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러 교수의 개혁파 정통신학 이해
개혁파 정통신학에 대한 멀러 테제에 대한 교의학적 성찰 1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뒤를 이어서 16세기 말에서 18세기 초까지 이어진 개혁파 정통신학(reformed orthodoxy) 또는 소위 “칼빈 이후의 칼빈주의(Calvinism after Calvin)라고 좀 부정확하게 언급되기도 하는”1) 신학 사상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정통주의 신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를 원하는 학자들은 일관성 있게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왔으나, 19세기와 20세기의 일부 학자들은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 논의하는 일이 많았었다. 이에 대해서 아직도 서로 대립되는 다른 논의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으나,2) 근자에 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신학의 연속성/비연속성 문제 대한 재평가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시도되고 있는데3) 그 중에서 칼빈 신학교의 리쳐드 멀러 교수가 그의 박사학위 논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일련의 작업에서 개혁파 정통신학에 대한 재평가의 매우 중요한 기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4)
멀러 교수는 자신이 이와 같이 이해하고자 하는 개혁파 정통신학의 발달 과정을 다음 같이 분류하여 제시한다.5) 두 단계로 이루어진 초기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 (1) 도르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의 초기 개혁파 정통신학 형성기(ca. 1565-1618/1619),6) (2) 도르트 공의회 이후의 초기 개혁파 정통신학 수립기(ca. 1618-1640).7) 또 다른 두 단계로 나타나는 개혁파 정통신학의 발달 시기: (3) 1640년경 소우물(Saumur) 신학의 전개와 함께 그에 반응하면서 전개된 적극적이기도 하고 논쟁적으로 아주 구체적인 신앙 고백을 한 개혁파 정통 신학 고백기(ca. 1640-1685),8) (4) 신앙고백의 포기(deconfessionalization)와 전이(transition)의 시기(1685-1725),9) 그리고 (5) “계속되는 종교 개혁”(Nadere Reformatie)을 주장하는 일들은 계속해서 살아 있는 개혁파 정통신학적 주장을 하였으나 논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개혁파 정통 사상을 많이 상실하여 가는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 시기(late orthodoxy, ca. 1725-1770).10)
물론 종교 개혁기와 같이 첫 번째 시기에도 상당히 많은 신앙 고백들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서, 아이리쉬 신앙고백서(the Irish articles, 1615), 지그문트 신앙 고백서(the Confession of Sigismund, 1614), 브란덴부르크 신앙고백서(the Brandenburg Confessions, 1615),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르트 공의회의 결정문(the Canons of Dort, 1619).
둘째 시기 동안에는 도르트 공의회의 결정문을 중심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아주 확고히 표현해 가는 신학적 작업을 하고 그에 근거한 교회 활동에 힘쓰던 시기였고, 세 번째 시기에는 이전부터 나타나던 소시니안 주의의 문제점을 확연히 인식하면서 그것에 대항하여 정통신학의 입장을 잘 변증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1649), 소우물(Saumur) 학파의 가정적 보편주의에 대한 강한 논박을 하고, 코케이우스(Cocceius) 등의 언약 신학과 관련한 논쟁을 하였으며,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데카르트 사상의 함의와 투쟁하는 신학적 논쟁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소논문에서는 멀러 교수의 테제를 검토하고(I), 그 테제를 비판적으로 보완하면서(II), 그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개혁파 정통신학은 과거 그 시대와 우리 시대의 신학과 교회를 위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지를 살펴보고(III), 이를 바라보는 우리는 우리 시대에 과연 어떤 태도로 신학을 해야 하는 지를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IV).
