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참다운 종교De vera religione>에 나타난 초기의 인식론
2.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
2.1 의심과 확실성
그의 인식론은 데까르트의 저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10세기 이상 앞지른 "만일 내가 의심을 한다면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그대가 의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지 않는지 식별하라. 그리고 만일 그대가 의심을 하고 있음이 확실하거든, 이 확실성이 어디서 오는지 살펴 보라...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사유의 법칙을 확립할 수가 있다:
누구든지 자신이 의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자는 [적어도 자기가 의심을 한다는] 한 가지 진실verum은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대상[의심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확실하다.(omnis qui se dubitantem intelligit, verum intelligit, et de hac re quam intelligit, certus est).
따라서 그것은 진실에 대한 확실이다.
누구든지 진리veritas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는, 자기로서는 의심을 않는 진실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
진리 자체 veritas가 존재 않고는 진실한 사물verum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39.73).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의심을 갖는 자는 진리에 관하여 의심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물은 궁극적인 것과의 조화convenientia, 혹은 궁극적인 유와의 관련gradus에 의해서 우리에게 파악이 된다. 따라서 의심이라는 사유를 하는 자도 일단은 진리에 입각하거나 대조하여 무엇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 이성에서 "이것은 내가 찾는 것이 아니다" 혹은 "이것이 과연 그것인지 의심스럽다"는 판단은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라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는 인식행위이며, 영원한 진리의 빛이 인간 이성을 비추어 주기 때문에 가능한 판단이다(39.73). 그러므로 어떤 동기로든 일단 의심을 품는 사람은 진리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할 수 없다.
의심한다는 것은 사실적 판단iudicium rei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의 출발점은 '사유하는 나' cogito이다. 물론 확실히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진리가 증빙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심이 가능한 조건, 의심하고 있음이 확실하다는 전제사항이 된다. 진리가 의심을 초월하고 선행한다.
물론 인간은 감관의 표상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는 한계 내지는 외향성을 회피할 길이 없고, 자기 내면성으로부터 탐구를 시작할 수가 없는 존재이므로, 의심이라는 '자기모순'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진리[신]는 이성의 추론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추론이 진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 따름이다(non enim ratiocinatio talia facit, sed invenit)고 발견이 되면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39.73). 이것은 아카데미아 학파의 입장과는 달리, 진리를 판단적 명제로 보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보는 시선이다(참조: <독백 Soliloquia> 2.17.31): "진리는 추론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추론하는 자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다"(39.72).
그의 진리관은 허위를 보는 시각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그는 허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허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그렇지 않는 것을 그렇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란 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falsitatem esse, qua id putatur esse quod non est, intelligit eam esse veram, quae ostendit id quod est.[36.66]).
그러나 감관이 감각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표상phantasmata은 일단 그대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 예컨데 물속에 잠긴 노가 우리 눈에 꺾여 보일 적에 빛의 굴절을 우리의 시각이 정확하게 이성에 전달한 것이다. 그 표상을 바탕으로 물속의 노는 꺾어졌다고 '판단'을 내린다면 그 판단이 그르친 것이다(33.62). 오류(허위)는 판단에 있다.
이처럼 감관의 표상을 바탕으로 내리는 판단을 그는 '낮은 의미의' 인식cognitio라고 하며, 지적 작용intellectio에 의해서 어떤 진리를 포착하는 것은 지적확실intelligentia, 직관에 의해서 파악하는 것은 파악comprehensio라고 부르는데 확실한 구분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진리는 존재론적인 명제이고 허위는 인식론적 명제가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허위를 더 깊은 의미에서, 오성이 진리를 추구하면서 진리 자체를 거부하는 모순적인 행위로 밝히고 있다:
"허위[오류]는 기만을 일으키는 그 사물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개념대로] 모든 존재res는 자기가 갖춘 미의 정도대로 자기의 형상
species sua을 감지하는 자에게 나타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관의
과실 때문도 아니다. 감관은 거기에 감지된 영상을 정신에 전달할 뿐이다."
그러면 어디에서 허위가 유래하는가? "영혼을 그르치게 만드는 것은 죄다. 진실verum을 찾으면서 [바로 그 행동으로] 진리 자체veritas를 저버리고 멸시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cum quaerunt verum, relicta est neglecta veritate)"(36.67).
2.2 이성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성mens, ratio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성이란 사고cogitatio라고 일컫는 작용이 아니고 정신nous, animus 혹은 영spiritus 심지어는 영혼anima과 동의어로 쓰인다. 이성의 대상은 육체 감관이 제공해 준 표상phantasmata이 아니고 순수이성적 사물이며, 지성이 영혼의 중심부acies mentis 또는 이성의 빛 자체 ipsum lumen rationis가 발현하는 거기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이다(3.3-4; 39.72 참조).
