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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신학

주의 만찬과 자기를 살핌(고전 11:17-34)

주의 만찬과 자기를 살핌(고전 11:17-34)
Lord's Supper and "Discerning Oneself" (1 Cor 11:17-33)
권연경 (신약신학)
1. 서론: 성찬에 앞선 내적 성찰?
2. 고린도전서 11:17-34절의 흐름
3. “자신을 살피라”는 말의 의미
4. “몸”을 살피는 일: “하나됨”의 중요성
5. 먹는 방식으로서의 “자신을 살핌”
6. 결론
1. 서론: 성찬에 앞선 내적 성찰?
본고의 목적은 고린도전서 11장을 기초로 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거기에 비추어 오늘 우리가 가진 성찬 예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성찬은 ‘상징적인’ 분량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 또한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은 기독교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당연히 바울 공동체에서는 “주의 만찬”이 예배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너희가 먹으러 모일 때에” (고전 11:31)라는 바울의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 당시 교회로 모이는 일은 간단히 “먹으로 모이는” 것으로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오늘날은 성찬이 초대교회 당시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정상적인 식사였던 것이 아주 간소하면서도 대단히 의식화된 형태가 되었고, 모일 때마다 예배의 중심이던 것이 일년에 몇 차례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예배의 방식이 바뀔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런 변화 자체를 두고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변화는 개선일 수도 있는 만큼 또한 왜곡일 수도 있다. 방식의 변화가 단순한 외형의 변화를 넘어 본질의 왜곡을 수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의 성찬 의식은 바울의 가르침과 사뭇 거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바울의 진술을 나름으로 해석하여 정당화 한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의 진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의 만찬을 거행하기 전 먼저 “자신을 살피라”고 충고한다 (11:27). 또한 교회 내에 병든 이들과 죽은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면서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살폈다면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질책한다 (11:31. 개역은 “심판” 대신 “판단”으로 번역).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이유는 고린도의 성도들이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셨고 따라서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27절). 이들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한 채” 주의 만찬에 참여하고자 하였고, 결과적으로 주의 몸과 피가 아닌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신” 꼴이 되고 말았다 (29절). 
사도 바울의 이 경고를 근거로 오늘날 성찬을 집전하는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돌아보라는 권고를 빼놓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성찰에 관한 권고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마음에 거리낄 만한 죄가 있는 지 점검해 보라는 주문이다. 그리고 이 권고는 대개 아직 해결되지 않은 죄가 있을 경우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는 권고로 이어진다. 해결하지 못한 죄를 안고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곧 “주의 몸과 피를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일이 된다는 근거에서이다 (27절). 실제 목회 현장에서 보면 목회자의 이런 권고는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마음가짐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점에서 성찬은 더없이 거룩한 의식으로 인식된다. 여기서의 실수는 곧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또한 그것은 곧 나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도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을 성찰해 보고, 종종 성찬 참여를 포기하기도 한다. 필자 역시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성찬식을 도울 때 개인적인 이유들로 참여를 사양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만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권고한 것이라면, 성찬에 앞서 나 자신을 살피고 또 필요하다면 성찬에 참여하기를 포기하는 관행은 우리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면모의 하나라 보아 좋을 것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 그리고 나 자신의 죄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일 만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런 관행이 실제 사도 바울이 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관행은 실상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주는 권고를 잘못 해석한 탓이다. 성찬이 합당하게 치러져야 한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다. 성찬에 앞서 우리 자신을 살피라는 것 또한 바울의 엄중한 경고이다. 문제는 “자신을 살피라”는 권고, 혹은 “우리를 살피라”는 권고를 우리가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물론 바울의 말을 잘못 이해하여 우리가 더 조심하게 되었다면 이것이 굳이 나쁜 것이라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보다 심각하다. 현재의 관행 속에는 바울의 은혜 복음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비복음적 요소가 섞여 있으며, 이런 비복음적 요소가 바울의 진술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제시된 생각은 신약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분명해진 상식이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중요한 결론이 일선 목회 현장에는 잘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본고는 쟁점에 대한 치밀한 논의보다는 분명한 결론을 풀어 설명하는 방식, 말하자면 본격적인 주석과 강해가 적당히 섞인 형태를 취할 것이다.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분명해진 결론을 전달하는 것이 본고의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2. 고린도전서 11:17-34절의 흐름
필자가 보기에 이 구절은 우리 성경읽기의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 곧 문맥을 무시한 성경읽기의 가장 극명한 실례를 제공한다. 성찬 시마다 목회자들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담긴 주의 만찬에 관한 전승을 읽고 설교한다. 혹은 주의 만찬 자체를 설명하는 23-26절을 읽기도 하고, 혹은 자신을 살피라는 권고를 포함하여 23-29절까지 좀 길게 읽기도 한다. 하지만 11:17-22절이나 11:30-34절을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말하자면 이 구절들이 본래의 문맥 속에서 고찰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바울의 말은 고린도교회라는 구체적인 정황을 벗어나 성찬에 관한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간주되고, 우리는 바울의 진술을 우리의 상황에 마음대로 적용하여 우리 나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살피라”는 바울의 권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주의 만찬을 먹으면서 보여준 파행적인 행태를 지적하고 이를 시정하도록 명령하는 문맥 속에 등장한다. 따라서 바울의 이 권고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우리는 이 권고가 주어지는 구절의 구체적인 정황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바울이 주의 만찬 문제를 다루는 대목은 11:17-34절이다. 물론 10장 16-21절에서도 이미 주의 만찬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거기서는 주의 만찬이라는 주제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을지 말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근거의 하나로 소개된 것이었고, 성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1장 17절에 와서야 이루어지고 있다.
바울의 논의는 크게 네 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다. 