1. 개혁파 정통신학에 대한 멀러 테제
개혁파 정통신학에 대한 멀러 테제는 이미 여러 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르네상스 사상을 그것이 속해 있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해야 하며,1) 칼빈 같은 개혁자들을 16세기 맥락(in the 16th century context) 속에서 보고 분석하여 중세 말기 사상과 종교 개혁 사상의 연속성을 보아야 하듯이,2) 개혁파 정통 신학도 무엇보다 먼저 그 역사적 장황 속에서(in their context) 그것을 그들이 이해한 대로 살펴보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종교 개혁과 종교 개혁자들에 대해서와 같이 개혁파 정통신학에 대해서도 “이 시기의 사상에 대한 전적으로 교조적인 접근”(entirely dogmatic study of the thought of the period)에서 벗어나 “좀더 맥락화 된 역사적 분석”(a more contextualized historical analysis)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3) 이 테제는 다음 같은 다양한 함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1. 멀러 테제는 1970이나 1975년 이전에 일부 학자들이, 특히 바르트주의 학자들이4) 주장하던 소위 “칼빈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칼빈”(Calvin against Calvinists) 해석에5) 반하여 이런 해석들을 "후기 개신교의 발전에 대한 신학적으로 심지어 교조적으로 통제된 설명"으로(theologically or even dogmatically-controlled account) 보면서, 이런 해석과는 구별되는 "균형 잡혀 있고 역사학적으로 지도를 받은(a balanced, historically couched)" 해석을 하려는 시도, 즉 개혁파 정통신학을 16세기 말과 17세기라는 구체적 역사적 정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구체적 역사적 정황 속에서 보면 개혁파 정통신학도 “종교 개혁과 마찬 가지로 중세적 유산에 근거하고” 있으며, 따라서 특히 후기 중세로부터 많은 것을 끌어 왔고, 또한 “종교 개혁과 마찬가지로 초기 근대(early modern)에 속하는 유럽의 의식의 변화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립한” 운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6) 그러므로 개혁파 정통 신학은 한편으로는 중세적이고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후에 우리가 고찰할 그들 사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점에서는 그들 사이의 연관성뿐만 아니라 개혁자들과의 연관성이 아주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는7)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특히 성경관 같은 데서는 종교 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사이의 사상적, 표현적 유사성과 연관성은 아주 두드러진다.8) 물론 성경의 정확 무오한 영감된 책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그 이전의 신학자들의 성경관과도 상당한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으나, “오직 성경”의 원리를 명확히 하느냐의 문제를 중심으로 보면 그 이전의 천주교 신학자들 보다는 종교 개혁자들과 개신교 정통 신학자들의 연관성이 더욱 분명해 진다.
또한 언약과 예정 이해에 있어서도 종교 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사의의 연속성은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멀러는 강하게 지적한다. 예를 들어서, 칼빈의 이해와 불링거의 이해 사이의 차이가 어떤 점에서는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것이 후에 논의될 개혁파 전통 신학의 다양성), 그런 것들은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흔히 과장되듯이9)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하는 것이다.10) 언약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사소한 차이가 몇 가지” 있기는(some minor differences in formulation) 하지만, 칼빈과 불링거는 모두 구원의 근거로서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unilaterally) 주신 철저히 은혜로운 언약(a thoroughly gracious covenant)에 대해서 말하며,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에서의 인간의 책임을 묘사할 때는 모두 다 쌍방적인 언어(bilaternal language)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멀러는 아주 의식적으로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다.11) 그러므로 멀러에 의하면, 개혁파의 언약 교리는 (어떤 이들이 그렇게 주장하듯이) 개혁파의 예정론과 대립하는 것도 아니고, 긴장 관계에 있는 것도12) 아니다. 왜냐하면 개혁파의 예정론도 하나님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부여된 은혜를 선언하며 또한 동시에 그 은혜 아래서 또한 은혜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인간의 책임과 순종을 가정하기 때문이다.13)
또한 1560년부터는 무스클루스(Musculus)와 우르시누스(Ursinus) 모두가 아주 간단하게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수립하시고 유지하시는 중세의 창조 질서 개념과 어느 정도 연관성을 지닐 수 있는 “창조에서의 언약 개념”(a concept of a covenant in creation)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14) 이런 창조 언약 개념은 후에 카스파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더들리 페너(Dudley Fenner), 윌리엄 펄킨스(William Perkins),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 (Franciscus Gomarus), 로버트 롤록(Robert Rollock), 그리고 존 볼(John Ball, 1585-1640) 등에 의해서 더 구체화되어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두 언약 개념으로 정리되게 되고,15) 그 후에 요한 코케이우스(John Cocceius, 1603-1669),16) 프란츠 부르만(Franz Burman, 1632-1679), 그리고 헤르만 위트시우스(Herman Witsius, 1636-1708). 등에 의해서 더 명확히 정리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아주 고전적인 정형적 정리화를 얻게 된다.17)
이와 같이 개혁파 정통 신학 사상은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과의 내용적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 많이 있다. 종교 개혁 시기의 신학적 표현 방식과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의 신학적 표현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18) 또한 개혁파 정통주위 시대에도 그 시대의 신앙 고백서나 개개인 신학자의 설교나 그에 준하는 논의는 스콜라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2. 그런데 이는 중세 말기 사상에서 종교 개혁에로의 전이를 비연속성보다는 연속성을 좀더 생각하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이전 학자들의 작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연관되어져 있다. 멀러 자신도 “종교 개혁 사상의 교리적 내용은 중세 말기의 어거스틴주의 전통과 분명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 즉, 그들은 “중세 말기의 신학자들인 토마스 브래드와딘(Thomas Bradwardine),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 그리고 요하네스 스타우피츠(Johannes Staupitz) 등과 같은 이들의 성경 해석과 교의적 정식화의 오랜 전통 안에 그와 반응하면서 서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2)
3. 그리하여 19세기와 20세기 중반까지의 학계 일부에서 일반적으로 ‘스콜라주의’(scholarsticism)라는 용어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비하적인 어조로 말하던 것에 대조하여 이제는 스콜라주의라는 말을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학교와 대학에서 사용하던 학문 연구와 교육 방법”(a method used in the schools and universities, applicable to nearly all disciplines)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3) 멀러는 중세의 모든 대학 교수들이 하나의 신학이나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스콜라주의 안에 다양한 사상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는 알만드 마우어(Armand Maurer)의 주장을 인용하며,4) 따라서 ‘스콜라주의’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학문) 방법에 대한 용어이다”고 말하는 데이비드 놀즈의 논의에5) 동의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 한다.
