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골로새서 1:23의 해석

골로새서 1:23의 해석 

노승수 목사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골 1:23의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운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매튜핸리주석중에서)
그는 고난의 설교자였다. 그는 본문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한다"(24절)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 그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선한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았으므로 그는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었다. 그는"그가 고난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기뻐하고"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존귀로 여겼다. 그리고 더욱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에게 존귀로 여겼다. 그리고 더욱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우려 하였다(24절). 바울이나 다른 이들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러했듯이 죄에 대한 보상으로써의 고난은 아니었다. 이들 사도들에게는 결핍된 아무것도 없었고 또한 "채워질" 필요가 있는 것도 없다. 그들은 고난의 의도에 순응하는 것으로 충분한 보람을 느꼈고 또 그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채워드리는 것으로 보람을 느꼈다. 반면 바울과 다른 선한 일군들의 고난은 그의 백성들로 그리스도의 합당한 자들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고난받으신 예수의 뒤를 따랐다. 또한 그들은 인장이 찍혀진 후 그것을 봉인하기 위하여 채워지는 밀납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말은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은 본문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고난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그의 "남은 것을 채웠다"고 하겠다.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부과된 일정한 비율의 고난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고난이 미리 작정한 것이었기에 그는 뒤에 남은 고난 혹은 그의 몫으로 주어진 남은 고난을 더욱 자기 안에 채우려고 하였다.

나의 해석
그리스도의 고난보다 '그리스도의 환난'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본문의 쓰인 '고난' 혹은 '환난'은 구약에서 택자와 의인들이 겪는 환난과 고난을 일컫는 그리스어의 70인역의 대응 번역어 입니다. 예컨대, 시편 37:39, 50:15 같은 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유대교 전통에서 환난은 종말의 한 징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에 고난을 채우신 것은 이 종말의 성취로 보아야 합니다. 이미로서 온전한 성취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세례요한의 의문도 이런 것이었지요. 마지막 때 그리스도가 오시면 진노를 부으셔야 하는데 그 일이 없는 것에 대한 의문, 그게 십자가의 고난으로 들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에 다시 오심을 예비하고 있고, 이 다시오심의 징표 역시 환난으로 들어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혹은 환난이라고 말하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읽혀야 합니다. 즉, 구약성경에 들어난데로 성도가 환난을 받는 것이 주님의 재림의 징표인 셈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로마서 5장 3절이하에 환난 중에도 자랑한다는 취지의 바울의 표현에도 잘 드러납니다. 이 환난이 소망 곧 부활과 구원의 소망을 이룰 줄 믿기 때문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잘 드러내는 본문인 셈입니다.
특별히 바울신학에서 '환난'의 성격은 성도 특히 사도들이 처한 고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고후 1:4-5, 빌 4:14).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난의 남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는 단 한 번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히 이루어진 공로입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음에도 여전히 마지막 구원이 남아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온전히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종말이 성취 되었음에도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고난 역시 재림의 때까지 남은 것이지요. 어거스틴에 해석에 의하면, 주님과 연합하여, 교회를 이해 고난을 받는 이러한 소명은 비단 사도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