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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노승수 목사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하려면 모더니즘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근대성, 혹은 현대성이라고도 번역이 되는데, 근대 과학 및 철학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르네상스로 인문주의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서구의 지식은 계시와 신에 정초되어 있었습니다. 근대성이란 신을 버리고 인간이 독자적 지식 체계를 갖추려는 시도입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한 명제는 근대철학과 과학의 정초라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기반을 인간의 생각과 의식에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의 구조는 의식의 주체로서<이성>과 지식의 대상이 된<세계>를 이 이성에 근거해서 정립하려는 전반적인 흐름을 근대성 즉, 모더니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합리론과 경험론 간트의 관념론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구성하려는 일련의 시도였습니다. 
의식 주체로서 인간 이성이 세계를 구성하려는 학문적 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가정이 존재합니다. 이 당시에 만해도 진리라는 것은 양립 불가능한 하나의 팩트로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성적 엄밀성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지식을 진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인식론>혹은<지식론>이라고 합니다. 물질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가? 이것이 철학자들의 물음이었죠 그런데 이 노력이 사실상 답을 얻지 못 합니다 근대성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진술하는 논증이나 언명으로 표현되었는데, 우리가 가진 언어적 진술과 물리적 세계의 일대일대응 관계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게 비트겐슈타인의 초기<논리철학논고>같은 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어는 그림과 같아서 세상을 진술하고 그 진술되는 언어는 인간 이성의 산물이라고 본 것이지요. 지식론이 전개되면 중세적 논쟁이 재현됩니다. 유명한 신학자<오컴의 면도날>도 나오게 됩니다. 인간 언어가 진술하는 것이 실재한다고 믿음면 이를 보편론이라고 하고 언어 일뿐이다 믿으면 유명론이라고 하죠 이는 아시리라 믿습니다. 중세 당시 스콜라 신학체계는 보편 개념이 너무나 확대되어서 인간이 언어로 가진 것은 모두 그것의 실재가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캄이라는 신학자가 그저 이름일 뿐 실제는 없다고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논의가 현대철학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우리의 진술이 언제 참이되는가?라고 묻기 시작한 것입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그 진술과 그 진술이 참이 되는 조건을 밝히기 위해서 철학적 노력들을 합니다. 아무튼 근대는 인간 이성으로 세계를 단일하게 진술하는데 실패 합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티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언어철학에서 인간의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법에 있다고 정의하고 인간이 갖는 고통과 같은 경험은 다른 사람과 공유가 불가능한 개인적 경험이며 그래서 사적 언어는 불가능하다는 이론을 폅니다. 실제로 '나는 고통스럽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그 개인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이해한다기 보다 그 말이 사용되는 용법을 이해하고 있고, 그리고 그것은 내 고통에 비추어서 이해하는 것이지 그 개인이 가진 개인적 언어로서 '나는 고통스럽다'라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결론은 '사적 언어는 불가능'하고 인간 이성이 진술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 '상호 주관성'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인간 이성으로 대변되는 언어는 진리라는 객관적 사태와의 일대일 대응을 통해서 진술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다고 보편적으로 믿는<상호주관성>개념으로 객관의 개념이 후퇴를 하게 됩니다.
