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삼락(牧會三樂)
노승수 목사
중국의 고전 중 사서에 해당하는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에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글귀가 나옵니다. 여기 전문을 한 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군자에게는 세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의 왕이 되는 것은 그것에 포함되지 않는다.
(君子有三樂 而王天下 不與存焉)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움이고,
(父母具存 兄弟無故 一樂也)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번째 즐거움이고,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번째 즐거움이다.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이 글귀를 접하고 마음에 목사의 목회에도 세가지 낙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맹자는 글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온화함과 패기 그리고 자신감이 넘치며 당당한 성품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로 비유하자면 디오게네스 같다고 할까요?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너무 유명하지 않습니까? 헬라제국의 황제인 알렉산더가 그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디오게네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통속에서 거지 행세를 하고 있던 디오게네스는 "옆으로 한 발짝만 비켜주십시오. 햇빛을 가렸잖습니까?"라는 말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는 황제 앞에서도 당당하고 기개을 잃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줄 알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가진 것이라곤 기거하는 통 하나, 외투 한 벌, 그리고 주발 한 개를 가지고 있었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샘물을 먹는 어린아이와 맞딱드렸는데, 맨손으로 샘물을 떠먹는 아이와 한참을 마주보더니, "내가 너무 많이 가졌음을 이 아이가 가르쳐주는구나!"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발을 박살을 내었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에겐 주발하나도 많은 것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 것이지요. 정말 이런게 자기부인이 아닐까요?
맹자도 비슷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맹자요의'에서 맹자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맹자께서 일생동안 관찰한 것이 도심(道心)을 보존하느냐 아니면 잃어버리느냐에 있었다. 욕심이 적으면 도심도 잃는 것이 적고, 욕심이 많으면 도심을 잃는 것 역시 많다. 군자가 엄하게 살펴야 하는 일은 오직 마음을 보존하느냐 잃어버리느냐 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군자삼락을 설명하면서 왕이 되는 것은 들어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고, 또한 군자 일락이 부모형제의 무고이니 사랑과 온화함, 그리고 욕심을 내지 않고 '청렴'한 것이 그의 성품이자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디오네게스가 알렉산더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듯이, [맹자]의 양혜왕편을 보면, 맹자가 양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혜왕이 '어떤 이익을 들려주려느냐?'고 묻자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옛 사람들의 '인의'를 보고있노라면 격세지감이랄까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특히 목회자의 삶이 이 사람들만 못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담임목사는 부교역자를 뽑을 때, 그의 인의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뭘 잘하는지?를 묻지요. 그나마 이것이라도 제대로 물으면 좋으련만, 그냥 부리기 좋은 사람을 뽑으려 합니다. 목회의 동역자가 아닌 것이죠,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성경에나 나오는 관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이후 기능주의적 사고에 교회도 물들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탐욕스럽기까지 합니다. 교회는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것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흔히 기복주의라고 하지요. 왜 그럴까요? 생각해보면 그것은 간단한 이치입니다. 그게 목사의 즐거움이기 때문이겠지요? 이재철 목사님이 장신대 수련회에서 했던 '비전의 사람'이란 설교에 보면, 고등종교의 특징을 '자기 부인'을 하는 종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결여되거나 사라지면 타락하고 세속화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제가 볼 땐 이런 게 세속화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참으로 목사의 즐거움일 수 있을까요? 저는 '군자삼락'이란 글귀를 보면서 목회자의 '목회삼락'은 진정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움이고" 라고 했는데, 목회의 관점에서 재해석을 해보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우리 삶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교회의 여러성도들이 이러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움이지 않겠습니까? 유교의 정신은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나라에는 '충'을 다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나라로 옮기면 다르겠습니까? 목사에게 즐거움이 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 그의 자녀로서 효를 다하는 것이어야겠지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인 성도들이 이러한 하나님과의 생생한 살아있는 관계 속에 들어가 있어서 그들의 영혼이 무고한 것이 목사의 첫째 즐거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란 그들의 삶의 여러 정황을 살피는 일도 중요하지만 첫째는 그들의 영혼이 참으로 구원을 받은 영혼인지를 목회와 삶을 통해서 날마다 확인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의 심방이란 집에 가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사는지 못사는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 심'에 '방문할 방'을 써서 그들의 영혼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혼이 무고한 것을 목회의 즐거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군자일락이 부모형제의 무고함이듯이 목회의 제일락도 성도의 영혼의 안위이어야 합니다. 