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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론

벌코프(L. Berkhof)의 神論 요약

벌코프(L. Berkhof)의 神論 요약
신원균 목사
서론
오늘은 벌콮의 조직신학 가운데 신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각 장마다 중요한 내용이 많지만 여기서는 교회사적으로 논쟁의 핵심이 되었던 것들을 중심으로, 개혁파 신학(혹은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 내용을 발췌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성경의 바른 내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고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제1부 하나님의 존재
1. 하나님의 존재
루이스 벌콮은 ‘교의학에 있어서 신론의 위치’에 대해서 중요하게 다루는데, 그것은 교의학이 신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벌콮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실은 언제나 가장 논리적인 순서로 인식되어 왔으며, 여전히 그와 같은 견해가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교의학의 의도하고 있는 바가 하나님에 관한 연구인데 이것은 교의학의 첫 번째 주제(locus)가 하나님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논의하고, 나머지는 간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교의학을 다루는 좋은 방식으로는 삼위 일체론적인 방법이 정통적이라고 한다. 삼위 일체론적 방법이란 교의학이 한 주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주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에 관한 연구임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한 방식이며, 교의학의 주제 자료를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가지 제목하에 정돈하는 방식이다. 
19세기초에 이르기까지는 교의학 연구를 신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관례였으나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영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가 제시한 새로운 방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 신학의 자료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권위 있는 계시로서의 성경에 대한 신앙이 불신을 받게 되었으며, 인간 스스로의 감정적이거나 혹은 합리적인 이해에 근거한 인간의 통찰이 종교적인 사상의 표준이 되었다. 또한 슐라이에르마허의 교의학의 잘못은 앞에서 정통적으로 받아들였던 내용을 모두 버렸다는 데서 그 문제점의 심각성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슐라이에르마허의 교의학은 하나님에 관한 연구(신론)에서부터 교의학을 시작하는 일을 부적당한 것으로 여겼다. 둘째, 슐라이에르마허의 교의학은 종교의식과 그 안에 내포된 교리들의 연구와 분석에 치중한 것으로서 신론을 연속적인 것이 아닌, 단편들 속에서만 다루었다. 이것은 삼위 일체론적 방식의 교의학의 내용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벌콮은 슐라이에르의 이러한 교의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의 출발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학적이다”
벌콮은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신학의 위대한 전제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적으로 합리적인 전제로 간주하지만, (슐라이에르마허의 방식과 같은)합리적인 논증에 의하여 이러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증거에 기초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벌콮은 이 증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된 말씀인 성경 안에서 발견되며, 이차적으로 자연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바울의 지적은 정당하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 21).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다양한 이론들’도 있다. 이에 대해서 벌콮은 시편 10:4, 시 14:1, 엡 2:12절에서 말하고 있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을 대표로 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자(불가지론자, 독단적 무신론자, 이론적 무신론자)들과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부인을 포함하고 있는 현대의 여러 가지 그릇된 신(내재적이며 비인격적인 신, 유한하며 인격적인 신, 단순한 추상적 관념의 인격화로서의 신)에 대한 관념들을 갖고 있는 자들을 들고 있다. 
벌콮은 신의 존재에 관한 소위 이성적인 논증들(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 도덕적 증명, 역사적 혹은 인종학적 증명)에 대해서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논증들에 대해 “우선 신자들에게는 이 증명들이 필요없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그들의 믿음은 논증들이 아닌,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아울러 “만약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성적 증명들 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인정하기를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인되 있는 것이다”라고 까지 언급하며, 그러한 이론들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러한 증명들을 불신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사용할 때, 이것들 중의 어떤 것도 그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확신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2.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가능성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 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다는 입장과,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거나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입장과, 인식 할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개혁파의 입장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끝으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의 필수 조건인 자기 계시에 있어서 바르트의 계시관을 살펴보자.
