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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근세교회사

미국 장로교회 분열사

미국 장로 교회의 분열사 


자유주의, 근본주의, 신복음주의 (1/3)

* 다음은 "한국교계 신앙의 눈동자" "고신신학 대변인" 박윤선 교수(1905- 1988)가 추천한 라보도, 김달생 목사 저 바른신학 (634페이지)의 맨뒤에 나오는 부록(조직신학 책으로 가장 알기 쉽고도 명쾌하여 강력히 추천한다. 요약자)


I. 마지막 때에 대한 성경적 교훈


A.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하여 성취되고 있다. 지금은 마귀의활동이 허용되고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에는 마귀가 무저갱에던져지고 지상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다. 무천년주의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은 후에 곧 영광스러운 상태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미래적 영광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바로 가질 때 그리스도가 재림하신 후영광을 받으면서도 왕으로서 다스릴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 이상하게 생각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심판한 후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충만하리라고 했다(사 11:9).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천년왕국을 향해 진행하고 있다.


B. 재림 전에 있을 징조들
1. 복음이 전세계에 증거됨(마 24:14) 이 징조는 현대에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사에 보면 3세기까지 복음이널리 전파되었던 것을 볼수 있으나 세상 끝까지는 못되었고 4,5세기에 와서는 비석에서 발견되는 대로 중국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8세기까지 중국에기독교가 존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8-9세기에 와서는 배교적 기독교가 되어 죽은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국 역사에보면 중국에는 과거에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는 것처럼 되어있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다시 암흑기가 유지되어 오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 복음이 전파되는 뜀틀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에 몰두한 나머지 외지선교에 힘을 쓰지 못하였으나 19세기에 와서야 선교활동이활발하게 전개되어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한국에도 복음이전파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전까지는 브라질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던사실도 밝힐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에 와서 서구와 미주를 제외한 모든아시아 아프리카 및 각처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고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20-1930년 어간에 자유주의가 태동한 후 1950-1960의 어간에는 이 자유주의 운동이 거의 교회의대다수를 장악하여 진정한 복음의 빛이 가리워지게 되었다.
2. 이스라엘의 독립과 국민적 귀환 여기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다음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 43:5이하,60:1-6; 렘 32:37이하, 겔 37장).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발돋움할 때 하나님께서는 히틀러를 사용하셨다. 곧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명을 학살한결과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국하여 20세기의 기적을 이룬 것이다.
3. 하나님을 반역하는 국가와 교회의 출현a. 구약의 증거(시 2: 단 2: ) 성경은 말세에 사람들이 점점 악하여 질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신신학자들은 성경의 예언과 반대로 점점 나아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사야 59:13-15절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세상의 부패성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b. 신약의 증거 마 24:2; 살후 2장; 딤전 4장; 딤후 3장; 벧후 2장; 유다서; 계 13장;17장 이외에도 많이 있다. 특히 다니엘 12:10과 계시록 22:11절의 사실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에 나타난 것은 일반적인 것(국가적 반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에 있어서는 교회 안에서 배교운동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장한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여 국가와 더불어 하나님을 반역하는 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술한 3가지의 사건과 사실이 20세기에 이르러성취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중시해야 할 것이다.


C. 배교의 형태
1. 도덕적인 면(유 4; 벧후 2장) 유다서 4절에 예언한 대로 도덕적 면으로도 배교가 있을 것을 말한다.즉 성경을 악용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어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된다.
2. 정치적인 면(계 13; 유 8) 정치적인 면에 나타난 배교적인 운동은 세속적 세력과 타협하여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계시록 13장에 나타난 첫째 짐승은 머리가 상하였으나 다시 회복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다니엘 7장에 있는 넷째 짐승과 같은것이다. 이것은 세속적 세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둘째 짐승은 양처럼 나타나 용처럼 말한다고 했는데 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동시에 기독교를의미하는 것이며 용은 사탄을 의미하는 것이니 외부적으로는 기독교처럼나타나지만 용처럼 말을 하니 곧 배교적 기독교 단체인 WCC세력을 의미한다.
3. 종교적인 면 계 17장에 나타난 음녀는 종교적 배교를 의미한다. 말세의 종교적 배교는 음녀적 운동인 것이다.


D. 성령의 역사
이사야 59:19-21절의 내용 가운데 19절이 한국어 성경에는 오역이 되어있다. 이 구절의 바른 번역은 "원수가 홍수처럼 닥쳐올 때 여호와의 신이그를(하나님의 원수) 대하여 기치를 들리라"이다. 여기에서 원수는 사탄의 세력인 에큐메니칼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의미하고 기치는 세계적증거 곧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공공연한 투쟁적 진리의 증거로서참신자들의 세계 운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마지막 때에 악한 세력들이 홍수처럼 밀려오지만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것을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킬 것을 예언한 것이다.


II. 배교에 대한 증거


A. 도덕적 면에서의 고찰
말세에 있을 배교는 말씀을 없이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사용하되 왜곡하고 악용하며 변질시키는 것으로서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 금일 신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를 말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장로교 목사가 WCC에 속하는 잡지에 기고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기사는 Sex문제를 취급한 것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는 피임약의 시대에 살고 있다. Sex는 장기와 같고 대화와 같은 것으로 도덕적으로는 중성적인 것이다. 그런고로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도남녀 소년들이 서로 성적관계를 가져도 좋다. 그 이유는 피임시대에 살고있으니 관계를 해도 임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성경에 있는10계명 중 제7 계명은 옛날에는 필요 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무의미하다는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놀랄 만한 사건은 자유주의의 첨단을 걷고 있는 최근미국 장로교와 감리교에 산포된 소책자 문제이다. 이 소책자의 표지에는"두려움 없이 사랑하자"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인즉 하나님은 사랑인데 우리는 그 사랑을 체험해야 된다. 그러면 어떻게 그 사랑을 체험하는가? 그것은 먼저 남녀간에 서로 벌거벗고 두려움 없이 그리고 자유로이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남성끼리 혹은 여성끼리 동성연애를 통해서도 체험을 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소책자들을 교회에서 만들어 전국교회 청년들과 대학교에 산포해서 남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있는 것이다(롬 1:27, 유 7 참고) 이것이 미국에 있는 WCC계 장로교, 감리교의 정체인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사단의 영을 받아 움직이는 배교적 색욕적인 단체에 대한 성경적교훈은 어떠한가? 성경에서 거짓교사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발견할수 없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구원의 진리를 왜곡하고 악용하며 은혜를 색욕거리로 삼는 자에게는 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성별해야 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하신다(계 18:4). 우리의 과업은 이와 같은 배교적 운동을 폭로하고 대항하고 싸워야 하며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신앙을 고수하고 중간 위치에 머뭇머뭇하지 말고 온전히 성별하여 거기에서 나와서 배교적 단체에 맹종하며 그와 같은죄악에 빠져 들어가는 자들에게 말씀에 순종하라고 외쳐야 될 것이다.


B. 정치적 면에서의 고찰
WCC의 6인의 회장단 중 한명은(유고슬라비아 사람)맑스주의 기독교인으로서 1968년 중공을 UN에 가입시킬 것을 요청하였고 같은 해에 다시 미국은 월남에 대한 침략자라고 까지 주장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세계 기독교학생연맹(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의 회장 RichardSchall은 말하기를 "맑스주의야 말로 세계를 위한 구원이라"고까지 했다.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1968년 10월 WCC의 공적 간행물이 무신론을 주장하면서 초자연적인 이적 같은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하고 세속화는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 세속화의 뿌리는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한 일이다. 이 문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버리고 세속적 세상에 오시지 않았는가 즉 세속화 되지 않았는가?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늘을 버리고 왔으니 그리스도 자신도 일종의 무신론자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주장하기를 맑스주의는 인간 자유의 프로그램이다. 맑스와 그리스도는 동일한 선지자였다고까지 주장하여 칼 맑스야 말로 세계에 있는 피압박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자이니 사회주의와 기독교를 합하는 것이 참복음이요 선교라고 했다.


