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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근세교회사

존 웨슬리 (Rev.John Wesley, 1703~1791)

존 웨슬리 (Rev.John Wesley, 1703~1791)
성공회에서 최종적으로 분리된 감리교 운동을 창시한 성공회 신부이다. 감리교와 성공회에서는 그의 회심일인 5월 24일을 기념하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내에서는 요한 웨슬레라고도 불린다.
성장 과정
1703년 6월 17일 링컨셔 주 에프워스(Epworth)에서 성공회의 가톨릭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앵글로 가톨릭
전통의 성공회 사제인 새뮤얼 웨슬리(Rev.Samuel Wesley)의 아들로 태어났다.
새뮤얼 웨슬리는 40년간 교구 일을 맡아 본 성실한 성직자였으며, 자녀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부친 새뮤얼 웨슬리의 영향으로 존 웨슬리는 기도, 신학공부, 성례전에 따른 엄격한 신앙생활을 주장하였으므로, 훗날 존 웨슬리와 그의 동지들의 감리교 운동을
메소디스트
(고지식한 사람)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헬라어, 라틴어, 프랑스어에 능통할 만큼 빈틈없는 학문 실력으로 19남매를 직접 가르쳤으며, 아이들이 규칙적인 생활과 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영국교회사에서 존 웨슬리라는 지성적이고 활동적인 신학자가 나온 것은 부모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생 시절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에 입학한 존 웨슬리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 시와 노래, 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으며
, 성적도 우수하였다. 웨슬리 사제가 복음주의 운동으로써 영국 성공회와 사회를 변혁한 것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는 지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복음주의 운동
존 웨슬리는 1725년 영국 성공회 부제로 서품되었으며, 1726년에는 링컨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존 웨슬리는 중세 영성가
토마스 아 캠퍼스
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
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영향으로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회심
1728년 9월 사제품을 받은 존 웨슬리는 1729년 옥스퍼드대학교에 돌아와, 동생 찰스 웨슬리(1707년 12월 18일생)가 결성해 놓은 거룩한 모임
의 지도자가 되었다. 존 웨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청중들을 감화시켰는데, 이는 신학생 시절 신학과 웅변을 성실하게 공부한 덕분이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우연히 들은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회심후 그는 존 웨슬리는 조지 휘트필드 신부의 영향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를 돌아다니며 직접 민중들에게 전도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40만km나 여행했다고 한다. 1739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부제에게 성공회가 사제서품을 주지 않는 것에 반발해 자신이 스스로 사제서품을 줌으로서 사실상 성공회에서 감리교회가 분열되었다. 하지만 존 웨슬리 사제 자신은 자신을 성공회 사제로 인식하였다. 왜냐면 그의 존 웨슬리 사제의 복음주의 운동은 사회적인 영향을 상실한 성공회를 갱신하려는 신학운동일 뿐이지,새로운 교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제제
영국 성공회의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제제는 복음주의자들의 국가교회 저항에 대한 정신을 주관적인 종교경험으로만 국한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복음주의 운동은 국가교회인 영국 성공회가 보기에 국가교회와 국가질서를 혼란하게 한다고 여겨져서, 복음주의 설교자들의 설교를 금하였고, 교회내 복음주의 성직자들을 파문하였다.
감리교회에서의 활동과 별세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성공회의 제제로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존 웨슬리는 그 자신이 이룬 영국내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감리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영국내에서 활동하고,
기독교 윤리
적으로 무기력하던 성공회 내부에서 복음주의적 변혁의 힘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감리회의 대표이며 동시에 직무를 박탈 당했어도 파면된 성공회 성직자의 자격은 남았다. 1791년 3월 2일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은 개인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의 입장을 지닌 감리교회로 발전하였고, 영국 성공회에는 국가교회인 영국 국교회로 안주하는 것에 반대하는 복음주의적 생명력을 심었다. 이러한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의 전통, 예전, 성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과 함께 성공회의 전통으로 존중되고 있다. 전자는 저교회파(Low Church), 후자는 고교회파(High Church)로 불리기도 하였다.