또한 멀러 등은 ‘인문주의’(humanism)라는 말도 어떤 특정한 철학적 관점이나 신학적 관점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다는 근본적으로 학문 연구 방법과 문헌학(philology)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6) 이렇게 스콜라주의라는 말과 인문주의라는 말을 새롭게 정의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전 학문계에서 흔히 스콜라주의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을 아주 대조적으로 보고 제시하던 것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7)
일반적으로 중세 말기의 스콜라주의자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들인 토마스 브래드와딘(Thomas Bradwardine),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 또는 웨쎌 간스포트(Wessel Gansfort) 같은 이들은 중세 말기에 당시 사상에 거역하는 이들로 여겨지지는 않았어도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논의와 생각이 개혁자들의 사상을 향해 있었다고 할 만한 측면도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8) 멀러는 이런 점에서 스콜라주의라는 말과 인문주의라는 말을 너무 대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중세 말의 일부 스콜라주의자들의 생각에는 후에 종교 개혁적 인문주의자들의 생각과 연관되는 생각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인문주의자들은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과 철학의 요소들을 흡수하고 사용하기 꺼려하는 면이 있어도, 16세기의 스콜라주의자들은 인문주의자들의 통찰에 상당히 개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9) 그러므로 16세기 스콜라주의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그 사상의 내용에서는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멀러는 중세의 경우에도 스콜라주의라는 용어를 일정한 사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4. 따라서 개신교 정통주의에 대해서 “스콜라주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도 그것을 비하하기 보다는 특정한 학문과 교육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볼 때 개신교 스콜라주의라는 말은 특정한 교리적 관점이 나타난 것으로 보다는 개신교 사상이 학교와 대학들에서 제도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10) 즉, 종교 개혁이 자리를 잡아 가자 이제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교육의 문제”(educational issues)가 제기 되어, 그 결과로 “대규모의 신학적 체계들이 중세의 스콜라주의적 논박 방식에 의존하여 세워지게”(the large-scale theological systems were modeled on scholastic disputations)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11) 이런 뜻에서 개혁파 스콜라주의라고 할 때의 스콜라주의라는 용어는 “개신교 교리의 제도화 과정의 전문적이고 학문적 측면을 묘사하는 말”이라는 것이다.12)
그러므로 이제 “스콜라주의”라는 용어는 중세의 스콜라 사상과 관련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오히려 이는 “그것은 존재하는가?”(An sit?), “그것은 무엇인가?”(Quid sit?) 그리고 “그것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인가?”(Qualis sit?)와 같은 식으로 전개 되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퀸틸리안(Quintilian) 같은 고전적 수사학(classic rhetoric)과 논리학(logic)에서 논의되었고, 특히 15세기와 16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인 아그리꼴라와 그를 따르는 멜랑흐톤에 의해 사유의 명료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권면되던13)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한 논의들을, 그리고 그런 논의들만을 스콜라주의적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14) 칼빈이 주도적으로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에서도 학생들을 이런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scholastici”(the young scholars)라고 언급하였고, 이 학생들은(scholastici) 매달 첫 금요일에는 공식적 신학적 논박(theological disputatiuons, elenchus)를 쓰도록 <제네바 학원 정관>(The Statutes of the Geneva Academy, 1559)에 명시되어 있었다는 것을 멀러는 중요한 논거로 제시한다.15) 이렇게 16세기 정황 속에서는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당시 논박하던 방식을 따라서 논박하는 일을 스콜라주의적이라고 했으니, 우리도 스콜라주의적이라는 말을 내용을 가지고 논의할 것이 아니고 그런 학문과 교육의 방법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콜라주의라는 말은 이제 “12세기 말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신학적 체계의 신학 방법론적 특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즉 신학에 대한 전문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16)
그러므로, 예를 들어서,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대한 주석서는, 좀 간단한 형식으로 이기는 하지만 툴레티니의 신학서가17) 전개 되는 그런 방식대로 진술되고 있으므로 그 진술의 성격상 스콜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것이 스콜라주의적 진술의 시기에 생성되었고, 또한 그 내용은 개혁파 스콜라주의적 신학서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진술 방식이 고백서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므로 스콜라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18)
