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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신학

바울 연구의 “새 관점” - 공헌과 한계

바울 연구의 “새 관점” - 공헌과 한계


권연경 (숭실대 교수)


1. E. P. Sanders와 초기 유대교
전통적으로 기독교, 특히, 루터 이후의 개신교는 일세기의 유대교를 “공로주의,” 곧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율법주의”적 종교로 보았다. 간간이 이에 대한 유대교 학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C. Montefiore, G. F. Moor), 이런 관점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1977년 출간된 E. P. Sanders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이었다. 이 책에서 샌더스는 광범위한 초기 유대교 문헌들을 검토하고 이를 기초로 초기 유대교가 결코 공로주의적/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논증하였다. 초기 유대교는 언약 백성됨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기초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율법 준수의 필요성은 강조된다. 하지만 이런 순종의 문맥은 율법 순종을 통해 언약 백성의 신분을 획득하려는(“getting in”) 공로주의가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staying in”) 노력이었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유대적 열성(nomism)은 철처히 은혜에 근거한 언약(covenant)의 태반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샌더스는 이런 유대 종교의 패턴을 “언약적 율법주의/신율주의”(covenantal nomism)이라 불렀다. 
샌더스의 주장은 신약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물론 이 반향 내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혼재한다. 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전통적-개신교적 유대교 상을 포기하고 샌더스가 제시한 언약적 신율주의적 패턴을 적극 수용하였다. 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샌더스가 제시한 유대교 상에 대한 반대 의견이 피력되기도 했다. 샌더스가 유대교 분석에 적용한 개념틀 자체가 유대교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유대학자의 비판도 있었지만(N. Neusner), 많은 경우 반대 목소리는 샌더스가 일 세기 유대교의 다양성을 과소평가하고, 그 다양성 속의 한 흐름으로 존재했던 율법주의적 경향을 지나치게 무시했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2. 달라진 유대교, 달라진 바울 - 샌더스와 던, 그리고 새 관점의 시작
바울 자신이 유대교의 태반에서 자란 사람이었고(갈 1:11), 그의 칭의론이 율법(의 행위)와 믿음 간의 이항대립을 기본 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일세기 유대교의 재조명은 불가불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재조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신약학계 내에서 이는 일 세기 유대교에 대한 관심 자체가 많은 부분 바울에 대한 관심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일세기 유대교에 관한 다양한 주장들은 바울에 관한 나름의 주장을 제시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판단도 가능하다. 전통적 관점에 의하면, 유대교는 율법주의적 종교였다. 바울은 은총과 믿음을 무기로 삼아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한계를 비판했다. 그런데 샌더스는 유대교의 패턴이 율법주의가 아니라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주장했다. 만약 그의 주장이 옳다면, 바울의 율법(의 행위) 비판은 도대체 무엇을 겨냥한 것인가? 유대교 자체에서 별 문제점을 찾지 못한 샌더스는 비판의 원인을 바울 자신, 곧 바울의 배타적 사고방식의 탓으로 돌렸다. 그가 부활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된 것처럼, 예수가 구원의 해답이라면 율법을 포함한 다른 어떤 것도 해답일 수 없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불만은 율법 자체의 문제점 때문이 아니라 그저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다”는 사실이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다양한 비판들은 율법의 본질에 대한 논리적 반성이 아니라 상황의 필요에 따라 제시된, 따라서 신학적 일관성을 찾기 어려운, 임기응변식 논증들이다. 이후의 저서에서 샌더스는 바울의 율법 비판이 유대적 제한성을 겨냥한다고 말하지만, 이 역시 율법 자체의 한계성이 아니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열린 것이라면, 일체의 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바울 특유의 “극단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새 관점”(New Perspective)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Dunn은 샌더스의 유대교 평가에는 후한 점수를, 그리고 그의 바울 해석에는 낙제점수를 매긴다. 유대교의 “언약적 신율주의”는 잘 설명했지만, 이를 바울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Dunn은 바울의 복음 역시 근본적으로 유대교의 언약적 신율주의와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연속성의 틀 속에서 던은 바울의 율법 비판이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오해를 겨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곧 유대인들이 율법 자체가 드러내는 보편성을 무시하고 율법을 배타적, 민족주의적 정체성의 표지로, 곧 유대인과 이방인 차별의 근거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엄밀한 의미에서 바울 비판의 핵심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태도다. 곧 바울이 문제시하는 “율법의 행위”란 율법을 지켜 구원을 확보하겠다는 율법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신분 표지들을 가리킨다. 당시 사회에서 유대인/비유대인 구별의 대표적 표지들로 인식되었던 할례, 음식규정, 절기규정 등이 비판의 핵심으로 부각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바울의 비판은 하나님의 은총을 이런 언약의 표지들을 소유한 자들에게만 국한하려는 배타적 태도 혹은 정체성의 표지로서 율법이 수행했던 사회적 기능을 겨냥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의 율법 비판과 칭의론을 이해하려는 흐름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라 부른다.
