1. 연구사
초기 편집사학파는 마태복음에 제시된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성을 설명함으로써 마태가 이방인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었는지 발표하는 데 주력하였다. G.Barth, R.Hummel, Hammerton-Kelly로 이어지는 두 전선 이론은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추방당하기 전의 상태에서 벌어진 온건한 논쟁을 전제로 하면서 마태가 한 편으로는 바리새적인 유대교 랍비들의 율법해석에 대항하여 사랑의 계명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예수의 율법관을 강조하고 (예를 들면 마 5:21-48 Antitheses) 다른 한 편으로는 율법을 무시하는 반율법주의적인 기독교인에 대항하여 율법의 정당성과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예를 들면 마 5:17) 주장한다. 이에 비하여 W.D.Davies는 성전파괴 이후에 요하난 벤 자카이에 의해서 주도되는 얌니아의 개혁 유대교의 도전에 마태가 응답하게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추방당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G.Strecker와 D.R.A.Hare는 마태의 공동체가 이미 유대교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초기 편집사학파가 마태복음에 제시된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하든지 간에 한 가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결국 마태의 공동체는 유대교와의 갈등의 결과로 이방인에게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방인에 대한 마태의 진술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편집사학파 이전의 일이다. 이 주제에 화두를 던진 사람은 K.W.Clark이다. 그의 전체적인 요지는 마태가 이방인에 대하여 대단히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마태복음이 개심한 유대인 (a converted Jew)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이방인에 의한 저작설을 주장하였다. 마태복음의 유대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이방인 “마태”를 추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이유를 이방인 성향이 마태에게 일차적 주제라는 점에서 찾는다. Clark에 의하면 민족으로서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제시되었지만 민족적으로 거절당하고 이방인들에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이 주축이 된 기독교가 유대교를 대치하게 되었다. Clark의 이론은 초기 편집사학파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 이후로 마태복음의 이방인 문제를 다루는 글들이 줄을 이어오다가 최근에 D.C.Sim에 의하여 이 주제가 더욱 크게 부상되었다. 
Sim은 Clark에 대한 비판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Clark과 정반대로 마태복음에는 이방인에 대한 강한 부정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Sim도 마태복음이 이방인에 호의적인 자료를 상당히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마태가 이방인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견해를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논문의 목적으로 삼는다. Sim은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는 예수의 계보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이방인을 위한 우호성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다말과 우리야의 아내가 이방인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하며 마리아와의 연계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의문을 던진다. 또한 그에 의하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이방인들 가운데 부정적 인물이 많다 (예를 들면 가다라 주민들, 본디오 빌라도, 예수를 처형하는 로마 군병들). 심지어 Sim은 십자가 곁에서 백부장과 군병들이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짖은 것까지도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단지 “신적인 능력 앞에서 패배의 부르짖음” (a cry of defeat in the face of divine power)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태복음에는 이방인에 의한 핍박과 같은 아주 부정적인 진술 (마 20:19) 뿐 아니라 계속해서 마태공동체와 이방세계 사이의 부정적 관계를 서술하는 네 가지 내용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마 5:46-47; 6:7-8; 6:31-32; 18:15-17). 이 네 본문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본문들에 의하면 이방세계는 마태복음 독자들이 본받아서는 안될 불경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마태 공동체는 대체적으로 이방인 이웃들과 접촉을 피한 것으로 나타난다. 마태복음기자와 그의 공동체는 유대적이기 때문에 이방인의 세상은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피해야 할 분명히 낯선 곳이다. Sim이 마태복음에서 부정적인 이방인 입장을 발견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에 의한 핍박의 모티브이다 (마 10:17-22; 24:4-14). 그에 따르면 이방인에 대한 이런 긴장(회피)관계를 더욱 가중시킨 것은 유대인 전쟁 후에 더욱 심각하게 발생한 이방인에 의한 기독교 핍박이다. 마태 공동체의 이방인 선교는 반대와 핍박에 봉착했는데 이것이 이방인 세계가 공개적이며 친근한 장소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Sim은 유대인 전쟁이 마태 공동체에 준 결과는 이방인 세계에 참여가 아니라 그들 사이에 쐐기를 박아 이방인 선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고 생각한다.
