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언약을 부정하는 분들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진실한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라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부정하면서 이를 회중파의 신학으로 치부하는데요.
그럼 그들의 말대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과연 행위 언약을 부정할까요? 아래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15장입니다. 우선 논지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달아 둔 #해시태그 와 거기 매겨진 1-8의 번호를 따라서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1. 율법의 온전히 지켜질 때, 영생과 영원한 복을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뭘까요? 행위언약이란 용어를 안 썼지만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말하는 행위언약 조건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2. 행위언약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호도하는 것이 있는데 행위언약을 강조하는 개혁파 신학이 행위언약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지킬 수 없으니까 그 뒤에 은혜언약이 따라오고 창 3:15이하 성경 전체가 은혜언약이라고 말하는 것이 개혁파 신학입니다.
3. 행위언약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율법이 마치 파기된 것처럼 다루지만 보시다시피 이 신앙고백서는 율법의 완성이자 목표가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이는 1에서 말한 바 "그 명령이 온전히 지켜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이라는 사실을 함의합니다.
4. 2에서 말했던 바대로 율법을 우리가 온전히 지키지 못하니 행위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은혜언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5. 이 부분이 핵심인데 불완전한 순종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바라본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바로 그리스도가 행위언약의 성취자라는 말입니다. 그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함으로 우리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를 보시기에 우리에게 은혜언약인 것이죠.
6. 이것을 이신칭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요. 7번을 근거로 그렇습니다.
7. 우리 더러워진 행위를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로 덮는다. 여기서 우리 "행위"와 그리스도의 "의"가 대비를 이룹니다. 이것은 바로 행위=의가 등식을 이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에 순종하는 행위에....복종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외에 누구도 율법을 행할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결론 : 아쉽게도 그들의 주장과 다르게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행위언약과 그리스도가 능동적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에 순종하신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된다고 고백합니다. 회중파 신학이라고 주장하던 분들은 과연 이런 사실을 알면 이 고백서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아래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원문과 번역본입니다. 번역문과 원문은 이광호 목사 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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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율법의 완전성과 인간의 불완전성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가장 의롭고 공정할 뿐 아니라 거룩하고 완벽하며, 또한 1. #그_명령이_온전히_지켜질_때_인간에게_생명을_부여하며_영원한_복락을_가져다주는_것으로 받아들여 고백한다(레18:5; 갈3:12; 딤전1:8; 롬7:12; 시19:7-9; 19:11).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지극히 타락하여 연약하고 불완전하므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2. #율법을_완전하게_준행할_수_없다(신 5:29; 롬10:3). 비록 우리가 중생한 후라 할지라도,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며 하나님의 진리가 자기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따름이다(왕상8:46; 대하6:36; 잠20:9; 전7:22; 요일1:8). 그러므로 3. #율법의_목표이자_완성이신_그리스도 예수의 의와 속죄 안에서 그를 온전히 붙잡는 것이 우리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삶이다. 또한 우리가 비록 모든 면에서 4. #율법을_지키지_못함에도_불구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 위에 떨어지지 않게 되어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롬10:4; 갈3:13; 신27:26).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5. #그리스도_예수의_몸_안에서_우리를_바라보시며, 비록 6. #불완전한_순종이라_할지라도_그것을_완벽한_것인_양_간주하시고_받아주신다(빌2:15). 그리고 많은 허물과 함께 7. #더러워진_우리의_행위를_그의_아들의_의로써_덮어주신다(사64:6).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는 자유를 얻은 성도들이라고 해서 율법에 복종할 의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8. #율법이_요구하는_것들에_순종하는_행위에_대하여_과거와_현재와_미래에_복종하시는_그리스도_예수_이외에는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그 율법을 다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우리가 모든 일들을 행했을 때는 겸손하게 무릎 꿇고 솔직한 심정으로 무익한 종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눅17:10).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행위의 공로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넘치는 공적을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헛된 것을 자랑하는 것이 되며 저주받을 우상에 신뢰를 두는 것과 같다.
The Perfection of the Law and The Imperfection of Man
We confess and acknowledge that the law of God is most just, equal, holy, and perfect, commanding those things which, when perfectly done, can give life and bring man to eternal felicity(Lev. 18:5; Gal. 3:12; 1 Tim. 1:8; Rom. 7:12; Ps. 19:7-9; 19:11). But our nature is so corrupt, weak, and imperfect, that we are never able perfectly to fulfill the works of the law(Deut. 5:29; Rom. 10:3). Even after we are reborn, if we say that we have no sin, we deceive ourselves and the truth of God is not in us(1 Kings 8:46; 2 Chron. 6:36; Prov. 20:9; Eccl. 7:22; 1 John 1:8). It is therefore essential for us to lay hold on Christ Jesus, in his righteousness and his atonement, since he is the end and consummation of the Law and since it is by him that we are set at liberty so that the curse of God may not fall upon us, even though we do not fulfill the Law in all points(Rom. 10:4; Gal. 3:13; Deut. 27:26). / For as God the Father beholds us in the body of his Son Christ Jesus, he accepts our imperfect obedience as if it were perfect(Phil 2:15), and covers our works, which are defiled with many stains(Isa. 64:6), with the justice of his Son.
We do not mean that we are so set at liberty that we owe no obedience to the law – for we have already acknowledged its place - but we affirm that no man on earth, with the sole exception of Christ Jesus, has given, gives, or shall give in action that obedience to the Law which the Law requires. When we have done all things we must fall down and unfeignedly confess that we are unprofitable servants(Luke 17:10). Therefore, whoever boasts of the merits of his own works or puts his trust in works of supererogation, boasts of what does not exist, and puts his trust in damnable idola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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