5. 그러므로 (명제 1과 연관해서 다시 말하자면)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이나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의 근본적 사상은 같은 것인데 그들이 처한 목회적 상황적 역사적 차이가 그들의 표현 방식의 차이를 형성하게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파 정통주의는 결국 개혁자들의 사상을 그대로 베낀 것(a carbon copy of the thought of the Reformers)이라기보다는 그들 나름의 정황을 반영한 살아 있는 운동(a living movement reflective of its own contexts)”이라는 것이다.1) 따라서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발전한 “종교 개혁의 종국적 교의적 규정화”(a final, dogmatic codification of the Reformation)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 그러므로 이런 상황적 요인으로 말미암은 차이를 그 이상의 차이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처한 맥락에서 떼어 내어 논의하는 것이므로 옳지 않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이성과 계시에 대한 개혁파 스콜라주의자들에 대한 태도에 대한 해석에서 찾아 질 수 있다. 이전의 일부 신학자들은 개혁파 정통주의 스콜라주의자들이 이성에 “신학에 있어서 신앙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여, 결국 “계시의 권위 일부를 손상시키는 데에도” 인도했다는 주장을 하였다.3) 그러나 대부분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표현이나 그들의 의도에서는 이성과 철학 모두가 성경 계시의 권위 밑에 서 있는 것임을 멀러는 명확히 주장한다.4) 오직 18세기에 이르러서 Venema, Wyttenbach, 그리고 Stapfer 같은 사상가들이 이성 일반에 주도적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5) 특히 비텐바하가 볼프적 합리주의적 방식으로 논의하기를 자연 신학이 그 위에 계시 신학의 체계가 근거해야만 하는 토대라고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이런 식의 논의는 개혁파 정통신학의 대다수의 견해나 규범일하고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6) 사실 이런 논의는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논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파 스콜라주의의 논의는 항상 성경적 계시에 복종하려는 논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튜레틴은 분명히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신학적 논의가 합리적 논의에 근거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천명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7)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는 종교 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를 찾기 어렵다.
이는 언약 신학을 정식화하는 표현 방식을 해석할 때도 유념해야 하는 점이다. 이전 시기의 일부 학자들은 코케이우스는 “개혁파 스콜라주의의 엄격한 예정론주의적”(the rigid predestinarinanism of "Reformed scholarsticism") 표현과는 다르고, 그에 대항하여 “조건적인” 언약 교리(a "conditional" doctrine of covenant)를 가르쳤다고 잘못 주장하였다.8) 그러나 사실 코케이우스도 정통파적 예정 교리를 가르치는 체계 안에서 일방적인 언약 개념과 쌍방적인 언약 개념을 연관하여 표현했다.9) 즉, 그 근본 사상에 관한 한 소위 개혁파 스콜라주의자들과 코케이우스 언약 사상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그 사상을 표현하는 표현 방식, 즉 정식화(formulation)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 코케이우스의 언약 사상 사이에 있다고 하는 긴장은 17세기 자료에 있기 보다는 현대 신학자들의 모음에 있는 것이라는 멀러는 논의는10)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따라서 코케이우스 등의 언약 사상이 합리화하는 스콜라주의(a rationalzing scholasticism)이라고 주장한 이전 학자들의 견해도11) 옳지 않은 것임을 멀러는 잘 드러내고 있다.12) 그 대표적인 논의는 코케이우스의 반하는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데까르트적인 합리주의가 신학에 도입되는 것을 완강히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6. 그런데 개혁파 정통주의 형성기에 사용된 방법론은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충용과 개정(a critical appropriation and a revision of Renaissance Aristotelianism)”이라고 할 수 있다.13) 또한 이 시기에 사용된 "논리적인 도구"(the logical tool)는 당시의 르네상스 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이 사용하던 일반적인 방법인 로키 방법(loci method)이었는데,14)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특히 멜랑흐톤에 의해서 변형된 아그리콜라적인 논리(the Agricolian place-logic as modified by Melanchthon)를 사용하였고, 후에 라미즘(Ramism)으로 불린 방법론을 사용하였다.15) 그래서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인문주의자인 아그리콜라와 그를 상당히 따르는 멜랑흐톤을 따라서 하나하나의 주제들에 대해 논의하여 정리하는 Loci 방법이 사용하여 그들의 신학을 정리하였고, 베자 등 일부 신학자들은 라무스의 논리에 반대하였으나 일부 신학자들은 아주 열광적으로 라무스(Peter Ramus)의 추론 방법을 따라서 모든 주제들을 계속해서 둘로 나누어 검토하는 일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방법의 사용이 그 사상과 추론의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 멀러 등의 논의이다. 