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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구약신학

생명나무

생명나무

 

I. “생명나무”는 성경을 통틀어 볼 때 몇 번에 걸쳐 언급되는데, 구약에서는 םי󰗁󰖏󰕘 ץ󰘠 혹은 םי󰗁󰖏 ץ󰘠으로서 6회 (창 2:9; 3:22; 잠 3:18; 11:30; 13:12; 15:4) 등장하고, 신약에서는 ξύλον ζωής 혹은 ξύλον τής ζωής로서 4회(계 2:7; 22:2, 14, 19) 모두 요한계시록에만 나타난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생명나무”에 대한 성경신학적 발전 과정이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개념을 제시하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창 3:22의 내용에 집중하여 생명나무의 핵심적 의미를 밝히려는 것뿐이다. 특히 이 구절에 표현된 바 하나님 말씀의 내용 --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ח󰗛󰚉󰖹־ן󰘵 ה󰚛󰘞󰕵 ע󰙜󰕯 בוֹט ת󰘞󰕈󰗚 וּנּ󰗶󰗬 ך󰖏אַ󰗖 ה󰖷󰕗 ם󰕇אָ󰕗 ן󰕚

׃ם󰗚󰘢󰗡 י󰖏󰕯 ל󰗈אָ󰕵 םי󰗁󰖏󰕘 ץ󰘠󰗵 ם󰕀 ח󰙍󰗚󰕵 וֹד󰖷

-- 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살핌으로써 이 작업을 수행하도록 할 것이다.

 

논문의 첫 부분(제 II 분단)에서는 생명나무에 대한 네 가지 해석을 소개하고, 동시에 이런 해석의 부당성을 조목 조목 설명하도록 할 것이다. 제 III 분단에서는 필자가 보기에 가장 합당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 (제 IV 분단)에서는, 필자의 이러한 해석이 행위 언약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짧게나마 기술하려고 한다.

 

II

 

생명나무란 무엇이고 성경에는 무슨 목적으로 등장하는가? 왜 아담은 뒤늦게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후 -- 생명나무를 동경하게 된 것일까? 왜 창 3:22에서 하나님은 아담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보이는데 -- 것일까? 만일 이러한 금지 조치가 올바른 해석이라면 그것은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도대체 창 3:22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창 3:22의 의미를 곡해하든지 아니면 어떤 불가사의한 벽에 부딪혀 혼란한 가운데 의미 파악을 포기하는 것 같다. 이러한 시각 지대를 틈타, 소위 신령하다는 몇몇 인물들 -- 사이비 종파의 창시자들이나 그런 경향을 띤 기독교 지도자들 -- 의 신비스런 해석과 이리송하기 짝이 없는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왜곡과 편견을 시정하고 좀 더 합당한 해석에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것이 이 논문의 근본 목적이다. 이제 창 3:22의 의미 규명과 관련하여 네 가지 부적절한 시도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또 각각의 입장이 어떤 점에서 부적절한지 연이어 비평을 가할 것이다.

 

(1) 필자가 배척하는 첫 이론은 악의설(惡意說)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영생을 허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불순종을 괘씸히 여겨서 고의로 막으신다는 이론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토록 큰 은혜를 베푸셨건만 -- 우선, 흙으로부터 지어냄으로써 비존재에서 존재를 갖추도록 하셨고, 자신의 형상을 닮게 해 주셨으며,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했고, 영생의 길에 오르도록 기회를 제공하셨건만 -- 그는 자신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마다하고 오히려 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대적하고 말았으니, 이 어찌 크나 큰 실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분명 아담이 이제라도 영생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분노와 괘씸함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막으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식의 악의설이 가당치 않은 이유는 최소 두 가지이다. 우선, 이 설명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이나 모습에 반(反)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기분이 잡치고 마음이 상한 까닭에 이렇게 해로운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속 좁고 쩨쩨하고 소인배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또, 악의설은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 취하신 은혜의 조치 -- 원복음 (창 3:16)의 계시, 가죽옷을 지어 입힌 일 (창 3:21) 등 -- 에 대해 합당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2) 거짓 생명 불허설(不許說)로서 하나님께서는 “참 생명의 대치물에 대한 불허”를 목적으로 아담을 막으셨다는 것인데, 필자는 이 이론 역시 지지하지 않는다. 이 주장의 핵심은 생명나무를 거짓 생명 -- “참 생명에 대한 대치물” -- 로 본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거짓 생명을 아담에게 허락하고자 하지 않으셨고, 이 금지 행위는 이런 면에서 오히려 아담을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 생명은 무엇이고, 또 생명나무는 어떤 점에서 참 생명의 대치물인가? 차일즈(B. S. Childs)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보자.

