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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페리코레시스는 직역하자면 "상호윤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강강수월래처럼 원을 이루며 추는 춤을 이른다. 갑바도키아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할 때, 삼신론으로 경도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용어다.

근데 여기 사용된 코레시스라는 용어는 코레이아에서 온 말인데 코레이아는 사실 천체 곧 하늘의 별들의 움직임을 나타낼 때 쓰던 플라톤의 용어다. 하늘의 별들을 원운동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 안으로 들고 밖으로 나가는 운동을 하는데 이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체계 내에서 지구보다 안 쪽에 있는 행성과 지구보다 밖에 있는 행성의 운동의 차이나 수많은 항성들을 천동설 체계 내에서 설명하려 할 때 사용된 용어다.

천체들의 춤을 의미하는 이 코레이아(choreia)는 춤과 음악과 시가 융합되어 진행된 제전의 의식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플라톤은 사물들은 형상에 ‘참여함으로써(participating)’ 이데아적인 본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코레시스가 "침투" "내주"로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별이 원운동을 하지만 그중 일부는 완전을 상징하는 원의 궤적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는 과정이 바로 "코레이아"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천체는 완전의 세계를 의미했고 천체는 완전체인 원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는 방식으로서 코레이아였다.

모방(mimesis) 또한 코레이아와 관련이 깊다. 그리스인들은 모방을 코레이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춤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 춤은 완전인 천체 운동의 모방이며 그렇게 천체들의 코레이아는 다시 천체와 인간의 코레이아가 된다.

페리코레시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존재한다. 첫째, 다른 위격 안에 침투하고 내주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 안에 침투 및 내주하고, 다른 위격들을 둘러싸며 채운다는 의미다. 둘째, 페리코레시스는 활동적인 의미로 상호 얽히고 침투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천체는 완전한 하나님의 모상이 되고 인간의 제의는 그것을 모방하는데 우리는 이런 고대적 제의 구조를 상실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방을 의미한다.

자연과 천체가 삼위하나님의 모상이라면 그 모상을 모방함으로 삼위하나님을 모사하려 했던 인간의 제의는 이제 인간 관계의 방식 안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저스틴은 모든 인류가 로고스에 참여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로고스를 따라서(meta logou) 사는 사람들이라고 그리스도를 변증한다. 이 참여는 바로 코레이아의 구조이며 스토아적인 산출적 로고스(generative Logos) 사상의 차용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정신은 어머니를 모방함하고 거기 참여함으로 어머니와 하나되며 동시에 거기로부터 분화를 경험한다. 그렇게 분화된 자기는 세상과 대상의 원형인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서 율법, 양심, 이상등을 타자와 세계의 상으로 의식 안으로 산출한다. 이 두 가지 산출은 모두 모방에 기초를 두지만 그 방식은 초자연을 모사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면 아이가 가지는 상상과 상징의 세계는 자연적이지 않으며 거기 담긴 이상들은 신적 세계의 모사와 같은 기능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 이웃과 닿으며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과 닿게 된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사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 관계의 신뢰가 쌓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모방함으로 우리 안에 어머니적인 자기를 산출하지 않고 하늘의 커튼 뒤에 계신 참된 아버지를 향해서 나갈 수 없으며 삼위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의 교제에 참여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와 성자가 나누시는 사랑의 교제에 참여한다. 이 일을 적용하시는 사랑이 영이 성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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