C. 종교적 면에서의 고찰
제17장에 있는 음녀는 교회가 주님께 충성하지 않고 다른 것에 충성을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WCC의 정책을 보면 바로 이 음녀와 같다. WCC의 정책은 다른 종교와 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그 예로서 1968년에 발간된 책에 보면 "불교 신도들에 대한 구원의 좋은 소식"이라는 제목 밑에서불교와도 대화를 하고 연합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기독교에서는 천당 지옥이란 말을 하지 말고 그 대신 불교의 열반사상을 받아 들여야 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사실인가? 그뿐 아니라 1970년에는 레바논에서 WCC가 주관하는 종교회의를 가졌는데 그때 거기 참여한 종파는 힌두교, 불교, 소위 기독교라 하는 WCC, 이슬람교였다. 그때에 WCC지도자들은 기독교가 이상의 다른 이방종교에 대해서 재고를 해야한다고하면서 이방종교들을 살아 있는 신앙의 종교라고 변호하고는 우리는 고집에서 벗어나고 옛 사상에서 벗어나 그들과 새로운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자고 했다. 그래서 정의평화, 교육, 개발 등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논의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온 인류에게 중요하기 때문에(외부적으로는 그럴듯하다). 그리스도를 주축으로 하여 그 주위에다 역사적 기독교와경과 심지어 이방종교까지 두고 서로 협력하고 연합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음녀의 행위요 또한 666수인 인본주의인 것이다.


III. 미국 장로교회(1860-1923)


A. 자유주의의 예비적 발전(1860-1890)
이 시기에 세가지 중요한 발전이 있었으니 1. 공산주의자 칼 맑스를 통하여 사회주의가 발전된 사실과 2. 찰스 다윈을 통해서 발전된 진화론과3. 독일에서 시작된 고등비평의 발전이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진화론은 자연과학과, 고등비평은 철학과 관계를 가진다. 이 세 발전은 각각다른 것 같으나 거의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진리에서 떠난 사상들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상 중에 독일에서 시작된 고등비평은 독일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파급되었다. 특히 미국의 젊은이들이 독일에 유학을 하고 귀국한 후 이 사상을 미국에 파급시켰다.


B. Charles A. Briggs의 암적 존재
Briggs는 독일에 유학하여 박사학위까지 받고 귀국하면서 불신앙의 사상을 받아 와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교수를 한 자이다. 처음에는 건전한 사상을 가르쳤으나 점차로 불신앙적 신신학 사상을 암암리에 가르쳐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그는 1891년 주경신학의 주임교수가 되었는데 그 때경건회 시간에 "성경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는 그런 제목 밑에서 설교를 하기를 우리 교회는 3가지의 신적 권위를 인정해야 되는데 1. 성경에는 비록 오류가 있을지라도 그 권위는 인정해야 한다는 성경적 권위 2. 교회의 권위 3. 인간의 이성적 권위를 인정해야 된다고 한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후 그는 모세오경도 믿지 않고 이사야서를 의심하면서 제2 이사야서를 믿고 차츰 성경의 무오설을 부정하여 독일에서 배운 신신학의 영향을 받아 공공연히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하는 자리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충격적인 발언과 사상은 미국 교회에 큰 문제가 되었다. 1891년에 소집된 New York 장로교 노회에서Briggs를 징계해야 한다고 하는 문제까지 제기되었으나 뉴욕에서는 Briggs의 친구가 많아 그를 징계 대신 옹호하는 자리까지 이르러 이 문제는 그냥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해인 1892년에 장로교 총회가 모였을 때는Briggs의 진술을 정죄하게 되어 그를 교수로서 더 머물러 있을 수 없게 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미국에는 9개의 신학교(장로교 계통)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유니온 신학교로서 Briggs교수가 그렇게 정죄되자 암암리에Briggs의 신신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많이 있은 결과로 총회의 그와 같은 결의에 반대하여 유니온 신학교는 총회에서 독립하여 Briggs교수를 다시 채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 장로교 내에 있던 청년들이 이 유니온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동안 Briggs로 부터 독소를 받아 먹고 졸업을했음에도 불구하고 총회에서는 안수를 주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Westmi-nster 고백서를 믿고 따르겠다고 입술에 발린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됨으로 다른 교단에도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C. 교회의 반응
이같은 불신앙의 사상이 교단에 들어오므로 자연히 여기에 반대하는 근본주의 운동이 발생케 되었다. 즉 1910, 1916, 1923년에 3회에 걸쳐 장로교 총회가 개최되었고 이 때 이들은 5개조에 달하는 신조를 결의하였다. 첫째, 성경의 완전영감 둘째,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셋째,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넷째, 그리스도의 육체부활 다섯째, 그리스도의 신성과 이적 등 5개조에 달하는 기본신조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본신조를 믿지 않는 자들은 기독교인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성경에 있는 어떤 구절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일한 견해를갖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적은 것들에 대해서는 다 협의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이 근본적인 5개 신조 만큼은 믿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소위 근본주의 운동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신조를 거부하고 신신학을 가르치는 유니온 신학교를 제거하였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오히려 옹호하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이유는 중간 노선을 취한 자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신신학을 주장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강력히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신신학의 세력이 점점 득세하게 되었다.


D. 1923년 교회의 위기
총회에서 이상과 같은 근본적인 5개 신조를 결의함으로 여기에 불만을품은 자들 즉 그 때 이미 좌경되었던 1293명의 회원들이 Auburn신학교에모여 그 근본적인 5개 신조는 잘못되었으며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하면 하나님 대신에 성경을 숭배하기 쉽다고 하는 교묘한 말을 하면서 총회에서이미 결의된 5개조 신조를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고 하여 반대하는 선언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Auburn Affirmation"(오번 긍정서)이다. 이 긍정서에는 1293명의 회원 모두가 서명을 했다. 이렇게 되니 교회에는 위기가 오게 되었다. Auburn Affirmation이 있은1년 후 1924년에 총회가 소집되어 임원 개선을 했는데 그 때는 총회장을보수측의 인물로 선출하는 데만 치중하고 다른 부분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않았다. 이 기회에 총회장이 보수측의 사람인고로 Auburn Affirmation에서명한 자들을 징계할려면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당시 회원들은 보수측 인물이 총회장을 장악하면 된다는 것에만 만족했기 때문에 그들을 징계하는 일은 못했던 것이다. 물론 회원들 가운데는 Auburn Affirmation에서명한 자들에 대해서 모종의 강력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또 어떤 회원들은 서서히 스므스하게 처리하자는 주장을 하여 불행히도 그 문제가 보류되고 교회에는 위기가 온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측 인물이 총회장이 된 것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했으나 내적으로는 그 "암"을 그대로 두었으니 그 암이 점점 자라나서 결국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총회를 장악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보수측이 실패를 한것이다. 당시의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보다는 교단을 더 앞세워 교회 통일을 원하였고 교회가 분열될까 우려한 나머지 강경책을 쓰지 않고 서서히 해결하려 했었다. 그것은 어린 사자를 키우는 것과 같았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이 임원진이 되고 보니 1934년 총회 때는근본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은 회원권마저 박탈 당한채 총회에서 잘리우고 만것이다.