 

창세기 2장은 그 소박한 언어에도 불구하고 이상적 생명(ideal life)이 무엇인지에 대한 히브리적 이해를 매우 신학적으로 묘사해 놓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도하신 생명은 조화로운 실존(harmonious existence)이라는 특질로 그려져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가 처음 주입되었을 때 “살아 있는 존재”(היח שפנ)가 되었다. 그는 순종 가운데 하나님을 의존하고 (2:7), 인간 그룹 가운데 있으며 (2:18 이하),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면서 (2:15, 19-20) 생명을 누리는 것이었다.

 

인간은 불순종 때문에 이런 유의 생명을 상실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2:17)고 하셨다. 죽음은 수치, 죄의식 및 추방으로 특징지워졌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진정한 생명의 상실 때문에 대신 생명나무를 통한 영생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셨다. 이러한 신화적 관념은 (영생에 대한) 거짓된 대치물로서 배척을 하는 바이다. 참 생명은 마술적인 나무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대한 온당한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강조는 필자의 것]

 

차일즈가 생명나무를 참 생명의 대치물로 여기는 이유는, 창세기의 저자가 생명나무를 다른 근동 지방의 종교에서처럼 신들이 생명을 부여하는 물체 -- 생명의 식물(植物), 생명의 떡, 생명의 물 등 --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차일즈의 편견일 뿐, 창세기 저자의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창세기에서는 생명나무가 다른 근동 지역의 종교에서와 달리 마술적 대상 -- 참 생명에 대한 대치물 -- 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고, 참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차일즈의 거짓 생명 불허설은 생명나무의 본질에 대한 오해로부터 생겨났다. 그가 생명나무를 미신적 산물로 간주했기 때문에 창 3:22에 대한 설명 역시 그릇된 내용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3) 필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세 번째 입장은 영속화 방지설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생명나무 열매에의 금지가 “인류의 영속적 불행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하여 베풀어졌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된 상태로 전락해 있는데, 이 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아담과 그 후손들은 영원히 불행한 상태로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비참한 상태의 아담에게 도리어 영생을 거절하심으로써 불행의 영속을 예방했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적 주장 내용이다.

 

이 입장은 앞의 두 설명과 달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매우 보편화된 것으로서 동시에 상당히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과연 이런 입장의 주창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나무는 동산의 중앙에 있었고 그 열매는 신체적 불멸(physical immortality) (창 2:9; 3:22)을 산출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은 범죄 후, 그리하여 죄된 경향이 본성 가운데 심긴 후, 남자와 여자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원히 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3:22) 동산으로부터 쫓겨났다. 이런 내용의 의미인즉, 만일 그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죄된 상태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면, 이것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말할 수 없는 재난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죄된 존재들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비참한 일이었으니, 그 상태에서는 인류의 구속과 발전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구는 금방 죄가 자동적으로 가속화되는 영원한 지옥으로 변할 것이었다. 이러한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해 그들은 쫓겨났고, 동산의 입구에는 스랍이 배치되었으며, 화염검은 두루 돌며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지켰고, 이리하여 인간이 신체적 영생을 소유할 가능성을 금지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 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았다는 것과 또 이제는 그렇게 할 가능성도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생 불멸(immortality)은 반드시 다른 방도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다 [강조는 필자의 것].

 

어떤 구약학자는 창 3:22-23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이렇게 생명의 상징(sacrament of life)을 합당치 않게 따먹으려 한 것에 대한 처벌은 그토록 탐하던 바 신체적 죽음으로부터의 면제를 받는 것이었는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면제는 인간의 죽음 및 소외를 항구적인 상태로 만들 것이었다. 왜냐하면 화목은 오직 희생적 죽음(cf. 3:15, 21)에 의해서만 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은 자비롭게도 그렇게 될 가능성을 예방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심판으로서의 추방(exile-judgment)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의 현현이었다 [강조는 필자의 것].

 

조금 다른 각도에서의 설명이 또 다른 학자에 의해서 제시되었는데, 그 핵심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인간들로 하여금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 성경에 그 방식은 묘사되지 않았는데 -- 해 주었을 것이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죄인이 되었고, 죄의 결과 가운데 한 가지는 … 신체적 죽음이므로, 그들은 더 이상 에덴 동산에 머무르는 것도 또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 그들의 후손들도 -- 영구적으로 낙원에서 추방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나님 은혜의 증거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타락한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계속 먹었다면, 그는 영원히 죄에 찢기고 죄로 더럽혀진 몸 가운데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재난이었을 것이다 [강조는 필자의 것].