1) 고린도 성도들의 파행적 행태에 대한 비난 (17-22절)
2)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점을 밝히기 위해 주의 만찬의 의미를 새로이 설명하는 대목 (23-26절)
3) 주의 만찬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이끌어 낸 원론적인 준칙 (27-29절)
4)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이 준칙을 적용하여 끌어낸 보다 구체적인 권고 (30-34절). 
편지의 서두에서 이미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고린도 교회 내에 생겨난 파당적 분열 때문이다. 이런 파당적 갈등은 교회의 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드러났고, 이점에 있어서는 교회 모임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주의 만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바울이 글로에 집안 사람들을 통해 들은 대로 (1:10 ff.) 고린도 교회에는 이들이 “교회에 모일 때” 그들 중에 “파당”과 “분쟁”이 있었다 (11:18). 이에 대해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는 함께 교회로 모여 먹는 행위가 “주의 만찬을 먹는” (kuriako.n dei/pnon fagei/n)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20절).
왜냐하면 교인들 각자가 “먹을 때에” (evn tw/| fagei/n) “자기 자신의 만찬을” (to. i;dion dei/pnon) “먼저 가져다 먹기” (prolamba,nei) 때문이다 (21절). 여기서 “주의 만찬”을 먹겠다는 좋은 의도와 “자신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는” 구체적 행태의 대조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주의 만찬이 이런 식으로 거행되다 보니 자연 어떤 사람은 취하는 반면, 어떤 이들, 특히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은 먹을 것이 남아있지 않아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21절), 이런 식으로 교회의 “못 가진 이들” (tou.j mh. e;contaj), 곧 가난한 성도들은 주의 만찬을 먹자고 모인 자리에서조차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되었다 (22절).
바울은 이를 두고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행태라고 심하게 나무란다 (22절). 단순히 가난한 성도들을 개인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교회 자체를 무시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교회에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겠다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긴다”는 비난은 이들의 행위가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동임을 지적하는 강한 꾸짖음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런 식으로 행해지는 식사는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주의 만찬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모임은 “유익한” 것이 아니라 모이면 모일수록 오히려 “해로울” 것이다 (17절). 어떤 의미에서 해로운가 하는 것은 바울의 논의가 진행되면서 분명해 질 것이다 (34절을 보라). 이 단락은 “나는 여러분들을 칭찬하지 않는다” (ouvk evpainw/) 라는 문구로 시작과 끝이 엮어진 일종의 수미상관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17절과 22절). 성도들의 파행적 태도에 대한 바울의 분노가 얼마나 깊은가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23-26절은 고린도 교인들의 파당적 행태가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주의 만찬의 참뜻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주의 만찬이란 주님 자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의식이다 (25절). 이것은 조금 전 10장에서 이미 언급된 사항이었다. 우상제물을 논하는 대목에서 바울은 교회의 성찬이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0:16). 단순한 식사를 넘어서는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이 관계는 주님의 몸과 피, 곧 주의 죽으심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요컨대 성찬의 의미는 “주의 죽으심을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전파하는 것”이다 (26절). 바울의 이 진술이 고린도 교회의 현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는 다음 단락에서 논의하게 될 것이다.
27-30절은 앞 단락에서 설명된 주의 만찬의 의미에 근거하여 주의 만찬을 거행할 때 명심해야 할 원론적인 준칙을 도출하는 대목이다. 주의 만찬이 일반적인 저녁 식사를 넘어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행위이라면,
주의 몸과 피를 “합당치 않게” (avnaxi,wj) 먹고 마시는 것은 결과적으로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범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27절). 따라서 주의 만찬에 주의 만찬에 임하는 사람은 주의 만찬을 합당치 않게 먹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자 “자신을 돌아보아야” (dokimaze,tw de. a;nqrwpoj e`auto.n) 할 것이며, “그런 식으로” (ou[twj) 떡과 잔을 먹고 마셔야 할 것이다 (28절). 왜냐하면 “몸을 살피지 않고서” (mh. diakri,nwn to. sw/ma) 곧 “합당치 않게”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면, 이는 곧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주의 몸과 피가 아니라 여기에 대해 죄를 범한 우리 자신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일 것이기 때문이다 (29절).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이 논의를 고린도 교회의 실제 상황과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는 병든 자들과 죽은 자들이 많았는데, 바울은 이것이 바로 합당치 못한 모습으로 주의 만찬을 치루어 온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지적하고 있다 (29절).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폈다면” (eiv de. e`autou.j diekri,nomen) 지금처럼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31절). 물론 이 심판은 우리를 깨우치기 위한 교육적 의미의 심판이지 우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더불어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32절). 그러니까 우리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참된 의미에서의 주의 만찬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너희가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는 권고로 귀결된다 (33절). 하나님의 심판은 이들이 합당치 못한 모습으로 주의 만찬을 먹은 탓이다. 이들이 합당치 않게 먹었다는 것은 서로 기다려 함께 먹지 않고 각자 자기 만찬을 먼저 갖다 먹어 가난한 성도들을 부끄럽게 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지금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태도는 이런 파행적이고 당파적인 행태를 버리고 서로가 하나됨을 확인하고 공고히 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곧 서로 기다려서 다 함께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 만찬을 위한 모임이 “심판을 위한 모임” (eivj kri,ma sune,rchsqe)이 되지 않도록 하는 길이다 (34절). 17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모임을 “해가 되는 모임” (eivj to. h-sson sune,rcesqe)이라 규정했을 때 의도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여기서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모임이 아니라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참된 유익을 얻는 모임이 되도록 하라는 것, 이를 위해 파당적 태도를 버리고 서로를 기다리며 배려하면서 주의 만찬을 먹으라는 것이다.