Sim은 결국 이로부터 마태에게 이방인 심판사상이 싹트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이방인 견해는 Sim에게 마 28:19까지도 재해석하게 만들었다. Sim은 마태 공동체는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는 구절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선교대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 마태 공동체는 자신의 역할이 유대인 선교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하였다.
D.Senior는 Sim의 주장은 너무나 극단적이라고 비판한다. Senior의 요점은 마태가 이방인 세계에 대하여 양면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의 공동체는 제한적인 또는 조건적인 이방인 선교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는 것이다. 유대교적 유산에 대한 마태의 복합적인 관계는 사실 그가 이방인의 미래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견해에서 반영된다. 그는 다양한 증거로부터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마태복음의 본질적 강조 모티브” ("a substantial underlying motif of Matthew's Gospel")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마태복음은 실제로 이방인들을 모든 중요한 부분에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이 예수에 대한 모범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이해하면서 복음이 결국은 그들에게 전파될 것과 그들이 기독교 공동체에 편입될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Senior는 이방인이 기독교 공동체에 포함될 것이라는 증거로 마태복음에서 이방인들이 민족적 신분보다 신앙행위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과 핍박자를 위한 기도가 언급되며, 이방인 치료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따라서 Senior에 의하면 마태가 이방인에 대한 예수의 관계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결코 무의미하거나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Senior는 마태는 이방인이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는데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방인이 공동체에 편입되더라도 유대적 유산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바리새적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유대적 유산의 정당성을 방어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할 다음 세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을 양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Senior는 이방인의 다수가 공동체에 들어왔을 때 마태의 소망은 무산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G.R.Smillie은 마태복음에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인 진술과 긍정적인 묘사의 병행 (juxtaposition)이 나타나는 것은 유대교적인 전통적 언어 (conventional language and imagery)와 기독교적인 비전통적 용례들 (unconventional usages)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Smillie에 의하면 마태가 이런 방식으로 보이고자 시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Smillie는 이방인 신자들은 예수의 모든 제자들에게 요청되는 신앙의 모범 ("paradigms of the faith that is called for in all of Jesus' disciples")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가능성을 찾는다. Smillie는 마태복음이 이방인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입장은 이방인의 환경에서 동하던 역사적 예수에게 근거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2. 이방인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이제 우리는 마태가 이방인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입장을 살펴본다. 마태는 이방인에 대하여 부정과 긍정이 교차되는 이중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이중적 입장이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한다. 
1) 이방인에 대한 긍정적 입장
마태복음이 이방인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장 먼저 복음서의 첫머리에서 암시되고 있다. 마 1:1은 예수에게 세 가지 명칭을 부여한다: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 이 세 가지 주제는 예수의 계보 (마 1:2-17)와 예수의 탄생사 (마 1:18-2:23)에 엮어져 있다. 먼저 예수의 계보 (마 1:2-17)는 이 세 가지 주제를 역순적으로 진술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마 1:17에서 간략하게 정리한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2-6a), 다윗부터 바빌론 이주까지 (1:6b-11), 바빌론 이주에서 그리스도까지 (1:12-16). 또한 이 세 가지 주제는 예수의 탄생사 (마 1:18-2:23)에서 각각 요셉: 다윗의 자손 (1:18-25), 동방박사들: 아브라함의 자손 (2:1-12), 애굽 이주: 그리스도 (2:13-23)로 설명된다.