 

이와 같은 여러 주창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과연 영속화 방지설은 얼마나 타당성을 갖춘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필자의 답변은, 이미 앞에서 힌트를 주었듯, 결단코 “아니오!”이다. 왜냐하면 영속화 방지설은 생명나무의 열매 속에 어떤 영적 생명력이 본유적으로 존재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생명이 본유적으로 내재한다는 견해에 매력을 느끼는가?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필자는 이제 네 가지 서로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이 이유들의 부적절성 혹은 부당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i) 어떤 이들은 창세기 본문에 대한 비평적 입장 때문에 이 견해를 지지한다. “에덴 동산의 기사를 단지 전설로 여기는 이들은 히브리인들이 생명나무를 마술적인 만병 통치제(magical elixir)의 원천으로 간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비평학자들은 에덴 동산의 기사를 포함하고 있는 창세기 2-3장의 저자가 그 핵심 내용을 근동 지방의 신화로부터 도출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창 3:22의 생명나무는 길가메쉬 서사시(Gilgamesh epic)에 나타나는 “생명의 식물(植物)”이나 아다파 신화(Adapa myth)에 언급된 “생명의 음식과 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의 식물과 음료는 그 자체에 효험이 있어 그것을 섭취하는 이에게 영생 불사의 신기한 능력을 부여한다. 이처럼 창 3:22의 생명나무 역시 그 열매에 생명의 효능을 담지하고 있어서 따먹는 이에게 영생 불멸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학자들의 견해는 “생명나무”의 종교적․문서적 합당성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창세기의 핵심적 사상 -- 생명나무를 통하여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를 포함하여 -- 이 근동 지방의 신화적․전설적 관념을 그대로 유입해 왔다는 이론은 매우 신빙성이 낮은 가설에 부과하다. 이 점에 있어서 카수토(U. Cassuto)의 설명은 의미 심장하다.

 

토라가 세상과 인간의 창조에 관하여 우리를 가르칠 때, 기존의 전통들 -- 현자들의 학파로부터 유래되었든 아니면 일반 백성의 민간 전승으로부터 생겨났든 --을 전혀 무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성경이 그러한 전통들에 대해 어떤 일정한 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즉, 한편으로 어떻게 진정한 가치가 있는 알곡은 챙기고 쭉정이는 버릴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정화하고 순화시켜 정리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성경의 정신(ethos)과 양립이 될 수 없는 것은 제거할 수 있는지 가르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전통들을 자신의 교리 및 견해와 조화시킬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으리라는 것도 추측할 수 있다. 그래야 그 전통들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을 토라가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긍정적 평가는 창세기 본문의 문서적 형성과 관련해서도 내릴 수가 있다.

 

끝으로, 한 세대 전에 가졌던 가정 -- 논의 중인 성경의 편집자가 자기의 문서 자료들을 기계적으로 다루기만 할 뿐 자기가 사용하는 자료들에 대해 어떤 식별력 있는 견해를 가졌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 -- 은 현대의 연구에 의해 이제는 배척을 받고 있는데, 이는 마땅한 일이다. 비록 “자료들”을 사용했다는 것은 가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자료들과 별도로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발견하는 바 “최종 생성물”의 기초가 되는 개념들이다. 오늘날에는 모세 오경, 특히 창세기 기사의 체계적 구조가 결코 우연의 결과거나 독창성 없는 “잘라 붙이기” 식의 편찬 결과일 수는 없고, 오히려 종교적으로 또 문서적으로 매우 고차원의 성취도를 나타내는 그런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상의 논변에 의거할 때 창세기 2-3장의 기사는 그 교훈의 핵심에 있어서 근동 지방의 종교적 관념 및 문서적 내용과 격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생명나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서, 우리는 결코 생명나무를 마술적 견지에서 바라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ii) 또 어떤 이들은 성경적 근거를 내세우며 생명나무의 본유적 생명력을 지지하는 수도 있다. 그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구절은 계 22:2, 곧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비판이 가능하다. 첫째, 계 22:2에서 말하는 생명나무의 기능은 창 3:22의 그것과 다르다. 물론 창 3:22과 계 22:2에서 지칭하는 “생명나무”는 동일한 수종의 나무지만, 생명나무로 인한 수혜자의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즉, 계 22:2의 경우에는 온전히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 -- 이미 주님과의 관계에서 영생을 누리는 이들 -- 으로서 생명나무의 은택을 맛보는 것이지만, 창 3:22에 등장하는 생명나무는 아담이 죄를 지은 상태 --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 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 3:22의 해석을 위해 계 22:2과 내용상의 연관을 짓는 일은 무리라고 하겠다.

