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율법 외의 한 의(롬 3:21-31)

율법 외의 한 의(롬 3:21-31)


노승수 목사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로 죄를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죄 문제에 있어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의 공의로움을 드러냅니다. 
1. 복음의 핵심(21-26)
복음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선지자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율법과의 연속적 관계 속에 복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여기서 ‘외에’란 ‘밖에’ 혹은 율법과의 관계에서 ‘단독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복음이 율법과 연속적 관계에만 있지 않고 불연속적인 관계 속에도 속해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잘 정립하는 것은 믿음 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의 한 분인 데오드르 베자는 “율법과 복음을 바르게 구별하는 일에 무지한 것이 그동안 기독교를 부패시켜 왔고, 또한 지금도 여전히 부패시키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이다.”(The Christian Faith, 1558)라고 했습니다. 
‘이제는’(21)이라는 표현은 전의 구약 시대와 다른 복음의 출현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표현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 계시의 참됨은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이 증거하고 보증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이며, 이는 율법을 받고 못 받음에 의한 나음과 ‘차별이 없는’ 의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으로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에, 즉,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영광이 뜻하는 바가 구원을 드러내는 것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구속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원인이 되어 ‘값없이’ 받게 된 ‘의롭다 하심’이며 신자는 이것을 얻은 자들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은혜”라는 낱말이 사용되는데 사실 이것을 정확히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이해를 결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는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은혜 받았다는 표현은 우리 마음이 감동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실제로 우리가 구원에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값없이 믿는 자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은 성전 지성소의 언약궤의 위 곧 속죄소()를 의미합니다. 이는 1년 1차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 민족 전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나가서 피뿌림의 의식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씻는 절기라는 개념을 빌어와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와 효력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은 “길이 참으시는 중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안에 있음으로 자신들 만이 언약백성이라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포함한 전 인류의 죄 문제에 대해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자도 없고 다만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 그와 같은 ‘행함’으로는 의를 얻는 방편은 없습니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간과’는 넘어가다는 말입니다. 죄가 있음에도 그리스도의 피를 그 죄값으로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죄가 없는 것과 같이 여겨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며 이 의로움을 십자가에서 나타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도 또한 의롭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2. 복음에 관해 세 가지 오해할 만한 내용(27-31)
사람들은 복음을 설명하면, 대체로 자기가 가진 여러 가지 생각이나 배경으로 인해 몇 가지 오해를 하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설명하고 난 다음에 이 오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첫째,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된다.’고 합니다(27-28). 그래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율법 행함’이라는 법이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우리의 믿음 생활이 훈장처럼 자랑꺼리로 전락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행함의 원리가 아니라 믿음이 그 핵심적 원리임으로 자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믿음은 율법 행함이 아니지만 우리가 앞 단락에서 ‘믿음의 법’(27)이라고 말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28)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28)을 우리가 인정합니다. 나는 정말 나의 행위를 조금도 의지하지 않고 있습니까? 나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만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합니다. 복음에 관한 이와 같은 선언은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공히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으로 인해 유대인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고, 이방인은 바울의 복음을 인해 유대인과 율법과는 상관없는 이방인의 복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일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경륜은 유대인에게 국한되어 있지 않고 전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을 가지셨다는 것이지요. 거기에서 유대인은 일종의 모내기를 위한 모자리 판과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이 율법 밖에 있는 이방인들의 구원받는 문제에 대해서 시기를 내고 억지논리(3:1-8)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이방인 역시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에 율법은 폐하여지고 쓸모가 없다는 식의 태도를 가지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적인 원리는 바로 할례자 즉, 유대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할례자 곧 이방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이 폐해져 이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주로 로마교회에 이방인 교인들 중에 생긴 오해입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오히려 굳게 세워집니다. 유대인의 하나님과 이방인의 하나님임을 다시 이야기하는 의도는 믿음이 율법을 폐하지 않고 도리어 굳게 세우는 것(31)임을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 아래 있었지만 주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갈 3:24-25)을 하지만 이제 그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 뿌리를 밖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엡 4:13) 우리의 자람을 확인하여 주는 바로미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폐”하여 질 수 없는 이유이며, 도리어 율법이 신자의 성화의 준거(Norm of santification)로서 굳게 세워지는 까닭입니다. 이처럼 율법과 복음을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설명하게 되면 그는 참된 복음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후 할례를 받은 사건을 두고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천사라도 저주를 받는다(갈 1:8) 한 이유를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 속에서 다른 복음이 아닌 참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