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혁신
노승수 목사
아들이나 딸들은 엄마가 하는 말에 대해 별말이 아니어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엄마가 편안하고 친근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을 흘긴다'고 또한 가장 만만한 상대에서 자신 마음에 있는 스트레스가 가장 만만한 상황에서 분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것은 엄마가 보이는 반복적인 하나의 패턴과 그것에 과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은 이전에 수없이 반복되었던 엄마와의 정서적 경험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노이로제라 부르기에는 때론 그것이 매우 경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한 사람의 정서적 경험의 농축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세계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으며 한 인간을 결정짓는 특질들이 녹아 있습니다. 이는 그가 아무리 고급스럽게 자신을 포장해도 감추어질 수 없는 사회적 기술입니다. 엄마와의 경험은 모든 인간관계를 결정짓은 프로토타입(Proto Type)입니다. 이것은 대개 의식된 반응이기보다 무의식적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무의식을 자신이 인지할 수 없는 거대한 의식 저편의 그 무언가로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친구이며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입니다. 날마다 삶 속에서 늘 반복하는 것들이며 마치 안경을 쓰는 친구가 쓴 채로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이 사실을 자각치 못하고 세수를 할 때 비로서 깨닫게 되는 일상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들여다 보고자 하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누구나 그 익숙함 때문에 그것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혹은 자신이 속한 관계나, 사회적 양상들을 획기적으로 변화를 시키고자 한다면,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 바로 이 엄마와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그간 의식할 수 없었던 나의 무의식적 패턴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장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예민함이나 별 일 아님에도 일어나는 짜증들 그리고 그런 반응의 이면에 겹겹이 쌓인 사건과 사고들로부터 겹겹이 쌓인 정서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에는 까다로운 기술이 필요합니다. 대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경향을 우리의 자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속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대부분 속습니다. 자신의 사고와 정서의 정당성에 대해 건강하게 검토하는 버릇을 가진 사람들은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고가 정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질수록 실제로 그것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고가 정서에 영향을 받으면서 심각하게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정서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법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고를 훈련한다고 얻을 수 있는 기술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사고의 모태가 바로 정서이기 때문입니다. 6세 이전의 아동들의 사고는 지극히 정서적입니다. 꿈으로 대표되는 여러 이미지들과 심상들이 난무하는 의식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라면서 현실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기르면서 논리적이며 현실적인 사고를 가지게 됨으로 인간에게는 정서적 사고는 인간 이성의 고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특히 아동기에 안정된 정서를 가지는 것이 이성적이며 합리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높은 건물일수록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것처럼 이 정서적 사고는 인격의 기초가 됩니다. 이는 우리가 사고하는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형태의 자기 방어가 발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앞서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이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잘 깨닫지 못하며, 그런 점에서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로서 사회화를 겪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누구나 여기에 어느 정도의 결함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거듭나서 죄의 책임과 형벌에서만 자유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들은 인격적인 열매라는 점을 고려할 때, 성령의 사역은 필연 인간이 가진 정서적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물론 이성적 사고에 미치는 혁혁한 변화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기두 합니다. 또한 조나단에즈워즈가 말하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는 말은 이 변화가 우리 존재의 기본적 방향에 변화를 주는 혁신적 변화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성경도 참 믿음을 정의하기를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정의함에서 알 수 있듯이 믿음은 우리의 정서적 사고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는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기독교적 인식론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의 상호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대개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신자와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일과 성경을 아는 일에 열심을 보이면서도 정작 자신을 아는 일은 등한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자신을 아는 일을 등한히 하면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 죄의 세력들의 영향력을 실제적으로 줄이는 일에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도 우리 삶을 조명하셔서 이 문제에 대해 변화를 촉구하시는 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가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말씀의 의미하는 바를 밝히 깨닫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주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둘은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해석됨은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순종이 없는 해석은 의미가 없고 해석이 없는 순종은 자기 실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적 정서를 기묘하게 만지십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정서적 사고로부터 이성적 사고와 결정을 위한 의지로 발달했다면 성령께서 인간을 만지시는 경로는 이성적인 사고와 의지의 결정의 문제로부터 우리의 정서적 사고를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역순으로 진입해 들어오십니다. 옷을 입는 순서와 옷을 벗는 순서가 정반대여야 하는 이치가 같은 것이지요.
해석에 있어서 이성적 사고의 대상은 본문이라면, 순종에 있어서 이성적 사고의 대상은 바로 나의 정서적 사고와 그것이 가지는 일련의 패턴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조명을 받아 내 삶의 사고의 결정들의 동력이 되는 정서적 동기들을 성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이 게으르거나 이런 수고와 애씀이 없이 우리 인격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서적 사고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핵심적 감정>의 패턴을 이해하고 이제 그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조율하는 일이 바로 순종의 최종적 목표인 셈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기 혁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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