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공감과 직면, 복음

개혁주의 진영 성경적 상담의 거두, 아담스 형님의 이론의 핵심은 "직면"에 있습니다.

직면시켜서 회개하게 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이 목적이죠. 그래서 "권면적 상담"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제 경험상 직면시키면 다 도망갑니다. 자신의 누추한 꼴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죠.

그럼 정신분석은 좀 나으냐 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석이 주요한 툴이니 누가 분석받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것이 일반은총이었든지 특별계시로부터 비롯되었든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방법들이 정말 복음을 닮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우리가 어찌할꼬" 하던 무리가 있었는가 하면 스데반이 설교할 때, "이를 갈고 죽이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반응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복음은 우리 심령에 무엇을 일으킵니까? 우리가 근본적으로 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퍼거슨 박사님의 말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그 자체"보다 "그리스도의 은택"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로 기울어집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제시받고 거기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럼 성경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어떻게 제시합니까? 그가 복음이신 이유가 무엇이며 그 복음이 십자가로 대변되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율법이든지 양심이든지 우리 죄를 지적하고 있고 우리는 이것을 피하느라 곤비한 상태라는 점을 먼저 기억해야 할 거 같습니다.

복음하면 죄를 먼저 지적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죄는 이미 우리의 양심과 율법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느라" 혹은 "지느라" 곤비한 상태가 인간의 실존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머리에는 바로 이 실존의 상황에 그리스도가 그 짐을 우리 대신지셨음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럼 인간의 이 실존적 상황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까요? 언제 사람들은 복음을 복음되게 받을까요?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고통을 이겨보려고 노력했는지, 거기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사력을 다하고 있었는지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애씀에 대해서 이해받을 때,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귀의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직면"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통해서 전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공감할 때만이 우리의 실존적 누추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마치 바람보다 햇살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복음은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선포하는 행위라는 양식으로 주로 선포되지만 그 죄를 지적한다는 말은 그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드러낸다는 말로 이해해야지 "느그가 다 죽일 놈이여"라고 외친다고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청중의 반응 밖에 없습니다. 물론 스데반이 잘못 설교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것은 그들의 실존적 상황에 그리스도 외에 달리 구원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방법이 틀린 줄 알면서도 같은 방법을 고수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늘 안 통하는 줄 알면서 같은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는 부부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애씀과 노력의 허망함을 그들의 노력을 따라 들어가지 않으면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부르는 복음은 "직면"이 아니라 "공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때 그것을 "사랑"이라 부릅니다. 책망도 그런 사랑의 잔고가 충분할 때 효력이 있는 것이지 아무 때나 "니 이래 생겨 먹었어" 라고 들이댄다고 그 영혼이 돌아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여러분의 영혼에 잇닿게 되기시를 축복합니다. 복된 하루 되소서.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0) 2020.06.19
성경읽기와 성령  (0) 2020.06.14
공평과 정의  (0) 2020.06.05
자아의 함정  (0) 2020.05.26
부부의 세계와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  (0) 2020.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