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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에 대한 변증(롬 4:1-25)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에 대한 변증(롬 4:1-25)


노승수 목사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이로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을뿐더러 율법을 폐하지도 않고, 특정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두의 하나님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믿음의 원리를 성경으로 예증합니다. 
1.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1-8)
율법을 행함이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 의롭게 됨을(3:27)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두 가지 비교 개념이 나오는데, ‘행위’와 ‘믿음’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나 율법에 있어서나 정통성을 얻을 수 있는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의 의롭다함을 성경으로 규명합니다(3).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지 않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명시합니다. 행함이라면 자랑할 바가 있지만 믿음인고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만약 행함이 근거라면 삯군이 자신의 일을 근거로 그것을 은혜로 받지 않고 품삯으로 여기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행한 어떤 행위에 근거한 것일 수 없음을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밝히며,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해 다윗을 통해 드러냅니다. 
정리하자면, 첫째, 믿음은 그 성격상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구원의 공로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 생활에 어떤 자랑꺼리를 가지려든다면, 그것은 믿음의 성질이 아니라 율법의 성질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믿음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까? 둘째, 믿음은 일하지 않고 받는 복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나의 구원에 대해 내가 일하지 않고도 받는 복입니다. 나는 온전히 믿음을 누리고 있습니까?
2.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9-12)
‘유대인이나 이방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은 복음에서부터 멀고 이방인인 우리가 이 복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은 이방인인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오해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증거 하지 않습니다. 할례자(유대인) 뿐만 아니라 무할례자(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하심을 받을 때가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에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무할례자로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고 이는 할례자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십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신 적이 없고 이방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대인은 버리고 이방인에게만 하나님이 되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 역시 복음에 대한 오해입니다.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3:22).
3. 율법이 아닌 믿음에 의한 후사(13-25)
후사, 곧 기업으로 잇는 문제를 다루는데, 유대인들은 율법이 바로 언약의 내용이고 이것을 지킴으로 곧 그 약속을 잇는 후사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만약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후사라면 믿음은 헛것이고 약속은 폐하여졌습니다. 여기서 다시 율법의 용도가 죄를 인하여 진노를 이루는 심판을 위해 중도에 더하여 진 것임을 분명히 하고 후사가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확증합니다. 
즉, 후사됨이 율법에 속한 것이라면 믿음 아래 있는 자들에게 언약은 폐하여 진 것이지만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후사가 되는 것이라면, 율법에 속한 자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 역시 모두 그 약속과 기업을 잇는 자가 되며 아브라함은 이들 모두의 조상이 됨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창 17:5의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는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율법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굳게 세움에 대한 다른 설명입니다.
이어서 결론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정의합니다(17b-25). 이 믿음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는 이 선언에 다 녹아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려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과정을 구체적으로 다루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혈통적 후손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임을 강조합니다. 100세의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에서 얻은 후손 이삭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입니다. 이삭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을 따라 난 자’(갈 4:29)라고 말하는데, 이삭이 혈통적으로 출생한 게 아니라 성령의 나게 하심이었으며 아브라함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날 자들을 자손으로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지금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후반부에 나오는 “저로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라는 말씀에 담긴 속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랄 수 없는 죽음의 상태에서 믿고 바란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는 우리 범죄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는데, 아브라함이 죽은 것 같은 데서 ‘성령을 따라 난 자’ 이삭을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죄로 죽은 것과 같음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나는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