영미 계통은 주로 이런 경향을 보였고, 대륙은 근대 모더니티가 인간 이성으로 지식 체계를 마치 건축물처럼 건축하다보니 실제로 세계에 대한 바른 지식을 왜곡하고 있다고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해체주의입니다. 그래서 참된 지식은 모더니티의 해체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지식의 계보학 같은 것도 근본적으로 같은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 철학적 논리들을 디테일하게 따라가면 다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전반적인 흐름은 같은 범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죠 서구인들은 시간에 늦는 것을 아주 나쁘게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태평양의 어느 부족은 시간보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지요. 서구 선교사가 예배시간에 사람들이 늦는 것에 대해서 답답함과 정죄하는 마음을 가지지만 그곳에 원주민들은 그것을 전혀 답답해하지 않는 것이죠. 이 서구 선교사가 가진 지식체계가 실제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기 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지식의 체계를 세운다는 점에서는 모더니즘적이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서로 양립가능한 진리 체계로서 모더니티를 말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과학의 발전도 일조를 하는데, 과학의 진보로 우주의 물질 세계의 신비는 곧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것이라 근대의 사람들은 기대했습니다. 뉴톤이 거시 세계의 물리학적 원리와 법칙에 관한 책을 세상에 내 놓았을 때, 그것은 만고불변의 변치 않는 진리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그런데 미시 세계 곧 양자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초기 위치와 운동량과 방향을 안다면 후기 위치를 예측할 수 있는 거시 물리학과는 달리 그 위치를 확증할 수 없는<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두 이론이 서로 양립가능한 이론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게다가 토마스 쿤과 같은 과학 사학자가<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이 지식의 점증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어떤 이론적 설명이 위기에 봉착할 때, 이전 이론과는 불가통약적으로 패러다임이 쉬프트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패러다임 이론은 쿤으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구요. 예컨대, 천동설로부터 지동설은 과학적 지식의 점증의 결과가 아니라 천동설이 갖게 된 이론 과학적 위기가 과학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된다고 보게 된 것이지요. 이미 앞서 객관의 개념이 진술과 사태의 일치가 아니라<상호주관성>이라 정의했던 것처럼 후기 모더니즘 사회는 이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천동설이 해체되면서 지동설이라는 새로운 지식체계를 갖게 된 것이지요. 각기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여러 이론들이 서로 양립하는 진리 체계를 갖게 된 것이지요.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 논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다가 그간 지리적 차이에 의해 격리되어 있던 여러 문화들이 교통의 발달로 지구촌이 되고 사무엘 헌팅턴이<문명 충돌>에서 말하는 그런 종교적 문명 간의 충돌이 실제 세계 속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서로 다른 종교와 세계관을 통합시키는 톨레랑스가 이론적으로 필요한 세상이 된 것이지요. 칼 맑스의 통찰 중에 사회에 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의 의식은 의식이 물질 문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물적 토대가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입니다. 이런 세상의 충돌에서 세상을 구하려는 이론적 시도들이 바로<종교 다원주의>이며 이는 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론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티가 해석학에도 사실 혁혁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케빈 벤후저의 역작<이 덱스트는 의미가 있는가?>는 이 포스트 모던적 해석학을 규명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이 포스트모던적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해서 그래서 강하게 공격을 해오지만 사실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종교다원성에 위배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틸의 논리이기도 한데요. 진정한 다원주의라면 기독교가<유일성>을 주장하는 것 역시 다원적 진리체계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죠, 자꾸 종교간의 장벽을 허물며 톨레랑스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 종교다원주의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화하여서 전체주의적 요구를 기독교계에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이 또한 이 시대의 정신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문서설은 거의 중국의 제가 백가 마냥 어느 한 학자도 일치된 견해를 보지 못해서 거의 폐기 되다 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비평학이 발달하면서 문예 비평이 발달하면서 포스트 모던적 해석을 하는데, 이들의 특징은 일단 성경 덱스트를 완성된 텍스트로 보고 그것의 해석학적 의미들을 묻는 작업에 천착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보수 신학자들도 이 문예 비평적 해석 툴을 상당히 받아들이는 편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책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트럼페 롱맨이 쓴 최신구약개론은 문예적 관점에 상당한 포커스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 근대이후 성경해석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부분이라면 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경향에 다시 구사님께서 말씀하시는데로 자유주의가 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문서설을 다시 다루고 있습니다. 저도 자세한 논의는 잘 알지 못하는데, 동기 신학교 교수님이 다시 학계에 이런 바람이 일고 있다고 하더군요. 
짐작컨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은 사실 세계가 어떠한가는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세계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것이지요. 아마도 문서설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문예비평도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실제 텍스트가 가진 의미보다 독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더 초점을 맞추겠지요. 이건 사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요.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의도가 다 이런 이유입니다. 
덱스트가 원래 뭘 의미 하려했는지 보다 그게 지금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를 묻는 방식이 자유주의자들이 성경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법이지요. 그게 현대 QT가 가지는 위험이기도 합니다. 사실 QT의 위험이기보다 이미 세계를 지배하는<시대정신>이 되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경해석에 물든 이 시대 사람들이 더 큰 문제이겠지요. 약간 이야기가 옆으로 갔지만 이해에는 이것이 더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해석에 이용하더라도 덱스트의 원래 의미를 밝히는데 천착한다면,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적 경험과 상호주관성에 천착하는 것이지요.
이미 말씀드렸지만 문서설이 최근 어떤 방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로 활용되는지는 저도 접한 것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설명 드린 바의 근 범주와 대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번외로 근대성과 후기 근대성의 지식 정초의 방식과는 달리 개혁주의는 인간 이성에 정초하지 않고 인간의 지식의 기반이 계시에 기반 한다. 하여서<계시 철학>이라는 개혁주의적 세계 정립의 철학적 시도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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