3. “자신을 살피라”는 말의 의미
그러면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을 살핀다”는 바울의 권고가 무슨 의미인지를 살펴보자. 바울은 무슨 의미에서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살피라”고 말하는가?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대로 성찬에 임하기에 앞서 아직 해결되지 못한 죄가 있는지 자신을 내적으로 성찰해 보라는 것인가? 바울의 권고가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는 점에서, 또한 우리에게도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절차의 하나로 남는다는 점에서 이 구절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성찬 집행을 위해 매우 중요한 절차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사실 고린도전서의 문맥을 찬찬히 살피면 바울이 무슨 의도로 자신을 살피라고 말하는 이유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진술이 일차적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각 사람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에 앞서 “자신을 살피라”고 권고하고 있다 (dokimaze,tw ... e`auto.n, 28절). “살핀다” (dokima,zein)는 말은 흔히 “분별하다”라는 말로 번역되는 단어인데, 살펴서 확인하고 검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로마서 12: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분별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지적 차원을 넘어 그 뜻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까지 포함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바울을 “살핀다”는 것은 살펴서 복음을 맡길만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되고 (살전 2:4; cf. 고후 8:22), “모든 것을 헤아려 보라”는 것은 그래서 “좋은 것을 선택하라” 말과 같다 (살전 5:21; cf. 빌 1:10). 따라서 “자신을 살피라”는 것이나 “자신의 행위를 살피라”는 권고 역시 단순히 살펴보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펴서 잘못된 점을 고치고 올바른 모습을 회복하라는 주문이 된다 (고후 13:5; 갈 6:4). 잘못된 행동을 인지하는 것을 포함하겠지만, 바울의 일차적 관심은 잘못된 행동을 실제로 수정하는 데 있다. 각자 “자기를 살피라”는 권고는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라는 권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잘못을 고치라는 권고이기도 하다. 
같은 권고가 조금 뒤에 다시 등장한다. 31절에서 바울은 조건문의 형태로 “우리 스스로를 살폈다면” (e`autou.j diekri,nomen)이라고 말한다. 이는 사실과 반대되는 상황을 그린 가정법인데, 실제로는 우리가 스스로를 살피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수사적인 용법으로, 바울이 아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주의 만찬에 참여함에 있어 자신을 살피지 않았다는 것이다. 28절의 표현과 다른 점은 살피는 주체가 복수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바울이 현재 고린도 교회에 속한 다수의 개인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단수가 복수가 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여기서 사용된 동사 diakri,nein은 앞에서 “자신을 살핀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와는 다르다. 이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로 “판결하다” (6:5) 혹은 부정적인 의미로 “주제넘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4:7). 혹은 예언된 내용을 “분별한다” (고전 14:29), 혹은 “영들을 분별함” 등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고전 12:10). 이 경우 분별함이란 주어진 예언이나 영적인 현상들이 참된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여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소 다른 단어이기는 하지만 현 문맥에서의 쓰임새로 보자면 dokima,zein과 거의 다른 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단어는 29절에서 “몸을 살피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행위를 언급할 때 이미 사용되었다. “몸을 살핀다”는 말의 의미는 잠시 후 구체적으로 논의하겠지만, 29절과 31절은 뚜렷한 병행관계에 있다. 그리고 28절에서 쓰인 dokima,zein 대신 이 두 구절에서 심판을 의미하는 kri,nein과 동일계열의 동사 diakri,nein으로 바꾼 것은 분명 자신을 “살피는” 행위와 “심판” 사이의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몸을 살피지 않고 (mh. diakri,nwn) 먹고 마시는 이는 자신의 심판(kri,ma e`autw/|)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29절).
우리가 자신을 살폈다면 (e`autou.j diekri,nomen)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ouvk a'n evkrino,meqa) (31절).
이런 식으로 바울은 우리가 제대로 “판단하지/살피지” (diakri,nwn/diekri,nomen) 못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심판” (kri,ma/evkrino,meqa)을 받을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의 성도들을 이렇게 “자신을 살피는” 일에 실패하였고, “합당치 못한” 모습으로 주의 만찬을 거행하였다. 이들은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범하였고,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물론 이 심판은 세상과 함께 정죄를 당하는 치명적 결과를 피하기 위한 하나님의 교육적 조치였다 (32절). 따라서 “심판을 초래하는 모임”이 되는 것을 피하는 길은,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고서 “스스로를 살피는” 것이며 (31절), 그리하여 “합당치 못하게”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28절의 “자신을 분별한다”는 말은 29절의 “몸을 살핀다”는 말과 31절의 “자신을 살핀다”는 말과 모두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단수로) “자신을 분별하는” 일은 (복수로) “자신을 살피는” 일과 사실상 동일하고, “몸을 살핀다”는 표현은 같은 동사를 활용하고 있는 31절의 “자신을 살핀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서로 표현이 약간씩 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표현들은 모두 합당한 주의 만찬을 위해 필요한 태도를 갖춘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문맥에서 보자면 “사람이”를 주어로 하는 28절의 말과 “먹는 자는” 혹은 “마시는 자는” 하고 시작되는 29절의 일반적 진술은 모두 23-26절에서 설명된 주의 만찬의 의미를 근거로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바람직한 태도에 관해 기술하는 원론적 진술들이다. 그리고 31절의 권고는 이런 일반적 원칙을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곧 실제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적용한 구체적 진술이다.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이 여기서 “자신을 살피고” “몸을 살피는”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로 앞 2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황, 곧 주의 만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잘못을 피하기 위함이다 (27절).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곧 “몸을 살피지 않고” 혹은 “우리 자신을 살피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들 표현이 고린도 교인들의 태도와 직접 관련된 것들이라는 점은 31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곧 고린도의 성도들은 “자신을 살피는” 일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고린도 교회에 몸이 약하고 병들고 죽은 사람도 많다는 상황을 지적하는 것으로 바울은 이것이 주의 만찬을 합당치 않게 거행하다 자초한 심판의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 (30절). 물론 이것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는 “몸을 살피지 않고”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신을 향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원론적 결론을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적용한 것이다 (29절). 