목사는 첫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둘째 그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의 양떼를 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양무리'를 치는 일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목사일락은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양떼를 돌보아 그 영혼이 무고하도록 하는 것이 목사의 제일락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맹자도 비슷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맹자요의'에서 맹자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맹자께서 일생동안 관찰한 것이 도심(道心)을 보존하느냐 아니면 잃어버리느냐에 있었다. 욕심이 적으면 도심도 잃는 것이 적고, 욕심이 많으면 도심을 잃는 것 역시 많다. 군자가 엄하게 살펴야 하는 일은 오직 마음을 보존하느냐 잃어버리느냐 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군자삼락을 설명하면서 왕이 되는 것은 들어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고, 또한 군자 일락이 부모형제의 무고이니 사랑과 온화함, 그리고 욕심을 내지 않고 '청렴'한 것이 그의 성품이자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디오네게스가 알렉산더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듯이, [맹자]의 양혜왕편을 보면, 맹자가 양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혜왕이 '어떤 이익을 들려주려느냐?'고 묻자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옛 사람들의 '인의'를 보고있노라면 격세지감이랄까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특히 목회자의 삶이 이 사람들만 못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담임목사는 부교역자를 뽑을 때, 그의 인의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뭘 잘하는지?를 묻지요. 그나마 이것이라도 제대로 물으면 좋으련만, 그냥 부리기 좋은 사람을 뽑으려 합니다. 목회의 동역자가 아닌 것이죠,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성경에나 나오는 관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이후 기능주의적 사고에 교회도 물들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탐욕스럽기까지 합니다. 교회는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것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흔히 기복주의라고 하지요. 왜 그럴까요? 생각해보면 그것은 간단한 이치입니다. 그게 목사의 즐거움이기 때문이겠지요? 이재철 목사님이 장신대 수련회에서 했던 '비전의 사람'이란 설교에 보면, 고등종교의 특징을 '자기 부인'을 하는 종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결여되거나 사라지면 타락하고 세속화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제가 볼 땐 이런 게 세속화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참으로 목사의 즐거움일 수 있을까요? 저는 '군자삼락'이란 글귀를 보면서 목회자의 '목회삼락'은 진정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움이고" 라고 했는데, 목회의 관점에서 재해석을 해보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우리 삶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교회의 여러성도들이 이러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움이지 않겠습니까? 유교의 정신은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나라에는 '충'을 다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나라로 옮기면 다르겠습니까? 목사에게 즐거움이 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 그의 자녀로서 효를 다하는 것이어야겠지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인 성도들이 이러한 하나님과의 생생한 살아있는 관계 속에 들어가 있어서 그들의 영혼이 무고한 것이 목사의 첫째 즐거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란 그들의 삶의 여러 정황을 살피는 일도 중요하지만 첫째는 그들의 영혼이 참으로 구원을 받은 영혼인지를 목회와 삶을 통해서 날마다 확인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의 심방이란 집에 가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사는지 못사는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 심'에 '방문할 방'을 써서 그들의 영혼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혼이 무고한 것을 목회의 즐거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군자일락이 부모형제의 무고함이듯이 목회의 제일락도 성도의 영혼의 안위이어야 합니다. 목사는 첫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둘째 그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의 양떼를 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양무리'를 치는 일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목사일락은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양떼를 돌보아 그 영혼이 무고하도록 하는 것이 목사의 제일락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번째 즐거움이고"라고 했습니다. 디오게네스처럼 알렉산더 앞에서도 당당하며 작은 아이 앞에서도 자신을 깨달으며 맹자처럼 한나라의 왕의 요구에도 '인과 의'를 말할 수 있는 사람, 즉, 목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알아 참되게 그것을 붙들고 그렇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 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신학교 3년 동안 저희 학년을 지도해주신 교수님은 조병수 교수님이십니다.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문막에 있는 오크벨리라는 곳으로 학년 리트릿을 갔었더랬습니다. 그 때 조목사님께서 목사는 디오게네스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목사는 명예를 먹고 사는 사람이다. 목사의 명예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 말씀을 사수하는 것을 생명으로 여겨라. 