잘 알려진 대로, “새 관점”은 어떤 특정한 학파가 아니라 바울신학계에 나타나는 공통된 흐름을 포착하는 표현이다. 바울 칭의론 및 율법 비판을 유대인-이방인 관계의 문맥에서 파악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새 관점으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입장을 하나로 엮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 나름의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 때 “새 관점”에 입각한 바울 해석을 내어 놓았다가, 이제는 보다 전통적인 해석으로 회귀한 Francis Watson은 “새 관점”의 특징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1. 믿음과 행위의 이항대립에 근거한 개신교적 바울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칭의 혹은 구원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진다는 기독교의 관점과 구원을 행위의 산물로 간주하는 유대교와의 대립은 바울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2, 70년 이전의 유대교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선택은 은혜에 의한 것이었고, 율법의 순종이 이 은혜 언약의 틀 속에서 이해되었다. 율법은 “getting in”을 위한 것이 아니라, “staying in”을 위한 것이었다.
3. 헬라 문화 속의 소수 그룹으로서, 유대 공동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상징하는 특정 요소들(할례, 음식규정, 절기규정)이 자연스레 두드러지게 되었다.
4.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선택과 자비에 관한 유대적 신념을 긍정하면서 또한 반대하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불변한 것으로 긍정하면서도, 그는 구원의 가능성을 유대인들에게만 국한하는 데는 반대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진술은 유대 공동체의 일원만이 참된 의인이라는 신념을 반박하는 것이고, 칭의가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진술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다.
5. 바울신학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시대착오적인 신학적 전제를 바울의 텍스트에 주입한 탓이다. 바울의 의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전제 없이 역사비평적 방법을 충실히 적용할 필요가 있다. 


3. 유대교로부터 바울로?   
샌더스는 일세기 유대교의 초상을 다시 그렸다. 공로주의 혹은 율법주의적 초상을 떼어내고, 언약적 신율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그림을 걸어 놓았다. 다수의 학자들이 이런 변화에 열광하지만, 우려의 목소리 역시 만만치 않다. 1977년 이후, 샌더스가 제시한 언약적 신율주의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서도 현대의 학자들은 초기 유대교가 샌더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흐름들을 품고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 율법주의건, 언약적 신율주의건, 이제 일세기 유대교를 단일한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바울 연구에서 일세기 유대교가 거듭 논의되는 것은 유대교가 바울 이해의 불가결한 실마리가 된다는 생각에서다. 이런 입장은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도, 바울의 칭의론은 대부분 유대교 혹은 율법과의 관련 속에서 다루어진다는 관찰에 근거한다. 그래서 전통적 바울 해석은 바울의 믿음-은총의 복음만큼이나 일세기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성격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하지만 일단 초기 유대교의 다양성이 수용된다면, 곧 율법주의건 언약적 신율주의건, 유대교가 특정한 하나의 틀로 제한될 수 없다면, 유대교로부터 바울에게로 이행하는 움직임은 불가능하다. 바울의 비판이 다양한 “유대교들”(Judaisms) 중에서 정확히 어떤 것을 겨냥하고 있는지 미리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으로 오히려 현실은 유대교에 관한 논쟁이 바울에 관한 논쟁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된다. 전통적 입장의 학자들이 초기 유대교 내의 율법주의적 흐름을 부각시키려는 노력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바울신학자들이 “묵시적 바울”이라는 용어를 공통으로 사용하면서도, “묵시적”이라는 개념을 자기 나름으로 조작하여 전혀 상이한 바울상을 만들어 내듯, 바울신학의 태반이 되는 일세기 유대교의 배경을 나름대로 채색하여 자신의 바울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단정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이는 유대교에 대한 차분한 관찰에 기초하여 바울을 바라보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한 마디로, 유대교 연구는 바울 연구를 위한 해석학적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없다. 유대교의 성격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 마당에, 바울 이해를 위한 노력은 결국 바울의 텍스트에 대한 천착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4. 바울서신의 상황적 성격과 유대교/율법의 문제 