IV. 1923-1936년의 미국 장로교 상황


A. 신학교 상황
1.메이천(Dr. J. Gresham Machen) 이는 보수신학의 위대한 학자요 투사이며 1923년까지 되어진 일에 대하여 반대하는 그룹의 지도 인물이었다. 그는 "기독교와 자유주의"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의 주요점은 자유주의란 새로운 기독교운동이 아니고일반 종교운동에 불과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자유주의를 예리하게 분석하여기독교와 자유주의를 분명하게 분리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기독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당시는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가 9개 있었는데 거의가 다 자유주의 사상에 침투되었으나 프린스톤 신학교만은 그렇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메이첸박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 프린스턴 신학교 이 신학교는 1812년에 설립된 총회신학교로서 당시에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보수적 신앙을 소유했고 메이천박사를 지지했다. 그러나 1925년에 와서 돌연 이 학교에 분쟁이 발생되었다. 그이유는 SCM(기독학생운동)과 유대를 맺느냐 혹은 단절하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생의 대다수가 보수적 신앙의 소유자였으니 압도적으로 SCM과 관계를 단절케 되었다. 이 결과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 관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메이천박사를 제외하고는 다수의 교수들이 자유주의 사상에 은근히 호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학생들과 교수들 간에 분쟁이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Charles E. Erdman박사가 학생들의 고문으로있었는데 이 사람은 복음주의 신앙에 깊지 못하고 적극성도 없고 뜨뜻미지근하여 학생들이 18년간이나 고문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했던 자이다.그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졌으나 분별력이 없이 취할 태도를 잘못 취한나머지 자유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들로 인하여1926년 총회에서 프린스톤신학교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맥킨타이어박사는 신학생이었다. 그런데 이 조사위원회가 신학교를 공격하는 위치에 서서 신학교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때 메이천박사는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 계열에 서 있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사회에서는 대부분이 메이천박사를 지지했으나 재단이사회에서는 반대를 하게되었다. 그래서 이사회와 재단이사회 간에 알력이 생겼으나 이사회가 주도권을 장악하여 그대로 나아갔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1년간 문서를 배포함으로 맹활약하여 1929년 총회에서는 재단이사회와 이사회를 합동하자는 제의를 일으켜 재단이사회와 이사회가 연합하기로 결의가 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메이천박사 편에서는 총회의 압력으로 문서활동도 1년간 정지 당하고 숫적으로 자유주의자들에게 굴복하게되자 메이천박사는 5명의 교수들과 대부분의 학생들과 함께 신학교에서 나와 독립적인 웨스트민스터를 창설하게 되었다.<그레샴 메이첸 1881-1937: 이 위대한 신앙의 수호자는 메릴랜드 주의 발티모아에서 신실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다. 11세 때에 이미 신학생보다도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었다고 하며 전미국에서 최우수 고등학생의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1898년에 죤스 홉킨스(Johns Hopkins) 대학교에 입학했고 자기 과에서 수석으로 그 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05년프린스톤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로 건너가 마르부르그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1906년에 프린스톤으로 돌아와 학생들을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14년에는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1929년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약성서문학과 해석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메이천은 미국의 장로교회로부터 자신의 목사 자격이 취소되었을 때,몇몇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통 장로교회"를 창립했다. 원래 결혼하지 않았던 그는 그 후 여섯 달 후 북부 다코타에 동료 목사를 지원하러 가서 설교를 하는 중에 폐렴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한국교회 한쪽에서는 메이천 박사를 가리켜 극단의 보수로 분열을(쫑겨났는데도) 일삼던 자로 유명하다고 평한다. 요약자><제 목회 생활에 있어서 특별히 힘쓴 것 몇 가지가 있읍니다. 그러나 다이대로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리해서 저는 성경중심의 신앙을 가지기를 힘썹지만, 특별히 여러가지 신학을 별로 공부하지는 못했읍니다. 또 공부하지도 않았읍니다. 할 수 있는대로 저는 가급적이면 신학교 논쟁을 기피했읍니다. 신학적 논쟁을 하게 되면 난 할수 있는대로 뒤로 빠졌읍니다. 그리고 제가 29년에 졸업하자마자 그 여름에 신학교가 갈렸읍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가 갈릴 때보니 갈려나간 수는 매우적었읍니다. 그런 경험을 당한고로 바로 그후에 20-30년 후에 그 신학교논쟁이 우리 한국 교회에 왔는데 그 가운데서도 저는 할 수 있는대로 논쟁을 피하는 태도를 취했읍니다. 한경직, 성경적 생활, 두란노서원, 펴낸날1986년, 한국복음주의 협의회편집, 제1회 서울 케직 메시지>
3.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1929년에 독립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창립되니 총회에서는 직접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음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음으로 양으로 방해공작을가하였고 웨스트민스터신학교 학생들은 큰 교회에서 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은 방해공작은 선교문제에까지 파급되어 심각한 대립을 계속하게 되었다.


B. 독립장로회 외국선교부(IBPFM) 형성
이 선교부는 1933년 창설되었다. 이 선교부가 창설된 이유는 자유주의문제가 선교문제에까지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1930년 소위 평신도 사절단일행이 중국을 시찰하여 진상을 조사하고 연구를 한다는 명목으로 여행을가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들의 여비를 미국의 재벌가인 록펠러가 대주었다. 이 록펠러는 자유주의 신자였다. 그후 그들은 1932년에 "재고적선교"란 제목 밑에 선교회를 소집했는데 그들은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중국을 시찰한 후 귀국보고에서 19세기 선교방법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되겠다고 했다. 그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중국에 가 보니중국인들에게도 그들대로의 종교개념이 있으며 그들의 종교와 기독교사이에 별 차이점도 없으니 선교사들은 기독교 개념만 그들에게 말하고 그 나라의 문명이나 종교는 비판하지 말고 존경해 가면서 타협적 태도로 선교를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중국에는 미국의 여류 소설가인 펄벅이 선교사로 있었는데 그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인 천당 지옥 그리스도의 보혈을증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의 부정하기까지 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을 저하시키는 위치에 있었으나 본국 선교부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선교를 계속하게 하였고 지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메이천 박사 밑에서자란 신학생들은 외지 선교사로 나가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1933년에 메이천박사가 소속하고 있는 노회에서는 근본주의적 신앙을 갖지않는 자는 누구든지 선교사로 보내지 말자는 제안이 나왔다. 메이천 박사는 그와 같은 내용에 대하여 11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써서 다른 노회에도보냈다. 그 결과 자신이 속해 있는 노회에서는 그렇게 문제가 안되었으나다른 노회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어 논의를 했는데 동년 총회에서 45명의회원들이 메이첸의 주장을 거절하는 제의를 하여 결국 자유주의 선교방법을 찬성하고 외국에 파견되어 있는 자유주의 선교사들을 지지하게 되었다.이와같은 결과로 할 수 없이 독립장로교 선교부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C. 교단내의 최종적 이의 1934년 총회에서는 이상과 같은 이유로 조직된 독립장로교에 소속한 자들은 속히 탈퇴하지 않으면 출교하겠다고 하였는데 일부 약한 자들은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나 메이천박사는 하나님께서 해체하라고 하시지 않았으니 해체한다면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순종하는 것이 된다고 하여 총회의 지시에 불응했다. 그 결과 1934-1935년 사이에 7명이 징계를 받았다. 그중에는 메이천과 맥킨타이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7명은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고 문제를 일으킨다는 죄목으로 노회에서 징계를받은 것이다. 그래서 1936년 총회 때에 메이천 박사와 맥킨타이어 박사가상소를 했으나 총회에서는 각 노회의 결의가 옳다고 하여 이들의 상소를묵살시켜 버렸고 또한 이들에게 발언권도 주지를 않았다.


V. 미국 장로교 위경(위경)에서의 재발전 (1936-1967)


A. 미국 성경 장로회의 시초
1936년은 총회가 법적으로 배교적 교회가 된 해이다. 비유컨데 주님 당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도 배교적 운동이 활발했지만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할 때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법적으로 배교자들이 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 신복음주의 노선을 걷는 자들은 이상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려하고 NAE그룹에 속한 빌리 그래함 목사 같은 분은 이 배교적 사실을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각자의 신앙양심에 따라 행하자고 온건한 태도를 취했으나 근본주의자들은 교단이 완전히 공적으로
배교적이 될 때는 그 교단에 있을 수도 없으며 그 교단을 도울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와 벧리알이 조화될 수 없으며 의와 불법이 함께 못하며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는 것이다(고후 6:14-15). 그러므로 일부에서는 그리스도를 택하든지 영적 흑암을 택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되며 양심에 따라서가 아니라 성경말씀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고 주장을 한것이다. 그래서 1929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세워진 것이고 1933년에는 독립장로교 선교회가 조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는 학적으로 나가면서 학자들을 규합하였고 독립장로교 선교회에서는 복음주의자를 규합하였는데 불행히도 1936년에 메이천박사가 별세하게 되어 큰 인물을 잃고 나니 메이천박사 생존시에는 없던 분쟁이 양파간에 자연히 생겨나 결국에는 분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보수신앙의 온상으로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는 네델란드 칼빈주의 사상을 가진 학자들을 받아들여 학적으로는 우세하였으나 기독교인의 자유신앙을 주장하여 음주와 주초도 허용하게 되었고 무천년설까지 주장하게 되어 마침내 무천년설과 기독교 자유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웨스트민스터를 주관하게 되어 미국장로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1937년 성경 장로교 창설 조직 위원회가 구성되고, 1938년 성경장로교 제1차 대회가 목사 39명 장로 11명이 참석하여 개최되었고 대회의 토론 내용은 배교에 관한 반대운동이 주로 토의되었으며 계속 배교사상을 공공연하게 반대하는 것의 중요성과 아울러 전천년설을 주장하고 주초는 금해야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이 되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측은 미국장로교(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란 명칭을 정통장로교(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개칭하고 성경장로교(독립장로교 선교회) 측과 분리되었다.