이런 방법을 멜랑흐톤이 사용할 때부터 결론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유의 명료성을 분명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16)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사용했으므로 예정론을 각지게 되었다고도 할 수 없으니, 어거스틴, 고뜨샬크, 칼빈 등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를 사용해서 예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7) 또한 중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와 중세 말기의 그 논리, 그리고 르네상스 시기의 그 논리가 다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리가 인문주의적으로 변용된 것이 사용되었음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로키의 내용은 성경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멀러의 논의는18)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다.
7. 그러나 같은 논리적 도구를 사용하면서도 사실 개신교 스콜라주의 안에 상당히 다양한 사상과 다양한 접근 방법이 있음을 주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통 루터파 신학과 정통 개혁파 신학에서도 그 차이와 다양성이 나타나고, 개혁파 스콜라주의 안에서도 다양한 접근이 있으므로 어느 하나의 신학을 진술하는 방식, 예를 들어서, 베자적인 방식으로 신학을 진술하는 방식을 유일한 스콜라주의적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다양한 전개라는 주어진 역사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콜라주의적 교육과 학문 방법을 사용한 같은 전통에도 다양한 생각이 있음을 역사에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멀러는 같은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 같은 예정론 사상을 가지지 않은 것을 대표적인 예로 언급한다.19) 그러므로 예전의 일부 학자들이 개신교 정통주의가 스콜라주의를 사용하여 엄격하고 굳은 예정론 사상(rigid predestinationism)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하는 것이20) 옳지 않다는 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21) 또한 이전에 스콜라주의를 사용하지 않던 어거스틴도 이중 예정론을 분명히 천명한 일이 있으므로 예정론 사상이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좁게 개혁파 정통신학만을 말해고 개혁파 정통주의는 “신앙 고백적인 통일성(confessional unity)을 가지되, 신학적인 다양성(theological diversity)을 가지고 있는 신학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언약 사상에 있어서 개혁파 정톤 신학 내에 엄격한 하나의 사상만 있다고 하거나 여러 가지 다른 언약 사상이 있다고 하기 보다는, “다양한 그러나 연관성을 지닌 개혁파 언약적 전통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multiple and rather divergent Reformed covenant traditions)는 것을 멀러는 강조한다.22)
신학적 다양성의 또 다른 예는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주장과 논쟁에서도 잘 나타난다.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작정의 문제를 가지고서는 베자(Beza), 퍼킨스(Perkins), 고마루스(Gomarus), 마코비우스(Maccovius) 등이 대표하여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하였고, 다른 이들은 타락후 선택설을 주장하여 이는 도르트 공의회의 결정문에서 고백되고 있지만,23) 개혁파 정통주의 사상가들은 모두가 시간 이전의 선택을 믿고 가르친 것이다. 즉, 이들은 모두 에베소서 1장의 가르침을 따라서 인간이 선택된 것은 창세전임을 명확히 가르친 것이다. 즉,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모두 믿으며 고백하려고 했고,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에서의 차이가 그들 사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II. 멀러 테제에 대한 비판적 보완
이상의 함의를 지닌 멀러의 주장은 이제 멀러만의 주장이 아니고 상당히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으면서 60년대 이후 나타난 종교개혁 사상과 개신교 정통주의를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던 학문적 범례(paradigm)를 대치하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경쟁하는 학문적 범례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멀러 테제와 이와 연관된 학문적 범례(paradigm)의 우위성을 높이기 위해서 멀러 테제를 좀더 일반화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를 지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는, 오랜 학계의 용례로 말미암아 중세 스콜라주의를 그 독특한 사상적 내용을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임을 감안하면서 ‘중세 스콜라주의’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 특별한 개념 규정을 하고 논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는 다음 두 가지 작업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하나는 중세 스콜라주의의 다양성을 잘 의식하면서도 그것의 일정한 특성을 찾는 “중세 스콜라주의”의 명확한 개념의 확립에의 요청이다. 