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 정치의 이해
노승수 목사
복음주의 진영을 포함은 범 개신교 진영에서 신학의 꽃이라면 역시 칼빈의 개혁신학이라 할 수 있다. 지상에 완전한 형태의 '원형신학(Theologia archetypa)'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신학은 천국을 향한 '순례자의 신학(theologia viatorum)'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유한자는 무한자를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finitum non capax infiniti). 그래서 순례자인 우리로서 우리가 가진 신학의 자료로서 계시는 '오직 성경' 밖에 없다. 우리의 신학은 적어도 세가지 점에서 제한을 받는다. 인간이라는 그 자체로서 제한,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한 본성을 유전함으로 인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성으로 인한 제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첫 번째 언급한 인간 존재의 제한은 타락하기 전에 아담도 가졌던 것으로 완전한 창조물로서 죄성을 가지지 않았으되 유한자임으로서 무한자이신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여전히 제한이 존재했다. 하물며 타락한 이후이겠는가? 타락하기 이전에 자연으로부터 가졌던 아담의 모든 영감은 죄로 인해 자연으로부터 영적 메시지를 읽을 수 없는 영적 문맹이 된 것이다. 물론 핑계할 수 없을만큼은 여전히 자연속에서 인류는 신의 흔적을 발견하게 하셨다(롬 1:20). 그러나 그것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턱없이 불충분하고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불쌍히 여겨서 우리에게 특별한 형태의 '계시'를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이다.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다. 인간의 죄성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궐이 나게 했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게 되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기에 충분한 정도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관한 지식을 계시해두셨다. 그리고 이 진리를 교회로 하여금 파수하는 사명을 주셨다. 그것이 2000년간 교회가 작성해온 신앙고백과 신조들이다. 시대마다 진리를 왜곡하는 이단의 무리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고 사람들이 구원에서 멀어져 가도록 미혹할 때마다 교회는 여러 신조들을 작성하여서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믿는 바들을 정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교리'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아다나시우스 신조, 칼케돈 신조가 초대 교회의 대표적 신조라 할 수 있었다. 칼빈의 종교개혁 당시에 칼빈은 두 가지 싸움을 해야 했다. 한 가지는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를 위에 두려는 로마 카톨릭과의 싸움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진리를 파수하는 '기구'(Institution)로서 교회를 무력화를 하려는 제세례파의 도전이었다. 전자는 성경에 없는 것을 진리의 이름으로 만들어 내었고 후자는 카톨릭의 이런 횡포에 반발하여 개혁이란 이름으로 진리를 파수할 수 있는 주님이 세우신 기구로서의 교회를 무력화하려 하였다. 이들은 교리 자체를 부정하고 '성경'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얼핏 보면 매우 개혁적인 것 같지만 진리를 파수할 수 있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허무는 무지에 찬 행동이었다.
교회 정치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이렇게 앞에 장황하게 신학으로부터 이야기를 늘어 놓는 것은 장로교회에서 있어서 '교회 정치'는 신학과 무관한 '정치'가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나오는 원리이며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진리를 파수하는 기구로서 교회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장로교회 헌법에 보면, 교리 바로 다음에 이 '교회 정치'가 위치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세속정치로 이해한다. 그러나 장로교회에 있어서 '교회 정치'는 세속 정치의 그런 종류의 정치나, 흔히 '정치 목사'라고 할 때 그런 종류의 정치가 아니라 바로 진리를 파수하는 체제로서의 '정치' 이며 이 진리 파수의 체제는 다름이 아니라 '직분론'이다. 교회 정치의 구조를 보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1장은 원리, 2장은 교회 3장은 교인 5-13장은 직분에 대해, 14-22장은 치리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교회의 정치라는 것이 곧 교회가 어떠해야 하며 그것이 간직한 진리를 어떻게 파수하느냐? 하는 구조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사와 교사와 장로와 집사'라는 제도를 통해서 교회의 진리를 파수하는 것이 칼빈이 이야기한 교회론의 근간이기도 하다. 칼빈은 교회를 단순히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보지 않고 '제도'로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제도가 바로 직분론을 의미하고 이 직분에 의해 교회가 믿는 바 진리와 신앙고백을 파수하기 때문에 이를 교회 정치라고 하는 것이다. 정치의 근간이 교회의 직분론이고 직분론의 끝 부분에 치리회가 나온다. 이 치리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치리란 말 그대로 다스리는 것이다. 교회는 누가 다스리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참된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공동체이다. 즉,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서 진리를 파수하는 실제적 행동이 바로 권징인 셈이다. 그래서 교회 정치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 권징 조례이다. 