B. 다른 발전들
1937년 성경장로교가 창설되었으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상실했음으로 처음에 신학교를 Wilmington에 설립하고 1950년에 다시 Philadelphia에 이전했으니 이것이 곧 신앙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이다. 1939년에는 맥킨타이어 박사가 Christian Beacon지를 창간, 1941년에는 NCC와 대결하기 위하여 맥킨타이어박사가 주동이 되어 ACCC를 조직, 1942년에는 중간노선인 NAE가 창설, 같은 해에 New York에서 Shelton대학이 맥킨타이어박사에 의해 설립되어 후에 New Jersey주에 있는 Cape May로 이전되었고, 1942년에는 독립장로교 국내선교회가 발족, 1948년 암스텔담에서 ICCC가 창설되었는데 이때 성경장로교(BPC)와 정통장로교(OPC)가 둘 다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53년에 OPC는 ICCC를 떠나 RES에 가담했다.


C. 1954-1956년 어간의 사건들
1. 성경장로교의 위기
a. ACCC에서 NCC에 대해 반대투쟁을 하고 NCC에서 ACCC에 대해 반대투쟁을 계속하게 되니 ACCC의 어떤 자들은 계속 투쟁을 했으나 또 어떤자들은 투쟁에 지쳐서 중립적 상태에 주저 앉아 미온적 태도를 취하게 된것과, 
b. 독립적 기관 문제인데, 즉 신앙신학교, 독립장로교, 국내외선교회, 크리스챤 비콘, 셀톤대학 등의 각 독립된 기관들에 대한 문제였다. 과거에는 이것들이 교단에서 인정된 것으로 독립했는데 이제는 운영을 독립적으로 할 것이냐, 혹은 교단 자체에서 주관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때 ACCC내의 투쟁에 지친 일부 사람들이 교단에서 공동으로 주관하고 운영하자고 함으로 또 위기가 오게 된 것이다.
2. 1955년에 분리
이 분리는 묘하게 대회별로 되었다. 성경 장로교회 내의 Collingswood 대회(맥킨타이어 박사가 속한 대회)와 Columbus 대회가 서로 분리되었다. 그후 Columbus 대회파는 그 명칭을 개칭하여 근본주의는 없이하고 단순히"복음주의 장로교(EPC)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후 다시 RPC(개혁장로교)와 합하여 EPC는 RPC(ES) 즉 복음주의대회 개혁장로교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에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데 세계 장로교 선교회(WorldPresbyterian Mission)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VI. 1967년 새 신앙고백서


새 신앙고백서를 만들게 된 것은 교회안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현대사조에 맞추어 좀 수정하자는 의견이 제기 되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신앙고백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적당했으니 오늘 새 시대에는 우리에게 맞는 신앙고백서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자유주의가 들어올 때부터 1967년까지는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학생들도 목사 안수식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믿지는 않지만 이 신앙고백서를 믿는다는 선서를 해야 되었음으로 양심상 가책을 받
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신앙고백서를 만들자고 한 것이다. 만일 이런 문제가 1937-1947년 사이에 제기되었더라면 교계에 큰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보수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많이 살던 세대가 지난간 후인 67년도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새 신앙고백서는 16세기 종교개혁에 뿌리를 박고 있는 미국교회의 신앙의 뿌리를 끊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WCC는 로마 가톨릭의 세력에 점점 흡수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A. 성경관
이 새 신앙고백서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유일한 충족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고 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 성경도 설명계시로서 역시 충족한 계시인데 이 고백서는 성경을 충족한 계시라고 하지 않으며 성경을 계시에 대한 유일한 증거라고만 한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라고 하지 않고 말씀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바르트의 사상이며 RES의 총무 스크로텐보어가 주장하는 사상이다. 바르트는 성경을 계시 자체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스크로텐보어도 성경이 계시와 동일시 되어서는 안되며 고립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모두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계시의 말씀인 것을 부인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새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화해 사역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비추어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해석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이렇게 말한 그들 자신들도 이해 못하는 그릇된 사상이다. 성경에는 화해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 통치, 악인들에 대한 심판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화해사역 원리만 성경해석의 빛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이 성경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원리를 항상 주장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라야 해
석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주장하기를 성경은 절대성을 가지지 못하고 상대적 가치를 가질 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들의 말이며 그 기록되던 시대와 장소와 환경에 유행하던 언어와 사상과 문체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성을 가지지 못한 것이니 시대를 따라 변동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변동될 성질을 가졌다는 것이니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 새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부인하고 있다.


B. 기독관
1967년 새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두 성품에 대하여 뚜렷이 구별되게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치중한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는 팔레스타인의 한 유대인으로 그의 동족 유대 백성 가운데 사셨고 그들의 곤궁과 시험과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나눈 사람이라는 것이다. 신성에 대해서는 사람과 함께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란 간단한 말로 막연하게 표현하거나 그저 간단한 말로 표현하고 지나갈 뿐이며 이것도 그들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니 성경적 의미의 신성
을 뜻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의 한분이심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무죄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언급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만인을 위해 죽으셨으나 모든 사람을 화해케 하는 것은 신비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으로 모호하게 말하고는 신비라고 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막연한 의미에서 "모든 사람의 구주(the Saviour of all men)"라고만 하고 있다.


C. 구원관
새 신앙고백서에는 예정, 선택, 유기, 칭의 등의 교리는 찾아볼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란 제목 밑에서 얼버무려 놓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으로 죄인을 어떻게 구원했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고 중생이란 말도 없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사람이 죄악 가운데서 인간성을 상실했다고 함으로서 죄를 하나의 사회적 병으로 보았고 인간이 죄의 종이 되었다든지 타락했다는 말이 없다. 죄관이 비성경적이니 올바른 구원관이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새 신앙고백서는 말하기를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예수를 일으키셨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인류의 개척자가 되기 위하여라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사회복음주의라는 것이다.


D. 교회관
1. 교회의 사명
성경이 말하는 화해는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이 사람에게 화목되시고 다음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화목됨을 의미하며 그 부산물로 사람끼리의 화목이 기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새 신앙고백서는 사람끼리의 화목만 주장을 하고 "하나님은 지상의 백성들을 한 세계적인 가족이 되게 창조하셨다" 하면서 인종차별도 없애버리고 사방에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멧세지를 통해서 붙여놓자, 공산주의와 반공주의가 나누어져 있으니 이것을 합해서 국제적 평화를 가져오자, 유교도 불교도 기독교도 이방종교도가
모두 합하자, 이렇게 하는 것과 함께 또한 가난의 극복, 남녀의 성문제 등의 해결에 치중하면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화해의 근본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화목만을 주장하며 사회개량에 진력을 다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본무인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의 전파는 잊어버리고 인간이 만든 사회복음을 전하는 것이니 인본주의요 공산주의적이요 사람의 수인 666수의 운동이다.
2. 교회의 장비
은혜의 방편인 말씀증거(Preaching), 기도(Prayer), 세례(Baptism), 성찬 (Lord''s supper)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다. 이 새고백서에서는 이상의 것들을 하나의 교회비품 혹은 장비로 생각하고 있다.