(1) 먼저는 하나님의 인식 가능성에 관해서 부정하는 자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헉슬러(Huxley)이며, 그는 자신과 같은 입장을 가리켜 불가지론자(agnostics)라고 했다. 이들의 기본 입장은 인간의 정신이 자연 현상들을 넘어 있는 것과 그 배후에 있는 어떤 것을 알 수는 없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초감성적이고 신적인 사물들을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 후 흄(Hume), 칸트,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꽁트(Comte),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와 같은 인물들이 불가지론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2) 다음은 하나님의 인식의 가능성을 긍정하긴 하지만 너무 지나친 자들이다. 4세기의 아리우스주의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유노미우스(Eunomius)는 하나님의 단순성, 즉 하나님께 있어서 인간의 지성에 의하여 온전히 알 수 없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3) 이에 반해서,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서 그의 본성에 관한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조명하시는 성령의 영향하에서 오직 특별 계시로부터만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께서 알려지실 수는 있지만 인간이 어떠한 방법으로도 철저하고 완전한 하나님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하나님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유한이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나아가서 인간은 하나님을 적절한 의미의 말로 정의할 수 없으며, 오직 부분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어떤 고차원의 유(類) 개념하에 내포될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논리적인 정의는 불가능하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신적인 목적을 완전히 실현하기에 적합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주장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오직 신적인 자기 계시를 통하여, 그리고 오직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4) 바르트는 종교개혁 이후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유럽을 휩쓸었던 계시관을 거부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특별히 계시의 주체에 관심을 두고, 교회를 주관에서 객관으로, 종교에서 계시로 돌이키기를 원했다. 계시는 결코 어떤 지평선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다. 계시는 항상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며, 인간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것, 즉 인간이 이전에는 알 수 없었으며, 오직 하나님이 주신 신앙에 의해서 계시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진정한 계시가 되는 새로운 것을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가져오시는 하나님이다. 바르트는 심지어 계시를 화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계시에서 주권적이며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계시는 인간이 언제든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명백한 한계들을 가진 사실상의 현재적이며 객관적인 형태를 결코 취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을 이차적인 의미에서의 계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입장에 대해서 벌콮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실존적인 계기 속에 있는 인간에게 어떤 매개를 통해서 오든지간에 그것은 언제나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된 말씀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관계
4. 하나님의 이름들
벌콮은 하나님의 이름은 그 분의 자기 계시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존재의 깊이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명칭인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의 일반적인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표현하는 많은 이름(구약에서는 El, Elohim, Elyon, ’Adonai, Shaddai, ’El-Shaddai, Yahweh, Yahweh Tsebhaoth, 신약에서는 Theos, Kurios, Pater)으로 갈라진다. 우리가 지금 여러 형태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오로지 이름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들은 비록 인간의 언어에서 모든 것을 차용하며 인간과 세속적인 관계들로부터 유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창안이 아니라 신적인 기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이름들은 신인 동형론적이며,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5. 하나님의 속성 개요
벌콮은 속성(attributes)라는 용어에 대해서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것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지정한다는 개념을 시사하며, 따라서 신적 존재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성’(properties)이라는 용어가 더 좋은데, 이는 하나님께만 고유한 어떤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벌콮은 스콜라주의, 매킨토쉬(Macintosh), 리츨(Ritschl), 브라운(W. A. Brown)의 ‘하나님의 속성을 결정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러한 모든 방법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경험에 그 출발점을 둔다고 평가하였다. 그들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명료한 자기 계시를 고의로 무시하고, 하나님에 관한 인간적인 발견의 개념을 강조한다고, 그런 방법들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입증된 ‘과학적인 방법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본성을 귀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과장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벌콮은 점점 더 강하게 비판하는데, 그들의 방법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대하여 눈을 감아 버린 것이며,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며, 하나님의 초월성을 희생하고 그의 내재성을 강조하며, 또한 하나님을 세계와 연속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철학의 최종적인 결과는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적인 속성에 관하여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적절한 방법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자연의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위대하심과 권능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속성에 대한 적절한 개념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계시 신학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속성인가는 배우려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연구 대상에서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끌어낼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에 관한 지식, 즉 인간이 단지 수용하여 획득할 수 있는 지식만을 전달하시기 때문이다. 
