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함 그보다 평범함
노승수 목사
文章做到極處 , 無有他寄 , 只是恰好(문장주도극처, 무유타기, 지시흡호)
人品做到極處 , 無有他異 , 只是本然(인품주도극처, 무유타이, 지시본연)
人品做到極處 , 無有他異 , 只是本然(인품주도극처, 무유타이, 지시본연)
做 : 지을 주, 只 : 다만 지, 恰 : 마치 흡.
문장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기발함은 없으며 다만 알맞을 따름이며,
인품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기이함은 없으며 다만 본연의 모습일 뿐이다.
- 洪自誠의 菜根譚(萬曆本) 後集 (001~134) 중에서 102. -
우리는 대개 카리스마 넘치는 것을 좋아라 하는 경향이 있다. 목회도 뭔가 특별한 것을 선호하고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세상 장사꾼들이 하는 일이다. 장사꾼을 비하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상인은 아무쪼록 많은 물건을 파는 것이 미덕이고 그러므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해야 한다. 그러나 목회와 교회는 어디 그런가? 물건마다 각기 다른 쓰임새가 있듯이 세상이 그러하다고 목회와 교회도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교회는 더 그렇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면 채근담의 이 구절은 지극히 당연한 경구이다. 문장이 경지에 다다르면 기발함보다 알맞음을 추구하게된다. 글이란 원래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쓰는 것임으로 읽는 자가 혹 듣는 자가 읽고 들어서 이해하기에 알맞아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가르칠 '교' 자에 모일 '회'자를 써서 교회라 불리는 까닭은 성경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그 말씀이 지배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말씀은 항상 성도들의 영적 필요에 알맞아야 한다. 이 말은 그들의 귀에 즐거운 소리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치 아이들이 편식을 하더라도 부모는 아이의 고른 발육을 위해서 먹고 싶어하지 않는 야채나 기타 다른 음식들을 아이들이 먹기에 알맞도록 조리해서 먹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그러하다. 그러므로 바른 설교자는 항상 쉽고 알맞도록 그들의 필요를 적절히 채워준다.
또한 교회가 목표하는 바는 부름 받은 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다름 아니라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이 또한 카리스마 넘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지으신 바 그 자연적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성도를 가르침의 목적이다. 우리는 기이함이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목회 현장을 가만히 보라. 기이한 성도는 항상 목회에서 근심의 대상이 된다. 사람이 건강하고 안정된 것은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특이함이 없고 다만 그 가진 바 하나님께 부여받은 자신의 내적 본성이 발현되어 평범하고 본연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 교회 교육의 핵심적 목표이다.
왜 우리는 특별해지려 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목 받고 인정받고자 함이다. 이 인정받고자 함이 강하게 되면 인정 받지 못할 때 노여워하게 되고 그런 까닭에 사람을 많이 가리게 된다. 사람을 많이 타는 사람일수록 그의 인품이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파해야 한다. 이런 자들과 자주 어울리면 곧 화를 당하게 된다. 논어의 학이편에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라고 했다. 군자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보통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은 특별하지 않다. 그는 지극히 보편적이다. 보편이란 각각의 개체가 가진 공통적 성질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때, '거룩한 보편적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가? 보편이란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 그리고 자연 가운데 심어두신 그분의 창조의 원리이다.