바울로는 인간을 육(soma, caro)과 혼(psyche, anima)과 영(pneuma,spiritus)으로 구분하였고(1데살 5.23),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분에 따라서 인간을 가리켜 "오성과 영혼과 육체를 갖춘 피조물"(intellectualis et animalis et corporalis creatura)"(7.13)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신플라토니즘의 물질, 혼, 영의 분류에 상응한 것이다. 영혼 속에서 이성의 고등활동이 이루어지고 거기서도 정상이 되는apex mentis에서 진리의 파악 또는 진리 자체인 신과의 합일도 이루어진다.
파악commprehensio이라는 것은 감각적 실재가 아니고 표상에 대한 우리 심리의 동화conformatio도 아니며 파악을 하는 인간 전체, 영혼 전체의 체험으로 간주된다. 영, 사물에 의존하지 않는 사상, 진리 자체의 발견은 인간의 존재 전체에 변화를 끼치므로 하나의 인식은 마치 새로운 탄생과 같다.
2.3 이성의 어두움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악의 이론을 반박하는 기회에 이성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포착 못하는 이유를 다루고 있다(11-21장). 그들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악을 본다. 변신론theodicea문제, 현상적이고 윤리적인 악의 존재에 대한 해설의 필요에서 그들은 악의 원리가 독자적 존재autonoma existentia mali를 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또는 플로티누스의 해결을 채택한다: 악은 존재론적인 한계이지 존재론적인 원리가 아니다. 일종의 비존재me-on, non-esse라는 것이다. 악은 결핍이다. 이 글에서는 악의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취급 않기로 하며 단지 인식론과의 연관하에서만 인용을 하기로 한다.
인간의 오성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파악 못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 장애들의 내용과 그것을 극복하여 진리 파악에로 나가는 방도를 다루는데 책의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성서의 한 구절(1요한 2.16)에 근거하여 이것을 욕망concupiscentia [passiones]과 오만superbia[iactantia]과 지적 호기심curiositas로 간추린다(3.4; 38.69-71). 다만 이 악습도 사실은 영원한 사물의 인식, 진리의 완전한 장악, 진리 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희구하는 영혼의 동력이 잘못 나타난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그에게는 모든 존재가 선하다):
"호기심이 지향하는 것도 지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만 그 지식이 영원한
사물들이요 언제나 동일한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 아니고는 확실한 지식일
수가 없다.
오만이 지향하는 것도 행동을 용이하게 하는 권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신에게 복속하고 그의 지배에 크나큰 사랑으로 전향한 완전한 영혼
만이 장악할 수가 있다.
육체의 쾌락이라는 것도 안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안
식이란 결핍이 전혀 없고 부패가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고 무엇인가?"(52.
101).
예를 들어 오만superbia이란 기실 "전능한 신에 대한 전도된 모방이요, 단독자로서 자기에게 만유가 종속되기 바라는 것" 이기 때문이다(45.84). 과오가 있다면 그것은 수단과 목적의 혼동이며, 때로 인간적인 목표를 오해한 데서 오는 경우이다. 그래서 도달해야 할 목표보다는 과정 자체에 머물고자 하는 심리가 된다(53.102-103).
2.4 인식과 조명
앞서 말한 것처럼 우선 그의 인식론에서는 진리를 '내면적인 빛'으로 파악하지 "이것은 이러이러하다"는 판단명제로 여기지 않는다. 어떤 명제를 통해서 진리를 정의하는 일은 논리학logismus의 영역이며 사물과 심리 정황에 의존하는 하급 인식론에 해당한다.
무릇 "육체[물체]는 본연의 인간이 아니다(corpora vero non sunt quod nos sumus.[46.89])". 그리고 "물체는 시간으로나 공간으로나 가변적이다. 표상 phantasmata은 물체의 형상species 에서 출발하여 육체적 감관을 통해 포촉된 사상事象figmenta이다. [오성이]진리를 탐색함에 있어서는 표상들의 영향을 안받고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10.18)는 것은 실이지만 감각적 인식은 사물의 진수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감관에 매어 있고 사물과 심리psyche에 의존하는 표상phantasmata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영spiritus, 이성mens, 오성nous이 진리를 파악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표상적 활동actio imaginativa으로서의 사고는 본원적인 진리와는 무관할 뿐더러 오히려 진리 추구에 장애가 된다.