마 1:1 마 1:2-17 (계보) 마 1:18-2:23 (탄생)
그리스도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2-6a) 요셉: 다윗의 자손 (1:18-25)
예수 다윗의 아들 다윗에서 바빌론 이주까지 (1:6b-11) 박사들: 아브라함의 자손 (2:1-12)
아브라함의 아들 바빌론 이주에서 그리스도까지 (1:12-16) 애굽 이주: 그리스도 (2:13-23)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에게 부여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칭호이다. 마태에게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가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받게 하는 아브라함의 씨라는 사실을 지시한다. 마태는 처음부터 모든 민족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제시함으로써 이방인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마태는 이후에도 몇 차례 아브라함을 언급함으로써 이것을 입증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 (마 3:7-10)에 나오는 “하나님이 이 돌들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일으킬 수 있다” (마 3:9)는 말이나 가버나움 백부장 단락 (마 8:5-13)에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다” (마 8:11)는 말이다. 이것은 결국 마태가 아브라함이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역할, 곧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에서 강조된 역할을 암시하면서 미래에 이방인들이 예수의 선교에 포함될 것을 표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방인에 대한 마태의 긍정적인 자세는 마태복음서 전체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에 의하여 더욱 강하게 증명된다. 이것을 위하여 가장 먼저 예수의 계보에 언급된 이방인 여자들을 제시할 수 있다. 마태는 예수의 탄생를 서술하면서 박사들이 동방에서 (avpo. avnatolw/n 마 2:1; evn th/| avnatolh|/ 마 2:2) 왔다고 말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하여 왔을 때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실현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마 2:1-12에 나오는 동방 박사들은 마 1:1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왜 아브라함의 아들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동방에 대한 진술은 예수의 계보에 언급된 바빌론 이주 (마 1:11,12,17)와 어떤 상관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마태는 바빌론에 대한 언급과 동방 박사들에 대한 언급의 결합으로 대사명 (마 28:19)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복음의 보편적 범위를 이미 발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곁들일 것은 바빌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능력을 나타내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애굽이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아기 메시아를 보호하는 지역으로 표현될 정도로 (마 2:13-15,19)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애굽은 이방인을 향한 마태의 긍정적인 입장을 증명해주는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동방박사들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동방박사들 사건이 “동서로부터 (avpo. avnatolw/n kai. dusmw/n)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라” (마 8:11)는 예견을 선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마태는 예수의 복음전파가 처음부터 이방인을 배제한 것이 아님을 보이기 위하여 예수의 초기사역이 이미 갈릴리 전역과 시리아 전역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 4:23-25). 마태복음에서 이방인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과 관련하여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가버나움의 백부장이다 (마 8:5-13). 백부장은 이스라엘 중에 어떤 사람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신앙의 소유자로 인정되었다 (마 8:10). 이 사건에서 이방인들에게 허락되는 족장들과의 식탁교제에 대한 주제 (마 8:11)는 이방인을 위한 구약의 약속을 이루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서의 사역을 보편주의적인 견점으로 이해했고, 종말의 견점에서 특수주의적인 구속사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약속은 예수께서 이전에는 없던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최종적 구원을 위한 우선권을 가질 것을 부인하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류를 포함할 구원의 실현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마태복음의 한가운데서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하여 소돔과 고모라 (10:14-15; 11:23f.), 두로와 시돈 (11:21f.),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 (12:41f.)과 같은 일련의 이방인 (지역)들을 쌍으로 언급하면서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가버나움의 백부장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칭찬받은 가나안 여자 (마 15:21-28)도 이방인에 대한 마태의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로서 지상의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사역을 행하고 이방인 선교를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활동이 이방인지역까지 확장되었고 이방인들은 그에게로 와서 이스라엘에서 발견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신앙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마태는 백부장과 군병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가리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 27:54)고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가 이방인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구절에 나오는 e;qnoj의 사용이다. 
