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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샤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샤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남겼다. 여기서 본질이란 일종의 존재의 이유다. 예컨대, 집은 주거를 하기 위해, 차는 이동을 하기 위해 있다.여러 다양한 종류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은 뚜렷하다. 그렇다고 생물이라고 다르지 않다. 종을 보존하고 먹고 살기 위해 존재한다. 이를 본질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실존은 인간 존재의 차별점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은 본질처럼 보편 개념으로 묶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이 존재한다고 했다. 당연히 기독교인의 사고방식과는 다르다.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인간을 세상에 던져진 존재, 곧 피투된 존재라고 한다. 이 피투성은 인간의 자유를 보여준다.
시람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유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어려서는 학업에 매여 자유가 없다고 불평이 가득하다. 가족을 부양하고 먹고 사는 일이 시급하여 자유는 꿈도 못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샤르트르는 이것을 자기 기만이라고 보았다. 인간 실존은 언제나 선택 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선택은 두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택장애를 겪기도 한다. 하물며 인생과 생존이 걸린 문제에서 선택은 더 어렵다. 그래서 미루고 싶고 남에게 위탁해버리고 싶다. 이게 자기 기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 방식으로 해석하면 어떤환경에서도 우리는 하니님의 영광을 위한 선택을 할 자유가 있다. 기꺼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 희생이나 손해를 감수하고서 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에게 이런 자유를 선사했다.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주를 섬길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서 자기를 던지를 것을 기투라고 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이렇게 자기를 기투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렇다고 자기 멋대로 하고 살란 말은 아니다. 샤르트르는 이런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했다. 그것을 불어로 앙가주망이라고 한다. 영어로 engagement다. 약속 뭐 이런 의미로 정치 사회적 책임과 참여를 말한다.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에 대한 참여와 책임뿐만 아니라 사회나 정치에 대한 앙가주망을 강조한다. 투표일이 다 되어간다. 물론 앙가주망은 단지 선거에 참여하는 것만을 일컫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당연히 예배나 종교 생활을 잘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화와 정치, 사회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실존적 자유를 진리로 말미암아 얻었다. 이는 율법이 없는 방종을 의미하지 않고 율법을 통해 사회 문화 정치적 책임을 다허는 시민으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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