"[진리의 태양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시각을 통해 정신에
각인되어 표상이 사유되는 그런 것을 통해서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 표
상들을 두고 '내가 찾는 것은 너희가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그 능력[이성]
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다"(39.73).
"플라톤이 살았더라면 '진리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고 순수 이성pura mens
으로만 보인다'고 하였을 것이다...이성적이고 오성적인 영혼anima ratio-
nalis et intellectualis에게만 영원한 진리를 관조하는 향유가 허용되어
있다...진리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표상에 의해서 사유되지 않고 이성
과 지적작용에 의해서만 감지될 수 있다(quod nec istis videatur oculis,
nec ullo phantasmate cogitetur, sed mente sola et intelligentia cerni
queat)"(3.3).
순수 이성mens pura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는 플로티누스의 nous katharos (Enneades 5.3.3; 6.9.5 etc.)의 번역으로서, 참다운 인식 능력, 심리에 매이지 않고 사물과 연계되지 않고서 작용하는 인식 능력을 말한다. 추리logismus는 오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이 후자의 빈약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입장도 플로티누스의 것이다(Enneades 4.3.18; 4.4.12; 4.8.1;4.4.6; 6.7.36). 그가 자기 사상의 전개에 있어서 플라톤의 영향을 입었다는 것은 스스로 고백한 내용이기도 하다(<고백록> 7.9; Contra Accademicos 2.5).
그러면 이성은 어떻게 진리를 파악하는가?
"진리는 이성으로 직관하는 것(intueri veritatem)이다"(16.30). "이성의 눈은 진리를 관조하려는 열망에 불타고 있다(quod si haec intueri palpitat mentis adspectus)"(35.65). 진리는 이성의 정열mentis affectus에 의거하여 추구하는 것이지 차거운 진리의 광선이 비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희열voluptas, "하위의 육적인 희열이 아니라,일종의 고귀한 영적인 희열"이다(39.72).
"오성으로 관상하는 것만이 진리여야 한다고 하는데, 내 오성으로 보는 것
도 기실 감관에 들어 오는 것과 똑같은 표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과연 이성
으로 관조하는 진리는 관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는 다음과 같
은 대답을 할 수가 있겠다: 그 환영이 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만드는 그
빛이 곧 진리이다(illa lux vera est, qua haec non esse vera cognoscis).
그 빛이 있어 그대는 일자unum를 보고, 그 일자를 기준하여 그대는 그대가
보는 모든 사물을 [변천한다는 점에서 비록 일자 자체와 같은 그런 일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라고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34.64).
진리는 내재한다. 사물에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조화convenientia를 보며, 우리가 그 척도를 내부에 간직하고 있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진리의 초월성, 초개체성을 강조 하는 명분은 진리가 인간적인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것이 최고의 조화인지를 알아내도록 하여라. [그것을 알자고]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에게로 돌아가라. 인간의 내심에 진리가 자리잡고
있다(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
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을 초월하라.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를
초월할 적에, 이성을 구사하는 영혼을 그대가 초월하고 있음을(ratiocinantem
animam te transcendere). 그러므로 그대는 이성의 빛이 밝혀져 있는 그곳
을 향해서 나아가라(illuc ergo tende, unde ipsum lumen rationis accen-
ditur)"(39.72).
그러면 어떻게 진리가 인간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가? 힙포의 이 철학자는 빛lux 또는 비추임illuminatio으로 해답을 모색한다. 플라톤과는 달리 기억, 진리를 관조한 기억, 이성에 새겨진 이데아의 잔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진리가 감관을 통해서 사물로부터 추출하여 도달하는 것이 아님을 고수하고자 한다. 비록 감관에도 어느 정도 신빙성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그가 찾는 진리는 감각적인 것과 전혀 무관한extranea것은 아니더라도 이질적heterogena인 것이다. 인간 영혼은 감관에서 출발하여 진리를 추출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의 빛이 반짝이는 그곳을 향하여 움직인다. 영원한 진리들이 인간 각자에게 현존하고, 최고진리에 의존하고 있으며, 오성의 조명 자체에 의해서 인간에게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명 자체가 진리를 날라다 주는 운반체인 셈이다.
그러나 진리는 단순히 인간이 찾아야 할 피동적인 대상이 아니고 일종의 아프리오리apriori로서 우리의 인식과 의지의 활동 전체를 끌어 당기는 힘이다. 플라톤의 견해 그대로 참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신의 위력과 예지가 [인간을 사물의 법칙으로부터 이탈시켜서, 인간의 가르침으로가 아니고 타고날 적부터]인간을 비추는 내적인 조명intima illuminatio으로 성취된다."(3.3).
다시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진리는 빛이다.