중세 스콜라주의는 다양한 사상적 정향이 그 안에 있는 사상 운동이었음을 사실 멀러 등이 잘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중세 초기 스콜라 사상의 전개가 있고, 나중에는 그 일부는 토미즘으로 전개되고 있고, 그 일부는 스코투스주의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일부는 중세적 어거스틴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토미즘은 자연 은총 이분법적 구조를 지닌 온건한 실재론으로, 스코투스주의는 역시 자연 은총 이분법적 구조를 지닌 유명론으로, 중세적 어거스틴주의는 이원론적 요소를 유지하면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많이 의식하는 방향으로 그 사상이 드러나고 있다. 중세 스콜라주의가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1) 그러나 동시에 이들 모두가 ‘중세 스콜라주의’에 속하는 일정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중세 스콜라주의는 역시 궁극적으로 자연 은총의 이원론적 구조(dualistic structure)를 지닌 사상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둘째로 이런 의미의 중세 스콜라주의는 개신교 정통주의의 스콜라주의와는 다른 면이 있음을 좀더 부각시켜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는 보완을 요청한다. 전통적으로 이점이 의식되기는 하였으나 과거 학자들이 정통주의 신학 시대에 스콜라주의적 방법이 다시 도입됨으로 종교 개혁시대의 바른 정향이 억압된 것으로 주장한 것을 강하게 반박하는 멀러 등의 논의에서는 마치 스콜라주의라는 말은 그저 학문적 교육적 방법에 대한 이야기 이므로 중세 스콜라주의와 개신교 정통주의의 스콜라주의라는 말은 그들이 사용한 학문적 방법이나 교육 방법만을 지칭하는 공통의 요소로 보자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그러나 실상, 멀러 등의 논의가 분명히 하듯이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다양성을 지닌) 중세 스콜라주의 사상 일반과 개신교 스콜라주의 사상 일반의 뚜렷한 차이가 있으므로 둘 다 스콜라주의적 방법만을 사용하였고 그것이 사상과는 별 관계없다는 논의도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중세 스콜라 사상의 일정한 사상적 특징과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사상적 특징을 드러내면 대조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학계에서 중세 스콜라 사상과 종교 개혁 사상과 개신교 정통주의를 너무 대조시켜 제시하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일부 중세 스콜라 사상가들의 생각이 종교 개혁자들이나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의 사사에 그대로 물려진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멀러 등의 큰 기여이다. 그 점을 새기고 유의하면서도 동시에 중세 사상가들의 일부 견해가 개신교도들에게 그대로 있어도 전체적인 사상의 틀에서, 중세 사상과 개신교 사상의 차이가 뚜렷이 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멀러는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자들 가운데 Thomas Bradwardine, Gregory of Rimini, 그리고 Johannes Staupitz 등의 성경 해석과 그들의 교의적 정식화와 종교 개혁 사상의 연관성을 보고 강조하고 있으나, 또한 이들과 개혁자들 사이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 스콜라주의의 일반적 성격과 그것이 종교 개혁 사상과의 차이도 좀더 부각시키는 일이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는 개혁파 정통주의와 스콜라주의의 관계를 좀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이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사상에 있어서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려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 멀러 등은 같은 스콜라주의적 논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알미니우스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는 다른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멀러는 잘 지적하고 있다. 이로써 멀러는 스콜라주의는 학문을 표현하는 방법이요 교육의 방법이지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어서,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해도 개혁파적인 사상을 가질 수도 있고[개혁파 정통주의], 루터파적인 사상을 가질 수도 있으며[루터파 정통주의], 알미니안주의를 가질 수도 있는[항론파] 것이지, 스콜라주의적 방법이 어떤 사상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논의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멀러는 개혁파 정통주의와 개혁파 스콜라주의라는 말을 상당히 혼용하기 때문에2) 때때로 알미니안주의도 개혁파 스콜라주의 안에 있는 한 논의라는 말을 하고, 때로 개혁파 정통주의와 개혁파 스콜라주의를 혼용하므로 마치 개혁파 정통주의 안에 알미니안주의도 포용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 곳도 있다. 물론 알미니우스 사상에 대한 멀러의 자세하고도 뉴앙스에 잘 유의하는 좋은 논의는3) 우리로 하여금 그가 알미니안 사상을 개혁파 정통주의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고 생각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는 단지 일반적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개혁파 스콜라주의와 연관해서 생각하고 논의하는 것과 연관해서 나타나는 문제일 뿐이다. 사람들의 이런 혼동을 배제할 수 있는 길을 멀러 테제가 제시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논의를 하는 것이다.