신학
존 웨슬리는 개인적 회심, 철저한 신앙생활, 성례전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례전적 신앙생활의 회복,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칭의(稱義)론을 기독교인이 성령에 의해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복음전파, 거듭남의 은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 죄를 멀리 하는 거룩한 마음,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공회 복음주의 활동가 존 웨슬리 신부의 삶-성공회 분당교회 이주엽 신부의 강의
성공회 복음주의 활동가 존 웨슬리 신부의 삶-성공회 분당교회 이주엽 신부의 강의
《기독교교육》2008년 6월호,기독교교육과 신학-복음주의 부흥운동가,요한 웨슬레,배성산, 대한기독교교육협회
대구성서아카데미 칼럼-신완식의 런던이야기
원어는 Holy Club이며, 신성 클럽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성공회의 역사》/대한성공회 선교교육원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새로운 나,우리》/홍영선 지음/대한성공회 p.136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출처 : 위키 백과
1. 위인의 생애에 대한 평가
“그렇게 훌륭한 노인을 나는 일찍이 본 일이 없다! 그의 정신 속에 숨겨진 행복감이 그의 용모에서 비친다. 그 분의 얼굴을 볼 때마다‘훌륭하게 보낸 인생의 멋진 추억’을 그 분이 얼마나 만끽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알렉산더 녹스(Alexander Knox)의「존 웨슬리」에서.
존 웨슬리 목사
엡워스(Epworth)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 웨슬리도 체구가 작았다. 그의 키는 겨우 5피트 6인치(170.18cm), 체중은 겨우 122파운드(55.3kg) 밖에 안 되었으나, 그는 근육형이었고 힘이 세었다. 담갈색의 밝은 눈과 준수한 용모 그리고 매부리코에 번듯한 이마와 맑은 피부,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그의 얼굴은 보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의 밝고 꿰뚫어보는 눈길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용모와 습관에 대하여 아주 꼼꼼한 편인 웨슬리는, 항상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곱게 접은 깃 장식 윗도리의 작은 칼라는 곧추세우고 세모난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감히 멋진 스타일로 글을 쓸 생각은 못하고, 다만 멋진 옷을 입을 자신은 있다.”
캐넌 오버톤(Canon Overton)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은 정확히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면 웨슬리는 옷에 대하여 독특하였던 것 같습니다. 웨슬리는 항상 조심하여 되는 대로 옷을 입지 않으려고 하였고, 늘 멋지게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 것이 꼭 그 분의 스타일과 같습니다. 단정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고, 그렇다고 천박하고 야한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년에 웨슬리와 함께 생활을 하였던 헨리 무어(Henry Moore)는 말하기를;
“웨슬리의 서재에서 책 한 권이나 종이 한 조각이라도 제 자리에 놓이지 않은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의 정확성과 시간을 엄수하는 것 때문에 웨슬리는 앞으로 돌아오는 엄청난 일을 다 해냈을 뿐 아니라, 그것도 완벽하리만큼 안정된 상태에서 다 해내었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가치를 신중하게 계산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정신적으로나 태도에 있어서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는 일단 쓰거나 한 일이면 그것을 다시 손질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무슨 일을 하든지 차분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느리다고 생각될 만큼 시간을 들여서 일을 하였다.”(헨리 무어)
그 자신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말벗이 되었지만, 기분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나 일단 어쩔 수 없이 그런 친구들과 한 자리에 있게 되면 화가 치미는 성질을 가라앉히느라고 애를 먹었다.
웨슬리는 어디를 가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행복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처신에 있어서도 부드럽고 사귀기 편한 그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으며, 최선을 다한 예의와 가장 완벽한 경건성이 한데 어우러지려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늘 보여 주었다. 그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다가 생각하면, 그의 멋진 고전미를 칭찬해야 할지, 사람들이나 사물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해박한 지식을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끝없이 넘쳐흐르는 그의 착한 마음씨를 칭찬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게 된다. 신중하고 진지한 사람들이 그의 지혜에 매료되는 반면에, 나이가 어리고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의 입에서 힘차게 터져 나오는 순수한 농담과 재미있는 이야기에 반했다.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그의 끊이지 않는 명랑과 쾌활 속에서 참된 종교의 극치를 보았다….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노년기까지도 즐거운 것이었다.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저녁 날씨와도 같이 누구를 막론하고 웨슬리를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절한 소원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의 말년이 웨슬리와 같이 되었으면!” (녹스).
언젠가는 웨슬리와 다른 순회 전도자 한 사람이 어느 부잣집에서 점심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서 이 위대한 사람이 기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집에 아리따운 젊은 딸이 있었는데, 그 처녀는 웨슬리 선생의 설교에 크게 감동되어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순회전도자는 그 숙녀가 수많은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웨슬리 선생이 볼 수 있도록 처녀의 손을 잡아 치켜 올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웨슬리 선생님, 감리교인의 손이 이렇다니, 이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석을 달고 다니는 것을 웨슬리가 몹시 싫어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처녀는 얼굴이 붉어져서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의 독특한 안정된 자세로 한 번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아가씨의 그 손이 참 예쁘군요!”