그리고 이 빛이 곧 신이다. 신은 진리이기 때문이다(Deus veritas). 진리란 하나의 명제, 어떤 상황 혹은 감각적이고 외적인 사물이 아니라, 내면적인 빛이다. 그 빛이, 요한 복음에 나오는 대로,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어 준다(lumen quod illuminat omnem hominem venientem in hunc mundum)"(요한 1.9). 아우구스티누스는 철인들이 어떤 학파의 주장dogma이나 어떤 학자의 설theoria을 인용하는 것과 똑같은 비중과 권위를 두어 성서를 전거로 하여 자기의 논제를 입증하고 있음을 유의하기 바란다.
성서를 전거로 하여 그는 이성을 비추는 이 빛이 곧 신플라토니즘과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로고스logos와 동일한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 로고스는 인간 안에 자리잡고 있으나 신의 로고스, 신적인 존재이다. 로고스가 인간에게 내면의 말verbum interius을 건넨다. 인간과 사물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자아 사이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간과 진리 자체인 신 사이에 의미와 대화가 성립될 수 있는 원천은 인간에게 자리잡고 있고 인간을 비추는 로고스(그의 저서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이다.
로고스의 육화는 진리를 탐구하는 우리의 길을 바로잡는(disciplina morum [16.32]) 거기에 있다:
[로고스-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은]"모두 영혼의 교화와 훈련을 위해서 갖
추어진 것으로서, 오성의 교육을 위한 제반 규범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
니던가(ad omnem animae instructionem exercitationemque accomodatus, quid
aliud quam rationalis disciplinae regulam implevit?)?"(17.33).
2.5 소급 regressio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다운 종교>에서 두 가지 소급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소위 현세적인 사물로부터 영원한 사물로 가는 regressio ad aeterna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 활동을 통해서 이성이 부단히 자기귀환reditio ad seipsum을 하는 사실이다. 인식론상으로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이 미의 유추 analogia pulchri를 이용해서 사물과 신, 부분적인 진리[진실]verum와 궁극의 진리veritas를 연관시키는 작업에 할당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저서 <교사론 De magistro>에서 이미 거론하였고 후에 <그리스도교 교양론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다시 다룰 소재이기도 하다. 단편적인 미와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서 일종의 기호 작용 semiosis 내지는 의사소통communicatio의 기능을 한다. 사물이 갖추고 있는 진리나 미가 지시적 indicativa인 역할, 인과율적인 지시indicatio causalis를 하는 것이다.
"이성이 어떻게 해서 가견적인 사물에서 불가견의 사물로 소급할 수 있으며, 어떻게 시간적인 사물에서 영원한 것에로 상승할 수 있는지(quaetenus ratio possit progredi a visibilibus ad invisibilia, et a temporibus ad aeterna conscendens)"(29.52)는 그의 커더란 관심사이다.
인간에게는 하급의 미를 게걸스럽게 탐욕하는 열정에서 최고미 summum pulchrum에로 나아가며, 개개의 진리에서 진리 자체 ipsa veritas로 가는 충동이 있다. 그처럼 한 사물에서 상위의 사물로 가는 비약metabasis을 그는 내면화 또는 자기초윌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는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via rationalis 논증하는 작업으로서가 아니라, 진리 자체와의 인격적이고 원천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는 과정으로 이런 논리를 전개한다. 로마서의 한 구절(1.20: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이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읍니다")을 인용하지만, 거기서 우주론적인 신존재 증명으로 유도하지 않고 실존론적인 결단에로 이끌어 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론은 "예술의 작품에서 예술의 법칙으로 가는 소급, 현세적인 사물에서 영원한 사물에로의 소급이요, 묵은 인간의 삶에서 새 인간으로의 변혁(haec est a temporalibus ad aeterna regressio, et ex vita veteris hominis hominis in novum hominem reformatio)"(52.101)이다.
"영혼은 이성을 사용하고 선한 의지를 사용하여...가변적인 다자들로부터
불변의 일자에게 귀환할 수가 있으며(a multis mutabilibus ad unum incom-
mutabile revertetur),...신을 향유하는(frui Deo)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람이 곧 영적 인간homo spiritalis, pneumatikos이다."(12.40).
결국 문제는 진리를 찾아가는 사랑caritas veritatis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하나의 신념이 생겨나는 것이니, 육체의 쾌락을 등지
고 진리의 영원한 본질을 향해서 우리의 사랑을 정향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ad aeternam essentiam veritatis amorem nostrum oportere con-
verti)"(15.29).
두번째 소재는 인식활동 중에 일어나는 의식의 자기귀환reditio ad seipsum으로서 이 책의 45.83부터 48.93까지가 그 내용이다.
