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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마태복음 23:23의 해석과 십일조

마태복음 23:23의 해석과 십일조
노승수 목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부정과거)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부정과거) 저것도 버리지(현재)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이 본문을 두고 인터넷에 어떤 글을 보니, 특이한 해석을 보았다. 후반을 이렇게 고친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번역한 것이다. 나름 해석의 특이함이 있긴 하다. 그러나 성경은 보통 읽어서 이해될 수 없는 비밀한 비전을 담는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은 누구나 읽어서 이해되는 책이다. 물론 이렇게 번역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의 헬라어 '메 아피에나이' 인데 '아피에미'는 '버려두다. 두다'의 의미도 있지만, '용서하다. 사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앞의 화 있을진저와 연관해서 "저것은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보다 더 근접한 문맥에 똑같은 단어 "버렸도다(아피에미)"가 있다. 헬라어 원문 상으로 보면, 20개의 단어가 채 차이가 나지 않는 거리에 같은 단어가 위치하고 있다. 물론 앞의 버렸도다는 동사로서 "부정과거시상"으로 되어 있고, 뒤의 "버리지 말다"는 부정사의 "현재시상"으로 되어 있다. 두 단어가 다 동사의 기능을 하고 있고, 근접 문맥인 바로 앞부분에서 '버리다.'로 번역된 단어를 뒤에서 "용서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물론 많은 경우에 신약 성경에서 '아피에미'라는 단어가 용서하다 사하다라고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접 문맥과 전혀 다른 단어로 해석하는 것은 사실 거의 넌센스에 가깝다. 본문에서 이것이란 의와 인과 신을 가리키고, 저것이란 박하와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를 드리는 일을 말한다. 그럼 십일조 드리는 일을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넌센스다. 넌센스, 그리고 짧은 헬라어 실력을 가지고 Syntax를 훼손하는 이런 시도의 해석은 정말 벼락 맞을 일이다. 물론 성경 번역 학자들이나 학자들이 다 옳은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일치하는 해석을 뒤집으려면 그에 걸맞는 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그 논거는 너무 빈약하다. 빈약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사실 이와 같은 논의의 출발점에서는 하나의 신학적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율법이 완성될 때, 십일조 역시 의식법으로서 완성이 되었는가? 하는 주장과 십일조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도의 인정을 담은 도덕법적 성격의 계명으로 이해해서 지금도 지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의 이면에 숨어 있다.
고신대 교수들이 작성한 "십일조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보면 각주 6번에 이 본문에 대한 구문적 해설을 달아 놓았다.
"이것도 행하고"에서 "행하다(포이에-사이)"는 부정과거 시상으로 사용되었으며, "저것도 버리지 말라"에서 "버리다(아피에나이)"는 현재 시상이 사용되었다. 물론 극소수의 사본에서는 부정과거 시상이 사용되었지만 그 수는 5천여 개의 헬라어 사본 중에서 단 4 개에 지나지 않으며, 네슬레-알란트도 채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것도 행하라"는 것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행하라는 것이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것은 십일조도 버리지 말라는 것인데, 십일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은 부정 시상과는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십일조 헌금의 효력이 상실된 시점으로 보는 것은 도무지 관계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부정 시상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가지만 효력이 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고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예수님의 죽음까지만 지키고 그 후로는 안 지켜도 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헬라어의 부정 시상은 원래 "점 동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용법이 다양하지만, 명령형에서는 그 동작의 "단호성, 결단성"을 나타낼 때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윤리적 명령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부정 시상"이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꼭, 딱, 반드시, 결단성을 가지고) 행하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십일조를 "버리지 말라"에서 "버리다"가 현재 시상이 사용된 것은 "일반적 원리"를 말한 것이다. 현재 시상은 지속적 동작을 말하는데, 윤리적 명령에서는 행위의 일반적 원리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를 신약에서 수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마 6:25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현재 시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서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적 원리를, 즉 윤리적 금지 사항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31절에서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부정 시상으로 나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하신 후에, 그러므로 이제는 너희가 "(딱, 분명코, 단호히)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즉, 실제로, 구체적으로 이제부터는 염려하는 행동을 그치라, 중단하라는 의미이다. 시상에 의한 이러한 차이는 아주 미묘한 것이고, 내용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뉘앙스의 차이 정도로 이해해야만 한다.
