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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소크라테스의 기소 배경

소크라테스 기소의 배경
소크라테스의 생존기간은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기간과 겹친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아테네의 기세는 올랐다. 이를 두려워 하고 시기했던 스파르타는 결국 전쟁에 나서고 만다.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그리스의 자살이라고 불렀다. 이를 암피폴리스의 지도자였다가 스파르타에게 패배한 책임으로 아테네에서 20년 추방형을 선고 받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던 타키투데스는 함정에 빠졌다고 말했다. 흔히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은 신흥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소크라테스는 포티다이어 전투에서 그의 제자이자 멘토 멘티 관계였던 알키비아데스를 구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제자는 세 번의 변절을 한다. 아네테에서 스파르타로, 스파르타에서 페르시아로, 1차 패르시아 전쟁에서 아버지가 죽고 페리클래스의 집에서 지란다. 외가가 이쪽이었던 듯 하다. 이 변절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전하여 스파르타가 세운 과두정에 관료로 입각한 크세노폰 역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전쟁이 거듭되면서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추락을 거듭했다. 아르기누사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폭풍으로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는데 이걸 빌미로 변론없이 승전 장군 6명을 사형에 처했다. 이 민회에서 유일하게 반대를 던진 이가 소크라테스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10개 부족이 50인을 달마다 한 달간 파견하여 12달을 다스리는 구조였는데 소크라테스도 여기 대의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결국 스파르타에게 패하게 되고 과두정이 스파르타에 의해 들어서게 된다.
이 과두정의 폭정으로 민회가 다시 들어섰고 책임자 처벌과 책임 전가를 원했던 민회에 소크라테스가 기소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