E. 종말관
제3부 화해의 성취란 제목 밑에서 종말관을 말하고 있으나 예수님의 재림이나 내세천국의 소망에 대해서나 부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저 막연한 "그리스도의 통치" "하나님의 최후적 승리"란 말만 사용하여 여기에 대한 정의는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천국이란 말도 내세에 대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하며 하나님의 나라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론
웨스트민스터 고백은 그 내용이 명백하고 세밀하여 그 주석이 필요없다. 물론 후에 그 주석이 나오기는 했으나 대개의 경우 그 내용을 좀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성경의 구절을 더 붙인 것 뿐이다. 그런데 신신학자들은 1967년 새 신앙고백서에는 주석이 있어야 되겠다고 한다. 이 새 신앙고백서는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인 Edward A. Dowey 박사가 새 신앙고백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15명의 사람들을 지도하여 저작하고 또 이 고백서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부록을 따로 썼으나 이것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워 주석을 썼으나 그래도 이해 곤란이요 혼돈이다. 이 고백서는 성경에서 떠나서 인간 두뇌에서 나온 산물이며 적그리스도와 공산주의를 합한 사단적 혼돈이요, 독소를 섞은 자유주의 신앙의 총결산이요 배교적 운동인 것이다.


VII. 신복음주의의 발생과 발전


A. 신복음주의의 발생
우리는 신복음주의를 잘 연구해야 한다. 그러면 신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정의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해석이 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는 신복음주의의 친구들에 의한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신복음주의의 반대자들에 의하여 주어진 정의이다. 이 신복음주의는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을 먼저 알아야할 것이며 그 원인을 알려면 또한 1900년부터 1930년 어간의 미국 장로교 역사를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에 있어서 1900년과 1930년 어간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배교운동이 일어나 강하게 발전되었고 이에 맞서 근본주의자들의 단체가 생겨 그들과 투쟁을 전개한 시기였다. 그래서 1910년에는 자유주의도 근본주의도 둘 다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1920년에 와서는 자유주의가 더욱 강해진 것이다. 당시 신신학 사상의 물결에 휩쓸린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들을 변호하기를 자신들이야말로 근본적 신앙을 가졌다고하고 따라서 근본적 신앙을 가졌음으로 교회의 원수들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교훈을 따라 사랑해야 된다고 주장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교훈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들은 교회의 원수들이라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을 한 것이다. 당시 보수신학의 위대한 학자요 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한 메이천박사는 자유주의를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는 "기독교와 자유주의"란 유명한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신신학자들의 "자유주의 기독교"란 책에 대한 답변으로 쓴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부활을 부정하였다. 그러므로 메이천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자유주의는 전통적 기독교와 부분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근간(근간)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했다. 불교와 기독교가 차이가 있듯이 자유주의와 전통적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논증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저서는 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배교적인 악한 사조는점점 물밀듯이 들어와 마침내 1930년경에 와서는 애석하게도 근본주의자가 불과 1퍼센트 정도만 남게 되고 99퍼센트가 다 자유주의 편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99퍼센트가 다 자유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환경 때문에 나오지는 못하고 자유주의자 편에 들어 있었지만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상당수가 있었다. 특히 교단과 신학교는 거의가 신신학자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그 외는 중간 노선을 걷는 중립파에 속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평신도는 모릅니다. 꼭대기, 꼭 대기가 문제입니다! 꼭대기가!) 


B.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의 시초(1942년)
1941년 맥킨타이어 박사가 NCC와 반대투쟁을 하기 위해 ACCC를 창설하였는데 이 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상관없이 근본주의신앙을 가지고 반대운동을 했다. 즉 자유주의 사상을 반대하는 자들이 합쳐서 NCC를 반대한 것이다. 그래서 칼빈주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아주 좋고 건전한 근본적 교리의 성명서를 제정하고 또한 교회의 순결을 강조했다. 자유주의는 배교적 단체이니 거기서 성별해야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부사람들은 성별해야 된다는 주장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마침내 그 사람들은 중간상태 즉 뜨뜻미지근한 상태에 빠져 사실상 자유주의를 반대하는데 미온적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이 중심이 되어 N.A.E.가 시작되었다. 이들도 그들이 내세울 교리를 채택하였는데 A.C.C.C.보다는 조금 약한 내용을 받아들여 주장을 했다. A.C.C.C.는 완전영감설을 믿는다고 주장했으나 N.A.E.는 그저 영감을 믿는다고만 주장했고 A.C.C.C.는 성경의 정확 무오성을 믿는다고 주장했으나 N.A.E.는 성경의 권위를 믿는다고만 주장을 한 것이다. 그리고 A.C.C.C.는 교회의 순결성을 주장했으나 N.A.E.와 N.C.C.는 교회의 순결성에 관해서는 무관심하여 성명서도 발표치 않았다. 그 뿐 아니라 회원문제에 있어서는 W.C.C.의 회원인 동시에 N.A.E.의 회원도 될 수 있다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신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바로 이 N.A.E.에 속한 사람들이 가진 신앙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교리적으로는 다소 바른 근본적 교리를 가지고 있으나 그들의 생활태도는 영적 흑암과 타협하는 타협주의자들이며 애급에서 나와서 광야까지 오기는 했으나 다시 애급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자들이며 소돔 고모라에서 떠나기 싫어하는 롯의 아내 같은 자들이요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할 때 하나님 편도 아니고 바알편도 아닌 중간 위치에서 머뭇거리던 백성들과 같다고 정의할 수 있다.


C. 현실적 문제
신복음주의는 기회주의적인 생각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자기들의 눈에 유리한 것을 먼저 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그것을 준수하자는 주장을 내세운다. 미국 장로교 1936년에 법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배도적 교회가 되었다고 본다. 1936년 전까지는 교단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교단을 구출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1936년에 공식적으로 배도적 교회가 되었음으로 근본주의적 교회들은 거기서 따로 나와서 성별되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NAE에서는 이런 점에서 분명한 원리를 가지지 않고 혼돈을 하고 있음으로 중간노선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VIII. 미국의 N.A.E.


A. 신학교의 상황(1930-1940)
1930년에 미국의 대부분의 교단들이 신학교와 함께 부패하게 되었다. 그결과 근본주의적 교회들은 1930-1940년 사이에 많은 독립신학교들을 세우고 복음주의적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이 신학교들이 외적으로는 배도에서 떠난 것 같이 보였으나 사실상 자유주의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배도적 운동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의 신학교는 복음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신학교이다. 자유주의 진영에 있는 자들이라도 복음주의자들과는 협력을 할 것이며 자유주의자들과는 투쟁을 하지 않고 일하겠다고 하였다. 즉 교리적으로는 복음주의적이지만 일하는 데는 자유주의자와의 투쟁을 피하고 타협적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현저하게 나타난 신학교로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Fuller신학교였다. 이 신학교는 부흥설교가였던 Charles Fuller의 이름을 따라 세운 학교였다. Fuller는 처음 신학교를 시작할 때 복음주의적 신학을 원했으나 신신학이나 자유주의와 투쟁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들을 교량 역할을 시키기 위해 프린스톤에서 공부를 하게 했는데 이것이 신복음주의의 전략인 소위 침투전략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주의와 교제하려면 평화가 필요하다고 하여 교리적인 문제도 타협을 했다. Fuller 신학교에서 근래에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삭제하고 있으며 또한 전천년설도 제거해 버렸고 영혼이란 말을 빼고 불신자는 구별되나 악자는 형벌이 없다는 것을 발표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Fuller의 아들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한 후 스위스에서 바르트주의도 배워왔다. 이와 같은 침투전략의 결과들로 이 신학이 처음에는 복음주의였던 것이 차차 신복음주의적 학교가 되고 말았다. 침투 전략은 악한 영향을 가져올 뿐이니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원리는 성별인 것이다.