그렇다면 고린도의 성도들은 어떻게 하여 주의 만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게 되었는가? 그 자체로 보면 “합당하지 않다”는 말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가령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적 사역의 목표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그들을 “나라와 영광에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2:12). 이 때 합당하다는 것은 구원의 부르심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혹은 부르심의 목적에 걸맞게 행동한다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같은 의미로 에베소서에서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하기도 한다 (엡 4:1). 이처럼 무언가에 합당하다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무엇이든 그 대상이 함축하고 있는 의도와 목적에 어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주의 몸과 피를 합당하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주의 만찬을 기념하며 떡과 포도주를 통해 주의 대속적 희생을 “기억하고” “그의 죽으심을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라는” 의도에 걸맞는 방식으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주의 만찬이 주의 만찬으로서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만일 주의 만찬이 합당치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런 만찬은 이미 주의 만찬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논의의 서두에서 던지는 경고, 곧 “여러분들이 함께 모여 먹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의 만찬이 아닙니다” (sunercome,nwn ou=n u`mw/n evpi. to. auvto. ouvk e;stin kuriako.n dei/pnon fagei/n)는 말을 기억한다 (20절).
고린도의 성도들이 주의 만찬을 기념하던 방식은 전혀 “합당치 않은” 것, 곧 주의 만찬으로서 근본 의미를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이들이 먹는 것을 두고 “주의 만찬”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바울이 보기에 이들의 식사가 주의 만찬이 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만찬에 참여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바울이 판단하기에 고린도의 성도들, 보다 정확히 그 중의 일부 성도들은 만찬에 참여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동을 하였다 (22절). 이런 결과가 된 이유는 함께 모여서 먹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떤 이는 취하게 되고 어떤 이는 음식이 없어 배고픈 채로 있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물론 이런 행태는 현재 교회 내의 근본 문제인 “파당적 갈등”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18절; 1:10 이하를 보라). 바로 이런 파당적 태도가 주의 만찬 자리에서도 이기적이고 파당적인 행동을 부추겼고, 이로 인해 하나됨을 더욱 해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바울이 판단하기에 이런 식의 모임은 “주의 만찬”의 본질을 무색케 하는 것으로 더 이상 “주의 만찬”이라 불릴 수 없는 것이었다 (20절). 이들의 행태는 “자기를 살피지” 못한 채 주의 몸과 피를 “합당치 않게” 마신 것이었고, 이는 곧 “주의 몸과 피에 죄를 범하는” 행위였다 (27절). 결과적으로 이들은 “자기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꼴이 되었다 (29절).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모임은 주의 만찬으로서의 유익을 누리는 기회가 아니라 모이면 모일수록 “해가 되는 모임” (eivj to. h-sson sune,rcesqe, 17절), 곧 “심판을 자초하는 모임” (i[na mh. eivj kri,ma sune,rchsqe)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34절).
결국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먹는 것이란 이런 파당적 태도를 지양하고, 성도들 중 누구라도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주의 만찬 본연의 모양새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현재 고린도교회의 상황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바로 이렇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이 먹으로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33절). 또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도록 하십시오” (34절). 서로 기다리라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각자가 자신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는” 행동을 멈추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상황이 생기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집에서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주문이다. 주의 만찬을 먹겠다고 모여서 파당적인 행태를 보임으로써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주문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 바 “자신을 살피고” (28절), “몸을 살피는” 일이며 (29절), “우리 자신을 살피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31절). 
선입견없이 읽는다면 사실 우리의 결론은 논의의 흐름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결론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 구절에 대해 통상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쉽게 수긍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결론을 더욱 분명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사항 두 가지를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 바울은 23-26절에서 주의 만찬에 관한 전통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설명한다. 그리고 27절부터 “그런즉” ({Wste)이라는 결론적 접속사를 활용하여 23-26절의 설명에 근거한 원칙적 결론 곧 “자기를 살펴야 한다”는 원칙을 도출해 내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살핌”에 관한 바울의 논의는 33절에서 다시 한 번 “그런즉” ({Wste)으로 이끌리는 또 하나의 결론, 곧 “서로 기다리라”는 보다 구체적인 권고로 발전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기다리라”는 33절의 결론이 “자기를 살피라”는 27-32절의 결론과 연장선상에 선 것임을 확인한다. 31절이 29절을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라면, 34절은 27-28절을 동일하게 적용한 것이다. 곧 “서로 기다리라”는 권고는 “자기를 살피라”는 원론적 권고를 구체적으로 풀어 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 “자신을 살핌”에 대한 논의와 “기다리라”는 권고가 “심판”이라는 주제 하에 함께 얽혀있다는 사실을 관찰하면 자신을 살피는 것이 곧 서로 기다리라는 말과 사실상 동일한 권고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몸을 살피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신의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29절).
“우리가 우리를 살폈다면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31절).
“서로 기다리십시오. 시장하거든 집에서 드십시오. 이는 여러분들의 모임이 심판으로 귀결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3-34절).
몸을 살피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심판을 피했을 것이다. 이처럼 논리상 29절과 31절을 받는 자연스러운 결론은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자신을 살피십시오”가 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읽는 결론은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서로 기다리십시오”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바울이 뜬금없이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몸을 살피라”는 말이나 “우리를 살피라”는 말이 곧 “서로 기다리라” 말이라는 것이다. 
다시금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라는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쓰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주의 만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다.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이들에게 “자기를 살피라”고 권고하였다. 물론 이들이 저지른 실수의 핵심은 파당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부끄럽게 한 데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에서 “자신을 살핀다”는 것은 곧 가난한 성도들을 배려하여 함께 주의 만찬을 먹는 것, 곧 만찬을 거행할 때 “서로 기다리는” 것이었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 “합당치 않은” 만찬이 파당적 행태로 이루어지는 만찬이었던 것처럼, 이를 시정하기 위해 “자기를 살피는” 일 역시 파당적 행태를 멈추고 서로를 배려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점을 무시하고 바울의 말을 우리 입장에서 해석하는 일은 바울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를 우리 마음대로 주입하여 읽는 행위가 될 것이다. 
