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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무엇이 인간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가?

개통령 강형욱의 "개는 훌륭하다"를 보면 개들은 여지 없이 변한다. 개들은 애착과 추동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포유류다. 주인과의 유대를 통해서 거기에 적응하는 존재다. 선지자 이사야도 이르기를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3)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한다. 이 말은 포유류의 행동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유비적으로 보여준다는 말이기도 하다.

 

강형욱씨가 개입되자마다 개들의 행동은 변한다. 이 말은 개들의 행동의 대부분이 주인의 행동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동시에 개들은 추동과 애착에 의해서만 자기 행동을 결정짓기 때문에 금방 변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주인의 변화, 혹은 가르치는 자의 변화된 행동이 곧 바로 개들의 행동 수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오랜 시간을 상담을 해도 잘 안 변하고 교회를 오랜 시간 다녀도 잘 안 변한다. 그래서 많은 목사와 성도들이 자조하기를 "과연 우리 삶에 성화는 있는가"라며 탄식하기도 한다. 그만큼 변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백일 것이다.

 

그럼 왜 인간은 그렇게 변하기 어려운가? 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인간이 지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추동, 곧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에 의해서만 의지 사용하거나 의사결정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도리어 이렇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욕구를 감추는 데 익숙하며 그렇게 감추려고 할 때, 그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지성을 사용한다. 그렇게 정당화된 지성은 하나의 신념체계로 자리잡고 신념 체계로 자리잡은 것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이 힘은 역경을 견디는 능력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이 변하기 어려운, 아니 변할 수 없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은유하는 바, 내가 가치 판단의 결정자가 된 행동이 빚은 결과다. 이솝 우화에 포도를 따먹기를 원했던 여우가 결국 먹을 수 없자. 그것은 신포도라며 자를 뜨는 것은 인간 행동에 대한 우화를 보여준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것을 방어기제라고 하지만 그런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인간 행동의 심대한 원천이 여기에 담겼다. 그리고 이 심대한 원천은 바로 인간의 죄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을 요청하는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을 요청하는 사랑의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욕구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시 신념을 동원하는 체계를 말한다.

 

강형욱의 개는 훌륭하다의 많은 문제 강아지들이 보이는 행동은 이런 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호자가 질서 잡힌 행동을 하게 될 때, 곧바로 수정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신념을 애착과 사랑의 관계보다 위에 두기 때문에 수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성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성화가 일어나는데 신학자들이 그리고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은혜의 수단의 사용이다. 그리고 그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데 나아가도록 요구하는 율법에 대한 이해가 걸려 있다. 신념의 체계는 강력해서 율법을 대면하여서 고소 당하기 전에는 그 체계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렇게 무너진 자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구걸하는 것이 은혜의 방편이다.

 

신념은 거의 죄와 등식을 이룬다. 강아지들에게 양육 조건이 바뀌었을 때 금방 행동 수정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는 추동은 있으나 신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추동을 신념으로 정당화했기 때문에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 행동의 더 근본적인 것은 신념이 아니라 추동이다. 그 추동이 목적하는 바가 하나님이냐 아니면 자기 욕망이냐가 결정한다. 그 추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랜 세월 쌓아온 여러 잡다한 신념 체계들이 인간 행동의 수정을 막는다.

 

변화는 그러므로 일종의 퇴행을 불러와야 가능하다. 율법의 고발로 자기붕괴가 일어나던지 인간 관계 속에서 더 근본적인 자기 내면의 추동의 힘을 볼 수 있어야 변화할 수 있다. 자기에게 더 솔직해져야 한다. 핵심감정 공동체는 자기와 이웃에 대해서 더 솔직해질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다. 안전한 상황 속에서 신뢰를 배울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