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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목회학

목사의 권위, 그 허상과 실상

목사의 권위, 그 허상과 실상
최낙재 목사(강변교회)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年少)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1-13). 
이는 바울 사도가 젊은 전파자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교회에서 어떻게 자기 직무를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 가르치신 말씀이다. 그 가르치심 가운데 이 직무 수행자의 권위를 보호하고 지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말씀을 맡은 자는 그의 가르치는 일이나 생활 태도에 있어서 모범스러워야 하고 나이에 관계없이 업신여김을 받지 말 것이며, 듣는 자들이 가르침을 잘 받고 순종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나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냈으며(고후 4:2), 범사에 참았다(고전 9:12). 그것은 복음이 권위 있게 달려 나가고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의 말과 행실이 믿음직하고 존경스러우면 그의 입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만하게 들려 권위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 말씀에 마땅히 따라야 할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의 권위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함에 긴요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구원을 얻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문제는 말씀을 맡은 자의 말과 행실이 맡은 바 신성한 직무에 미치지 못하고 현격한 차이를 나타낼 때 생긴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항상 잘못과 미치지 못함이 있다. 그러나 이 점이 이 신성한 직무를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직무를 맡기시는 주께서 친히 은혜를 베푸시어 채워 주시므로 맡은 자가 자기의 부족과 불급(不及)을 깨닫고 주의 은혜와 긍휼을 구할 것이요, 구하여 얻어서 직무를 수행할 일이다. 바울 사도 자신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자를 위하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기도하였다(딤전 1:2). 
문제는 자기 부족을 모르고 주께 의지하지 아니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결하고 능력 있게 나타내지 못하고 사람의 지혜를 섞어서 전하며 자기의 말과 행실을 하나님의 말씀에 표준에 맞게 쳐 복종시키지 못하는 방종함에 있다. 이것이 누적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를 잃고 어둠이 교회를 뒤덮게 된다. 
16세기 종교 개혁은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성신의 권위를 모든 종교 회의나 사람의 교훈이나 교황의 선언 위에 두는 믿음과 겸손에서 시작되었다. 유럽 천지를 호령하던 교황의 권위로 하여금 제 분수(分數)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있게 되었을 때 진리의 빛이 사람들에게 비취기 시작했고 생명수가 골고루 흘러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일시적인 개혁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한 시대만으로 그칠 일도 아님을 본다. 오늘날 16세기 개혁자들의 후예로 선 개신 교회에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양상이 드러남을 볼 때에 -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못 찾아 방황하고 그 음성을 분별할 수 없어 맹신(盲信)하고, 그 틈을 타고 목사의 권위, 그 허상이 난무함을 볼 때 - 로마 가톨릭 교회가 타락하기로 작정하고 타락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노회장, 총회장과 더불어 목사는 교직 계급의 사닥다리 중 한 계단으로 인정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부-주교-대주교-추기경-교황의 긴 사닥다리에는 견주지 못해도 그 모습을 닮아 가면 목자장이 양 무리 가운데 세워 주신 목자상은 벌써 퇴색한다. 
그러나, 비극은 목자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비극은 오히려 목사가 설 자리 없는 교회, 목자장이 세워 주신 목자가 없는 양 무리에게 있다. 하나님의 은혜, 권위의 음성, 높은 위(位)에 계시나 낮은 자를 하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이 모두가 목사와 함께 멀리 떠나고 만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 전달에 목사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친히 백성의 모든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체질을 아시사 모세를 인도자로 주셨고 예수께서는 친히 교회의 주이시고 교회를 채우시는 분이시나 교회를 위하여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자와 교사를 선물로 주셔서 채우셨다(엡 4:12).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배려는 모세를 주신 과정에서 생생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 산 위에서 불과 구름과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열 가지 명령을 말씀하실 때, 이스라엘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불 가운데서 나오는 큰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고 말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과 대책은 무엇이었던가?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 즉 그 말이 다 옳도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서 나를 경와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너는 여기 내 곁에 섰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로 이를 행하게 하라”(신 5:28-31). 이 말씀대로 모세를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말씀하실 수 없어서도 아니요, 그렇게 하시기를 꺼려서도 아니요, 오직 백성들의 연약함을 돌아보시고 그들의 체질에 적응하시고자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맡은 자는, 오직 맡은 말씀을 충성되게 전함을 자기의 할 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므로 백성들이 그 권위에 드리는 순종은 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누리려는 권위는 다 허상이요, 허세다. 이 일이 중대한 만큼 빗나감에 대한 경고도 엄중하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신 18:20).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겸손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모양만을 보고 사람의 말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과 지혜를 저버림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하여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별함이 없이 맹신함은 사람의 종이 되는 첩경(捷徑)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