B. 대중복음전도
대중 복음전도의 대표적 인물은 Billy Graham목사이다. 그는 NAE가 배경이며 그의 목적은 복음을 증거하려는 것이며 자유주의자와 투쟁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면으로 훌륭한 부흥사이나 그가 자유주의자와 투쟁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주의의 배교적 노선과 개인적으로 협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적 성별생활을 원하는 많은 사람에게 큰 혼란을 가져오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 때문에 에큐메니칼측에서 인기를 얻어 N.C.C.의 큰 대회의 주요 스피커로 나타나기도 했고 1956년 N.A.E.대회에도 설교자로 초청을 받기도 했으며 또한 로마 가톨릭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사방에 있는 가톨릭 단체에서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기도 했
다. 카톨릭의 어떤 사람은 편지를 쓰기를 Billy Graham 목사의 설교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설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 가지 흥미 있는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Billy Graham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대부분의 가톨릭 교회가 기뻐할 수 있는 도덕과 복음주의의 내용이 서로 합치한다고까지 찬사를 늘어 놓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리면에서 볼 때 하나도 발전되거나 변화된 것이 거의 없고 오히려 마리아의 무죄성과 교황의 완전무오설을 주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Billy Graham 목사는 그들에게 한 설교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인기있는 존재가 되어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만일 10년 전에 빌리 그래함 목사가 이렇게 했으면 많은 신자가 그를 반대했었을 것인데 지금은 대대적인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지금 표준이 파괴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C. 선교 단체들
첫째 E.F.M.A. 단체인데(여기에는 130개의 선교단체가 가담하고 있음) 이 단체는 N.C.C.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NAE와도 유대를 맺고 있는 단체이다. 둘째는 I.F.M.A.(50개의 무소속 교단의 선교단체)가 있는데 이 선교단체는 T.A.M.만큼은 못하지만 최초에는 자유주의를 반대하는데 강력했다. 그러나 점점 약화되어 T.A.M.(ICCC와 관계를 가지고 있음)만이 WCC를 반대하고 있는 강한 그룹으로 남고 I.F.M.A.는 E.F.M.A.와 같은 관계를 가지고 오다가 마침내 합동을 하여 Washington D.C.에 사무실을 얻어 함께 일하고 있다. T.A.M에는 현재 A.C.C.C. 문제 때문에(맥킨타이어 박사의 행위 때문에 A.C.C.C.가 분리된 문제를 의미함) 문제가 야기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두고 봐야 알 것이다(I.C.C.C.와 관계를 가지고 있음)


D. N.A.E.가 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한 실례들
1. 남침례교회
이 교단이 최초에 I.C.C.C.에 가입할 때 100교회 이상이 가맹했으나 현재는 10교회도 잘 안되는 형편이다.
2. 성결교회
한국에서 ICCC에 가입한 교단 중에 제일 큰 교단이다. I.C.C.C.에 가입한 회원이 7만명인데 그 중 1/2인 3만 5천이 성결교 교단에 속한다. 그런데 이 성결교단이 미국 웨슬레 감리교(N.A.E.)에 가담하려 했다가 Robert S. Rapp박사가 쓴 책자 때문에 가입을 못하고 다시 원 위치에 돌아와 현재까지는 I.C.C.C.안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
3. R.E.S.(개혁주의 에큐메니칼 대회)
R.E.S.는 개혁주의 교회 안에 있는 신복음주의이다. 불행히도 한국은 W.C.C.와 투쟁하여 나온 보수주의 교단과(합동측)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옥고를 겪은 분들이 주동이 되어 생긴 고려파 교단이 R.E.S.에 교단적으로 가입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1971년도 총회 때 고려측 교단에서는 R.E.S.를 탈퇴 하였으나 합동측 교단에서는 R.E.S.를 반대하는 노회와 회원들도 많이 있으나 교단적으로는 아직 탈퇴를 않고 R.E.S.회원 교단이 되어 있다가 1973년에 와서 다행하게도 총회적으로 탈퇴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명하고 있지 않는가?


IX. R.E.S.의 국제적 상황


A. R.E.S.(개혁주의 에큐메니칼 대회)의 역사적 개요
R.E.S.는 1946년에 최초로 미국 그랜드 래피드에서 3개 교파가 회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 3개교파란 화란의 개혁교회, 남아프리카의 개혁교회 및 미국의 기독교 개혁교회(칼빈신학교를 소유)등이다. 그러나 1946년의 모임은 그 성격이 기초적이고 준비적인 모임이었고 1949년에 비로소 화란 암스텔담에서 실제적 첫 대회가 열려 완전히 조직된 것이다. 이후에 계속 교단들이 가입을 하여 35개 교단이 가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B. R.E.S.의 기초
R.E.S.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전통 속에 있다. 칼빈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단체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교 교단만이 허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오늘의 R.E.S.의 상황은 전연 달라져 전통신앙과는 멀어지고 에큐메니칼 운동과 관계있는 자들과 일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세 교단 중에 R.E.S.의 모교회인 화란에 있는 개혁교단은 W.C.C.에 가입을 했으며 또 하나인 미국 기독교 개혁주의 교단에는 자유주의자가 많이 있으며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데 아마도 곧 W.C.C.에 가입할 줄 안다. R.E.S.는
최초에는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했으며 또한 칼빈주의적 신조들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기초는 매우 훌륭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것들이 다만 하나의 진술에 불과하고 교리적 성명서는 아니며 그들이 주장하는 기초는 그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R.E.S.의 총무 스크로텐보어에 의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칼빈주의 신조의 기초가 곡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스크로텐보어 박사는 말하기를 계시에는 3형태가 있다고 하고 성경은 그 3형태 중의 하나라고 하면서 성경과 계시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고립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고유의 본질적 객관적 권위성을 부인하고 있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인 것을 부인하고 있다. 만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성경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말씀이다(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그것도 성경에 있는 것임). 그리고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속되는 말씀이라고 한다. 특히 세째의 주장에 대해서는 시편 147:17-19을 곡해 인용하고 있다 (여기 구절들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면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는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임을 부인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 전하는 설교를 성경의 권위와 같이 간주한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이며 미국 연합장로교회에서 채용한 이단적인 1967년도 새 신앙고백서의 입장이다. 오늘의 유일한 계시는 성경 외에는 없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런 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달리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 지금 지상에서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은 정확무오한 말씀이겠으나 주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그러므로 R.E.S.의 기초는 나쁘게 보이지 않으나 실제로는 그 기초를 따르고 있지 않다. 겉으로는 개혁주의요 칼빈주의지만 사실상 비개혁주의요 비칼빈주
의적이다.


