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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신학

예수인가 바울인가, 하나님 나라인가 칭의인가

예수인가 바울인가, 하나님 나라인가 칭의인가 
스캇 맥나이트 Scot McKnight 
2011.8.25 김병규 옮김
많은 성경학자와 성도들은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강조한 반면 예수님은 거의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교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누군가는 예수님과 바울이 서로 다른 두 복음을 전했다고 결론짓는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과 바울 모두 실제로 이신칭의를 전파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그 둘이 전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였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건 무슨 일일까?
나는 사도 바울과 함께, 그의 터 위에서, 그를 통해, 그 안에서 자랐다. 바울의 편지는 우리가 보는 성경의 핵심이었다.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부터 지금껏 기억나는 설교는 매주 절별로 전체를 강해한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 설교뿐이다. 복음서나 예수님에 관한 설교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통상 1년에 두 번은 바울이 아니라 다른 데 초점을 맞췄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설교를 들었던 성탄절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설교를 들었던 고난주간이 바로 그때다. 우리는 바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었고, 아무도 이 사실을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다. 나는 바울 식으로 생각하고 믿으며 사는 걸 배웠다. 모든 것을 바울의 신학이라는 체로 걸러냈던 것이다. 이신칭의는 복음을 보는 렌즈였으며, “성령 안에서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는 렌즈였다.
나는 바이블대학(현재의 코너스톤대학교. 미시건주 그랜드래피즈에 위치)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들을 수 있는 성경 강의를 최대한 수강했다. 다시 한 번 바울은 주인공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 졸업반 시절 나는 랄프 마틴이 쓴 「신약의 초석」(크리스챤다이제스트 역간) 첫 권을 읽고서 복음서의 새로운 매력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신학대학원에서의 첫 경험만큼 나를 압도한 것은 일찍이 없었다.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에서 월터 리펠트 교수의 공관복음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 그리고 복음서에 완전히 넋을 잃었다. 그때 그곳에서 나는 평생 예수님과 복음서를 탐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몇 년 후 나는 마태복음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 뒤 몇 년이 지나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 교수로 임용되었고, 예수님과 복음서에 관해 강의할 수 있었다. 나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어떻게 바라보셨는지 전부 다 가르쳤다. 내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해 너무 자주 강의했던 탓에, 한 학생이 “교수님이 하시지 않은 강의라고는 ‘예수님이 바라본 예수님’밖에 없을 겁니다”라는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분명했다. 이전에 나는 바울을 사랑했고 그와 함께 사고했다. 하지만 마치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처럼 그분을 새롭게 마주했을 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 동료는 가끔 내가 바울을 너무 무시한 채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넌지시 묻곤 했다. 정기적으로 바울 서신 일부를 강의하고 있으니, 글쎄, 내가 바울을 무시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바울 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오직 예수님 식으로만 생각했다. 나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사실, 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전에 강렬히 사로잡혀서 바울 서신을 펼쳐 읽을 때마다 매번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복음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
나만 유별난 경험을 한 것은 아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바울에서 예수님으로 옮겨갔다. 복음주의자 사이에서는 누가 결정권을 쥐는가 하는 문제, 즉 예수님이냐 바울이냐 하는 문제로 여전히 긴장이 감돈다. 우리가 복음을 가르치고 살아내는 데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아니면 이신칭의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가 그 문제다.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복음주의 운동의 근원적인 동력이 종교개혁과 대각성 및 18세기와 19세기의 부흥이라는 사실, 곧 복음주의 운동이 하나부터 열까지 바울로 인해 생겨난 운동이라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20세기 초반, 하나님 나라를 진보와 정의에 연결한 듯 보이는 사회 복음이 등장하자 복음주의 운동권 내부에서는 바울을 더욱 강조하기 시작했다. 최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전을 새롭게 발견한 몇몇 복음주의자는 복음주의 내부로부터 그들이 사회 복음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는 경고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많은 복음주의자가 바울 중심적인 신학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일으킨 데는 조지 엘든 래드의 「미래의 현존」(The Presence of the Future), 「하나님 나라: 조지 래드 전집 1」(크리스챤다이제스트 역간), 그리고 「회심」(한국 IVP 역간)으로 잘 알려진, 단호하면서도 끈질기게 정의를 부르짖는 짐 월리스의 목소리, 그리고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싹을 틔운 사회적 양심이 한몫했다. 이 상황에 이르게 한 여러 요인을 논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풀러신학대학원 캠퍼스 중 한 군데서 강의하는 소장파 신약학자 대니얼 커크가 최근 내게 검토를 요청하며 원고 하나를 보내왔다. 처음에 제안한 제목은 「나는 예수를 사랑했지만 바울도 사랑했을까?」(Jesus Have I Loved, But Paul?)였다. 이 제목은 내가 지난 15년간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관찰한 바를 완벽히 잡아낸 것이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예수님을 다루면 좋아하다가도 바울로 옮겨가면 이내 심드렁한 눈빛으로 바뀐다. 복음주의가 예수와 바울의 관계를 놓고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과 오늘날 많은 이들이 편 가르기를 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젊고 진지한 복음주의자들을 많이 만난다. 하나님 나라 언어에 흠뻑 빠진 이들은 바울을 거기에 맞추려 애를 쓰는 반면 바울의 신학적 용어에 젖어있는 이들은 예수님을 바울에게 맞추려 낑낑댄다. 나 역시 바울의 메시지를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맞춰보려 몸부림쳤다가 후에는 예수님을 바울의 메시지에 적합하게 만들어보려 버둥거려봤기에 그 경험을 이해한다.