이런 인식과 관련하여, 우리는 또한 바울의 목회적 편지들과 일세기 유대교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곧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같은 바울의 목회적 서신들이 일세기의 유대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냐 하는 물음이다. 바울신학자들은 모두 바울의 편지들이 상황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니까 바울의 편지는 특정한 가정교회 공동체 내의 매우 구체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물론 이런 지엽적 공동체의 문제거리라고 해서 이들이 일세기 유대교의 본질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무관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는 당연히 전제될 것이 아니라 주석적으로 증명되어야 할 사안이다. 가령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선동자들”의 영향을 받아 복음의 진리를 버리고 “다른 복음”을 좇아가는 갈라디아인들을 꾸짖고 설득한다. 이런 “바울 대 선동자/갈라디아인들”이라는 대결 구도가 바울 대 유대교, 혹은 바울 대 율법이라는 구도로 치환될 수 있는가? 보다 실질적으로, 갈라디아 내의 목회적, 현실적 갈등에 과한 역사적 탐구가 “바울 대 언약적 신율주의” 혹은 “바울 대 율법주의”라는 “신학적” 탐구로 변환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바울서신의 상황적 성격에 대한 학자들의 강조는 종종 자신의 견해에 어울리는 상황을 설정하기 위한 움직임인 수가 많다. 이런 경우 바울서신의 상황성은 바울의 메시지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현실적 틀이 아니라, 학자들이 생각하는 바울의 “사상”을 추출하기 위해 제거해야 할 일종의 해석학적 장애물로 전락한다. 바우어가 초대교회의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헤겔적 신학을 말하려고 했던 것처럼, 현대의 많은 학자들 역시 바울서신의 상황과 역사에 대한 물음을 지랫대 삼아 자기 나름의 (바울)신학을 말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울서신의 “신학”을 말하기 위해 이들의 “목회적” 성격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5. 전통적 관점의 모순과 새 관점
바울이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재검토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새 관점은 전통적 해석에 내재한 긴장 혹은 모순을 더욱 분명히 부각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바울은 분명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로마서에서 그가 칭의에 관해 내어놓는 첫 진술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다”라는 것이다(2:13). 전통적 바울 해석은 이 두 진술 사이의 긴장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 물론 율법/계명 준수의 요구는 이 구절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잘 알려진 대로, 바울은 한 번도 행위 심판 개념을 포기한 적이 없다(롬 2:6-11). 그는 종말론적 구원을 위한 순종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한다(갈 5:21; 6:7-9; 고전 6:9-10; 롬 6:19-23; 8:13). 하지만 이런 신념이 그의 이신칭의론 및 율법 비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선명하게 해명되지 않는다.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바울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개념, 혹은 모세의 법과 그리스도의 법을 구분해 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지만, 이들은 대부분 개념을 조작하려는 이론적 시도일 뿐, 이 두 법의 내용이 사실상 겹친다는 사실은 바꾸지 못한다.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율법 순종을 비판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구절들은 대부분 “율법의 행위들”에 대한 비판 혹은 율법에 대한 보다 일반적 진술들이다. 하지만 바울이 애초부터 믿음과 행위/순종을 상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면(살전 1:3; 갈 5:6; 롬 1:5),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실제로 율법의 요구건 자신의 도덕율이건, 바울의 비판은 언제나 성도들의 불순종을 겨냥하지 그들의 실천/순종 혹은 이를 위한 열심을 겨냥하지 않는다. 또한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바울의 대안은 “오직 믿음”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 곧 실질적 순종이었다(롬 2:29; cf. 갈 5:6; 고전 7:19). 행위 자체를 교리적으로 문제시 하는 전통적 해석은 바울서신 내의 이런 “율법주의적” 경향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 