그 다음 집회에 나타났을 때 그 젊은 숙녀는 보석을 하나도 달지 않고 나왔고, 마침내 독실한 감리교인이 되었다.
2. 결혼에 실패한 존 웨슬리
1749년 4월, 찰스 웨슬리는 웨일즈의 치안판사의 딸 사라 과인(Sarah Gwynne) 양과 결혼하였는데, 당시 존 웨슬리도 행복한 결혼을 앞두고 가슴 설레며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해 8월에 뉴카슬(Newcastle)에서 전도할 때 잠시 아픈 일이 있었는데, 그 때 그레이스 머레이(Grace Murray)라는 32세의 출중한 과부의 간호를 받은 일이 있다.
그 여인은 뉴카슬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런던으로 이사해 살았다. 거기서 스코틀랜드의 명문가의 아들인 선원과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는데, 아들이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감리교 전도자의 설교를 듣고 감리교도가 되었는데, 그의 남편이 반대하자 그를 데리고 와 그도 감리교도가 되었다. 그러나 1742년 선원인 남편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자 그레이스 머레이는 뉴카슬로 돌아와 고아원을 경영하였다. 매일 수백 명의 꼬마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함께 기도하며 평생을 살겠다는 머레이를 만난 웨슬리는, 보면 볼수록 그 여인의 신앙이 아름답고 평생 부모 없는 어린이를 위해 살기로 한 그 믿음이 마음에 들어 결혼을 신청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에게는 넘치는 축복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바라고 싶은 일입니다.”
그리고 웨슬리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하기 때문에 웨슬리는 그를 요오크셔와 더비셔어 집회 때 데리고 다녔는데, 그 여인은 웨슬리에게는 물론 집회에도 말할 수 없이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볼톤(Bolton)에서 얼마 동안 존 베네트(John Bennet)의 순회교구(circuit)에 머물렀는데 베네트도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베네트는 “머레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의무입니다”라고 웨슬리에게 편지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도 머레이를 지극히 사랑하여 결혼 준비를 구체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베네트가 웨슬리를 찾아와 머레이가 자기에게 웨슬리가 보낸 편지를 다 갖다 보여주었다고까지 말하자 웨슬리는 머레이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양보할 터이니 베네트와 결혼하라 하였다. 그러자 머레이는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웨슬리뿐이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 때 그들이 얼른 결혼했어야 했는데….
찬송가 작가 찰스 웨슬리
웨슬리는 동생 찰스와 상의하였다. 그런데 찰스 웨슬리는 형이 심부름을 하던 여인과 결혼하면 동역자들이 다 형을 떠날 것이라며 반대를 하였다. 그리 되면 모처럼 결집되는 감리교회 지도자들이 흩어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형 웨슬리는 그래도 하겠다고 편지하자 찰스는 그 과부 여인을 찾아가 말하였다.
“그레이스 머레이씨, 당신은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찰스는 그 여인을 데리고 베네트를 찾아갔다. 머레이는 베네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동안 섭섭하게 대한 일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1주일 후에 머레이는 베네트와 결혼하였다.
헨리 무어는 머레이와 존 웨슬리의 마지막 만남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들의 마지막 만남은 애처로웠다. 그러나 웨슬리 선생은 평소의 그가 지닌 안정감보다 훨씬 차분하였다. 수년간의 간격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다 애절한 사랑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웨슬리의 말에 표현되는 부드러운 후회 속에서 그 여인은 인격적으로나 태도에 있어서 웨슬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찾아보기란 극히 쉬운 일이었다. 그 만남은 오래 끌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후에 웨슬리 선생이 평생 그 여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들은 일이 한 번도 없다.”
웨슬리는 그 이후로 머레이를 단 한 번도 만나지를 않았다. 베네트는 결혼 즉시 웨슬리와 결별하였는데, 헤어지는 마당에 그는 웨슬리를 혹평하고, 심지어는 그가 교황처럼 행세한다고까지 악평하였다. 그는 감리교회를 떠나 칼빈주의교회 목사가 되었는데, 4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일 웨슬리가 그레이스 머레이와 결혼했더라면 그의 가정생활은 행복하였을 게 분명하다. 그 후 웨슬리는 47세이던 어느 날 런던 다리에서 낙마하여 다리뼈를 다친다. 그 때 사업가의 미망인으로 아이가 4명이나 있는 네 살 연상의 과부 몰리 바제일(Molly Vazeill)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면서 그를 좋아하게 되어 결혼하였는데, 그 결혼은 비극이었다. 결혼 후 4년 만에 웨슬리는 아우 찰스에게 "우리의 사랑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몰리의 죄악상을 나열한다.
