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목사가 지닌 한계

 

목사들은 대부분 자신이 목회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걸 벤게메렌의 "현실정치"라고 했죠. 가진자들을 목회하면 가진자의 편이 되고 가난한 자를 목회하면 가난한 자의 편이 됩니다.

 

그러나 목사는 가진자의 편이나 가난한 자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성경의 메시지를 선지자적으로 세상에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벤게메렌이 말하는 현실정치의 성경의 버전은 예레미야를 들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까불지말고 바벨론에게 포로로 가라. 그게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민족주의를 표방하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유다와 그 선민된 백성을 버리실 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에 관점으로보면 예레미야는 마치 적국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며 매국노처럼 보입니다. 내부적 논리로는 아마도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이 더 인기가 있었을지 모르며 사실 그것은 그들이 듣고 싶어했던 소리였습니다. 벤게메렌은 다수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소리를 들어서 "현실정치"라고 했습니다.

 

오늘 목사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소리를 외치는 것이죠. 그것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란 단지 설득의 절차만은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세상의 목소리는 소수자 문제를 들어서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가 그릇되다고 하는 편입니다. 지금 자라는 세대의 젠더 교육에 그것이 가득 담겨 있기도 하죠. 그러나 소수자의 권익과 성경이 정죄하는 동성애는 별개로 다뤄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도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때로 매국적 상황을 부르기도 하며 때로 사회적 상식에 반하기도 하며 다수 대중의 눈높이와 맞지 않기도 합니다.

 

목사의 시각은 교회의 양무리를 목양하면서도 시선은 그들과 맞추면서도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수의 나이 드신 목사님들이 자기가 속한 그룹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낼 때, 가슴아프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젊은 목사들이 낫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속한 시대의 다수의 대중에 목소리에 휩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 되고 말테니까요.

 

목사는 자신의 속한 그룹의 한계를 넘어 성경에 그 시선을 고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