두 가지 접근
복음주의자들은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 즉 바울과 예수님을 좀 더 완벽하게 조화시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눈에 띄는 점은 각각의 접근법이 자신의 것이야말로 복음 자체를 분명히 드러낸다고 상정한다는 점이다. 첫 번째 접근법은 예수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철저히 숙지해서 바울이 그에 얼마나 들어맞는지 보여주는 방법이다. 다른 접근법은 바울의 복음과 그의 칭의 신학을 완벽히 익혀 예수님이 그에 얼마나 들어맞는지 보여주는 방식이다. 각각의 접근법은 별도의 수고를 동원해 특별한 설명을 덧붙이는데, 이 과정에서 각각의 내용을 살짝 구부리거나 둘을 억지로 끼워 넣을 수밖에 없다. 각각의 접근은 예수님과 바울의 메시지가 일관성 있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이신칭의의 복음이 하나이자 동일하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 중심의 접근법을 생각해보자. 주로 ‘시작된 종말론’이라 불리는 조지 래드 계열의 사고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로 정의된다. 이는 마태복음 12:28, 곧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구절이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너무 가까워서 그 임재를 지금 느낄 수 있으니) 회개하고 믿으라고 말하는 마가복음 1:15 같은 본문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 역동적이고 인격적이며 구속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임재라는 틀을 이신칭의에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미묘한 차이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칭의에 대한 로마서의 증언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주적 구속에 관한 에베소서의 증언을 하나님 나라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한 문제들 때문에 이런 방식의 조화를 보는 내 양심은 매번 불편하다. 먼저 바울의 신학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 중심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충분히 얘기한 적이 없다. 바울 서신 중 하나님 나라를 언급한 곳은 열다섯 군데가 못 된다. 바울을 하나님 나라라는 틀에 맞추는 일은 바울 서신만 가지고는 어렵다. 오히려 이리저리 꿰어 맞춰야만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바울은 하나님 나라라는 측면보다 구원론과 이신칭의 및 교회론을 바탕으로 사고를 전개한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을 공정히 다루려면 바울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더구나 이러한 접근법에는 보다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한다. 바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 이상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역동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나는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 나라가 개인적인 체험이나 회심이길 바라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바울에 끼워 맞추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다음과 같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1세기 모든 유대인에게 하나님 나라는 최소한 왕(예수님 또는 하나님), 백성(이스라엘), 영토(그 땅 또는 이스라엘) 그리고 백성을 규율하는 율법(토라 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됐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서 단순히 비약해 예수님이 칭의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핵심 주제 중 일부를 바울에게서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접근법은 완전히 실패다. 나사렛에서의 첫 설교(4:16-30) 등 누가복음의 중요 문단에서 모두 보이는 주제를 바울의 가르침에서는 찾을 수 없다. 물론 바울도 가난한 사람들, 적어도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포하신 가난한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주제와 재물에 관한 혁명적인 메시지는, 바울이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가르쳤다고 결론 내릴 만큼 바울의 가르침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와 칭의는 같지 않다. 예수님과 바울을 조화시키려면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바울의 칭의 이해에서 출발한다. 칭의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전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빙 둘러가는 것이다. 개혁신학을 되살린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존 파이퍼 목사의 최근 시도는 이러한 접근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준다. 목회자를 위한 어느 집회에서 파이퍼는 다음처럼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께서 바울의 복음을 설교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울이 가르침에 들어맞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과 수많은 역사가의 마음을 괴롭히겠지만, 성경에 대해 이렇게 묻는 것이 부적절하지는 않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파이퍼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justified)이라는 단어가 복음서에서 바울이 사용한 의미로 언급된 예는 단 한 군데밖에 없다는 사실을 조사했다. 누가복음 18: 14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물론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2:37, 그리고 누가복음 10:29과 16:15을 여기에 덧붙일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이신칭의”라는 관점으로 생각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구절을 복음서에서 더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파이퍼는 탁월한 주해 실력과 신학적 설득력을 활용해 예수님은 이신칭의를 분명 가르치셨으며, 심지어 이중 전가(double imputation,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을 뜻함/편주)까지도 가르치셨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주장을 파이퍼 혼자만 한 건 아니다. 오래전 독일 루터파 신학자인 요아힘 예레미야스는 칭의라는 신약성경의 중심 메시지가 예수님과 바울 모두에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 예수님이 사용한 압바(Abba, ‘아빠’를 뜻하는 아람어/역주)라는 용어와 바울의 칭의 신학을 연결했다.