4. “몸”을 살피는 일: “하나됨”의 중요성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살핀다” 혹은 “우리 자신을 살핀다”는 표현이 개인주의적이고 내적인 자기성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다른 성도들, 특별히 가난한 성도들을 배려하라는 권고임을 살펴보았다.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나 자신의 자격을 따져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방식이 어떤가를 돌아보라는 권유인 것이다. 말하자면 바울의 이 권고는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라는 권고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돌아보라는 권고인 셈이다. 사실 이런 공동체적 관심이 고린도교회의 성찬 문제를 다루는 바울의 논의 중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몸”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점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바울에게 있어 주의 만찬은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23-25). 따라서 이에 합당치 않게 참여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다 (27절). 이런 잘못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몸을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먹고 마시게 될 것이다 (29). 이 대목에는 사본상의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역에서처럼 “주의 몸을”로 된 사본들도 있고, “주의”라는 단어가 생략된 채 그저 “몸을”이라고 되어있는 사본들도 있다. 문맥상 둘 다 가능성한 독법이지만 사본적 증거의 경중을 재어보면 “주의”가 없는 본문이 원문일 가능성이 많다.
“몸을 살피지” 않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을 살피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우선, 개역이 기초하고 있는 사본의 경우처럼, “주의”라는 말이 없더라도 “주의 몸”을 줄여서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은 “주의 몸과 피에 죄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 몸을 살피라”는 말이 될 것이다. 여기서 “몸”은 “몸과 피”라는 정상적인 표현을 축약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성도들이 먹는 만찬이 일상적인 식사를 넘어 주의 몸(과 피)를 먹는 것임을 인식하라는 주문일 수 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성찬의 영적 의미를 무시한 채 일상적인 식사로만 간주했다는 주장은 별 신빙성이 없다. 오히려 10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들은 주의 만찬이 우상숭배의 위험조차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의 마술적 위력을 가진 것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말은 주의 만찬을 먹으면서 주의 몸, 곧 주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주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 역시 본 구절의 특이함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을 말할 때나 (27, 28절)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언급할 때처럼 (27절), 바울은 주의 만찬 자체를 설명하는 경우 반드시 몸과 피 혹은 떡과 잔을 나란히 언급한다. 그런데 29절에서 피에 대한 언급은 피한 채 그저 “몸”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이는 분명 의도적이다. 단순히 27-28절에 등장하는 “몸과 피”의 축약은 아니라는 것이다. 
29절에서 “몸을 살핀다”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이와 병행되는 표현을 함께 고려함 필요가 있다. 좀 다른 동사이기는 하지만 바로 앞 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살핀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31절에서는 “몸을 살핀다” (diakri,nwn sw/ma)고 할 때와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살피는” (e`autou.j diekri,nomen)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펴서” 주의 몸과 피를 합당하게 먹고 마셨다면 지금처럼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를 살핀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필요하면 태도를 바꾸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식으로 “주의 몸”을 살필 수는 없다. 스스로를 살펴서 주의 몸과 피를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지 주의 몸과 피를 우리가 “살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몸을 살핀다”고 말할 때에 바울의 의도는 “주의” 몸과 피를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고 말할 때와 비슷한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두 구절의 표현상의 병행관계 역시 이를 지지해주는 것 같다.
몸을 살피지 않으면 자신을 향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29절)
우리 자신을 살폈다면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31).
두 구절 모두 바울이 지적하는 현상은 “살피는” 일을 소홀히 한 결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야 할 대상은 “우리 자신”이 되기도 하고 혹 “몸”이 되기도 한다. 이런 병행관계는 “몸”과 “우리 자신”이 사실상 동일한 것임을 시사한다. 좀 다른 표현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동일한 생각을 전달하고 있는 “(각 사람이) 자기를 살핀다”는 28절의 표현을 함께 고려하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자신을 살핀다” 혹은 “우리를 살핀다”는 말을 “몸을 살핀다”는 말로 바꾸어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울이 “몸”이라는 말을 쓸 때 생각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묻게 되면 우리는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 “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이곳이 처음이 아님을 기억하게 된다. 성찬 자체가 아니라 우상에 바쳐진 제물이라는 다소 다른 문제를 다루는 중이기는 하지만 바로 앞 문맥, 곧 10장에서 바울은 이미 주의 만찬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며, 여기서 처음으로 “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6절) 
16절의 설명은 바울이 11:23-26에서 주의 만찬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떡과 잔을 먹고 마시지만, 이것은 단순한 일상적 식사 이상의 영적 의미가 담긴 행동이다. 우리가 마시고 먹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런 자명한 사실로부터 바울은 한 가지 매우 의미심장한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17절).
곧 “많은 우리가 다 한 몸”이라는 것이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결론은 “떡이 하나”라는 사실,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한 구절에 “하나”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진술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 싶은 핵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곧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예하는 공동체의 하나됨이다. 모두가 같은 떡에 참예하는 이상 참예하는 자 모두가 다 하나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인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성찬 공동체가 가지는 본질적 하나됨을 강조하기 위해 “몸”이라는 그림 언어를 활용한다. 물론 “몸”은 우리가 참예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서 이미 등장한 것이다 (16절).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이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간다. 이제 “몸”은 그리스도 자신의 육체를 넘어 이 육체 속에 참예하는 신자들의 무리, 곧 “우리”를 지칭하는 말이 된다.
많은 우리가 다 하나의 “몸”이다. 
바울은 “몸”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를 믿고 따르는 공동체를 유기적으로 엮고 있다. 우리는 다 하나의 “떡”에 참예한다. 그런데 이 떡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몸”이다. 곧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한다. 따라서 우리 역시 “한 몸”이 된다. 동일한 문맥에서 “몸”은 그리스도의 육체이기도 하고 또한 교회 공동체이기도 하다. 바울이 “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보여주는 이런 “모호함”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11장의 성찬 논의가 끝난 뒤 등장하는 은사 논의에서도 바울은 여기서와 거의 같은 분위기의 진술을 하고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2:12).