C. W.C.C. 대한 R.E.S.의 입장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 협의회)가 무엇인지 간단히 고찰해 보자. W.C.C.는 1948년 발족 이래, 불신앙의 사람들 곧 그들 중 상당수는 노골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고귀한 진리들을 부인하는자들에 의하여 지금까지 지도되어 왔다. W.C.C.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지 브롬리 옥스남이라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보혈을 흘렸다는 진리를 부인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어떤 신(신)이든지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자기 아들의 피를 요구하는 신 (신)은 야비한 신이라고 하였다.
W.C.C.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서 고백하는 교회들을 회원들로 한다고 자처한다. 이것은 사단이 빛을 천사들처럼 보이게 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W.C.C.는 실제상 그런 표준을 붙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W.C.C.안에는 또한 유니테리안(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도 회원으로 들어 있다. 일반적으로 W.C.C.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바르트주의자들인데, 이들도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성경적 교리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바르트주의에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영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현현한 다만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함). 그들은 신인(신인)연합에 대한 성경적 교리가 동정녀 탄생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진리를 말살한다. W.C.C. 안에는 또한 헬라 정교회도 가입되어 있는데 이 교회는 일반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꼭 같은 이단 교리들 즉 죽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성자 숭배, 마리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올려 놓은 것, 세례에 의한 중생 및 행위 구원 들을 붙잡고 있다. 더욱이 W.C.C.는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웁살라에서 모였던 W.C.C. 대회에서는 W.C.C.의 핵심기구인 신앙 질서 위원회에 로마교회 신학자 9명을 가담시킴으로서 의도적으로 그방향을 더 취하였다. 끝으로 W.C.C.는 심지어 비기독교적 종교들과 궁극적인 연합도 모색하며 대화를 갖는다(이것은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분명하게 되었다).
W.C.C.는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많은 교회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사실상 이 교회들은 결코 참 교회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산국가 내에서의 참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벌써 순교를 당했든지 또는 광산 같은 곳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소위 이들 교회들은 다만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는 공산당의 일선 기구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산당들은 이 교회들을 통하여 비공산 세계의(사단으로부터 속임을 당한) 현대주의 신학자들과 협조하여 자유 세계 정치 지도자들의 활동들을 정죄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W.C.C.는 웁살라 대회(1968년 7월)에서 미국과 한국이 월남전에 참여하여 있는 것을 노골적으로 정죄하고 그들의 군대를 곧 철수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결코 전체주의 공산당을 정죄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로 W.C.C.는 북괴가 소련 공산당의 무기를 가지고 남한을 침범해 왔을 때도 침묵만 지켰다. W.C.C.는 또 1956년 소련 공산당이 항가리를 공격 했을 당시도 침묵을 지켰었다. 이렇게 반공 국가들의 활동은 정죄하고 공산당들의 활동은 찬양하는 W.C.C.의 정책은 W.C.C.가 얼마나 비기독교적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W.C.C.의 회장단 한 사람이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원임을 알고도 놀라지 않는다(그의 이름은 절맨 감독이다). 또한 웁살라에서 W.C.C.는 중공을 공식적으로 U.N.에 가입시켜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W.C.C.는 모든 세계가 한 세계 곧 사회주의적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사회주의 정신 가운데 맑스주의와 반 기독교가 있다는 것을 자유로이 승인하지는 않으나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사단은 계시록의 짐승이 나타나는 길을 준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바로 몇 주일 전에 세계 선교 위원회의 기관지와 복음주의 회보를 받았다. 이 세계 선교 위원회는 W.C.C.의 선교 기관으로서 그들의 기관지는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라고 부른다. 이 기관지 1968년 마지막호에 실려진 제목은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인데 티 바울 벌게스(T. Paul Verghes)가 게재하였다. 그는 여기서 구원의 의미를 논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죄 값이라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구원에 필요한 개인적 회심의 체험도 언급하지 않고 그 대신 그는 세례와 자력 (자력)을 통한 구원을 말하였다.
또 린 에이 데 실바(Lynn A de Silva)라는 사람은 한 기사에서 말하기를 구원은 불교의 교훈에서도 논의된다고 하였다. 그는 성경의 교훈 곧 택자는 구원을 얻고 불택자는 지옥 간다는 진리를 비난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 두가지 교리는 악마적 개념이다... 영원한 고통이라는 개념 안에는 어떤 감추어진 도덕적인 반역이 있다"고 하였다. 천당과 지옥 교리에 관련하여 기독교 신학은 불교의 중생 교리를 주의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현대 신학은 사후에도 사람의 정신적 영적 성품들이 계속 자란다는 진행과 발전의 개념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고 하였다. 끝으로 그는 (de Silva)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은 불교의 극낙 세계 개념과 꼭 같다는 전연 믿을 수 없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거기에(왕국) 들어갈 자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전통적인 불교의 대답 곧 "아무도 없다"는 말로 대답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거기에는 개인주의적이고 자존적(자존적) 존재는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불멸의 영은 없다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극락세계는 하나님의 왕국의 한 국면이다"라고 하였다. 참 한심스럽다.
그리고 밀란 오포센스키(Milan Opocensky)씨가 쓴 기사는 최악의 증오일 것이다. 이사람은 세계 기독 학생연맹 유럽 총무이며 순전한 공산주의자이다. 그는 그의 기사에서 하나님에 대한 현대인의 반역을 논평하면서, "현대인은 위선을 거절할 준비와 인간의 정직으로 인하여 찬양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초자연성을 반대하는 인간 반역을 시인하는 하나님의 표라고 하는 한심한 주장을 하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였는가 들어보자. "세속주의로부터 시작하자! ... 오늘의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억설(가설)을 필요치 않는다. 인간은 실제적 결정들로서 인간의 이상으로 인하여 지도된다. 인간은 자주자(독립자)가 되기를 원한다. 인간은 초자연적 세력들의 관념을 거절한다. ... 세속주의는 재변도 아니고 재난도 아니다. ... 신학적 투시도로 보면 성경의 자체에서 세속주의의 뿌리를 보며... 성경의 책들은 세속화의 현실화, 심지어는 무신론의 현현까지도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사렛 예수로 오시는 성육신은 가장 급진적인 세속화 과정의 운동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속화된 인간에게나 속화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예(동의)이다"라고 하였다.
참 한심하다. 벌써 이는 공산주의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시인이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초자연적 하나님에대항하는 현대 인간의 반역을 주장하고 있는 공산주의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성경의 용어를 가지고 칼 맑스의 교리를 어떻게 설교하는가를 알았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W.C.C.의 신학적 부패상의 깊이를 실감한다. 실로 이 W.C.C.는 사도 요한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이라고 말한(계 18:2) 음녀와 바벧론이다. 어찌 참 성도들로서 이런 글들을 읽고서 W.C.C.와 배교적 기독교가 계 13:11절 이하와 계 17:1 이하에서 묘사한 것을 드러내고 있는 사실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W.C.C.는 사단의 수중에 들어 있는 한 도구라는 사실을 참 성도는 부인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시인하는 즉시로 우리는 또한 성경의 명령 곧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계 18:4)는 명령을 시인하여야 한다.
W.C.C.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W.C.C.의 배교적 상태를 시인도 하지 않는다. R.E.S.는 말하기를 "우리는 W.C.C.가 승인한 성명서로만 판단하는 것을 강조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R.E.S. Agenda Report p.168). 즉 다시 말하자면 W.C.C.를 W.C.C. 자체가 고백한 성명서로만 판단하여야 한다는 말이니, W.C.C.도 성명서로는 "W.C.C.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는 우호체이다. 고로 한 분 하나님, 성부 성자 성신의 영광을 위하여 다같이 공
동으로 사명을 성취한 것을 우리는 모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성명서는 벌써 R.E.S. 자체의 행동과 모순됨을 우리는 보아왔다. 그런데 W.C.C.가 참으로 자체의 성명서를 취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왜 R.E.S.는 W.C.C.의 성명서만 믿기를 원하는가? 여기에 영적 식별력이 있는가? 만일 우리가 공산주의를 그들의 선전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좋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괴뢰가 남한을 자유화 시키기를 원한다고 말할 때에 사람들은 그를 믿는가?
김일성 괴뢰를 판단하는 유일한 표준은 그가 자신을 위하여 만든 진술서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성도들이 W.C.C.나 기타 다른 운동단체들을 바로 판단하겠는가? 그 대답은 오로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마 7:15, 20)고 하였다. 이 말씀은 W.C.C.를 판단함에 있어서 참된 표준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 자체의 선전으로 판단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그들의 맺은 열매로 판단하여야 마땅하다는 말씀이다. 왜 R.E.S.는 W.C.C.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할 수 없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상실하였으며 타협하는 악한 영으로 인하여 소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R.E.S.는 성도들과 교회들을 이 바벧론 음녀로 부터 성별시키기 위하여 불러내지 못한다. 오히려 R.E.S.는 W.C.C.와 R.E.S.의 2중의 회원권을 허락한다. 이 타협 정책에 따라서 R.E.S. 내에는 적어도 W.C.C.에 가입되어 있는 교회가 3교파나 된다. 그 교파들은 중앙 자바에 있는 인도네시아 교회와 기독교회 및 숨바의 기독교회이다(R.E.S. Agenda Reports.-1968. p.4,156). 더욱이 R.E.S.의 주도적 교단인 화란 개혁교회가 이제 W.C.C.에 가입했다. 그래서 최근에 전언하기를 "W.C.C.에 가입함에 반대되는 근본적 성질은 전연 없다"고 하였다(R.E.S. Agenda Reports. -1968.p.156).
또한 미국의 개혁 장로교 내에는 그들의 교회를 가입시켜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R.E.S.내에 있는 다수의 교단들은 W.C.C.의 회원이 아님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W.C.C.가 배교 집단임을 밝혀서 그의 백성들에게 이 배교와는 분명하게 단절해야 할 것을 가르치도록 하는 성경의 엄격한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R.E.S. 교회들의 대부분은 W.C.C.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거나 편의를 도모해 주는 결과로 W.C.C.의 정회원은 아니나 간접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R.E.S.의 한 회원 교단인 미국의 연합개혁 장로교는 노골적으로 중공을 UN에 가입시키자고 주장하며, 이방 종교들과의 대화를 주장하며, 젊은이들이 부정한 성적 관계를 가져도 자유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N.C.C.와 같이 짝하는 협동 회원인 것이다. 또한 R.E.S.의 한 회원교단인 브라질에 있는 개혁교회는 1964년 그곳 W.C.C. 지방단체와 관계를 가졌는데 당시 그 단체는 공산주의자들이 브라질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는 일과 사회 복음주의에 강력한 사상적 뒷받침을 하였다(나는 이 모든 사
실들을 1961-1965년까지 브라질 선교사로 있으면서 직접 보았다). 또 다른 한 경우로 화란의 개혁교회가 있는 인도네시아는 신학교육 분야에 있어서 W.C.C.와 같이 일하고 있다.
최근 암스텔담에서 열렸던 R.E.S. 대회에서 총대의 3분의 2가량이 다음과 같은 성명서에 호감을 가졌다는 것은 매우 유의해 볼만한 사실이다. 즉 "우리는 회원 교단들이 현 상태하에서는 W.C.C.에 가입하지 않기를 조언한다고 한 전번 대회의 조언을 고수할 것을 믿는다"고 하였다(R.E.S.Age-nda Reports - 1968. p.189). 표면상으로는 이 성명서가 W.C.C.를 반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이 말은 사실상 매우 모호한 말이다. 다만 조언이나 한다는 식의 말은 하나님의 존엄하신 권위에 근거한 도덕적인 직결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이 "조언"이란 말은W.C.C.의 현 형편에 근거하여 한 말이다. 이것은 마치 교역자가 교회에서 젊은 여성들에게 현재의 상황 속에서는 간음하지 않기를 조언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심지어는 이 조언 마저도 "W.C.C.에 대한 최종적 결정과 책임은 개교회에 맡긴다"고 주장하므로써 R.E.S.는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R.E.S. Agenda Reports -1968. p.191). R.E.S.가 W.C.C.의 배교를 반대하는 분명한 증거를 줄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더욱이 암스텔담 회의 대표 중 3분의 2가량만이 이 성명서에 호의를 가졌고 다른 이들은 이 말마저도 심한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W.C.C.에 반대하는 어떠한 결정도 택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3분의 1가량의 대표들은 상실되었다는 것이 표면상으로 나타난다. 좀더 자세히 검토해 보면 3분의 2가량이 승인한 그 성명서는 W.C.C.가 배교적 기구이며 사단의 영향을 받아 지도되는 기구라는 점을 공격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더욱이 현 상태에서는 W.C.C.에 가입하지 않기를 조언한다는 3분의 2가량이 찬동한 성명서는 말하기를 W.C.C. 성명서의 기본 말 자체는 복음의 요약이라고 하였다(Christian News 1968. 9.9). 이 얼마나 거짓인가? 우리는 이 점에 진심으로 도전한다. W.C.C.의 기초란 복음에 대하여는 언질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풍성한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의 교리는 전연 설명도 하지 않는다.
W.C.C.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거부하는 보편 구원론자들이기 대문이다. 더욱이 W.C.C.는 "R.E.S.와 W.C.C.의 대표자들이 에큐메니칼 문제에 대하여 R.E.S.의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고 보도하였다.(Christian News 동일자판). 이것은 다 알려진 일들이다. 만일 어린이라도 원한다면 이점을 볼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것은 W.C.C.에 대한 R.E.S.의 공적 태도(입장)가 성별주의가 아니고'대화의 입장임을 뜻한다. 이 대화는 영적 어두움의 세력과의 대화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말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애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러므로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리라"(고후 6:14,17)한 말씀에 위배된다.
여기에 대화가 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정통적인 교회를 포함한 R.E.S.의 모든 교회들은 이 입장에 관여되고 있다. R.E.S. 내에는 많은 개별적인 관점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R.E.S.의 모든 교회들은 공통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거기에는 신학적으로 상이한 모든 계열을 포함하는 한 공통 분모가 있다.
이것은 세상 어두움의 세력과 타협하는 태도이다. 심지어 형태로는 가장 정통인 것 같고, 개교회의 태도는 매우 강한 것 같이 보이는 교회들마저도, 배교에 관한 하나님의 참된 표준에 도달함에는 아직까지 실패하고 있다.
그들은(R.E.S.) 1 W.C.C.가 사단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고 판단함에 실패했으며, 2 교회들을 배교로 부터 나오라고 하는 성별의 순종을 호소함에 실패하였으며, 3 에큐메니칼 운동을 대항하여 싸우며 그 운동을 세상에 폭로시키는 일을 함에 있어서 실패하였다.


