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생령"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을 일컫는 용어다. 다만 문맥에 따라 생령 혹은 생물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생령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홍수를 포함해서 홍수 시기 이전과 에스겔의 성전 환상 중에만 나오는 단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타락 이전의 상태, 곧 창세기 6:3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기 전의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힌트일 수 있다.
이 범죄를 기독교 계통은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의 결혼으로 해석한다. 유대인들은 왕들이 초야권을 행사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대부분 천사와의 인간이 창조의 범주를 흐리는 범죄로 해석한다. 현대의 주석가들도 여기에 거의 동의한다. 이는 창세기 3장의 범죄와 일종의 평행을 이룬다. 12장 이전의 세 가지 범죄는 모두 하나님 되심에 대한 반역이란 공통점이 있다. 바벨탑 역시 하늘까지 그들의 탑을 닿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추방될 때, 하나님의 염려도 그들이 죄 가운데 영생하는 문제였다.
창조 당시 에덴은 어떤 상태였을지 우리는 한 가지 유추를 할 수 있다. 하와는 뱀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이 부분에 대해서 바빙크는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이 본문을 신화적 요소가 담긴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이 창조 초기의 상태를 외부적인 영적 존재의 개입으로 본문을 해석한다. 그러면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나오는 창조 시기의 동물들의 언어 능력이 은사로 존재했다는 견해도 부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 1장을 너무 지금의 물리적 세계관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골로새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을 지으셨다고 말한다. 이 창조에는 천사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마귀를 타락한 천사라는 기독교 전통을 받아들일 때, 이 뱀은 단지 뱀이 아니라 영적 존재로서 뱀일 수 있다. 계시록 역시 이 뱀을 옛뱀 곧 마귀라고 말한다. 뱀과 마귀를 다른 존재로 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할 때, 이는 다른 존재들과의 영적 교감을 어느 정도 상정하고 있다. 이사야 11장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지금의 약육강식의 자연이 아니라 포식자와 피식자가 사라진 동물의 세계를 그리며 이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충만한 상태로 설명한다. 짐승들에게도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작용하게 된다는 의미다. 최근 과학자들은 많은 동물에게 학습 능력이 있으며 일정한 판단을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런 연구 결과는 반기독교적이라는 거부감을 불러오지만 이는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그릇된 다른 전제를 가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 창세기 2장은 마치 돕는 배필을 들짐승 중에서 찾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는 말씀 후에 짐승에게 이름을 짓고 그가 돕는 배필이 없다는 진술이 이어진다. 마치 돕는 배필을 들짐승 중에서 찾는 듯한 뉘앙스다. 없음으로 갈비뼈를 취해서 돕는 배필 하와를 짓는다. 이는 명백히 인간과 짐승들을 구분 짓는 표현이면서도 이름 짓는 사건이 단지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교감이나 통치를 의미하는 것을 해석될 수 있다.
더 기이한 본문 중 하나는 거짓 선지자 발람을 책망하는 그가 탄 당나귀가 말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서사를 보면 다른 영적 존재의 개입이나 하나님께서 당나귀를 통해서 말했다는 흔적이나 뉘앙스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나귀가 말을 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봐야 알 수 있지만 중세 스콜라 신학은 창조 세계를 유기적 피라미드 구조로 파악했다. 이 꼭대기에 하나님이 계시며 이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교회가 그 다음에 위치한다. 이 교회를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구조를 하고 있다. 당연히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도 이 하위에 존재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과 내 영혼에만 관심이 있지만 주님은 훨씬 더 큰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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