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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학서론

문자적 해석

문자적 해석
이성호 교수
보수신학은 그동안 문자적 해석에 치중한다는 비판을 많이 들었다. 사실 그러한 비판은 이해가 간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튼튼함이 없으니, 성경 자구에 얽매여서 영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고신교회는 문자적 해석에 치우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 왔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조금만 유심히 살피면 별 근거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고신교회가 문자적 해석에 치우친다고 공격하는 거의 핵심적인 이유는 주일성수에 관한 문제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사안 하나로 어떤 교회의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일반화 오류의 대표적인 예이다. 

몇 가지 근본문제는 제기해 보자. 

1.문자적 해석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대강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누구도 항상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다. 예를들어, "하나님의 손"이라는 성경구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실제로 손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신자는 없다. 따라서 100% 문자적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문자를 전혀 무시하는 해석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문자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면, 성경읽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해석에 있어서, 모든 신자는 문자에 어느 정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든 해석은 문자적 해석일 수밖에 없다.
명제:문자적 해석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문자적 해석일 뿐이며, 따라서 상대방을 "문자적 해석"이라고 딱지 붙이는 것을 신중해야 한다. 그렇게 딱지 붙이는 사람 역시, 보다 비문자적 해석을 하는 사람에 의해서 문자적 해석이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문자적 해석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문자적 해석은 가치중립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수준이 낮다"는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문자적 해석가라고 말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성경해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통 의미한다. 심지어 한국교회의 문제는 문자적 해석이 주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로 그럴까? 내가 보기에 한국교회를 결정적으로 망친 것은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비문자적인 해석인 경우가 훨씬 많다. 

2. 1. 일제시대를 보자.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것은 제 2계명이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구약의 율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문자주의적 해석에 빠졌다고 공격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의 핵심은 하나님의 율법을 문자그대로 지킬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정치의 문제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은혜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부조리를 덮어버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훨씬 많다. 

2. 2. 70-80년대 부흥사 시대를 보자. 

부흥사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비문자적 성경해석으로 이름을 날렸다. 문자를 거의 무시하고 신령한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성도들을 현혹하였다. 한 예로, 내가 어렸을 때, 합동측 총회장까지 한 아주 유명한 부흥사의 집회에서 직접 들은 것을 소개한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온 땅을 적시는 환상이 나온다. 그 물은 점점 늘어나는데, 물이 허리까지 차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석이 걸작이다. "물이 허리에 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허리에 무엇이 있나요? 허리에는 돈 주머니가 있습니다. 물이 허리에 찼다는 것은 성령의 물로 인해 돈주머니가 회개를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 . . " 결국 헌금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해석들이 한 시대를 휘저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성도들은 딱딱한 문자적 해석보다, 신령한 비문자적 해석을 훨씬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문자적 해석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2. 3. 자유주의 해석을 보자. 

5병 2어의 사건을 어떻게 볼까? 보수주의자들은 문자적으로 믿는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기적을 베풀어 5000명을 먹이셨다고 본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실제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5병 2어를 바친 어린 아이의 헌신에 감동된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 가지고 온 음식을 다 꺼내 놓은 것을 기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 자유주의자들의 비문자적 해석이 훨씬 황당하고 조잡한 것 같다. 

3. 따라서 문자적 해석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 문자적 해석은 비문자적 해석보다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러나 문자적 해석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다. 문자에 지나치게 얽매일 때, 우리는 종종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는 시적인 표현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이 진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해가 머문 기적도 사실은 해가 멈춘 것이 아니라 지구가 선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이런 경우 과학의 눈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이성을 초월하지만, 이성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부활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천동설은 이성과 충돌하는 것이다. 신자는 과학이나 이성과 명백히 충돌하는 것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이와 유사하게, 신자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우겨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모세의 책"이라는 사고에 갇혀서 신명기 마지막 장 이후의 모세가 죽은 이후의 기록조차 모세가 썼다고 강변해서는 곤란하다. 모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썼다든지, 모세가 죽은 이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환상으로 보아서 죽기 전에 썼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이성과는 충돌하지 않지만), 매우 부자연스런 해석이다. 