첫째로 마태는 사 8:23-9:1 (LXX, 개역 사 9:1-2)를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의 갈릴리” (Galilai,a tw/n evqnw/n)를 언급한다 (마 4:15). 이로써 마태는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계획은 이미 구약성경의 사상인 것을 표명한다. 마태는 본래 이스라엘이 티글랏빌레셀로부터 구원받을 것을 지시하던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의 등장에 적용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행위의 시간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의 사역이 종말론적인 구속사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사실상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기 예수의 갈릴리 나사렛 정착 (마 2:22f.)과 관련이 있다. 아기 예수의 정착지인 갈릴리 나사렛은 마 4:14-16에 설명되는 이방인의 갈릴리 모티브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신학적인 안목을 보여준다. “이 지역적인 설명은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이방인으로 가는 길” (den Weg des Messias Israels zu den Heiden)을 예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구절은 부활 예수의 이방인선교 (제자화)에 대한 명령 (마 28:16-20)을 선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이방인에게로 가는 구원의 진행을 위한 미래적인 전망 (Zukunftsperspektive)을 발견하게 된다. “이방인을 위한 구원이 성경적이며 선지자적인 전망이라는 사실은 마태에게 중요한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이방인들은 증거의 대상 (eivj martu,rion)으로 설명된다 (마 10:18; 24:14). 먼저 마 10:18을 살펴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선교의 사명 앞에서 (마 10:16) 유대인과 이방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을 전제하고 있다 (마 10:17). 그런데 어느 핍박에서든지 핍박받는 자는 핍박하는 자에게 (auvtoi/j kai. toi/j e;qnesin) 신앙을 위한 증거가 된다. 유대인 뿐 만 아니라 이방인도 핍박받는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복음의 증거를 얻는다. 또한 마 24:14는 말세의 현상을 설명하면서 “그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서 모든 민족에게 (pa/sin toi/j e;qnesin) 증거되기 위하여 전파될 것이다”고 말한다. “온 세상에서” (evn o[lh| th/| oivkoume,nh|)라는 표현이 “모든 민족”이라는 말을 강화하고 있다. 이 구절은 말세로 나아가는 기독교 공동체에게 복음전파를 위한 선교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러므로 “24:14는 28:19에 대한 짝이다. 모든 민족이 천국복음을 듣게 될 것이며 구원을 앙망하고 제자들이 될 것이다”. 
마태는 마 12:18-21에서 사 42:1-4를 인용하여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사실상 이 단락은 문맥을 따져볼 때 예수께서 치병 후에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성취인용이다 (마 12:15-17). 이것은 무엇보다도 겸손과 평화의 예수를 묘사한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마 12:19). 그런데 마태가 단지 겸손하시고 평화스러운 예수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19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그쳐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이 구절을 중심으로 앞뒤로 확대하여 폭넓게 인용한다. 마태의 확대인용은 일종의 괄호법 (inclusio)을 이루고 있는데 여기에서 간과해서 안될 것은 이방인에 대한 언급이 본문을 싸고 있다는 사실이다. 
┏━ 18절: 심판 (kri,sij)과 이방인 (e;qnh)
┃ 19절-20상: 하나님의 종의 모습
┗━ 20하-21: 심판 (kri,sij)과 이방인 (e;qnh)
이것은 마태에게 이방인에 대한 입장을 보여주려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넓은 이방세계에 대한 조망과 세상의 소망으로서의 구세주에 대한 지식이 결정적이다”. 이방인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존재이지만 심지어 그들도 구원의 이름을 소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지상사역을 하던 중에 이미 아주 은밀한 가운데 구원이 이방인을 향하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태는 “이방인 구세주 비밀” (Heiden-Heiland-Geheimnis)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제시하고 있다. 
마 21:43은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한 민족에게 (e;qnei) 주어질 것이라”고 진술한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또 하나의 민족이 성립될 것을 예상시킨다.
이방인에 대한 긍정성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pa,nta ta. e;qnh) 제자로 삼으라” (28:19)고 말씀하신 것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사용된 “모든 민족들” (pa,nta ta. e;qnh)이라는 표현은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열국의 아버지” (path.r plh,qouj evqnw/n 또는 pollw/n evqnw/n, 창 17:4-5)인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들” (pa,nta ta. e;qnh)이 복을 받을 것 (창 18:18. 참조 22:18)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은 서론과 결론에서 괄호법 (inclusio)을 이룬다.
이 외에도 세상 (ko,smoj)은 때때로 마태가 이방인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의 제자들이 빛의 신분으로 관계해야 할 대상이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Umei/j evste to. fw/j tou/ ko,smou, 마 5:14), 천국의 아들들이 심겨져야 할 공간이며 (밭은 세상이요 o` de. avgro,j evstin o` ko,smoj, 마 13:38),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온 천하에서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o[pou eva.n khrucqh/| to. euvagge,lion tou/to evn o[lw| tw/| ko,smw|, 26:13).