D. R.E.S.의 현재 상황
R.E.S.에 속해 있는 화란 자유대학과 미국 그랜 래피드에 있는 칼빈신학교에 있는 대다수의 교수들이 성경의 초자연적인 기사와 이적들을 공공연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 예로서 여호수아서에 있는 가나안 정복 기사중(여리고성 정복 에 관한 기사)에 7일간의 기적을 신화로 간주한다. 1968년 네델란드 총회시에는 창세기 1장-3장까지의 내용을 신화로 규정한 사실이 있다. 특히 자유대학의 Kuitert 교수는 과거의 고전적인 사상은 변화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타락, 죄, 구원 같은 중요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이 교수가 미국의 칼빈신학교에 메인 스피커로 초대되어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유주의적 견해를 보여주고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신학교에 Groppi란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 혁명가인 로마 가톨릭 신부가 와서 연설하는 중 미국의 젊은이들은 국가에서 징집영장이 나오면 그런 영장은 찢어서 백악관에 던져 버려야 한다고 연설을 하니 우뢰같은 박수갈채를 받은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 R.E.S.에 대한 성경적 판단
1) 성경은 악한 것을 분별하라고 명하는데 R.E.S.는 분별을 못한다. W.C.C.가 배교적 단체라고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반대하지도 않고 있다.
2) 성경은 악에서 성별하라고(Separate from evil) 교훈하는데 R.E.S.는 복음적인 신앙을 소유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악에서 떠나지 못하고 성별도 않고 위선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3) 성경은 악을 반대하고 사단의 세력을 과감하게 대항하는 의의 전투를 권장하는데 R.E.S.는 그렇지 못하다.
이상은 모두 신복음주의적 정신이며 태도인 것이다. -끝-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므로
백범 김구
"자기네 구린데를 닦아내는 휴지 비슷하게 사용한다구요. 그래서 막상
거기에 들어갔다 나오면 똥걸레가 됐다 나오는 거죠.
그안에 있는 똥 다 묻혀 가지고 와서는 갈데가 없어지는 거죠. 조금 괜
찮은 사람 데려다가 이렇게 솔솔 닦아내서는 너 조금 더러워졌으니 내가
좀 깨끗해졌다 그러는겁니다."
1988년 5월호, 샘이 깊은 물
한국장로교회와 WCC와의 관계년도별 요약
1949 전필순, 김길창, 양주삼, 정춘수, 정인과 제 목사가 반민족행위 친일자 로 정부의 특조위에 피체.
1950 12월 태국방콕 WCC대회에 연동파 총회가 가입된 한국 NCC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미국을 비롯한 UN군의 한국출전을 직히 비난 공격하는 용공정책을 지지하는 의안을 채택.
1951 고신측에서는 국회의원 22명의 이름으로 WCC를 좇는 총회를 용공으로 성명케함.
1961 김길창, 길진경 목사가 인도 뉴델리 WCC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연동파<나중에 통합측이 됨>총회 기관지 기독공보 제 601호 1면기사)
1959 9월 WCC 지지 회원들이 특별열차를 교섭승차하고 연동교회에 모여 총회장 아닌 전필순 목사 사회로 불법단체를 조직하고 제44총회가 성립되었다고 하였으나 그후 그 불법을 자인한 그들은 이를 해체.
1959 11월 승동교회에서 양화석 총회장이 피선되고 임원교체식에서 성경, 헌법, 규칙, 사회봉과 총회장 직인이 수교되고 전서기 김상권 목사는 신임된 박찬목 목사에게 총회록과 인장 및 일절 서류를 인계함으로 총회 전통을 계승.
1060 12월 제 44차 총회가 칼측의 WCC성분을 완전히 제거시킨 까닭에 고신 측이 주장하는 신사참배 회개를 받아들이고 합동함. 총회장에 한상동 목사 선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