6. 새 관점의 공헌 - 바울사상의 역사적 맥락
새 관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울의 칭의론이 드러내는 사회학적 차원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점이다. 부분적으로 이는  초기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인식의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스텐달이나 라이트의 경우에서 보듯, 이런 통찰 자체는 초기 유대교에 대한 관찰보다는 바울의 텍스트 자체를 관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바울의 칭의론이 대부분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혹은 율법 문제라는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전통적 관점에서 이 사실은 대부분 무시되거나 부수적인 현상으로 치부되었을 뿐, 이 주제가 바울의 칭의론에서 왜 그렇게  집요하게 나타나는지를 해명하지 못했다. 새 관점은 이런 텍스트 상의 현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것을 바울 칭의론의 주요한 차원으로 간주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바울의 칭의론은 바울이 유대교의 배타적 선택사상과 대결하는 구도 속에서 제시된다(갈 2:15; 롬 2-4장). 물론 이는 바울의 복음 그 자체보다는 바울의 복음이 선포된 초대교회의 역사적 정황과 관계가 깊다. 초대 기독교 자체가 유대교의 태반에서 자라난 것이었고, 당시의 유대교가 배타적 선민사상에 기운 상황이라면 바울의 “해답” 제시는 당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던 “가짜 해답”의 폭로 과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7. 새 관점의 부작용 - 구원론적 모호함
하지만 새 관점에 바울의 칭의론의 속내를 제대로 규명한 것 같지는 않다. 바울의 논증이 율법주의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밝힐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정작 말하고자 한 핵심을 건드리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이러한 실패는 바울의 논점을 “보편성-배타성”이라는 또 하나의 추상적 관점으로 파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말해, 흔히 제시되는 배타성-보편성은 도식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개념틀이 아니다. 유대적 요소로 인식되는 할례나 절기규정 등의 조건들을 요구하긴 했지만, 이방인의 개종을 막을 의사가 없었다는 점에서, 일세기 유대교가 본질상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같은 이유에서, 바울의 복음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절대적 조건을 단다는 점에서 마냥 보편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유대교와 바울의 차이는 결국 전이의 범위가 아니라 전이의 조건에 놓인다. 유대교는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의 행위를 요구했고, 바울은 이들의 무용성을 역설하며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유효한 해답으로 제시했다. 바울 자신이 복음의 유대적 성격을 강조하고, 또 믿음을 배타적 조건으로 내세우는 마당에, “율법의 행위”가 “유대적”이고 “배타적”이어서 문제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보다 실질적인 설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통상 새 관점의 학자들은 이 문제에 답변을 회피하거나, 이방인 선교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 때문인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 점에서 새 관점 학자들은 전통적 관점의 학자들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 출신 바울에게 있어 율법이란 그저 현실적 필요에 의해 손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주의가 이유가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적 해명으로서 새 관점이 갖는 한계를 잘 보여주는 현상의 하나가 바울 칭의론의 구원론적 차원을 평가절하하려는 시도들이다. 학자들은 종종 바울의 칭의론이 구원론적 문맥에서 제시되고 있음을 부인하고, 이를 그저 “사회학적” 혹은 “교회론적” 차원의 담론으로 제한하려 한다. (현재적) 칭의를 회심/부르심과 구분하고, 이를 언약 백성됨에 대한 법정적 선언으로 재정의하려는 Wright의 시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는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려는 의욕이 너무 넘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 관점 학자의 하나인 
갈링턴이 지적하듯, 바울의 칭의론은 분명 구원론이다. 이 점에서 일부 새 관점론자들은 주석적 측면에서 전통적 관점보다 더 후퇴한 면모를 보인다.