셋째로 개혁파 정통주의의 다양성을 드러내면서 전택설과 후택설 논의만이 아니라 심지어 아미로의 가정적 보편주의까지를 개혁파 정통주의가 수용할 수 있는 듯이, 또는 그런 방향으로 나갔어야 하고 후대에 사는 우리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재고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를 하고자 한다.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사상에로 나아간 모습이 아미로 등의 사상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 사상을 같은 개혁파 사상에 넣어 고려하는 것이 과연 유익할 것인지 필자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런 요점들은 멀러 테제를 비판하는 것이기 보다는 멀러 테제가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제안하여 보는 것이다. 중세 스콜라주의의 문제점을 잘 드러내는 논의가 될수록, 개신교 정통주의의 사상적 특성을 더 잘 드러내는 논의가 될수록 개혁파 정통주의를 그것이 있었던 시대적 맥락 가운데서 정확히 보아야 한다는 멀러 테제 더 강력해 질 수 있는 것이라고 판단되게 때문이다.
III. 개혁파 정통주의의 현대적 의의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하는 방식이기 보다는 개혁파 정통주의의 사상이다. 이는 “오늘날의 규범적 개신교 신학의 근거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의와 타당성”(contemporary relevance)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1) 그 사상은 멀러 테제가 분명히 하듯이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 것이며,2) 심지어 그 이전 시대의 성경적이려고 노력했던 기독교 사상들과 연관성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으로부터 나온 연속되는 사상적 통일성을 찾아 갈 수 있는 한 방향을 개혁파 정통주의가 지시해 줄 수 있다고 사료된다.
3-1. 개혁파 정통주의의 사상적 특징들
그 사상의 근본적인 것은 모든 신학적 논의를 궁극적으로는 성경에 근거하여 확증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 결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그 경륜적 사역을 존중하고, 또한 그 결과로 그의 영원성과 신적 지식의 성격으로부터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성경에 근거하여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것에 대한 바른 이해,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으로 구속사의 전 과정을 잘 정리해 내어 계시사(historia revelationis)와 밀접하게 연관된 구속사(historia salutis)를 잘 제시하는 것이 개혁파 정통주의의 중요한 성격으로 드러난다. 또한 이 구속의 결정적 사역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명확히 바르게 인정하며 이 신인(神人, the God-man)의 “형벌적 대리적 구속”(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 사역을 모든 측면에서 바르게 제시하고, 그가 온전히 성취하시고 성령님께서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시는 구원의 성격(monegism)을 잘 제시하는 것도 그 하나의 특성이다. 구원된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대해서도 그 성격과 그 조직까지를, 그리고 그 사역까지를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정리하려는 것이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회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극치에 이르게 하시기까지의 과정도 성경에 근거하여 제시하려고 하였다고 할 수 있다.
3-2.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하는 방법의 독특성
이런 사상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일에서 개혁파 정통주의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 근거하되 논리적 추론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사유를 명확히 하고 필연적 추론을 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런 스콜라주의적 방법은 그것이 여러 면에서 유익을 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이런 방법은 때때로 지나친 추론에로 사람들을 인도해 가는 면도 있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적 추론을 모두 다 그대로 따라 가지 않는다. 그들이 성경에 따르면서도 지나치게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몇 가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과 연관되기는 하지만 실제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신조적 선언을 하는 방식으로 하기는 했으나 개신교 정통주의의 가장 지나친 주장은 맛소라 사본의 모음까지가 영감되었다는 스위스 일치 신조(Helvetic Consensus Formula, 1675)의 고백의 주장을 들 수 있다. 성경을 전체로서 존중하며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려는 그 의도는 매우 존중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맛소라 사본의 모음까지 영감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특히 그것을 신조로 주장하였다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폴라누스(Amandus Ploanus), 벅스도르프(Johannes Buxdorf) 등이 주장한 것과의 연장에서 그 당시로서는 그런 입장의 천명이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으나,3) 이런 작업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개혁파 정통주의에게서 멀어지도록 하는 결과를 내었다면 그것은 그렇게 성경을 존중하는 신조적 선언을 하며, 성경을 존중하는 신학을 하는 그 의도를 결과적으로는 잘 섬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3. 이런 방법론의 사용과 관련 없는 논의 중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점들
바른 성경적 사상을 유지하고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신학적 논의에도 이외에 여러 가지 잘못된 생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예가 여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논의 가운데서 문제가 될 수 있고 수정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만을 언급해 보기로 한다.
