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 현실
노승수 목사
하나님은 우리의 풍성한 삶을 원하신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주님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무 분명하고도 확실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이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그것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믿는 것이다.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진 것처럼 믿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자기 세뇌를 통해서 자기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의 실체라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자면, 믿음은 가능태(可能態 : dynamis, Potentiality)이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현실태(現實態 : energeia, actuality)라는 것이다. 예컨대, 토도리는 갈참나무의 가능태이다. 도토리 안에 이미 갈참나무가 들어있다. 무엇으로 가능태로 들어있다. 우리는 도토리를 심으면서, 장래에 갈참나무를 기대할 수 있고 그 기대는 정당하다. 이처럼 믿음이란 장래에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가능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래에 행복과 풍성한 삶이라는 나무가 우리에게 현실태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 이행이 일어나도록 삶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선택이다. 생명의 비밀은 자란다는 데 있다. 어떤 씨를 심었는데 자라지 않는 것은 두 종류이다. 벌레를 먹었거나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명이 있다면 반드시 자라고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믿음은, 그러므로, 생명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계를 보면, 특정한 성질을 가진 동물이나 곤충들이 있다. 야행성이란 밤에 활동하는 동물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주광성이란 빛을 향해 달려드는 성질은 말한다. 그래서 불에 들어가면 타 죽는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인생을 부나비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믿음이란 이런 일련의 속성과 같다. 하나님을 향한 끌림의 속성이다. 믿음이 우리 안에 심겨지면 그것은 가능태임으로 끊임없이 현실태가 되려는 속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믿음은 그러므로 자기 확신이 아니라 실체인 것이다. 단지 지금 현재 현실태로 보이지 않을 뿐 우리 삶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어떻게? 순종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점점 말씀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우리 삶에서 현실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의 선택이 없이는 아무도 행복해지거나 풍요로와 질 수 없다. 믿으면 행복이 찾아온다. 믿으면 기쁨과 평화가 내 영혼과 마음에 깃들 것이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 특히 창세기의 족장들의 복은 하나같이 물질적 풍요로 들어났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다. 믿으라.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곤고한 날도 주신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풍요는 그저 옵션일 뿐이다. 그리고 구약의 족장들의 물질적 풍요는 장차 우리가 누릴 천국의 풍요에 대한 상징일 뿐이다.
그림자에 빠져 참된 풍요를 잃어버릴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걸 주시겠는가? 물질이 때론 시험이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 밖에 허락치 않으신다. 한 개인이 살아가는데 많은 물질이 필요치 않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많은 물질을 주시는 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아브라함의 복이 여러사람에게 미치는 것처럼 아브라함 개인을 위해서만 복을 부어주시지 않고 여러 사람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물질적 풍요는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내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주신 은사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에게 부어주실 것이다.
2010.02.05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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