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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진실 왜곡

진실 왜곡

노승수 목사

진실은 항상 부풀리고 싶은 것에 의해서 뒤틀리고 감추고 싶은 것에 의해서 왜곡된다. 교통사고 현장에 가보면 잘못했다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정직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수와 과실을 감추며 자신이 피해자인양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서 우기기 바쁘다. 사실이 '1'과 '2'가 있는데, '1' 만을 말하면 그걸 진실이라고 할까? 그것은 거짓말이다. 왜? 사람들은 대체로 모든 것을 거짓말로 하지 않는다. 그런 새빨간 거짓말에 넘어가는 사람은 없다. 왜 사실 '2'를 감출까? 어떤 모종의 사실을..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양심이 그 사실을 당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은닉은 대체로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있다. 청문회 증인들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그가 진실을 말한 것일까? 우리는 왜 이들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에 분노할까? 우리가 알고 싶은 '2'를 은닉하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죄악은 거짓이고,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청문회는 '청문회'라는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저 통과의례일 뿐 정직하지 못한 것이 흠이 되지 않는 사회이다. 
오늘 뉴스에 보니 2010년 월드컵이 있는 남아공에서는 절도를 거의 죄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심지어는 공항의 직원들조차 승객들의 화물을 뒤진다고 한다. 어느 사회에 이런 고질적인 악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거짓이란 고질적인 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청문회 조사에도 국정조사에도 검찰의 수사에도 우리나라의 각종 스캔들은 의혹만 커지지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을 '1'이라고 하고 나의 과오나 과실을 '2'라고 해보자 보통 내가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는 '1'은 부풀려진다. 그리고 나에게 불리한 '2'는 감추게 된다. 자신은 감추고 있지만 그것은 이것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이미 그 양심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감추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잘했다고 정당하다고 믿는 카드 '1' 만 내밀게 된다. 이런 일들에 의해 실체적 진실이 뒤틀리고 왜곡되어 한 번 맺힌 갈등은 풀어지지 않는다. 
진실은 말하는 이가 아니라 듣는 이에 의해서 뒤틀리기도 한다. 미하엘 셸레「소문, 나를 파괴하는 정체불명의 괴물」이란 책을 보면, 거짓 소문에 맞서 이기기 위해서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공식 부인만 가지고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소문 때문에 갖게 된 ‘감정’까지 제거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게 진실 왜곡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진실은 말하는 사람에 의해서도 왜곡되지만 듣는 사람의 감정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왜곡이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조두순 사건이 핫 이슈가 되었을 때, 조두순이 목사라는 소문이 전국을 휩쓸었다. 왜 이 소문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심지어 중앙 일간지인<매일 경제>신문에까지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도가 되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의 앙금이 해결되지 않으면 좀처럼 소문은 수그러들지 않고, 그럼으로 진실이 왜곡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믿기를 힘들어 하면서 이런 일들이 나면 너무나 쉽게 믿어버리는 것은 그 일과 내 마음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거짓은 100%의 새빨간 거짓말보다 2%를 살짝 바꾼 것이 더 치명적이다. 고무신에 나이키 엠블럼을 그려 넣는 것과 진짜처럼 만들어 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치명적이겠는가? 고무신에 나이키 엠블럼을 그려 넣는 것은 범죄가 되지 않지만 가짜 나이키를 만드는 것은 범죄가 성립한다. 사기꾼이 참말을 많이 할까? 거짓말을 많이 할까? 참말을 많이 한다. 왜? 그래야 신뢰를 얻고 신뢰를 얻어야 사기를 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거짓의 속성은 이와 같다. 진실의 왜곡은 바로 이런 타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마음이 자신을 속이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가 우리는 2%, 그 것을 사소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삶의 문제들을 타인에게 떠 넘기기에 바쁘다. 
마지막 한 가지는 '책임 전가'에 의해서 진실은 왜곡된다. 아담과 하와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이 찾아 오셨을 때를 생각해보라. 진실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그 버거운 무게로 인해 누군가를 탓하고 상황을 탓하고 자신이 져야할 어떤 것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 왜곡이 치명적인 까닭은 이렇게 떠나간 책임은 누구도 지려고 들지 않기 때문에 떠돌게 되고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렇게 우리 삶에 무게로 되돌아온다.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 희극인 까닭은 져야할 책임이 없음으로 이런 코미디가 없기 때문이요. 비극인 까닭은 삶의 무게를 아무도 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은 각자의 것이다. 내 마음에서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이 책임 져주지 않는다. 사기꾼이 던진 미끼를 잡아 채는 것은 나의 결정이다. 나는 나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근데 복음의 길도 자신의 삶의 진실을 외면하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지 못하면 자신의 무력함을 시인하지 못하면 그 애통함을 정직하게 직면하지 못하면 다다를 수 없는 길이다. 진실 왜곡은 내 삶의 현재만을 왜곡하지 않고 장래와 내세까지 왜곡한다는 것이 가장 큰 삶의 비극일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벧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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