4. 올바른 문자적 해석을 위해서. 

4.1. 명백히 이성과 모순되지 않는 한 성경은 가능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요즘 많은 경우에, 특히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비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 장의 "날"에 대한 해석을 보자.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을 한 날 (day)로 보지 않고, 기간 (period)락 본다. 그리고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향해 "문자적 해석"이라고 비난한다. 사실, 성경을 예로 보아서는 날을 기간으로 볼 수도 있다. 용례도 있다. 하지만, 날을 굳이 기간으로만 해석하려는 근거가 무엇인가? 거의 대부분은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이라는 안경에서 창세기 본문을 보게 되면, 날을 기간으로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의 대부분의 용례는 날이 그야말로 날(day)이다. 그렇다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날은 날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지 않겠는가? 물론 나 역시 날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날만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진화론이 명백히 과학적 사실이 아닌한, 창세기의 날은 기간이 아니라 날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본다. 더구나 모세의 글을 읽었던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지 못했었다. 

4. 2. 우리의 경험이나 문화가 성경해석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안수에 대한 해석이다. 성경은 여자가 교회에 잠잠하라, 여자가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이것을 가지고 어느 누구도 여자가 교회에서는 벙어리처럼 있어야 한다든지, 어머니가 남자 아이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든지, 주일학교에서 여선생님이 남학생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여성안수 찬성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런 식으로 강변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따라서 여성안수 반대자=문자적인 해석이란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성안수 반대자 역시 여성의 제한을 언급하는 성경본문에 대해서 명백히 비문자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여성안수 찬성자들이 여성안수 반대자들의 성경해석이 틀렸다고 이야기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해석이 문자적 해석이라고 딱지 붙이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더군다나, 여성안수가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된다느니, 세계교회의 흐름에 따라야 한다느니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까지 하는데, 교회 성장은 여성안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카톨릭교회의 경우 여성사제를 전혀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안수의 문제는 세계교회 전체의 흐름이 아니라 개신교만의 매우 제한 된 흐름이다. 카톨릭교회나 그리스 정교회는 여성안수를 금하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여전히 흔들림없이 지키고 있다. 오히려 여성안수를 가장 먼저 실시한 교단 중의 하나인 성공회의 경우 극심한 교세 하락을 겪고 있는 중이다. 

4. 3. 신앙고백의 중요성. 

개신교는 위의 구절에 대해서 비문자적 해석을 하고 있다. 따라서 문자적 해석이라 순전히 상대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나 신학을 규정할 수 있는 용어도 아니다. 모든 신학이나 교회는 어떤 본문에 있어서는 문자적인, 다른 본문에서는 비문자적인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교회를 향하여 "문자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무식을 나타내는 말일 뿐이다. 어떤 본문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결국 그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에 따려 결정된다. 따라서 성경해석에 있어서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에 몇 개를 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내가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이것은 나의 몸이다" 여기서 세상은 무엇을 뜻할까? 반석은 무엇을 뜻할까? 어떻게 떡이 몸이 될까? 이런 구절들은 아무리 혼자 QT를 한다고 해결될 수 없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경신학에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틀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신앙고백이다. 바른 틀이 있어야 본문을 바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틀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성경 해석의 수단으로 매우 유용한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일까?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는 신조를 통하여 이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면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우리는 성경공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조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읽을 때 마다 삼위 하나님이라는 신관을 갖고 성경을 읽게 된다. 이러한 틀 없이, 전적으로 아무런 편견없이 성경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에게도 100% 순수한 문자적 해석은 존재할 수가 없다. 

결론: "문자적 해석"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은 보다 정직하고 겸손할 필요가 있다. 비문자적인 해석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우월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제대로 되지 않은 문자적 해석도 문제이지만, 어설픈 비문자적 해석은 교회를 더욱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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