①자기 사무실에서 도둑질하기
②친구를 집으로 초대 못하게 하는 불문율
③포로나 다름없는 비인간적 대우
④외출 할 때 상세히 보고하기
⑥사적 서류나 서신 함부로 위조 남에게 공개
⑦저속한 비어 사용과 심한 폭행
⑧남들 앞에서 끝없는 중상모략 등등.
한번은 주위사람이 보는데서 남편 웨슬리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찔찔 끌고 다녔다고한다.
몰리는 남편의 책상에서 서류와 편지들을 꺼내어 여기 저기 문구를 바꾼 다음 그것을 웨슬리의 적수들에게 혹은 신문사로 보내어 보도하게 하였다. 알려진 바로는 웨슬리가 누구와 함께 여행을 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100마일(약161km)를 질투의 불길에 사로잡혀 말을 몰아 쫓아가기도 하였다. 웨슬리의 설교가들 중의 한 사람인 존 햄프손(John Hampson)은 몰리가 화내는 장면을 직접 목도하고는 이렇게 썼다.
“몰리는 웨슬리 선생에게 난폭하게 손찌검을 하고, 심지어는 존엄한 그 분의 머리카락을 한 줌씩이나 뽑은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찰스 웨슬리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인 잭슨(Jackson)이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웨슬리가 자기 부인에게 보낸 편지들 속에 나타나고 있는 “가장 따뜻한 애정은, 그것을 감당할 여자가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약 그와 잘 어울릴 여인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이 넘치는 남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웨슬리가 기질적으로 냉정하고 쌀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전적으로 웨슬리의 성격을 오해하는 것이다.”
항상 사람들의 가장 좋은 면만을 기억하며 산 웨슬리이지만, 그들의 행동 때문에 실망을 당하는 슬픔을 수 없이 겪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악의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심지어 가장 잔인한 원수까지도 쉽사리 용서하였다.
아마 웨슬리의 성격과 경력에 대하여 애즈베리 감독(Bishop Asbury)이 자신의 일기에서 적은 것보다 가장 잘 평가해 놓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웨슬리의 평이하면서도 힘찬 글과 설교와 일기에 대한 그의 비범한 재능……관찰력이 강한데서 얻어진 그의 지식과 학자로서의 그의 성취,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의 경험 등을 생각할 때,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길러낸 모든 자손 중에서도 그와 대등한 인물을 찾아볼 수 없거니와 그 뒤에 올 아담의 모든 후손 가운데서도 그보다 뛰어난 인물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출처:김영운 옮김《존 웨슬리의 일기》pp.33-37)
3. 웨슬리의 말년
웨슬리는 죽기 직전까지 일기를 썼다. 1789년 일기를 보자.
―6월 28일 토; 오늘로 85세가 되었다. 수없는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림이 마땅하다! “수많은 해를 달려오며” 받은 고통은 별것 아니다. 과거보다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전처럼 빨리 뛰거나 걸을 수가 없고 시력도 감퇴되었고, 왼쪽 눈은 아주 어두워 책 읽기도 힘들다. 얼마 전 부딪친 왼쪽 관자놀이 뿐 아니라 오른쪽 눈에 계속 통증을 느낀다. 오른쪽 어깨는 삐었는데 류머티즘이 겹쳐 팔을 쓰기 힘들다.
기억력도 감퇴되어 알던 사람 이름도 생각이 안 난다. 그러나 20~30년 혹은 60년 전 일들은 똑똑히 기억한다. 청각, 후각, 미각과 기호(비록 음식량이 전보다 1/3로 줄었지만)는 예전 그대로다. 또한 여행이나 설교에는 전혀 힘든 것을 느끼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건재한 것은 첫째 나를 이끌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여기 저기 통증이 오는 것은 이제 머지않아 나는 이 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나는
―내 남은 날들을
주님 찬양하며 보내리
주님은 온 인류를 구하시려
목숨 버려 희생하셨으니
나의 남은 날은 주님의 것
이 날들도 주님께 바치리라.