"우리 인간은 이성의 빛을 통해서 [[어떤 명제가]참임을 파악한다. 그리고
다시 이성의 빛을 통해서 내가 이것을 인식하고 있음을 같은 이성의 빛을
통해서 내가 인식한다. 또다시 이성의 빛을 통해서 이 사물을 인식하고 있
음을 같은 이성의 빛을 통해서 인식하고 있음을 나는 같은 이성의 빛을 통
해서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49.97).
(de hac luce mentis...
per hanc enim intelligo vera esse quae dicta sunt,
et haec me intelligere per hanc me intelligere per hanc rursus intelligo.
et hoc rursus et rursus cum quisque se aliquid intelligere intelligit,
et idipsum rursusu intelligit, in infinitum pergere intelligo).
의식의 이 자기 귀환과 무한정한 소급 또는 초월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개념이자 하이덱거와 칼 라너의 '초월적 인식'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자기가 지금 무엇을 파악하고 있음을 의식할 때마다, 심지어는 모든 인식 활동에서 인간은 부단히 자기를 초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2.6 인식과 로고스 Logos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과 이성, 철헉과 종교 사이에 모순과 대립이 없다고 단언하고 논리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로고스 개념 때문이다. 참다운 이성vera ratio과 신적인 권위auctoritas divina는 로고스에게서 완전히 하나라는 이유다. 이 둘은 사실상 두 가지 인식 방법이며, 둘다 신적인 지혜sapientia divina에서 유래하고 근거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상으로도 모순될 수가 없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예배의 대상이기 이전에 존재의 원인causa subsistendi이고 인식의 토대ratio intelligendi이며 생존의 명분ordo vivendi이다(7.13; 55.113 참조).
인간 이성은 (죄와 욕정으로)약화되어 있으므로, 자기를 비추는 원천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고 자신의 구조에 갇혀 있다. 따라서 사물의 불변하는 형상을 직관하기 위해서는 정신animus이 회복되어야 한다. "로고스를 파악하고 사랑하고 향유하여 영혼이 쾌유되고 이성의 정상acies mentis이 그 위대한 빛을 수용할 만큼 강해져야" (3.4) 하는 것이다.
육화한 로고스는 "나는 진리다"(Ego sum veritas: 요한 14.6)라고 자기를 정의한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4,9-11)라는 말로서 일자unum 와 진리verum가 하나임을 공언한다.
철학은 이성이 일자를 향해서 가는 방법론적인 과정이다.
신이 곧 진리라면, 우리 가운데 있는 로고스가 곧 진리라면, 진리가 영혼 저 깊숙이에서 반짝이는 빛이라면, 구원이라는 것은 영에 이르는 영혼의 변용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최소한 개종후 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사상으로는 그에게 이성은 곧 신앙이요, 철학이 곧 종교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지옥 또는 멸망을 정의하는 그의 말에 이것이 잘 나타난다: "지옥에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전혀 없으며, 이는 이성의 사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참빛이 거기서는 이성을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ubi nulla potest esse commemoratio veritatis, quia nulla ratiocinatio: ideo nulla ratiocinatio, quia non eam perfundit lumen verum)"(52.101).
하지만 사랑의 우위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자의 한계를 벗어난다. 즉 진리를 추구하는 그의 인식 활동은 단독자가 단독자를 향하여 날아 오르는 도피(Enneades 6.9.11)가 아니라, 한 인격신을 향하여 부단히 뛰어 오르는 약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그리스도교와 신플라톤 사상은 단일한 건물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되어 남는다. 그의 인물과 사유에 일종의 동질적인 요소들connaturales로 삼투되어 있다.
영원한 '너'와의 만남, 인격적이자 비인격적이라 할 '너'와의 관계가 생긴다. 자아를 떠나 비인격적 절대 진리에 이르고 나면, 심리적 자아가 추구하던 '인격적 너'도 만나게 된다. 이제는 의인적인 무슨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영원한 빛으로 완전한 미로서 나타난다. 신-진리Deus veritas는 인격적 실재, 우리 자신의 참 실재, 우리보다 앞선 우리의 실재(Deus intimior intimo meo)가 되어 나타난다.
플라톤에게도 그리스도교에도 오성과 사랑은 전적으로 하나다. 오성의 본질은 파악comprensio이다. 파악하는com-prehendere 행위이다. 팔로 감싸는, 진리를 포옹하는 행위이다. 애정의 흐름이 파악된 대상에로 투사된다. 사랑이란 오성이 진리를 향하는, 형상을 향하는, 지성의 눈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향하는, 약동이다(5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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