권징이란 '권면과 징계'의 준말로 우리는 권징을 자꾸 징계의 측면에서만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권징이란 진리의 말씀이 성도와 교회를 지배하도록 하는 지배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치리회를 통해 어떻게 교회가 진리를 사수하며 성결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대강이 '권징'이다. 이 권징은 교회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예배의 순수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교회 정치의 직원편을 보면,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공히 '평범한' 항존 직원이라고 했다. 이 셋은 수직적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구조이며 각기 직임과 역할이 다를 교회의 공통적인 직원이다. 따라서 목사를 성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장로교회의 신학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74년 범복음주의권의 신앙고백인 '로잔선언'의 핵심인 '성직주의 배격'과도 궤를 같이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장로, 집사에게 있지 않다. 강북의 어느 목사님의 주장처럼 그들을 호칭으로 부르면, 속된 말로 '종이 호랑이'로 만들고 그나마 남아있는 모든 직임을 모두 목사가 가지고 오게 된다. 사실 이게 한국교회의 부패의 원인이 아니던가? 더 중요한 것은 장로교회가 진리 곧 성경이 말하는 참된 진리를 교리로서 작성하고 그것을 신앙고백하는 것을 파수하는 체제로서의 정치와 그 정치의 핵심에 이 '직분론'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신학적 연계성에 대한 무지가 목회 현장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어떤 문제들에대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정을 하게 만든다. 다른 한가지 오해는 '항존'에 대한 오해다. 항존직이라 하니 한 번 되면 평생 장로 목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기서 항존이란 교회가 지상에 있는 동안 항상 존재하는 직분이라는 뜻이지 한 사람이 한 번 하면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과 다르다. 교회 정치 안에서는 목사의 사직에 대한 규정이 있다. 장로와 집사의 면직에 대한 규정도 있다. 즉 항존이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구호처럼 그렇게 직분을 수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개혁'의 본질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거룩한 보편적 교회 곧 교회가 고백해 온 진리의 말씀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실 세속정치에도 이런 요소가 남아 있다. 정치의 핵심이 무엇인가? 국회의원을 뽑고 대통령을 뽑는 일이다. 쉽게 말해 직분을 세우는 일이다. 자신이 가진 정치적 정책적 소신에 따라 그에 맞는 정당과 정책과 사람에게 투표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15년간 이 투표가 한국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학습했다. 유시민전 장관이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는 후불제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처럼 교회는 최종적 의결기구인 공동의회를 통해서 2/3 이상의 지지를 얻는 사람들을 직분자로 세움으로 이들을 통해서 진리를 파수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장로교회에서 '노회'와 '개 교회'에 구분이 존재한다. 어떤 분들은 치리상 노회와 교회의 당회는 수평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진리의 파수 곧 성경의 해석과 관련된 문제 즉 교리의 수립 및 개정은 개 교회에 그 권한이 있지 않다. 그럼으로 교회의 두 가지 권세 곧 성경의 해석권과 치리권에 있어서 노회와 당회는 결코 수평적이지 않다. 노회와 총회로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서 작성한 신앙고백서가 바로 지금 장로교회가 받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또한 장로교회에서 목사의 소속은 '노회'이고 장로와 집사의 소속은 '개 교회'라는 것도 이런 진리 파수의 체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먼저 개 교회가 혹여 다른 이단적 미혹에 빠지게 될 때 노회는 즉각적으로 노회를 통해 바른 진리를 파수한다. 동시에 개 교회 역시 미혹의 가르침을 베푸는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계 2:2)을 개 교회의 직분자인 장로와 집사들이 교회의 직원으로서 이 진리를 파수하는 것이다.
물론 이 진리의 파수에 핵심에는 예배가 있다. 그래서 고신의 유해무 교수는 교리 다음에 '예배 모범' 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모든 권징이 시행되는 곳이며 성례가 시행되는 곳이며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며 모든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회인 예배를 성결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신앙 고백이 교리요 이 교리를 수호하는 체제가 '교회 정치'이며 이 모든 것은 바로 참된 예배 곧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바르게 드리기 위한 교회의 순결을 위지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처럼 장로교회의 여러 제도들은 서로 신학적으로 맞물린, 그것도 정치하게 맞물린 톱니바퀴와 같다. 그리고 이런 제도에 손을 대려면 적어도 칼빈의 어깨를 밟고 올라설 정도로 신학적인 성숙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학문의 발전과정을 보면 이것은 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이제 갓 입문한 과학도가 새로운 과학이론을 주창할 수도 있지만 그런 주창 역시 기본적 과학 이해라는 사전의 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게 제대로 배우지 않고 그들이 남긴 유산이 어떤 의미인지 조차 모르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교리'의 진리의 파수의 체제인 '교회 정치' 나 '권징 조례'도 한 번 읽고 숙고 해보지 않은 채 단순히 현상만을 가지고 비판과 수정을 가하려는 시도가 온당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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