속성을 분류하는 분류법은 크게 4가지가 있는데 벌콮은 그 중에 가장 일반적인 것은 ‘비공유족 (incommunicable) 속성과 공유적(communicable) 속성의 구분이라고 한다. 
6. 비공유적 속성(절대 존재로서의 하나님)
벌콮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무한자이지만, 동시에 전체적으로는 그의 창조와, 또한 그의 피조물들과 자유롭게 여러 가지 관계를 맺으실 수가 있는 분이다. 따라서 비공유적 속성은 하나님의 절대 존재를 강조한 반면, 공유적인 속성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과 여러 가지 관계를 맺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 하나님의 자존성 : 개혁파 신학자들은 아주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존재에 있어서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것, 즉 하나님의 덕성과 명령과 사역 등에 있어서도 독립적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 용어를 독립성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2) 하나님의 불변성 :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가운데 ‘불변성’의 속성은 매우 중요하다. 벌콮이 지적하는 것은 이 속성이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우스주의자들, 그리고 범신론자들과 차이가 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그의 존재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지식과 의지에 있어서 변화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결단이 인간의 행동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잘못된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또 이 속성이 범신론자의 견해를 반대하는데, 범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절대 존재보다는 오히려 영원히 생성하시는 분으로 여기고 무의식적인 절대자가 점차로 인간 속에서 의식적인 인격성으로 발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이 속성에 대한 역사적으로 바른 이해는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완전성과 목적과 약속에 있어서 전혀 변경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생성하는 것보다 높으며, 존재나 속성에 있어서 증감과 성쇠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지식과 계획, 도덕적인 원리들과 결의는 영원히 동일하다. 나아가 이성조차도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변화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불변성은 다음의 성경 구절들 속에서 잘 가르쳐지고 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시 102:26-28)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히 1:11)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이 외도 사 41:4; 48:12; 말 3:6절과 같은 성경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도 있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 32:10,14)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벌콮에 의하면 이러한 말씀들(잠 11:20; 12:22; 시 18:26,27 포함)을 근거로 하나님의 의도를 후회하시며 변경하시는 분으로, 회심 전과 후에 달리 대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신적인 불변성을 이해할 때는 하나님 안에서 아무런 운동도 없는 것으로, 부동성(immobility)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을 순수 행동으로, 즉 언제나 활동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이 아주 관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중의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사실, 즉 인간과 함께 살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주변 즉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는 변화가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목적, 행동의 동기와 약속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러한 예로 ①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며, 이러한 목적이 하나님의 의지의 영원 불변한 행동에 의하여 실현되었으므로 하나님 안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②성육신은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 그리고 그 목적에 있어서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영원히 선한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말씀들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고 벌콮은 말한다. 만약에 성경이 하나님의 후회와 하나님이 의도를 변경하시는 것과 회개하는 죄인에 대하여 관계를 변경하시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이 단지 신의 감정을 사람의 감정처럼(anthropopathic) 표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3) 하나님의 무한성
(4) 하나님의 단일성
7. 공유적 속성(인격적인 영으로서의 하나님)
