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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우리 민족의 기원

북방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인근에 예벤키 족이 산다. 이들은 우리 민족과 생김새가 비슷하다. 유목민인 예벤키 족에게는 우리 말의 "아리랑"과 "쓰리랑"의 발음을 같이 쓰는 말이 지금도 통용된다. 아리랑은 "맞이하다"로 쓰리랑은 "느껴서 알다"라는 뜻으로 현재 실생활에 사용되고 있다.

근데 이 예벤키 족이 머무는 바이칼 호 인근은 한나라 무제가 처조카였던 곽거병을 무장으로 내세워 흉노를 정벌할 때, 최종 정벌의 전투 장소이기도 하다. 무제 때 쫓겨난 흉노는 서쪽으로 이동에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관여하는 훈족이 된다.

조선 중기 추사 김정희는 태종무열왕릉비의 탁본을 금석하면서 신라의 시조 김알지를 김일제로 해석했다. 김일제는 본래 흉노 출신으로 흉노의 번왕인 휴저왕(休屠王)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4살 때 부왕이 무제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전한에 포로로 끌려왔다. 이후 무제의 신임을 받아 전한의 관료로 일하면서 김씨(金氏) 성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받았다기보다 원래 그렇게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타이를 한자로 음역하면 "금"이 된다. 신라의 화려한 금장 문화는 이것과 무관치 않다. 아무튼 김일제는 곽광·상관걸과 함께 소제의 후견인이 되었으나 병들어 투후(秺侯)에 봉해지나 곧 죽고 만다. 7세기 신라의 왕족은 그 가계를 신성시하고자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아마도 전한이 망하면서 왕망의 난을 피하여 신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씨는 흉노족의 성씨며 신라 왕가의 출토된 문물은 북방계 유목민 문화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 황제 푸이라는 영화에서 청나라 황제에서 내려올 때 자기 성씨를 쓰는 장면이 있는데 김씨라고 쓰는 장면이 있다. 이로 보건대 만주족 역시 흉노계통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 역시 북방계의 여러 흔적들이 기록에 남아 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이안사(李安社)부터 찬양하고 있는데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이안사가 산성별감(山城別監)과의 불화로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는데 이때 170여 가(家)가 이안사를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씨족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농경민들의 행태는 아니며 유목민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로 실제 북방계 유목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만주 일대의 통치자였던 옷치긴왕가의 실세였던 산지(散吉) 대왕이 고려에서 금방 이주해온 이안사를 다루가치로 임명했다는 것으로 봐서 이안사부터가 실질적인 이성계의 족보이고 그 이전 이린(李隣)과 연결짓는 것을 일종의 족보 세탁으로 보인다. 청나라가 초기 조선과 형제의 예를 주장했던 것 역시 이런 것을 배경으로 하는 게 아닐까 추정이 가능하다.

아무튼 대한민국은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다. 북방계 특유의 자유분방하며 주체적인 특징이 강하다. 단일민족 프레임은 일본의 프레임일 가능성이 많다. 지금도 일본은 단일민족 프레임으로 자기들의 역사를 해석한다. 가부장제 문화도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산업전선에 남자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정치 프레임이다. 실제 조선의 기록들을 보면 여자들에게도 유산이 물려주었으며 남녀가 대등한 분위기가 많다. 가부장제와 단일민족 프레임은 일제식민지를 거치면서 이식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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