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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철학

비트겐슈타인은 19세기 후반 유대인의 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유력한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해서 당대 최고의 음악가 브람스, 슈만, 말러 등을 집에 초대해 연주회를 열곤 했다. 집은 예술가와 문객들이 끊이질 않았다. 불행하게도 그의 세 형은 자살을 했고 비트겐슈타인도 그 충동에 오래 시달렸다. 그나마 파울이란 형은 피아니스트였는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오른 팔을 잃고 말았다.
비트겐슈타인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전선의 맨 앞에서 용맹하게 싸웠으며 퇴각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일기처럼 글을 썼고 종전 후 이걸 모아서 성경처럼 번호를 매겨 출간했다. 이게 그 유명한 "논리철학논고"이다. 이 책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단 번에 유럽 지성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마침 종전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을 상속하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사두었던 미국 국채가 엄청 나게 올라 부호였던 집안이 세계적 부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내고는 철학이 끝났다고 하며 시골의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그 막대한 재산도 가나한 예술가와 지인들에게 익명으로 기부하고 한칸 방이면 충분하다며 소박한 삶을 이어갔다.
원래 공고를 나온 그는 공학에 관심이 많아 캠브리지 공대에 진학했었는데 거기서 세계적 논리학자 프레게의 소개로 러셀을 만나게 된다. 기실 러셀의 책을 읽고 매료되서 부탁한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이었다.
러셀을 그를 계속 설득해 강단에 세우려 했다. 그가 논고를 출판할 당시 그는 학위가 없었다. 철학이 끝났다던 그는 초등학교 교사 경험 때문이었을까 캠브리지 강단으로 돌아 온다. 논고는 3인칭과 1인칭만 가득하다. 그림이론으로 세상은 담는 언어는 그림이라고 밝혔다.
그랬던 그가 철학적 탐구에서는 플라톤의 대화편처럼 상인과의 대화 등을 일상 언어를 싣는다. 사실 탐구는 그의 제자들이 사후에 3만쪽이 넘는 그의 노트를 모아 발표한 유작이었다.
전기는 논고라는 논리적 규칙성에 입각한 그림이론, 후기는 말이란 그 사용법에 의미가 있다는 일상언어로 입장이 바뀐다. 그는 사적 언어는 불가능하며 언어란 공적 약속이라고 보았다.
그는 강단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는데 그 당시 비트겐슈타인은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수업은 거의 받아쓰기였다고 한다. 이런 삶에 매력을 못 느껴 다시 은퇴하고 시골에서 홀로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는 전립선 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 자기 인생이 멋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1999년 TIME지가 선정한 20세기 위대한 활동을 한 24명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업적은 오늘 성경 해석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케빈 벤후져의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해석학은 비트겐슈타인이 그 기원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보면 그는 그의 사명을 위해 누추하고 초라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도 명예나 가진 돈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겼다. 한 명의 철학자가 진리를 위해 이러하거든 생명을 얻는 진리를 가졌다는 오늘의 목회자들은 너무 대조적이다.
예전에 어느 미국 목사가 친구였던 코메디언에게 "넌 거짓말을 하는데 어떻게 그렇개 인기가 있냐" 물었다. 그 코미디언 찬구는 "난 거짓을 진짜처럼 전하고 넌 진짜를 거짓처럼 말하지 않냐"고 했다고 한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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