벌콮은 ‘인격적인 영으로서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히브리어 파님(panim)과 헬라어 프로소폰(prosopon)과 같은 말들이 ‘인격’의 개념에 아주 가까운 표현으로 쓰이고 있지만, ‘인격’이라는 용어가 하나님께 적용되지는 않으며, 동시에 성경은 한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증거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인 동형 동정론적인 표현들을 하나님의 순수 영성과 거룩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그러한 표현들이 존재에 적용될 때 인간적인 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인격적인 속성을 가진 진정한 인격이라는 전제을 떠난다면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럴 때, 하나님은 인간이 함께 얘기할 수 있고, 인간들이 신뢰할 수 있으며, 고통 속에서 인간들을 붙드시며, 인간의 마음을 구원과 승리의 기쁨으로 채우시는 인격적인 분으로 철저하게 나타나신다. 따라서, 벌콮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갖고 다음과 같이 그 속성들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A. 하나님의 영성
B. 지성적인 속성들
a. 하나님의 지식
b. 하나님의 지혜
c. 하나님의 진실성
C. 도덕적인 속성들
a. 하나님의 선 :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선, 사랑, 은혜, 긍휼, 오래 참으심
b. 하나님의 거룩함 
c. 하나님의 의
D. 주권적 속성들
여기서 우리가 좀더 살펴 보아야 할 내용은 ‘주권적 속성’에 관련된 부분이다. 신적인 의지는 성경에서 만물의 궁극적 원인으로 나타난다. 모든 일(창조와 보존, 통치, 선택과 유기, 그리스도의 고난, 거듭남, 성화, 신자들의 고난, 인간의 삶과 운명, 생명에 대한 지극히 작은 것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요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이 항상 하나님의 의지를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인식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의지와 죄의 관계’이다. 그럴 때 오해를 하는 문제는 대부분 하나님의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알미니우스주의자들과 개혁파 신학자들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 난제를 피하기 위하여 사람이 선택할 진로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하나님의 의지가 죄를 허용한 것이라 한다. 한편 개혁파 신학자들은 행 2:23; 3:18과 같은 구절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작정적인 의지에 인간의 죄악된 행동이 포함된다고 주장하나,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언제나 주의 깊게 지적한다는 것이다.
8. 성 삼위 일체
삼위 일체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가 이미 1999년 6월에 ‘여름 정기 세미나’에서 함께 살펴 본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자료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벌콮은 다른 장에서는 대개 초대 교회 교부들, 중세 신학자들, 종교 개혁자들, 현대 신학자들의 신학적 내용을 살펴보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8장에서는 크게 종교개혁 이전과 종교개혁 이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개 다른 장에서는 그러한 교리의 핵심적인 내용들이 어거스틴을 거쳐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잘 정리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종교 개혁 이전에 잘 진술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높이 평가하며, 다마스커스의 요한의 저작을 소개하고 있다. 벌콮은 종교 개혁 이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종교 개혁 이후에는 삼위 일체론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으며, 초기의 몇 가지 잘못된 삼위 일체론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초기의 잘못된 삼위 일체론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하나님의 유일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세 위격의 구분을 무시한 형태이다. (1)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신성 안에 인격적인 구분들을 아예 무시해 버렸으며, 더러는 성 삼위 일체의 제 2위와 제 3위의 본체적인 신성에 대해서 충분히 정의하지 못했다. (2) 터툴리안은 최초로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였지만 성자를 성부에 종속시켰다. (3) 오리겐은 터툴리안 보다 훨씬 더 나아가서 ‘본체에 관해서는’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으며, 성령은 또한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그는 신성의 이러한 두 위격에서 본체적인 신성을 감소시켰던 것이다. (4)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를 성부의 제1피조물로, 성령을 성자의 제1피조물로 묘사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부와 함께 성자와 성령의 동질성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희생되었으며, 신성의 세 위격들은 지위에 있어서 달라지게 되었다. (5) 그 후 단일신론(Monarchianim)에 의하여 하나님의 신성의 세 위격은 완전히 희생되었다. 
