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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서로 받으라(롬 15:1-13)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서로 받으라(롬 15:1-13)


노승수 목사


이 단락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의 확대해석입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말씀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용납하고 하나 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그 영광을 드러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서로 받으라(1-6)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말씀의 보다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믿음의 법(3:27, 31)을 따르는 자가 보여야 하는 윤리의 표준을 제시합니다. 강한 자는 그리스도께 빚진 자의 심정으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우리 역시 그리스도로부터 이와 같은 사랑을 입은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빚진 자라는 의식이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 동기이며 마땅한 바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빚진 자의 의식은 이웃을 기쁘게 하되 이전에 죄 가운데서 행할 수 없었던 영적 선을 이루게 하며, 교회를 온전케 하는 영적 건덕을 세웁니다. 신자가 이러한 윤리적 표준을 따라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는 결정적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 69:9)는 시편 인용에서도 들어나듯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적으로부터 오는 비방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가신 삶의 길이며 신자는 응당 이와 같은 삶의 길을 성경을 통해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를 ‘성경의 안위로 가지는 소망’이라고 합니다. 이 구절의 여러 단어들은 로마서 5:3-5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미 살폈던 대로 ‘인내는 연단 곧 신자의 성품(charcter)을 가져오고 이것이 장차 우리가 가질 구원과 천국의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이제 성경의 교훈적 권면을 따름으로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한 뜻을 품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성부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빛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실 때를 제자에게 팔리어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때라고 말씀하신 것에도 알 수 있습니다(요 13:30이하).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슨 세상 공부를 잘해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아무개가 기독교 신자라서 공부를 그렇게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흔적들이 드러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심은 다름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약자의 약점을 지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며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우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2. 하나님의 진실과 긍휼, 첫째는 유대인, 또한 이방인에게(7-13)
7절은 선언, 8절은 유대인의 구원, 9-12절은 이방인의 구원을, 마지막 13절은 결론입니다. 여기서 서로 받으라는 말씀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받아 한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받으실 수 없는 참 의인이요,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 곧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교회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도 서로 반목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냅니다. ‘영광을 돌림’이란 앞 단락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 삶에 드러내고, 그 근거와 동기와 능력이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신앙고백’과 ‘삶’으로 드러내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를 받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8)은 유대인에게 주셨던 언약을 받들어 유효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이어지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3-4)는 선언에 대한 결론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실하시기에 그 언약이 폐하여 진적이 없고 그리스도는 다른 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 남긴 약속 곧 할례로 말미암는 언약의 수종자로 오셔서 그 언약을 성취하셨음으로 유대인에게 그리스도는 그 언약의 성취자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고로 복음은 먼저는 유대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행 3:26). 
9절부터는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설명합니다. 8절의 유대인의 구원이 ‘하나님의 진실하심 곧 언약에 신실하심’에 근거한 구원이라면 9절의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한 구원’입니다. 구약의 세 구절을 인용해서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이미 성경이 증거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10절(신 32:43)과 11절(시 117:1)에서는 열방이 주를 즐거워하며 찬송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사 11:10에서 그리스도를 ‘이새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이신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다윗 혈통의 뿌리가 되심으로 이 증거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13절은 바울의 축복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은 ‘구원의 소망’을 말하는데, 이는 두 가지 근거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소망의 근거인 성품(character)를 이루어줍니다. 첫째, ‘믿음 안에서’의 소망이며, 둘째, ‘성령의 능력 안에서’의 소망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이는 성도는 성령의 열매를 얻을 수 없으며, 열매 없이 자신이 구원 얻은 자라 믿는 것만큼 허망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열매있는 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