위의 배열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구절은 “몸 - 지체 = 지체 - 몸”과 “하나 - 많은 = 많으나 - 한”과 같이 이중적인 교차대구의 구조를 보인다. 문맥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이는 분명 교회에 관한 설명이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도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12:13). 그러므로 12절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그러하다” 쯤 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지체가 하나의 몸을 이루는 원리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물론 교회와 무관하게 한 개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분명 교회 공동체를 두고 말하고 있지만
바울은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고 선언함으로써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는 서로 분리되어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6:15). 이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의미심장한 표현을 소개한다. 교회 중의 많은 지체가 모여 하나의 몸을 이루는데, 이 몸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물론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인 하나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몸의 지체가 많지만 다 한 몸이다” (12:12)
위에서 본 대로 이러한 선언의 바탕에는 많은 우리가 다 한 몸에 참여한다는 주의 만찬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실재는 또한 주의 만찬과 더불어 또 하나 초대 기독교의 중요한 의식이었던 세례를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다.
“우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12:13).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결정적 하나됨을, 그리고 주의 만찬은 그와의 지속적인 유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식이다. 곧 이 둘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그 공통의 바탕으로 삼는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의식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존의 핵심을 포착하는 의식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이 현 문맥에서 이 두 의식들을 언급하면서 공히 강조하는 바가 바로 “하나됨”이라는 것이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고, 또한 한 몸에 지속적으로 참여함으로 한 몸이 유지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하나됨의 원리가 은사에 관한 바울의 논의의 핵심적인 주제가 된다 (12-14장). 지금 고린도교회 내에 존재하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곧 파당적 갈등이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현상이다. 이러한 하나됨을 강조하는 핵심적 수단이 바로 “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몸 개념의 의도적 이중성 (주의 육체로서의 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은 하나됨이 기독교적 삶의 부수적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됨과 긴밀하게 얽힌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의 몸, 곧 주의 육체에 참여하는 삶은 주의 몸, 곧 교회 공동체로 살아가는 삶과 나누어질 수 없다. 바로 이점이 고린도교인들이 잠시 망각했던 핵심인 것이다.
다시 주의 만찬에 관한 논의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도 바울은 “몸”이 지니는 이중적 의미를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주의 “몸”에 참여하는 의식이 성찬이라면, 이것은 (주의) “몸” 곧 “주의 몸인 교회”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의 핵심에는 우리가 다 “하나”라는 생각이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주의 “몸”에 참여하려고 하는 자리에는 이 몸의 하나됨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울이 “몸을 살핀다”는 말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다. 본질적으로 하나여야 할 “몸을 살피지 않고서는” 주의 몸에 참예할 수 없다. 곧 바로 여기에 고린도 교인들의 실수가 있다. “주의 몸”에 참여하겠다고 부지런히 모여서 먹지만, 교회 내엔 분열이 있었고 예배의 핵심인 성찬 역시 파당적 행태의 영향 아래 놓이고 말았다. 가난한 성도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한 몸”된 교회로서의 유대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들은 “몸을 살피지” 않았다. 하나됨을 그 본질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다.
바울은 이들의 행태를 두고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경고는 현재 바울의 관심이 공동체의 하나됨에 집중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고린도 교회의 파당적 행동이 실제로는 일부 성도들을 부끄럽게 한 것이지만, 이는 곧 “몸”의 본질 곧 한 몸으로서의 본질을 파괴하는 행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행동은 하나된 전체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는 행동이었다. 이들은 “몸을 살피지 못하고” 주의 만찬을 먹겠다고 함으로써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셨다. 당연히 이들의 먹는 행위는 “주의 만찬”으로 인정될 수 없었다. 
결국 “몸을 살피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살피라”는 주문과 사실상 같다. 물론 이것은 몸, 곧 교회에 속한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해당되는 말이지만 바울의 최종적인 관심사는 개인의 상태라기보다는 몸, 곧 교회 전체의 상태이다. 곧 우리의 “몸”인 교회를 잘 살펴서 파당적 행태가 드러나지 않도록 성찬에 참여하라는 권고인 것이다. “몸을 살피라”는 것은 “자신을 살피라”는 말과 같이 파당적 태도를 삼가고 서로 기다리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요 “몸”인 공동체의 하나됨을 파괴하지 말라는 권고이다.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자신을 살피라는 바울의 권고는 성찬에 앞서 자신의 숨은 죄를 찾아보라는 내적 성찰의 주문이 아니다.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이 말을 했을 때 의도한 바는 그들이 성찬을 거행하는 방식이 성찬의 참된 의미를 부인하는 파당적 행태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보라는 권고이다. 그래서 이것은 또한 “서로 기다리라”는 말로 쉽게 옮겨질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을 살핀다”는 말 자체는 얼마든지 내적 성찰이라는 의미로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표현이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해서 그 모든 의미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의해 그 일반적 표현에 구체적인 의미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의 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살핀다”는 말이 내적 성찰이라는 의미로 활용될 수 있는 표현이지만,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의 문맥에서 이 표현을 썼을 때 의도했던 의미는 아니다. “자신을 살핀다”는 일반적 표현이 파당과 분열이라는 특수한 정황에 의해 구체적인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우리가 바울의 말을 내적 성찰에 대한 요구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바울의 의도 대신 우리의 생각을 고집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5. 먹는 방식으로서의 “자신을 살핌”
이것이 “이런 방식으로” (ou[twj), 곧 자기를 살피고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이다 (28절). 이 구절은 대체로 잘못 이해되어왔다. 개역은 이 대목을 시간적 진행으로 나타나는 “그 후에야”로 옮겨 자기를 살피는 것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인 것처럼 간주하고 있다. 표준새번역의 “그런 다음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자기를 살피고 만찬을 먹는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간적 순서를 전제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 ou[twj가 시간적 순서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ou[twj는 그 앞과 뒤를 시간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단어이다.