그런데 현대적 개념이 여기에 들어와서<보편>개념을 "통계적 다수"의 개념으로 바꾸어 버렸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마치 좁은 문을 마다하고 넓은 길을 선호하는 멸망의 길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마 7:13). 통계적 다수의 주목을 살만한 특별함을 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함을 선호하고 특별한 대접을 받기를 원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힘들어지고 괴로워지며 비참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특별함이란 항상 '비교'와 '우위'라는 개념위에 세워진 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교와 우위의 잣대는 대중적 평가의 잣대이지 결코 성경과 하나님의 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가장 평온할 때는 바로 우리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때이다. 풀 한 포기 꽃 한송이의 영광이 솔로몬의 입은 옷의 영광보다 더 크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지는 비결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목회자들에게서도 특별함을 기대한다. 그래서 어느 교회 목회자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다더라 귀신이 떠난다더라 이런 풍문이라도 돌면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든다. 특별함이란 말 그대로 특별함이다. 특식이 매일 나오면 그게 어디 특식인가? '밥이 보약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은 특식이나 보약이 아니라 일상적인 밥인 것처럼 우리 영혼을 온전케 하는 것 역시 특별함 그 보다 평범함 가운데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이다. 그게 곧 실력이 된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는 등한히 하면서 어느 한 날의 특별함만을 좇아 다녀서 어떻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가능하겠는가? 그건 마치 밥은 마다하고 쵸콜릿만으로 끼니를 유지하려는 사람과 흡사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추구가 우리를 바른 신앙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사이비와 이단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미혹이란 우리 밖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특별함의 달콤함은 나의 나르시스적 욕망에 만족을 가져다주고 그 만족을 따르다가 멸망 길로 들어서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범하게 일상적인 길을 걷는 그것이 성숙의 지표인 셈이다.
또한 교회가 목표하는 바는 부름 받은 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다름 아니라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이 또한 카리스마 넘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지으신 바 그 자연적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성도를 가르침의 목적이다. 우리는 기이함이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목회 현장을 가만히 보라. 기이한 성도는 항상 목회에서 근심의 대상이 된다. 사람이 건강하고 안정된 것은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특이함이 없고 다만 그 가진 바 하나님께 부여받은 자신의 내적 본성이 발현되어 평범하고 본연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 교회 교육의 핵심적 목표이다.
왜 우리는 특별해지려 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목 받고 인정받고자 함이다. 이 인정받고자 함이 강하게 되면 인정 받지 못할 때 노여워하게 되고 그런 까닭에 사람을 많이 가리게 된다. 사람을 많이 타는 사람일수록 그의 인품이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파해야 한다. 이런 자들과 자주 어울리면 곧 화를 당하게 된다. 논어의 학이편에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라고 했다. 군자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보통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은 특별하지 않다. 그는 지극히 보편적이다. 보편이란 각각의 개체가 가진 공통적 성질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때, '거룩한 보편적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가? 보편이란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 그리고 자연 가운데 심어두신 그분의 창조의 원리이다.
그런데 현대적 개념이 여기에 들어와서<보편>개념을 "통계적 다수"의 개념으로 바꾸어 버렸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마치 좁은 문을 마다하고 넓은 길을 선호하는 멸망의 길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마 7:13). 통계적 다수의 주목을 살만한 특별함을 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함을 선호하고 특별한 대접을 받기를 원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힘들어지고 괴로워지며 비참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특별함이란 항상 '비교'와 '우위'라는 개념위에 세워진 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교와 우위의 잣대는 대중적 평가의 잣대이지 결코 성경과 하나님의 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가장 평온할 때는 바로 우리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때이다. 풀 한 포기 꽃 한송이의 영광이 솔로몬의 입은 옷의 영광보다 더 크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지는 비결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목회자들에게서도 특별함을 기대한다. 그래서 어느 교회 목회자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다더라 귀신이 떠난다더라 이런 풍문이라도 돌면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든다. 특별함이란 말 그대로 특별함이다. 특식이 매일 나오면 그게 어디 특식인가? '밥이 보약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은 특식이나 보약이 아니라 일상적인 밥인 것처럼 우리 영혼을 온전케 하는 것 역시 특별함 그 보다 평범함 가운데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이다. 그게 곧 실력이 된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는 등한히 하면서 어느 한 날의 특별함만을 좇아 다녀서 어떻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가능하겠는가? 그건 마치 밥은 마다하고 쵸콜릿만으로 끼니를 유지하려는 사람과 흡사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추구가 우리를 바른 신앙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사이비와 이단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미혹이란 우리 밖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특별함의 달콤함은 나의 나르시스적 욕망에 만족을 가져다주고 그 만족을 따르다가 멸망 길로 들어서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범하게 일상적인 길을 걷는 그것이 성숙의 지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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