그러나 바울을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를 약화시키는 것이 바울의 칭의 패러다임에 예수님을 맞추려는 시도 또한 약화시킨다. 언어 차원에서 바울에게 맞아떨어진 것이 예수님께도 동일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틀 속에서 예수님께 맞아떨어지던 것이 바울에게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칭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한 적 없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으로, 바울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한 것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바울로 남겨두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다른 방법이 있긴 하다. 둘 모두를 공정히 다루면서도 동시에 복음이라는 차원에서 내적 통일성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복음이라는 방식
이 두 가지 접근법, 곧 바울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전에 끼워 맞추려 하거나 예수님을 바울의 칭의의 비전에 끼워 맞추려 하는 시도가 지닌 문제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각각의 접근은 복음이라는 단어의 범위를 축소한다.’ 이쪽 사람들에게 복음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말이지만 저쪽 사람들에게 복음은 이신칭의와 동의어인 것이다. 분명 복음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나라와 칭의 모두를 압축해 포괄하면서, 하나님 나라나 칭의보다 더 깊이 뿌리내린 개념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확실히 파악한다면 이른바 예수님과 바울 사이의 괴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하려면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바울에게서 시작해보자! 하지만 로마서 3장이나 5장이 아닌 고린도전서 15:1-8에서 시작할 것이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여기서 바울은 복음을 정의하려 한다. 사실 이 본문이야말로 신약에서 복음을 정의하는 유일한 본문이기도 하다. 이 다음에 바울이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몇 가지를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 이것이 바울에게 전해진 복음이었는데(3절), 그 복음은 최초의 사도들이 전한 것이다.
둘째, 그 복음은 사람들을 자신의 죄에서 구원한다(2-3절).
셋째, 복음의 진수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인 예수님의 이야기다(3-8절). 그리스도(메시아)라는 말과 “성경대로”라는 문구는 사도들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이해한 핵심이다.
넷째,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나 칭의라는 그 어떤 단어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우리 죄를 위하여”라는 문구를 집요하게 조사해 이 두 가지 주제를 표면에 등장시킬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우리는 바울 자신이 복음의 정의를 말하게 해야 한다.
종합하자면 이런 말이다. ‘복음이란 무엇보다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복음은 기독론(Christology)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칭의 너머에 또는 그 밑바탕에 복음이 자리하며, 그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를 완성하신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다. ‘복음을 전하다’(to gospel)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이야기를 전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이 동일한가 하는 질문을 완전히 새롭게 고쳐야 한다. 그 질문은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했을까?”를 묻는 게 아니다. 또한 그 질문은 “예수님께서 칭의를 전하셨는가?”를 묻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파이퍼처럼 예수님께서 바울의 복음을 전하셨는지 질문을 던진다면, 그건 사실상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는 뭐라 가르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하신 분이라 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와 죽음, 장사된 사실과 부활에 대해 전하셨을까요?”라고 묻는 것이다.