둘째, 세 위격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세 위격을 분리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을 파괴한 형태이다. (1)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은 예수 안에서는 인간만을, 성령 안에서는 신적인 영향력만을 보았다. (2)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은 성부, 성자, 성령을 신적 본체가 계속적으로 나타난 현현의 세 모양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삼위 일체론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회의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주후 325년에 니케아(Nicea)회의에서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 본질임을 선언했고,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hople)회의에서는 성령의 신성과 삼위의 상관 관계에 관해서 선언했던 것이다. 그 후 어거스틴을 거쳐 정립된 바른 내용으로 벌콮은 다음과 같이 6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신적인 존재 안에는 유일의, 구분할 수 없는 본체가 있다(ousia, essentia). ② 이러한 한 신적 존재 안에는 세 위격들 혹은 개별적인 실체들(subsistences),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존재한다. ③ 하나님의 나누어지지 않은 전 본체(질)가 삼위의 각자에게 동등하게 속한다. ④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위의 실존과 활동은 분명하게 정해진 순서로 표시된다. ⑤ 삼위가 구별되는 어떤 위격적인 속성들이 있다. ⑥ 교회는 삼위 일체를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로 고백한다.
제2부 하나님의 사역
1. 하나님의 작정 개요
벌콮은 하나님의 작정의 교리가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루터파 신학과 큰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1)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무엇이 일어날지를 주권적으로 결정하셨으며, 또한 그의 예정이 계획에 따라 자연계와 초자연계에 걸친 그의 전창조 사역에서 그의 주권적인 의지를 작용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바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엡 1:11)라는 말과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보았다. 벌콮은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실제적으로 홀로 작정에 관한 교리들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작정의 교리를 강조하는 신학이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2) 벌콮이 말하는 루터파 신학은 이 점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과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루터파 신학은 훨씬 덜 신학적이며, 보다 더 인간학적이다. 그것은 일관성 있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며, 만물을 신적으로 예정된 것으로 간주하나 사물을 위로부터 보다는 아래로부터 고려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예정을 믿는 데 있어서도 예정을 세상에 있는 선한 것, 좀더 특별하게는 구원의 복들로 국한하는 경향이 있다. 루터파의 많은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작정 교리에 관하여 침묵하고 있거나 거의 침묵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단지 예정론만을 논의하고 또한 이것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조건적 예정으로서만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 현저한 사실이다. 벌콮은 이러한 루터파 신학에 대해서 한 마디로 “예정론에 있어서 루터파의 신학은 알미니우스주의와 매우 유사하다”라고 평가한다. 
벌콮은 하나님의 작정의 특징을 7가지 들고 있다. (1)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기초하고 있다. (2) 그것은 영원하다. (3) 그것은 효과적이다. (4) 그것은 불변적이다. (5) 그것은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이다. 이것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과 다른 내용이다. 이것은 작정이 어떤 점에서든 작정 그 자체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닌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획의 실행은 방편을 필요로 하거나 어떤 조건들에 의존할 수 있지만, 그때에 이 방편들이나 조건들은 또한 작정 속에서 결정되었다. 하나님의 작정을 실행하는 방편들을 결정함이 없이 죄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는 일은 전혀 없다. 예정된 목표에 이르는 방편들도 역시 작정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 2:23)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그리고 (6) 그것은 보편적이거나 전포괄적이다. (7) 죄에 관해서 그것은 허용적이다는 특징을 말한다. 작정 교리에 대한 반론들은 앞에서 말한 알미니우스주의자들과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이에 대해서 벌콮은 3가지를 들고 있다. (1) 작정 교리는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상반된다. (2) 그것은 인간의 노력을 위한 모든 동기를 박탈한다. (3) 그것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 
2. 예정
벌콮은 작정에 관한 교리의 내용과 예정은 ‘여전히 동일한 주제’라고 말한다. 다만 작정 교리가 ‘일반적인 논의’라면 예정 교리는 ‘특수적인 논의’라는 것이다. 벌콮에 의하면, ‘예정’이라는 말은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때때로 그것은 일반적인 단어인 ‘작정’과 동의어로 쓰인다. 다른 경우에 예정은 그의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표시한다. 그러나 대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의로운 유기를 말하는 타락한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나타낸다고 본다. 벌콮은 이 마지막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예정론에 관해서 주요 논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른 ‘절대 예정’이냐, 아니면 인간의 구원의 공로에 의한 ‘조건 예정’이냐. 둘째, 선택과 유기를 다 인정하는 ‘이중 예정(쌍방 예정)’이냐, 아니면 유기를 무시하고 선택만을 인정했느냐. 개혁주의 신학은 절대 예정과 이중 예정을 믿는다. 이것은 성경을 근거로 할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입장이었고, 종교개혁시대에 칼빈과 그 후 17세기 도르트 신조에서 이를 확고히 하고 있다. 