깅그리치 사전을 보면, "버리지"에 해당하는 "에피아미"를 여러 용례를 설명하는데, 명시적으로 마 23:23을 들면서, neglect로 설명을 했다. 엄격한 문자적 번역을 한 NASB 영어성경의 경우에도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ou tithe mint and dill and cummin, and have neglected the weightier provisions of the law: justice and mercy and faithfulness; but these are the things you should have done without neglecting the others." 로 번역 했고, 헬라어 부정과거 시상과 현재 시상의 의미도 잘 살려 놓았다.
본문을 현대의 외식적인 십일조와 연계를 지으려고 드니까? 물론 당시에도 그런 외식적 십일조가 횡행했지만, 황당하게도 십일조를 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본문을 뒤틀게 된다. 이런 엉터리 같은 신학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NASB나 깅그리치 사전은 '버리다'보다 더 강력하게 '무시하다'라는 의미로 해석을 했다. 십일조가 일반적이며 도덕적인 원리로서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십일조가 도덕적 원리가 되는가? 십일조는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적으로 10분의 1을 달아서 내는 종교세가 아니다. 십일조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십일조 기사가 처음 나오는 것은 아브라함이 전쟁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은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주는 사건이다. 창세기에서 멜기세덱의 사건은 계시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이 제사장은 그리스도의 표상(히 7:15)이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믿음 사건(창 15:6)이 등장한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사건의 표상으로 아브라함의 바로 이 사건을 들고 있다. 아브라함이 덮어 놓고 믿은 것이 아니라 이 멜기세덱 계시와 연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었다. 히브리서 7장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한다.
구약 개념의 의식법적 안식일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주일을 성수한다. 주일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따른 도덕법인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을 왕으로서 주권자로 인정하는 자연적이며 도덕적 원리는 여전하다. 그리고 그 도덕적 원리가 특정한 날일 필요가 없다.
다시 설명 하자면, 이렇다. 구약적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날이 안식일이라고 주장하는 무리가 경건하게 주일을 성수하거나 모든 날을 안식으로 누리는 일을 본일이 없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여전히 들어가야할 안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역시 동일하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그의 주권을 인정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물질의 일부를 드리는 것을 싫어 한다면 그 사람의 말을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십일조를 의식법으로서가 아니라 도덕법으로서 지켜야 한다. 어떤 도덕적이며 자연적인 법인가? 하나님이 우주의 통치자시라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예물이 곧 십일조인 것이다.
오히려 신약 시대의 십일조는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지인 셈이다.
십일조의 도덕적 요구가 무엇인가? 오늘 본문 23:23에서 말하는 의와 인과 신이다. 영어 성경에는 정의와 자비와 믿음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십일조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럼 오늘 십일조가 왜 기형적이 되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의 직분제도의 굴절 때문이다. 성경적 직분제도는 삼직 곧 목사, 장로, 집사로 이루어져 있고, 집사의 직무의 가장 큰 것은 교회를 평균케 하는 직무이다. 십일조의 도덕적 의미가 경제적 정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자비, 하나되는 믿음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의 삶을 바라보냐면,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데만 열을 올리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전 생애를 온전히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진정 그리스도가 그 법을 성취했음을 믿는다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법을 따라 살고 있는가? 그렇게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온전하게 인정하는 삶에 나 자신을 헌신하는가? 하는 것이다. 십일조가 율법의 성취로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그대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것이 십일조를 성취하신 주님의 율법 완성의 정신이다. 정말 그리스도가 이것을 성취했다고 그대 스스로 믿는다면, 사실 나는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보다 더 많은 재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 평균치 못한 지체들의 삶의 형편을 예루살렘 교회들처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것이 진정 내가 가진 재물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재물에 대해 정말 청지기로서 삶을 살면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의심스럽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