2)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 입장
마태는 이방인에 대한 긍정성과 함께 이방인에 대한 부정성도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방인에 대한 마태복음의 부정적인 입장은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볼 때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우선 마태복음에서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살펴보고 이어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먼저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이방인들을 분석해보면 예수와의 관계에서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귀신들린 자의 치병을 보고 예수께 자신들의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한 가다라 주민들로서 (마 8:34), 이것은 예수와 그의 사역을 거절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마태가 예수를 죽이는 일에 큰 책임을 돌리고 있는 빌라도 (마 27:11-26)와 예수를 조롱한 군병들 (마 27:27-31)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방인에 대한 마태의 부정적인 감정은 e;qnoj와 evqniko,j를 경멸적으로 사용하는 구절들 (derogatory references)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방인들의 갈릴리 (마 4:15)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그리고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함께 흑암 또는 사망의 지역과 그늘이라고 부연된다 (마 4:15-16). 이방인들에게는 지배와 전쟁이 유행한다 (마 20:25; 24:7). 이방인의 제도에서는 지배와 서열이 특징을 이룬다.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 교회가 이방인의 제도를 따라가서는 안될 것을 경고하면서 오히려 교회는 섬김과 겸손을 특징으로 삼아야 할 것을 권면한다 (마 20:26-27). 이렇게 함으로써 마태는 교회가 이방인인의 제도에 이질적인 길을 가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에서 이방인들의 관례는 예수의 제자들이 아주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이방인들의 윤리 (대표적으로 인사)를 넘어서야 한다 (마 5:47). 이방인들은 친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 5:44). 또한 이방인들의 종교 (대표적으로 기도)는 교회가 본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마 6:7). 이방인의 기도는 신의 별칭이나 마법어의 열거를 통하여 수다떨음의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이방인의 생활 (대표적으로 재물추구)에 대하여 교회는 질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마 6:32).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재물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마태는 이런 내용들을 언급함으로써 이방인 세계가 불경건한 공간이기 때문에 복음서 독자들이 그들의 관례를 본받아서는 안될 것임을 알려준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를 일러줌으로써 기독교가 이방인들의 윤리와 종교와 생활을 따라감으로써 세속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이방인에 의한 핍박은 마태복음에서 중요한 주제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이방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핍박자로 이해된다 (마 10:18). 그리스도인 이방인에 의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에 의하여 핍박받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마 20:19). 이방인의 핍박은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는 모든 것에서 발생할 것이다 (마 24:9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핍박은 기독교의 신앙에 대한 위협이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마 5:43).
교회설교에서 범죄한 형제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하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가르침 (마 18:17)은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잘 보여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방인은 교회 밖에 존재하는 아웃사이더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 28:19의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maqhteu,sate pa,nta ta. e;qnh)는 말은 아직 이방인들이 교회 밖에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최종적으로 볼 때 영벌에 들어갈 이방인들도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마 25:32 “모든 민족들을 [pa,nta ta. e;qnh]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이와 유사하게 세상 (ko,smoj)도 부정적인 성격을 가진다. 세상은 마귀에 의하여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마 4:8),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빛을 받아야 할 대상이며 (마 5:14), 악한 자의 아들들이 섞여 살고 있는 공간이다 (마 13:38). 
이방인에 대한 마태의 부정적인 입장은 두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교회의 구성과 연관이 있다. 마태의 교회에는 어느 정도의 수효이든지 간에 이방인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이미 이방인 (헬라)의 문화와 접촉되어 있는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마태의 교회는 유대적인 뿌리로부터 잘려져 이방세계로 흡수되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이방인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 마태가 이방인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교회의 방향 때문이다. 이방선교를 강조하는 마태의 교회는 실제로 이미 이방선교에 깊이 참여하여 상당한 결실을 거두고 있었던 같다. 이때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이방인의 지역에 선포되면서 이방인의 여러 가지 사항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새로운 전선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마태의 교회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라는 두 전선에 이어 이방인문화라는 제3의 전선과 마주하고 있다. 이방선교의 사명 앞에 있는 교회가 이방화 또는 세속화의 위협 (위험)에 처하였다. 선교를 위하여 이방세계 (문화)에 들어간 교회가 도리어 이방세계의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태복음은 한편으로 이방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마태의 교회는 이방선교 추진과 함께 이방영향 방지에 관심한다. 이방의 영향을 방지할 때에야 비로소 이방선교가 결실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과 관련하여 마태복음은 선교와 방어를 한꺼번에 담당함으로써 이첨판(二尖瓣, bicuspid valve)과 같은 판막의 역할을 한 것이다.