(1) 어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칼빈을 따르면서 천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언급한다.4) 이는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을 영적이고 인격적 존재의 어떤 특성들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서도 천사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 않고, 이런 성경의 사상을 따른 후대의 신학자들은 천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비판하면서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5)
(2) 많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칼빈을 따르면서6) 천사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된 제한된 섬기는 영들(πνεύματα λειτουργικά)이며, 따라서 물질적 요소가 없으므로7) “육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8) 그러나 매우 중요한 개혁신학자인 장키우스와 알미니안주의자인 흐로티우스(Grotius)는 이전 시대의 사상의 영향을 유지하면서 천사가 물질적이라고 하였다.9) 천사가 영체를 가졌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서 장키우스가 보나벤튜라, 리차드, 아우에올루스, 그의 스승인 디오니시우스와 다메섹의 요한의 영향을 받아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서 “천사가 물질을 완전히 결여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10) 또한 장키우스를 제외한 많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천사들은 그들의 기능을 수행함에 있어서 때때로 육체적 형태를 취하지만, 단시 일시적이다.”고11) 정확히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3) 언약 개념을 잘 발전시키면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협약 교리를 너무 자세하게 발전시키며 특히 하이데거와 코케이우스가 스가랴 6:12-13의 “평화의 의논”를 언급하고, 이와 연관해서 이사야 53:10-11, 시편 40:6, 히브리서 7;22, 8:6, 10:10, 요한복음 6:40, 시편 2:8 등을 언급하고 있는 것, 비트시우스가 누가복음 22:29을 언급하는 것, 고마루스가 마태복음 3:13 등을 언급하는 것 등이12)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구절의 함의와 관련하여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의논을 생각하는 것은 좋으나 이를 스가랴서 6:13의 “평화의 의논”과 연관시키는 것은 실수요 잘못일 것이다.13)
IV. 마치는 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신학해야 하는가?
개혁파 정통신학이 성경에 충실한 사상적 내용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개혁파 정통주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성경적 사상은 연관성을 지니고 어느 시대에든지 유지되어야 할 것이고, 개혁파 정통주의는 16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사상이 보유된 한 종류의 사사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개혁파 정통신학이 신학을 하는 하나의 방법을, 그것도 상당히 좋은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개혁파 정통주의적 신학의 방법은 좋은 신학 방법론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모든 진술이 스콜라주의적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멀러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예를 들자면, 사상적으로는 개혁파 스콜라주의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스콜라주의적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스콜라주의는 개혁신학을 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되거나 그런 것으로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다.
또한 멀러 등의 논의가 잘 드러내 주고 있듯이 그 방법론을 가지고도 여러 가지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신학이 제시되는 방법의 다양성과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한 신학 사상의 다양성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전택설과 후택설의 논의가 개혁파 정통주의 안에서 있었던 다양성의 대표적인 예이고, 20세기 초의 논의로는 역사적 전천년설이나 (자유주의적인 후천년설이 아닌 성경에 충실하려고 하는) 후천년설이나 무천년설 사이의 논의가 그러하다. 이는 그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성경적 사상 밖에 있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그들 사이의 재미있는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논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개혁파 정통주의의 사상을 유지하면서 서로 같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논의에 대해서는 논의 가능성을 확대하면서 모든 논의를 성경적 사상에 맞추어 가려고 하는 노력이 계속 될 때에라야 우리들의 신학은 의미 있고, 교회를 섬기며,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위한 신학적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도 사상에서는 개혁파 정통주의에 일치하는 신학을 제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만, 그것을 이 시대에 제시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유일한 방법만이 신학을 하는 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느 말이다. 신학ㅇ늘 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 사상이 중요한 것이지 그 방ㄹ법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개혁파 정통주의도 몇 가지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입장을 제시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개혁파 정통주의에 충실하면서도 전택설을 주장할 수 도 있고,14) 후택설을 주장할 수도 있으며,15) 그 두 논의를 모두 존중하면서 그 각각으로부터 중요한 요점을 배우려고 할 수도 있고,16) 그런 논의 자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상 우리는 이 모든 논의들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을 핑계로 삼아 성경의 가르침 밖으로 나가려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다양성의 종국적 절단선(cutting edge)은 항상 성경의 가르침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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