《존 웨슬리의 일기》pp.392-3에서
기독교의 3대악처
선량한 남편에게 못되게 구는 아내를 '악처(惡妻)'라고 한다. ‘악처’라는 단어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보면,「크산티페」‘Xanthippe’라고 나와 있다. 크산티페는 다름 아닌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부인의 이름이다. 4월27일은 소크라테스의 기일로 세계 “악처의 날”이다.
원래 크산티페란 그리스어로 “금발의 여인 또는 금마(金馬)”라는 뜻이라고 한다. 2,500여 년 전의 사람이지만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얼마나 악처였기에 이렇게 좋지 못한 뜻의 '일반명사'로 자리잡아버렸을까?
기독교 문화권에서의 '3대 악처'는;
①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
②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츠'
③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아내 '몰리 골드호크 바제일' 을 꼽는다.
가.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
첫째,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18세 나이에 34세의 톨스토이와 결혼했다. 결혼 후 15년간은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톨스토이는 이 시기에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명작을 많이 썼다. 아이도 13명 낳았다. 그러나 남편이 문학세계에서 벗어나 종교와 사회운동 쪽으로 옮겨가면서 가정을 소홀히 했고 갈등이 시작돼 자주 다투면서 별거생활을 되풀이했다. 기독교인이 된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했고 이후 소피아와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82세 나이에 가출, 아스타보바라는 한적한 시골 역에서 폐렴으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톨스토이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 장례식에) 저 여자는 참석시키지 말아라”였다.
나.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츠'
두 번째,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츠는 소프라노 가수 출신으로 불성실하고 매정한 인물로 묘사돼있다. 낭비벽이 심한데다 모차르트가 죽었을 때 아프다는 핑계로 바덴바덴의 별장에서 놀면서 장례식도 남을 시켜 대강대강 치러 공동묘지에 묻었다. 시체를 따라간 사람은 묘를 파는 인부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모차르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비엔나 상크트맑스 공동묘지(Sankt Marxer Friedhof)에 있는 무덤은 가묘(假墓)일 뿐이다.
모차르트의 사후에 그의 서명이 들어간 악보와 서한을 팔아 사치에 썼다. 그러나 자신에게 불리한 편지는 모두 파기했다. 악보를 모조리 걷어 헐값에 팔아넘긴 것도 모자라 제자의 것까지 남편 작품이라고 속여 팔고 훗날 덴마크 귀족과 재혼한 그녀는 모차르트가 유명해지자 추억의 수기, 사랑의 편지 등을 출판하여 돈을 챙기느라 바빴다.
다. 존 웨슬리의 아내 '몰리 골드호크 바제일'
마지막으로,
존 웨슬리의 아내 몰리 골드호크 바제일을 들 수 있다.
웨슬리는 47세이던 어느 날 런던 다리에서 낙마하여 다리뼈를 다친다. 그 때 사업가의 미망인으로 아이가 4명이나 있는 네 살 연상의 과부 몰리 바제일(Molly Vazeill)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면서 그를 좋아하게 되어 결혼하였는데, 그 결혼은 비극이었다. 결혼 후 4년 만에 웨슬리는 아우 찰스에게 "우리의 사랑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몰리의 죄악상을 나열한다.
①자기 사무실에서 도둑질하기
②친구를 집으로 초대 못하게 하는 불문율
③포로나 다름없는 비인간적 대우
④외출 할 때 상세히 보고하기
⑥사적 서류나 서신 함부로 위조 남에게 공개
⑦저속한 비어 사용과 심한 폭행
⑧남들 앞에서 끝없는 중상모략 등등.
한번은 주위사람이 보는데서 남편 웨슬리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찔찔 끌고 다녔다고한다.
몰리는 남편의 책상에서 서류와 편지들을 꺼내어 여기 저기 문구를 바꾼 다음 그것을 웨슬리의 적수들에게 혹은 신문사로 보내어 보도하게 하였다. 알려진 바로는 웨슬리가 누구와 함께 여행을 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100마일(약161km)를 질투의 불길에 사로잡혀 말을 몰아 쫓아가기도 하였다. 웨슬리의 설교가들 중의 한 사람인 존 햄프손(John Hampson)은 몰리가 화내는 장면을 직접 목도하고는 이렇게 썼다.
“몰리는 웨슬리 선생에게 난폭하게 손찌검을 하고, 심지어는 존엄한 그 분의 머리카락을 한 줌씩이나 뽑은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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