결론
마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자신의 공동체를 새로운 백성으로 제시하면서 유대인에 대하여 이중적 견해 (dual perspective)를 보여준 것처럼 이방인에 대하여도 이중적 견해를 보여주었다. 마태의 공동체는 전체 사회에 대하여 양면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긍정적인 관심은 이방선교에 대한 권면으로, 부정적인 관심은 이방요소 침투에 대한 경고로 설명된다. 
그러면 이방인에 대한 마태의 이중적 입장은 어디에서 유래했는가? 그것은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근거하고 있다. 마태는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현실적 입장이 예수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보여주고 하였다. “마태가 설명하는 것의 확고한 역사적 근거가 그의 문학적인 임무를 고정시킨다. 그 임무의 일부는 이방인에 대한 예수의 행동을 충실하게 진술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예수의 생애동안 이미 통용되었던 이방인에 대한 태도와 정책을 마태의 동시대인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the firm historical basis of what Matthew recounts anchors his literary task. Part of that task is to faithfully narrate Jesus' behavior towards Gentiles, and thus to suggest to Matthew's contemporaries the attitude and policies towards Gentiles which obtained already during Jesus' lifetime"). 그러므로 마태의 주목적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신학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에게로 돌아간다. 사실 우리는 마태의 정황 (Sitz im Leben)에 관하여 잘 알지 못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마태는 이방인에 대한 입장을 자신의 상황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교훈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마태의 상황. 회당와의 결별의 결과로 이방인에게 전향, Sim 40, Anm. 34 = Meier); 마태공동체가 회당과 더욱 더 갈등에 빠진 결과로 유대인전쟁 후 팔레스타인에서 시리아로 이동하여 이방인 선교에 치중하게 됨 Sim 40, = Brown).
마태는 자신의 상황이 오직 예수의 교훈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였다. “이스라엘 선교는 예수의 지상선교의 독점적인 초점이었으나,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마태의 부활 후 공동체를 위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이었다. 이 현실은 복음서 이야기와 예수의 교훈과 말씀의 내용 안에 들어있는 예수와 이방인의 상호교제 안에서 이미 예상되었다”. 
더 나아가서 마태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으로부터 자신의 상황을 창출해갔다. 이미 예수의 생애와 교훈은 이방인에 대하여 이중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이첨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의 이중적 입장은 기독교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마태도 이에 자연스럽게 동승한 것이다. 마태는 예수로부터 자신이 이방인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지 분명하게 취득하였다. 이방인에 대한 예수의 입장이 이방인에 대한 마태의 입장을 설정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가 예수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마태를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의 입장에 조화를 이룸으로써 이방인에 대한 사역을 창출하고 있다. 마태는 예수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단순히 자신이 이방인과 관련하여 어떤 상황에 있는지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공동체에 이방인과 관련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마태의 목적은 이방인과 관련된 자신의 상황을 진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관련된 자신의 상황을 창출하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태복음에서 이방인에 대한 이중적인 입장과 관련하여 세 가지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로 구약의 입장을 반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차원이다. 둘째로 예수의 입장을 수용하는 마태의 차원이다. 셋째로 마태로부터 예수의 입장을 전달받아야 할 미래의 교회이다. 마태는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예수에게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 입장을 미래의 교회에게 전달하고 있다. 마태는 주인의 양식을 집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이다 (마 24:45). 마태는 예수 (과거)의 입장에 의하여 자신 (현재)의 입장이 결정된 것임을 보이고자 할 뿐 아니라 교회 (미래)의 입장도 결정되어야 할 것임을 보이고자 하였다. 결국 마태에 의하면 과거는 현재를 결정할 뿐 아니라 미래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는 과거의 예수가 미래의 교회로 가는 현재의 건널목이다. 마태는 현재의 서기관으로서 과거의 예수와 미래의 교회를 연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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