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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사랑과 윤리

상담을 하다보면 누군가 타인의 마음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세계 속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져요. 동일언어 동일문화 속에서도 바벨탑이 상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비칩니다.

 

설혹 어떤 팬덤이 만들어져도 그것마저도 자기 욕망의 투영같다고 느꼈어요. 마치 고대 신화적 세계 속에서 사람들이 우상에게 자기욕망을 투영하면서 종교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서로를 묶어내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기독교 신앙과 공동체는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이상에 가깝죠. 그걸 현실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나마 우리가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사랑이란 게 인간의 육체와 DNA 속에 일부 남아 있다는 것이죠. 원래 창조의 원형과는 많이 다른 뒤틀린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서로에게 가닿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집단상담을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개인상담을 하면서도 만나죠 하지만 As you are 있는 게 불편한 진실일 수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주하지 못하거나 거기까지 이르기도 전에 여러 암초들을 만나 좌초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깊은 동기 속에는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욕구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욕구 위에 켜켜이 쌓인 지질학적인 감정의 층위들과 거기에 이름붙여 둔 신념이란 체계 때문에 자연으로서 자기를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죠. 기실 이것이 인간의 부패의 본질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부패는 부패한 본성 자체와 맞물려 있지 않고 도덕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인간의 본능과 기본적 욕구들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도덕적 체계를 통해 정당화됩니다. 그래서 그 본연의 자질을 왜곡하는 것을 수정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이죠. 이것이 자신에게로 기울어진 부패의 본질입니다.

 

이 부분을 더 잘 이해하려면 개통령 강형욱 씨가 했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나 "개는 훌륭하다"라는 프로그램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개들의 문제들은 대부분 주인의 행동과 태도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행동이 수정되면 개들의 문제 행동은 곧 사라집니다. 개들이 사람과 함께 살면서 부여되었던 개들을 바라보던 도덕적 시선은 태도 변화로 곧바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죠. 이게 가능한 이유는 개들에게는 도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단지 본능이나 욕구를 따라 움직이지만 않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도덕적 체계를 통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때론 신화가 동원되기도 하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정당화를 이루고 나면 자기 안의 본능과 자연의 힘을 간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의 위협이 제거되었음에도 개들이 변하는 것처럼 사람은 변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것을 루터는 노예 의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담이 타락하는 사건 자체도 그가 부여받은 도덕적 금령에서부터 타락이 시작되고 그 금령을 어긴 아담이 취한 자기 방식의 정당화가 문제를 수정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타락은 도덕과의 결부된 불가분의 관계 속에 놓여 있습니다. 부패한 본성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본성을 바라보는 이런 시선 자체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듭니다. 이미 여기 도덕적 평가가 내재해 있어서 그것을 자유롭게 내어놓을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복음은 바로 이렇게 도덕이 결부되어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내어 놓을 수 업는 우리 자신을 대신하는 희생양이신 그리스도와 그가 우리 대신에 행하신 일들을 의로 선포하신 하나님의 큰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진정으로 우리 심장에서 복음이려면 우리 본성에 부여된 도덕적 체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사실상 자유하기 어렵습니다. 복음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사무엘 러더포드가 율법을 통한 회개와 통회가 그 출발점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인 것이죠. 아담의 최초의 상태를 성경이 묘사할 때 그가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도덕과 결부되지 않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상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저는 지금 반율법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죠. 율법이 우리 본능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그 본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적 속에서 우리 무장이 소용없으며 우리 무능력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 대안이자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소개받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분명 율법 너머의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새창조가 우리를 그것을 담아내는 존재로 만들어가는 것이죠. 도덕을 넘어 있으나 도덕적 존재가 그 지향점인 것입니다.

 

콜버그라는 학자가 도덕발달이론에서 제시하는 3수준의 6단계의 발달이 이 지점을 잘 보여줍니다. 1수준은 인습 이전 수준(Pre-conventional level)은 주로 처벌에 의한 복종의 단계와 자기 욕구 충족이 도덕판단의 기준이 되는 단계로 나뉘어 있습니다. 2수준은 인습수준(Conventional level)으로 타자와의 관계, 기대, 동조 등이 도덕 행동의 이유가 되는 단계와 사회적 체제의 유지를 위한 도덕행동으로 발달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1과 2수준이 바로 율법을 통해 통상 사람들이 요구받는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3수준은 인습이후 수준(Post-conventional level)으로 사회계약에 의한 공공윤리로 발달하게 되는데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지향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마지막 단계는 성경이 말하는 우리 심비에 새긴 사랑의 계명으로서 보편 윤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계명이자 율법의 정점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윤리가 실현된 인간은 우리 내면에 체화된 본능과 처벌로 묶인 도덕 체계를 지닌 채로는 가서 닿을 수없습니다. 우리 안에 자연적 본성과 그것을 얽매는 습관으로서 처벌에 기인한 도덕을 걷어내지 않고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걷어내기 위해서 개입된 것이 율법입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를 정죄함으로 우리를 막다른 곳으로 모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사랑이 우리 가슴에 닿을 때, 이 사랑이 우리로 율법의 요구에 실질적으로 부응하는 복음적 존재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이 우리 사이의 바벨탑을 허물고 오순절의 소통의 역사를 가져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