칭의는 구원론적 개념이다. 그리고 문제는 칭의의 범위가 아니라 칭의의 조건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칭의의 길로 제시했다. 그렇다면 제기되는 물음은 “왜 율법의 행위는 칭의의 수단이 아닌가?” 하는 것과, “왜 그리스도는 칭의의 해답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새 관점론자들은 바울의 기독론적 출발점을 해명의 대상으로보다는 유대교/율법 비판의 무조건적 전제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인다. 샌더스는 바울이 다메섹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가 해답임을 발견하였으며, 이는 그의 배타적 사고방식과 결합하여 “따라서 율법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들은 해답일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설명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바울이 왜 배타적 사고를 하고 있는가 해명되어야 하지만, 이에 대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새 관점은 율법주의가 비판의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은 강조할 수 있었지만, 그 비판의 진짜 이유를 해명하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혹은 바울 칭의론의 사회적 함의는 보다 분명히 밝힐 수 있었지만, 바울 복음의 신학적 논리를 밝히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8. “율법의 행위”와 율법의 도덕적 준수
위 논점을 구체화시켜 보자. 새 관점을 전통적 관점과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 개념의 하나가 바로 “율법의 행위”이다. 양 진영 모두에서 바울 비판의 핵심인 이 “율법의 행위”는 일세기 유대교의 성격을 집약하는 핵심 코드로 활용된다. 이 “율법의 행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반대하여 은총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고, 유대교의 배타적 선민사상에 반대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열린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한다. 일견, 이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 두 관점은 매우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는 공로주의적 색채에 초점을 맞춘 반면, 후자는 배타적, 민족주의적 경향에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은 강조점 혹은 해석의 문제일 뿐이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건, “율법의 행위”의 실질적 내용은 다르지 않다. 곧 두 관점 모두 이 “율법의 행위”가 율법의 (도덕적) 준수를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 순종이 완벽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거나(전통적 관점) 배타적이어서 문제가 될 수는 있지만(새 관점), 비판되는 이 “율법의 행위”가 율법의 실제적 실천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의문시되지 않는다. 사실 율법의 사회학적 기능을 부각시킨 Dunn의 초기 진술들은 전통적 입장과는 달리 “율법의 행위”를 할례, 음식규정, 절기규정 등의 요소로 국한하는 것으로 비쳐질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Dunn은 자신이 한 번도 “율법의 행위”에서 율법의 도덕적 요소를 배제한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물론 이런 항변의 배경에는, 초기 유대교가 율법을 하나의 전체로 보았다는 생각, 곧 할례 등의 특정적 요소들과 도덕적 계명들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비판이 깔려 있다.  하지만 이런 항변은 오히려 자신이 주창한 새 관점의 가능성 자체를 포기하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바울의 비판이 할례, 음식규정, 혹은 절기규정 같은 율법의 특정한 요소들 뿐 아니라 율법의 도덕적 준수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면, 이런 비판을 바울의 윤리적 권면과 연결할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진다. 따라서 바울의 율법 비판을 그의 윤리적 권면과 조화시키려는 시도, 혹은 바울이 비판하는 “모세 율법”과 그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의 율법” 간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시도 면에 있어서는 전통적 관점이나 새 관점 사이에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어느 쪽도 논리적으로 선명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9. 문제의 핵심 - 율법에 대한 불순종
물론 문제의 핵심은 주석적인 것이다. 필자는 여러 번, 율법주의적 의미에서건 언약적 신율주의의 관점에서건, “율법 준수에 열심인 유대인들”이란 그림은 바울 자신의 명시적 진술과 어긋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갈라디아 선동자들에 대한 바울의 진술로부터는, 전통적 율법주의건 언약적 신율주의건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혹은 지키려는 이들을 도출할 수 없다. 바울은 그들이 할례에는 열심이면서도 율법을 지키는 일에는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비판하고(6:13), 갈라디아인들에게도 그런 순종의 필요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으로 묘사한다(5:3). 그러니까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들은 학자들이 발견해 낸 통상적 유대교 초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전통적 유대교 상을 배경으로 놓고 바울의 신학적 논증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불가불 바울의 의도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바울의 선동자들을 율법 준수에 열심인 자들로 그리려는 것이 최근의 전반적 경향이지만, 필자가 지적한 것처럼 이는 호의적 유대교 관을 지키기 위해 바울의 명시적 진술을 무시하거나 뒤집은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의 칭의론은 율법준수에 열심인 그룹이 아니라 할례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율법 준수에는 무관심한 그룹을 전제로 해석되는 것이 마땅하다.
