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성경읽기와 성령

목사 안수 전에 인터뷰 때, 장로님 한 분이 "성경은 얼마나 읽으셨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셨는데, 하필 그 질문이 내게 왔다. 나는 사실대로 "대략 50독을 했고 그 이후로는 안 헤아렸습니다"고 했다. 좀 당황하셨던지 장로님은 "예?"라고 되묻기도 했다.

나의 성경읽는 방식은 질문하며 읽는 방식이다. 질문은 스스로 생각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모든 독서가 그렇지만 질문하지 않는 독서는 결코 마음에 남지 않는다. 읽어냈다는 뿌듯함이나 성취감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마저도 나중에 자랑과 교만의 빌미가 되니 사실상 안 읽음만 못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 성경을 읽은 횟수를 말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책을 얼마나 무슨 책을 읽었느냐를 말하는 것도 즐겨하지 않는다. 실제로 뭘 읽었는지 어디서 읽었는지 모를 것이 내 안에 많다.

특히나 성경은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책이다. 어떤 책이든 마음으로 읽으면 양약이 되고 머리로만 읽으면 마치 노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멋을 내는 친구에게 생긴 습관과 같아서 나중에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을 만들기도 한다.

성경뿐만 아니라 고전을 읽는 자세도 비슷하다.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큐티를 권장한다. 내 성경읽기는 사실 여기서부터 나왔다. 그러나 현대적인 포스트모던한 읽기 방식으로 큐티는 그리 권장할만하지 않다.

사람들은 지금의 자기 상황을 설명해줄 뭔가를 찾고 있다. 그래서 이런 자신의 맥락이 더 중요해져서 성경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맥락과 전혀 관계 없는 이야기를 성경 속에 밀어넣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이렇게 밀어넣는 메시지들은 대체로 어디선가 줏어들은 우리 사회에서 그가 겪었던 망탈리테(histoire des mentalités) 같은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게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통해서 내면의 것을 끌어내는데는 그의 내면에 다이몬이 작용했다. 다이몬은 신으로 보통 해석된다. 소크라테스는 어려서부터 어떤 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에게 이 다이몬은 뭘 하라고 하지는 않고 뭘 하려 들 때 금지하는 목소리였다. 아마 이런 점 때문에 저스틴은 계시의 씨앗으로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저스틴은 "이성적으로(meta logou: 로고스에 따라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그의 변증서에서 말하기도 했다(Apol. I. 46.) 예컨대, 소크라테스나 헬라클리트 같은 사람을 그렇게 생각했다. 이 로고스는 그리스도밖에서는 씨앗 형태로 계시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전한 형태로 제시된다(Apol. I)라며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연속선상에서 묶는 계시철학을 형성하기도 했다.

보통 그리스도의 낳심을 지혜와 말씀의 낳심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만큼 성경에는 이런 표현들이 많다. 당연히 로고스의 계시이며 그 계시의 최종 형태가 그리스도이시므로 우리는 성경을 접할 때, 로고스의 맥락을 따라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가 이성이라고 하면 자꾸 머리로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이성은 대상을 탐구하는 능력이나 암기 능력이 아니라 "반성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마음으로 읽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참 신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해 계시며 마땅히 읽는 바를 깨닫게 하신다. 성경을 읽기 전에 성령께 간구하라. 조명하시도록 성령은 어떤 주석가보다 선생보다 더 깊이 말씀을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것도 가장 적실하고 적절하게 나의 필요에 따라 깨닫게 하시며 순종하게 하신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그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 목표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그 뜻을 아는 것이 목표다. 앎을 뒤에 두고 순종을 앞에 둔 것은 알아서 순종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나 인간의 부패로 인해 때론 순종하지 않고는 절대로 알 수 없는 하나님 자신과 그 뜻도 많기 때문이다. 순종은 우리 이성의 눈을 밝히신다. 진리를 밝히 분별하여 알게 하신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민족의 기원  (0) 2020.06.26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0) 2020.06.19
공감과 직면, 복음  (0) 2020.06.11
공평과 정의  (0) 2020.06.05
자아의 함정  (0) 2020.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