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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사랑에는 밀고 당기기가 있다(?)

사랑에는 밀고 당기기가 있다(?)


노승수 목사


모든 사랑에는 밀고 당기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왜 그리 순수하지 못하냐고 하면서 나는 그렇게 피곤한 사랑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을 망각한 말입니다. 사람이 모두 자기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 자신의 마음 만큼이나 속깊이 감춰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옛 속담에도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개정)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부패했고 자신이 정말 뭘 원하는지 모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그렇게 미워하는 마음으로 다투고 나면 곧 마음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며, 그렇게 속으로 짝사랑을 했었는데, 상대가 관심을 가지면 곧바로 식기도 합니다. 변치 않을 것 같던 사랑이 결혼의 부담감으로 깨지기도 합니다. 이는 자기의 마음을 자기도 모른다는 여러 증거들 중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사랑에 밀고 당기기가 필요한 것은 사랑이란 두 인격 사이에 주어진 자유롭고도 전인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이 일방적이라면 그는 사랑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밀고 당기기를 통해서 인격 깊숙한 곳까지 사랑이 다다릅니다. 누구나 다 경험해보셨을겁니다. 지나치게 헌신적인 사람에게는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것에 대해서는 그 귀함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 그러다가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달으며 그 혹은 그녀가 내 곁을 떠나고 나서야 찾아오는 뒤늦은 후회와 같은 것을 다 겪어 보셨을 겁니다. 밀고 당기기는 이처럼 상대의 마음에 숨겨진 사랑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동시에 내 마음의 사랑이 참된 것이 되도록 제련하는 풀무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면 절제없는 열정을 생각하지만 귀한 것일수록 그리고 위험한 것일수록 신중하게 절제된 마음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내 마음에서 밀어냄은 상대가 스스로 안에 있는 사랑을 확인하도록 하는 배려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그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자유의 상징과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풀무질에도 비유될 수 있습니다. 밀어낼수록 그 사랑은 풀무에 담금질된 철처럼 붉게 달아오릅니다. 적어도 그 사랑이 진실하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붉게 달아오름은 변화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충분히 부드러워지기까지 달아올라야 합니다. 그 절정에서 담금질을 하면 최고의 품질의 철을 생산해낼 수 있듯이 우리 안의 가능태였던 사랑은 이 절정의 순간에 '당김'을 통해서 서로 안에 가능태로만 있던 사랑이 현실태가 되도록 합니다. 그래서 '밀어 냄'에는 적절한 절제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욕심이 가득한 마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안목입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고 있다가 병아리가 부화되어 나오는 싯점을 알고 알껍질을 쪼아주는 것처럼 사랑은 이처럼 타이밍의 문제입니다. 
그럼 이것은 사람간의 사랑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정말이지 밀고 당기기의 고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불일듯이 일어나도록 하실까요? 또 우리는 언제서야 비로소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까요? 시편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리우시는 때에 노래했던 시인의 노래들이 가득합니다(시 10편, 13편 등등). 그들이 특별히 죄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불경건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는 것 같고 의인이 없어지는 것 같은 때를 경험합니다. 이 때 신자에게 일어나는 일이 어떤 것일까요? 이 하나님의 부재의 순간은 바로 내 마음 속에 가능태처럼 있던 사랑과 믿음이 어떤 진실을 감추고 있는지 드러나게 해줍니다. 마치 바이올린 연주가에게 들린 현의 밀고 당김이 아름다운 연주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가능을 현실로 드러나게 하시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같으십니다. 
여기에 성도의 견고한 인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부재하고 자신이 부모가 된 후에서야 비로서 그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이유를 알수 없는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한 것 같은, 하나님이 나를 밀어내시는 것 같은 영적 어둔 시기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가 오고서야 우리는 우리 안에 있던 사랑의 크기를 짐작하게 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되며, 비로서 겸손해지며, 그간 내가 받고 있던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게 진정한 믿음이 있었다는 징표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기의 순간 우리는 성화를 경험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만지시는 손길은 늘<밀고 당기기>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 마음에 심어두신 사랑이 열매로서 발현하게 됩니다. 마치 가을이 깊어가서 된서리가 내리고 나서야 열매가 더욱 달아지고 붉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뜨거운 뙈악 볕과 간 밤에 내린 된 서리는 우리의 영혼을 조련하시는 하나님의 능숙하신 손길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는 어둔 밤에 더 잘됩니다. 이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평온하고 안락한 동안에 침대가 푹신하고 방이 따뜻한 동안에 우리는 더 게을러지며 우리의 자리에 냉기가 돌고 침대가 딱딱해서 우리 삶에 고난이 엄습해 올 때서야 우리 안에 잠재했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흔히 고난의 종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고난에도 불구하고 더 낙심하게 되고 기도도 더 게을러진다면 그것은 무슨 징조일까요?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영적위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낙심과 염려를 아주 큰 죄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4가지 밭 중에 가시밭은 이 생의 염려가 기운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염려나 낙심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만,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이 낙심을 7가지의 죽음에 이르는 죄(Deadly Sin)으로 구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런 죄악의 엉겅퀴가 우리 영혼의 밭에 가득하도록 우리 영혼을 방치함으로 우리가 겪는 영적 위기는 정말 심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는 고난이나 하나님이 그 얼굴을 가리우신 것이 아니라 이런 엉겅퀴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혼을 위해 깨어 경성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치명적 죄와 관련한 사안은<목회 강의>폴더에<치명적 죄와 중독>에 관한 7편의 글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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