로마서에서의 유대인 비판 역시 전형적 유대교 상과 어긋난다. 로마서 2-3장의 신랄한 비판은 유대적 정체성을 자랑하면서도 실제 율법을 지키지 않는, 혹은 지킬 의사도 없어 보이는 이들을 겨냥한 것이지, 율법주의자들이나 언약적 신율주의자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그려내는 그림은 율법을 지키려고 나름 애를 쓰지만 완벽함이라는 기준에 못미치는 안타까운 모습도 아니며, 율법을 잘 준수하지만 그것을 배타적 국수주의로 채색해 버린 서글픈 상황도 아니다. 바울의 논증은 시종일관 순종-불순종의 대립을 설정할 뿐, 순종의 수준이나 순종의 의도 같은 물음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2-3장의 공격이 이어지는 칭의론의 발판을 맞다면, 거기서 바울이 개진하는 “율법의 행위 대 믿음”의 이항대립은 율법주의자룰 겨냥한 것이나 샌더스 판(版) 언약적 신율주의자들을 겨냥한 것도 아니라, 외적 정체성을 자랑하면서 실천적 순종은 보이지 못하던 종교적 위선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또한 할례 등과 같은 “율법의 행위들”과 율법에 대한 순종을 구분하는 바울의 논법을 관찰해야 한다. 물론 이는 초기 유대교에서 율법이 하나의 전체로 이해되었으며, 할례가 결코 다른 도덕적 계명들과 분리될 수 없었다는 통상적 판단과 어긋난다. 하지만 이 점에서 할례 문제를 “율법 지킴”(갈 6:13) 혹은 “하나님의 계명”(고전 7:19)과 구별하는 바울의 진술 또한 자명하기 그지없다. 바울의 비판은 갈라디아의 선동자들이 할례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율법의 “다른” 계명들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6:13). 할례 역시 하나님의 계명의 일부이지만, 바울의 논법에서 이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무할례자들의 율법 실천에 관한 논의에서 분명해지듯, 로마서에서도 할례는 “율법의 요구들”을 실천하는 것과 분명히 구분된다(롬 2장; 8:4). 여기서도 우리의 출발점은 할례와 율법 실천을 구분하는 바울의 텍스트여야지, 할례가 율법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학자들의 요구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필자는 바울이 믿음과 대조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는 결코 율법의 도덕적 실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바울의 논법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런 방법은, 바울 자신의 논법처럼, 이 “율법의 행위들”을 할례, 음식규정, 절기 규정 등, 율법의 실천과 구분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구약 내에서 이미 제의와 윤리적 순종의 구분이 이루어지고, 할례와 참된 언약적 정체성이 구분된 것이 분명하다면, 바울이 할례와 율법 순종을 구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새 관점주의자들은 애초부터 “언약적 신율주의” 곧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함으로써 바울이 제시하는 비판의 핵심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 새 관점론자들은 전통적 해석을 비판하며 우리는 자신의 구원론적 관심을 바울의 텍스트에 투영했던 루터의 실수를 반복하는 대신, 바울의 텍스트 자체의 본래 의미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새 관점 역시 이런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그림을 바울의 텍스트에 강요하면서 바울의 비판 자체를 소홀히 읽는 면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일세기의 유대교가 어떤 성격의 것이든,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언약적 신율주의자들이 아니라 외적 근거들로 선민의 정체성을 내세우면서도 율법 실천을 바탕으로 한 내적 정체성은 보이지 못했던 위선자들이다. 바울의 믿음과 은혜의 칭의론은 율법주의나 언약적 신율주의가 아니라, 바로 당시 유대인들의 “값싼 은총 교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점에서 바울의 비판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외적 정체에 기대를 걸었던 자들을 향한 세례요한의 비판 및 속은 더러우면서도 겉을 꾸미는 것으로 해답을 삼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의 비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물론 이는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선지자적 비판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바울의 복음 역시,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불순종이라는 비극적 현실 및 이 불순종을 야기하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불순종/죄의 문제를 해결해 가시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10. 옛 관점, 새 관점, 그리고 바울(을 빙자한 필자)의 관점
