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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애로스와 추동

플라톤의 향연에도 추동에 관한 성찰이 가득하다. <향연>은 비극작가 아가톤의 경연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아가톤의 집에서 잔치를 하면서,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모인 사람들이 에로스에 대해 말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이 사랑은 주로 갈망이라 표현되었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다.

 

소크라테스와 그 시대는 동성애가 만연했던 시대다. 특히 이 시대의 동성애는 주로 나이 많은 자에 의한 소년에 대한 사랑, 이를테면 소아성애같은 류이다. 엄밀하게 아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구도로 이뤄져 있다. 청년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유혹한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아름다움 자체를 향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플라톤의 사랑을 플래토닉 러브라고 해서 육체적 사랑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플래토닉 러브는 원래 애로스로부터 시작한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에로스는 ‘사랑받는 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사랑하는 이는 자기의 결여를 채우기를 원하는데 이것이 바로 추동이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사람의 본질을 심리성애로 해석했다. 애로스와 타나토스, 곧 사랑과 미움으로 해석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플라톤의 향연까지 소급되며 이는 어거스틴 신학과도 맞닿아 있다. 어거스틴은 리비도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은 몸과 영혼의 추동을 지닌 존재다. 그러나 이 추동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면서 왜곡되고 만다. 참 지식과 의와 거룩은 우리 몸과 영혼의 추동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향하게 한다. 애로스로부터 아가페를 지향하는 것이다. 애로스를 잃어버린 자는 아가페도 잃어버리고 만다.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함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