3. 창조 개요
4. 영적인 세계의 창조
5. 창조에 대한 성경의 설명
6. 섭리
벌콮은 섭리는 창조주가 모든 그의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활동하시며, 만물을 그들의 지정된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신적 에너지의 지속적인 실행이라고 정의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정의는 섭리에 3가지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는데 보존(preservation), 협력(concurrence 혹은 cooperation), 통치(government)이다. 섭리의 교리에 있어서 교회사적으로 많은 논쟁을 하였던 내용은 다음 2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이고, 둘째는 그에 따른 죄의 책임에 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교회사적으로 잘못 이해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한 형태이다. 여기에는 세계가 우연에 의하여 다스려진다는 에피큐로스 학파가 있는가 하면, 스토아적 운명론을 반대하고자 인간의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를 부인한 초대 교부들의 잘못도 있다. 그리고 18, 19세기에 들어서서 나타난 이신론(하나님이 창조 사역 이후 세계로부터 스스로 물러나셨다고 묘사)과 범신론(하나님과 세상을 동일시하고 창조와 섭리간의 구분을 철폐하고 제2원인의 실재를 부인함)이 있다. (2)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형태이다. 여기에는 세계가 운명에 의하여 다스려진다는 스토아적 입장이다. (3)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내용과 인간의 책임성에 대한 내용에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벌콮이 제시한 섭리의 3가지 요소 중 협력은 개혁주의 입장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섭리론에서 잘 드러난 내용이다. 어거스틴은 운명론과 우연론에 반대하여 만물이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지혜로우시며 선하신 의지에 의하여 보존되고 다스려진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하여 아무런 유보 조항도 만들지 않았으나, 세상에 똑같이 존재하는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주장하였다. 제2원인의 실재성을 방어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호하였고, 인간의 책임성을 확인하였다. 벌콮은 협력을 미리 제정된 그들의 작용 법칙에 따라 그들을 행동하게 하고 정확하게 행동하게 하는 모든 종속적인 능력을 소유한 신적인 능력의 작용이라고 정의한다. 신적 협력의 특징은 (1) 그것이 시간적이 아니라 논리적인 의미에서 선행적이고 선결정적이다는 것, (2) 신적인 협력은 또한 동시적인 협력이라는 것, (3) 신적인 협력은 직적접인 협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야할 오류들이 있는데 그것은 (1) 신적 협력이 결코 특정한 행위를 결정하지 않고 단지 능력의 일반적 전달이라는 것, (2) 신적 협력은 인간이 일부를 행하고 하나님이 일부를 행하는 그런 성격과 같은 것이라는 것, (3) 협력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인간의 사역은 대등하다는 것이다. 
질문 및 토의 사항: 
1) ‘웨스트민스터에서 제안하고 있는 구분’이란? (249쪽 1줄)
2) 댑니(Dabney)는 개혁파 신학의 엄밀한 성격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 학자인가? (257, 319쪽)
3)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해서?(286쪽 이하)
4) 하나님의 작정과 죄의 문제를 푸는데 ‘허용적 작정(permissive decree)’이라는 개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인가?(305쪽)
5)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의 삼위일체에 관한 저서는 무엇인가?(280쪽)
6) 벌콮은 ‘협력’을 concurrence 혹은 cooperation 이라고 표현했는데, 2 단어를 같게 사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지?(374쪽 2번째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