한 가지 간단한 물음을 제기해 보자. 바울이 왜 율법을 비판했는가에 대한 통상적 설명들은 바울서신에 명시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바울의 진술을 근거로 학자들이 추론한 것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할까? 복음의 핵심을 숨기는 것이 바울 전도의 전략이 아니었다면, 분명한 복음을 만천하가 알도록 제시하는 것이 바울의 원칙이었다면, 왜 바울은 자신이 율법을 비판한 이유를 명시적으로 선포하지 않는 것일까? 만약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지 않았을까?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하는 “율법의 행위”가 사실은 “충족되지 못한” 율법의 행위/요구”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왜 바울은 그 핵심적인 대목을 생략해 버렸을까? 반대로, 바울이 율법의 배타적 기능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비판한 것이라면, 바울은 왜 한 번도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일까? 혹은 바울의 명시적 진술을 우리가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 율법의 행위를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관찰은 중요하다. 전통적 관점이나 새 관점론자의 주장과는 달리, 문제의 핵심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바울의 생각 속에서 할례, 곧 율법의 행위들은 무의미하거나(갈 6:15) 무력하다(갈 5:6). 로마서에서도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으로 인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하다”는 한계에 직면한다(8:3). 그래서 율법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아니면 “의문/글자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불만은 율법 자체에 내재한 교리적 혹은 사상적 문제점 때문이 아니라 율법이 지니고 있는 태생적 무능력 때문이다. 율법은, 혹은 “율법의 행위들”은 나쁜 것이 아니라 소용이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를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로 표현한다(3:2-5). 율법은 “생명을 주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율법이 칭의의 길이 아니라는 주장 역시 같은 의미다(3:21). “율법의 행위”에 속하는 할례나 무할례는 신자들을 의의 소망으로 인도할 능력이 없다. 믿음이 참된 대안이 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율법의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무할례 역시 해답이 아니다. 할례/무할례와 무관하게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울이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 믿음을 통해서만 신자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갈 3:2-5, 14, 5:5). 예수의 죽음이 성령 주심을 위한 것이라는 바울의 주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3:13-14; 4:5-7). 그리고 바울은 이 성령을 종말론적 “의의 소망,” “하나님 나라” 혹은 “영생”의 불가결한 관건으로 제시한다.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5:5), 육체의 일들 대신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며(5:19-25), 육체가 아니라 성령 안으로 씨를 뿌림으로써 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수확한다(6:7-9). 그래서 성도들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5:16-18, 25), 그리고 이 믿음의 달음질에서 좌절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는다(6:10).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적 정체성이 나쁘다고 말하는 대신, 외적 정체성이 무익하다고 말한다. 바울이 생각하는 대안은 유대적 정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성경적 의미의 정체성 확보, 곧 외적 조건들이 아닌 참된 순종에 기초한 언약 백성됨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의 할례”라는 구약적 개념을 참된 대안으로 제시한다. 물론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는 이 마음의 할례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영으로 되는 것이지 의문/글자로 되는 것이 아니라”라 말한다(2:29). 생명의 성령을 통해 우리가 죄와 사망의 길에서 해방되고, 또 성령을 따름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이룬다는 진술이 바로 그런 의미다(8:2-4). 바로 여기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선언이 가능해진다(8:1). 아브라함의 믿음-칭의가 할례와 무관하고(4:1-12), 오히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한 부활신앙의 표현이라는 말은, 그리고 바로 이런 부활신앙 차원에서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이 통한다는 설명은 복음 속에 약속된 성령과 새 생명의 역사를 부각시키려는 노력들이다(4:17-24). 바울이 믿음을 칭의의 유일한 통로로 제시하는 것은, 칭의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 곧 그의 영으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새창조의 역사를 필요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칭의를 위해 살아나셨다는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