너무나 결연했습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지요. '미치지 않고는 다다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 때는 참으로 비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사수함에는 이런 비장함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제와 나이를 더 먹고 생각해보니, 비장함 만으로는 뭔가 2% 정도 모자람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비장함으론 평생을 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비장함이란 전장에 나가는 장수나 가질 법한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비장함은 나이가 들면 무력해지는 것 같습니다. '노인'과 '비장함'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지요. 나이가 들면 달관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때에도 모세처럼 눈이 흐리지 않으려면 모세가 날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향기를 그의 삶에서 품어내었던 것처럼 이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그 말씀을 받는 일을 생명과 명예로 아는 일은 비장함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어야 한다는 것이 제 깨달음입니다. "능력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하지 못한다"라고 했지요. 목사의 생애에 이것이 즐거움이 아니라면 반드시 변심하게 되는 싯점이 오고야 맙니다. 사울은 첫 겸손함을 잃고 변심을 했습니다. 솔로몬은 첫 순수함을 잃고 반심이 되어 우상숭배를 하고 맙니다. 다윗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전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수많은 사람 중에 그를 일컫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신실하고 그 말씀을 사람 앞에서 전함에 있어서 타협함이 없는 삶, 그것이 우러러, 그리고 구부려 부끄러움을 없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목사는 이것을 목회의 즐거움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의 제 이락입니다.
셋째,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번째 즐거움이다"라고 했는데, 목사는 당연 교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군자의 삼락에 제 삼락을 보니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걸 목회의 삼락으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선생으로서 최대의 행운은 좋은 학생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에서 좋은 학생이란 누구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 택정함을 입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생한 자들이지요. 그리고 중생할 자들입니다. 목사가 진리의 말씀을 전하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떡을 먹고 배불렀던 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 예수님을 좇아 왔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는 복음의 정수를 말씀하시자, 그들이 듣고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목사는 불신자들이 교회에서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그 때 예수께서 물으셨지요.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그렇습니다. 군자 삼락에서 천하의 영재란 목사삼락에서는 바로 복음의 진리를 들어 깨닫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참 많은 교회를 접했습니다. 제가 유별나서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저런 교회의 모습을 참 많이 본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목사가 말씀 전하는 일은 등한히하고 성도들 뒤꽁무니를 좇아 다니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목회였습니다. 연초면 교회 봉사 부서 조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주보에 나가면 여러 통의 전화가 날라옵니다. 여기로 넣어달라 저렇게 해달라, 그러면 목사가 어쩔줄 모르고 거기에 다 맞춰주는 목회자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분은 사랑이 많고 온유해서 그렇다고 하는데요.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은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지 그냥 부드러운 처세를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토요일은 목사가 말씀 준비에 가장 긴장되어 잇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 날 서울서 남도의 해안까지 새벽같이 심방을 갑니다. 무슨 상이 난 것도 가정에 큰 경사가 생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마치 갓난쟁이를 얼르는 듯한 목회자의 태도는 결코 성도들의 영혼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목사삼락의 제삼락은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알아듣는 참된 하나님 나라의 성도를 얻어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성도를 가슴에 품지 못하는 속좁은 목사를 군자라 할 수는 없겠지요? 응당 그가 주님께 부름받아 주님의 양떼를 치는 자라면 그 양떼를 목숨처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말씀을 전하여 가르치는 일을 즐기는 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내 양떼를 먹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셔도 떠나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결정체이신 그분이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청함은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고 말입니다. 목사의 메시지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저는 '청함을 받은 자'가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맹자가 군자삼락에서 말하는 '천하영재'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구분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목사가 성경의 말씀으로 그 복음의 정수를 전하게 되면 자연히 갈라지는 현상이겠지요. 오히려 성경을 가지고 타협하고 복음을 흐리게 될 때, 양무리 중에 이리떼가 많아지겠지요. 목사는 지상에 참된 교회를 세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응당 주님이 '맡기신 양떼'를 목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냐 복음의 정수를 가감없이 바르게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것이 목사의 제 삼락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즐거움은 역시 목사의 목회삼락의 제 삼락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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