신약성경 전체가 이 모든 질문에 함께 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답은 바로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라 전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전하셨기 때문에 복음을(그 복음이 바울의 복음이든 베드로나 요한의 복음이든 상관없다) 전하신 것이다. 복음서를 어떻게 읽든, 어느 복음서를 읽든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을 보고 들었던 이들에게 물었던 이 물음에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된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Who am I?)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신 데서 출발해보자.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처음 하신 설교는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설교였는데, 이는 심오하면서도 적절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로만 축소한다면 이 단락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예수님은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구속에 관한 단락인 이사야서 61:1-2을 발췌해 읽으셨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러한 구속의 전권대사로 여기셨다는 점, 곧 자신이야말로 “기름 부음받은”자라고 생각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또 하나의 핵심 본문은 누가복음 7:20-23이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그 이”인지 아닌지 묻는다. 예수님은 이사야서(29:18-19, 35:5-6, 61:1)를 인용해 지혜롭고도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어 답하신다. 마지막 23절의 대담한 주장에 심장이 멎을 지경이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달리 말해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성경구절을 성취하시는 분이라 주장하고 계신다. “이스라엘 이야기는 나로 완성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메시지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이 마지막 본문은 내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부르는 복음서 본문들로 우리를 이끈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서로 대화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 단락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냥 건너뛸까 두렵다. 그러니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나눈 대화에 대해 우리가 먼저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던질 질문은 다음과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성경의 인물과 예언 가운데 그 답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까? 우리 중 누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사야가 말한 그 인물 또는 메시아, 엘리야, 모세나 인자(人子, the Son of Man) 아니면 다윗 계통의 왕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지만 만약 그랬다면 아마도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사회 보호시설에 수감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계속 대화를 이어갔던 것 같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항상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 반면 예수님은 요한이 어떤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언제나 분명히 알고 계셨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마태복음 16:14을 보라. 다른 사람들은 요한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요한복음 1:19-28에 나온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요한복음 1:22-23이 말해준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생각은? 마태복음 3:11-12과 누가복음 7:18-23이 보여준다. 예수님은 요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마가복음 9:9-13을 보라. 예수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누가복음 7:22-23이 그 답을 준다.)
여기엔 복음서에 면면히 흐르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예수님과 요한이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할 사람으로 보았다는 점, 자신들의 이야기가 구원의 이야기가 될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복음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했을 수 있고, 바울이 칭의를 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와 칭의의 바탕에는 기독론, 곧 메시아이자 주님이시며 그 나라를 임하게 하사 믿음으로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놓여있다.
여기서 주절주절 풀어놓는 걸 양해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예수님에 대한 구원 이야기로 확신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 사이에 놓인 심오한 일관성을 발견하게 된다. 둘 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했기에, 동일한 복음을 “전파한 것”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겠는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성경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해 복음을 전한 바울처럼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가 자신을 가리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함으로 “복음을 전하고” 계신다.
열둘이라는 상징적인 숫자,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열 지파의 회복이라는 소망과도 연관된 그 숫자를 골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 열둘에 포함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그 열둘의 주인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심으로 역사가 완성되어감을 보셨고, 자신이 그 완성의 주인임을 아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도들이 전한 바로 그 복음이다.
그 누가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9:31에서 하신 것처럼 자신이 죽을 뿐만 아니라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예언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그것도 다니엘서 7장의 인자 환상과 이사야서 42-53장의 종의 이미지를 결합한 방식으로 주기 위해 온 인자(the Son of Man)라는 말로 자기 생애를 통틀어 말할 수 있겠는가? 마가복음 10:45과 마가복음 24:24을 묶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러한 이미지를 발견하게 되지 않는가!
그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을 유월절로 여기신 것처럼 자신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예수님은 깊은 뜻을 지닌 이미지를 종합해서 자신의 삶을 그러한 이미지로 깨달을 수 있게 하시고서는, 그분 자신이 이스라엘의 구속과 사죄를 대신 담당하는 이임을 천명하신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에 담긴 바울의 복음이다.
그렇다면 내 주장은 단순하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시작한다면 바울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라는 틀에 우겨넣어야 하고, 우리가 칭의에서 시작한다면 예수님을 칭의라는 틀에 끼워 맞춰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에서 시작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11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복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 즉 둘 다 예수님이 하나님 이야기의 중심이라고 증거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 복음이 성경의 핵심이며, 그 복음이 예수님의 이야기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그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와 칭의 모두를 담아내는 이야기가 된다. 단 그 이야기는 예수님에서 시작해야 함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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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는 노스파크대학교(North Park University) 종교학과의 칼 올슨 석좌교수(Karl A. Olsson Professor)로 재직 중이다. 다수의 책을 저술한 저명한 복음주의 신약학자로, 국내에는 「예수와 제자들이 매일 암송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살림 역간)가 소개되어 있고, 최근작으로 「하나의 삶: 부르시는 예수님, 따라가는 우리」(One Life: Jesus Calls, We Follow)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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