가령 7: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준 분수와 불러주신 형편을 언급하고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라”고 권하고 있다 (ou[twj peripatei,tw). 여기서 ou[twj는 앞의 말을 받아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그대로” 혹은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형편 그대로”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이런 식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하라는 권고는 자기를 살핀다는 말에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자기를 살피는 방식으로”의 뜻을 갖는다. 곧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주의 몸과 피를 먹으라는 권고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살피는 방식으로” 곧 “자기를 살피면서” 주의 만찬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구절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라,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올바른 태도에 관한 진술이다. 이는 바울이 주의 몸을 “합당하게” 곧 “합당한 방식으로” 먹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동일하다 (26절). 곧 성찬에 참여하는 행위 자체가 “자기를 살피고” “몸을 살피는” 모습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권고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성찬이 파행적으로 진행되고, 그 결과 교회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당사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상황에서, 파당적인 행동을 삼가고 “서로 기다림으로써” (33절) 주의 몸과 피를 “합당한 방식으로” 먹으라는 권고인 것이다. 
“자기를 살피는” 행위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혹은 성찬 참여를 제한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성찬을 집행하는 우리의 관행에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오늘날 성찬 집행자들은 오랜 전통을 따라 성찬 집행에 앞서 성도들로 하여금 먼저 자신을 내적으로 성찰해 본 다음 혹 성찬에 합당치 않은 이유가 있다고 여겨질 경우 성찬에 참여하지 말도록 권고한다. 이런 관행의 근거가 바로 28절, 곧 사람이 자신을 살피면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바울의 진술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대로, 여기서 바울은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자기 성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문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지 못할 조건이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할 때의 올바른 태도를 말하고 있다. 주의 만찬을 먹되, 교회의 하나됨이 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필요한 경우 “서로 기다려서” 다함께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내가 참여할까 말까”를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참여해야 할 것인가”를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곧 여차하면 먹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떡을 먹고 잔을 마시되 “이런 식으로”, 곧 자신을 살피고 몸을 살피는 태도로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자신의 죄가 드러날 경우 성찬을 사양해야 한다거나 혹은 필요한 경우 집례자가 타의적으로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관습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바울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주의 만찬에서 물러나야 할 어떤 상황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명확한 자료가 없기는 하지만, 학자들은 일상적인 식사를 겸하면서 예배의 핵심이 되었던 초대교회의 주의 만찬은 불신자들도 참여할 수 있었던 개방적 모임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14:23-24). 자격이 안 되므로 때문에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바울이 성찬을 생각할 때 갖고 있던 생각은 아니었다. 바울 공동체에서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경우란 아예 교회 공동체에서 축출되는 경우인데, 이는 배교나 이에 버금가는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조치였다 (5:1-2, 11-13). 하지만 이것은 깊은 죄책감을 갖고 성찬 자리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조치는 아니다. 본문에서 바울의 경고도 주의 만찬을 함부로 대하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교만한 자들을 향한 것이지 자신의 잘못을 괴로워하며 용서를 구하는 이들을 향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중대한 범죄가 있음을 알게 될 경우 성찬을 사양하는 우리의 관습에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이런 태도 속에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혹은 부인하는 독소적 사고가 깔려 있다. 바울이 역설하는 것처럼, 성찬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대로 이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주님께서 자신을 드리신 희생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 대속적 희생을 기념하고 선포하는 이 십자가 말고는 다른 어디에서도 우리의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은 의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우리는 바로 이 죄인들로서 주님의 자발적이며 대속적인 희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인다. 성찬은 바로 이 복음의 핵심을 상징적 방식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용서에의 초대에는 아무런 제한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죄 때문에 성찬을 사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죄인이라는 이유로 우리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사양하는 행동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주의 몸과 피, 곧 그의 대속적 죽음을 “정중히 거절하고” 다른 어디에 가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올 것인가? 우리로 하여금 주의 몸과 피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어 줄 다른 어떤 수단이 있다는 것인가? 이는 바로 목욕탕이 아니면 씻을 수 없는 오랜 때가 있는 사람에게 목욕탕을 이용하기엔 너무 더러우니 다른 데서 몸을 깨끗이 씻고 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우리가 가장 더러운 순간이 목욕탕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이듯, 우리가 가장 큰 죄인임을 발견하는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순간이 아닌가? 또 우리는 날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시옵소서” 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죄가 생각나면 날수록 더 치열하게 달려들어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할 것이 아닌가? 실제로 필자는 큰 실수를 저지른 한 성도가 주의 만찬에 참여하지 못한 채 죄책감을 부여안고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만 있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은혜의 용서를 가장 절묘하게 고백하고 선포하는 의식 앞에서도 용서의 감격보다는 자신의 더러움에 좌절한 채 돌아서야 한다면, 이는 죄인을 위해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드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면으로 부인하는 행위가 아닌가? 
어느 순간에도 그리스도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남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향유를 부었던 여인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 사함에 대한 주님의 선포를 들었다 (눅 7:36-50).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비유에서도 돌아온 둘째 아들은 열심히 연습했던 회개의 변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기쁜 잔치의 주인공으로 변해 있었다 (눅 15:21-24). 물론 이들 이야기에는 이런 주저없는 용서를 수긍할 수 없었던 “바리새인”도 있었고 (눅 7:36), 그렇게 큰 죄를 저지른 아들을 아무 조치도 없이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용납할 수 없었던 큰 아들도 있었다 (눅 15:25-32). 죄책감이 있는 사람은 성찬에서 물러나게 하는 관습은 무조건적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은혜를 무시하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바리새인이나 큰 아들의 입장에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님이 주저없이 내리시는 용서를 우리가 가로막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가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는 바로 이런 태도를 “실족케 하는 일”이라고 간주하고, 이런 자들에게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더 나으리라”는 심판의 경고를 던지고 있다 (17:1-2).
현재의 관행은 성찬을 거룩하게 보존하겠다는 선한 의도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는 바리새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에 드러나는 이들의 위선적 태도 이면에는 자기들 나름의 거룩함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이런 관심의 결과로 거룩함에 관심이 없는 “죄인과 세리”들을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 죄인과 세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바리새인들의 공평한 사고방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이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이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새롭게 한다. 그런데 이런 은혜의 의식에 참여하는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의 혁명적인 은총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적 사고에 지배된다면 이는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죄가 있다는 이유로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생각은 우리 교회에서 하루 속히 사라져야 할 반(反)복음적인 요소임에 틀림없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성찬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현재 성찬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 중 어떤 면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문제는 우리가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 읽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하는 말을 상황과 관계없이 읽고, 그것을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해 버린 결과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해석은 또한 더 심각한 신학적 왜곡으로 금방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느낀다. 물론 본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쉽지 않는 작업이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에게 익숙한 의미로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좀더 겸허하게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 자체의 흐름에 민감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가 자주 느끼듯이 이것은 단순한 방법의 문제를 넘어 실제로
말씀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영적 결단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가장 절실하게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1) 바울의 말은 그들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먹는 만찬은 더 이상 주의 만찬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개역의 “먹을 수 없으니”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2)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해석을 취한다. 그러나 최근 J. Meggitt은 Paul, Poverty and Survival (T&T Clark: 1998) 118-122, 189-193에서 이 표현이 “가난한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쓰인 경우가 거의 없음을 지적하며, 이는 “주의 만찬을 가지지 못한 이들”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취하고” “주린다”는 표현 역시 실제로 만취하거나 배고픈 상태라기보다는 주의 만찬을 먼저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일종의 수사적 과장으로 본다. 그의 주 관심은 고린도교회의 주의 만찬이 부유한 교인들과 가난한 교인들 간의 사회경제적 계급갈등의 양상으로 표현되었다는 Theissen과 Meeks의 "공인된“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고린교교회의 문제를 경제적 갈등으로 보건 혹은 다른 양상의 갈등으로 보건 성찬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하려는 우리의 목적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3) G.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Eerdmans: 1987), 564. 
4) 개역의 “판단받지 아니하려니와”도 가능한 해석이지만, 바울이 의식적으로 심판의 동기를 부각시킨다는 의미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번역이 더 타당해 보인다. 
5)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로 된 개역의 번역은 고린도 교회의 만찬을 “주의 만찬”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바울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은 개역개정판에서도 수정되지 않고 있다. 표준새번역과 대조하여 보라.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6) N/A 27th과 USB 3rd 모두 “주의”가 빠진 본문을 채택하고 있다. NIV는 개역과 마찬가지로 “주의”가 들어간 본문을 채택하였다. 
7) G. Theissen, The Social Setting of Pauline Christianity (T&T Clark: 1982) 153. 
8) Bornkamm, “Lord's Supper and Church in Paul" in Paul L. Hammer trans., Early Christian Experience (SCM: 1969) 123-127, 147. 
9) I. H. Marshall, Last Supper and Lord's Supper (Paternoster: 1997) 114가 이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0) G. D. Fee는 1 Corinthians (Eerdmans: 1987) 563-564에서 이 점을 강력하게 논증하고 있다. 
11) 이 점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I. H. Marshall, Last Supper and Lord's Supper (Paternoster: 1997) 121. 
12) Fee는 6:15절을 근거로 하여 이 구절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몸”의 축약으로 본다. First Corinthians 603. 또한 Jerome Murphy-O'Connor, “1 Corinthians” (NJBC) 810. 결과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바울이 굳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의도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13) G. Bornkamm, “Lord's Supper and Church in Paul" in his Early Christian Exeprience (SCM Press: 1969) 149: "To discern the body, to esteem Christ's body in its peculiarity, means to understand that the body of Christ given for us and received in the sacrament unites the recipients in the "body" of the congregation and makes them responsible for one another in love." 그는 진술에 이어 또한 고전 12:26절을 인용하고 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다른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14) 표준새번역은 29절에서 특별히 “주님의 몸인 교회공동체를 가리킴”이라는 주를 달아놓고 있다. 
15) 이한수, 『하나님의 지혜, 세상의 지혜』(두란노: 1993) 119-226은 이 본문을 강해하면서 공동체의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16) 대부분의 영어 번역 역시 시간적 의미로 옮기고 있다. 이 점에서 KJV이 오히려 나은 감이 있다. “But let a man examine himself, and so let him eat of that bread and drink of the cup.” NASB도 KJV와 비슷하고, Luther의 번역 또한 보다 “문자적”이라는 점에서 지나치게 시간적인 개념은 벗어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주석들 역시 시간적 개념으로 본문을 주해하고 있다. 
17) BAGD 혹은 Louw/Nida 등의 사전을 보더라도 시간적 의미에 대한 설명은 없고, 이 구절을 예외로 언급하고 있는 사전들 역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석들은 여전히 시간적 의미를 당연시하고 있다. 
18) I. H. Marshall, Last Supper and Lord's Supper (Pater Noter: 1997), 116. 또한 Manfred T. Brauch, Hard Sayings of Paul (IVP: 1989) 154-158. 
19)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실족케 하는 일”로 번역된 스칸달론을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행위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이것은 상식적인 판단일 뿐, 누가복음의 문맥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관심은, 15장의 삼중적 비유에서 아름답게 표현되는 것처럼, 잃어버린 자의 회복에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회복을 방해함으로써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로 등장한다. 
20) 당연한 말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의 권위를 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에 실제로 순종하는 일이다. 목소리만 높이고, 실제 겸허한 해석에는 관심도 없는 위선적 경건을 주의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