 

둘째, 계 22:2의 “소성함”(θεραπεία)이 영어 성경에는 “치유함”(healing)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θεραπεία의 일차적 의미는 “봉사, 섬김”이고 오직 이차적으로만 “치유”의 의미를 갖는다. 계 22:2의 경우에는 더욱 더 원래의 의미가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온전히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면 더 이상 아픈 것이 없어서 (계 21:4) 치유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 22:2의 내용에 기초하여 생명나무에 본유적 생명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는 매우 힘든 노릇이다.

 

(iii) 류폴드(H. C. Leupold) 같은 이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적 이유 때문에, 생명나무에 생명적 활력이 주어져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생명나무와 관련해 어떤 의미에서는 본유적 능력의 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결국에는 그것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기울어진다.

 

그것[생명나무]에는 불멸의 신체적 생명을 분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 왜냐하면 만일 그가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는 주장이 그 진술의 자연스런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어떤 나무도 그 자체로서 이런 효능을 소유할 수가 없기에, 다시금 루터를 좇아 이러한 놀라운 능력이 나무의 특징이 된 것은 그 안에 내재하는 자연적 특질들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인한 효능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최선으로 여겨진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나무의 열매를 섭취하면 그 효과가 그렇게 되도록 정하기를 기뻐하셨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타락하고 비극적으로 변화한 상태에 처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죄에 찢기고 상한 몸을 가진 채 영생 불멸의 특질을 획득하는 일은 커다란 재난이었을 것이다. 그는 결코 이 “죽음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류폴드는 생명나무가 생명 분여의 효능을 갖게 된 것이 자체의 본유적 능력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말씀의 능력을 통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설명은 다른 이들의 근거보다 낫게 보이나, 그렇다고 하여 그의 견해에 아무런 문제점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생명나무의 생명적 활력이 그 원인상 내재적인 것이 아니고 외부적 --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음 -- 인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 열매를 따먹지 못하도록 금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저 처음 제공한 말씀의 능력만 거두면 그 나무는 생명력을 잃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담이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든 말든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 아니겠는가?

 

만일 이런 난점을 피하기 위해 일단 하나님께서 말씀의 능력을 허락하신 후에는 생명나무에 생명의 활력이 영구적으로 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실상 류폴드의 입장은 다른 이들의 본유적 내재설과 하등 차이가 없는 것 -- 사실 그는 이 입장을 피하고자 했고 또 자신의 입장을 이것과 차별화하기 위해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도입한 것인데 -- 이 되고 만다.

 

아마도 류폴드는 루터파의 신학 전통인 공재설(consubstantiation)에 입각해 생명나무의 성격을 규정하고 싶었던 것 같으나, 어쨌든 상기한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신학적 설명 또한 생명나무의 자연적 능력 보유에 대한 근거로서는 미흡하다고 하겠다.

 

(iv) 또 어떤 이는 창 3:22의 내용을 성경의 다른 부분과 전혀 차이가 없는 표준적 진술문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생명나무의 본유적 능력 이론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대표적인 학자로서 앙리 블로허(Henri Blocher)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창 3:22의 성례적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기를 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나무를 선택하셨고 그것을 자신이 제공하는 은혜의 표시(sign)로 만드셨다. 만일 인간이 영적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그는 이 표시와 더불어 생명을 받게 될 것이었다. 이 가설이 매력적임은 부인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생각에 대해 원칙상 무슨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어디에 이런 식의 의미에 관한 힌트가 조금이라도 주어져 있단 말인가? 창 3:22은 인간의 마음 상태와 아무 상관 없이 그저 영원한 생명과 열매의 섭취를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이러한 “성례적 원칙”에 역행하는 것이다.

 

블로허는 창 3:22의 내용에서 성례적 해석을 취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생명나무의 열매는 생명의 표시가 아니라 생명 자체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창 3:22이 하나님의 내적 궁리(deliberation) 내용을 말하고 있고, 또 그 문장 형식 역시 불완전한 형태로 되어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만일 그가 이러한 표현 방식에 민감했다면 결코 성례적 해석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생명나무의 본유적 능력과 관련하여 블로허가 내세우는 근거 역시 그 타당성이 매우 빈약하다고밖에 평가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필자는 영속화 방지설이 생명나무의 본유적 능력 내재 이론을 전제하고 있으며, 각각 서로 다른 네 가지 이유에 의해 그런 내재 이론을 주창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런 네 가지 서로 다른 이유가 실은 모두 지지 기반이 빈약한 것임을 설명했다.

 

그런데 이러한 각각의 약점 이외에도 모든 내재 이론은 공통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만일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 자체가 영생을 준다면, 다음과 같은 어불성설의 결과가 야기된다. 즉, 선악수의 열매를 먹기 전에 먼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으로 그는 이미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이 입장은 성경의 영생관과 정면 충돌을 하는 것이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 --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 은 그저 시간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비신자들에게도 영생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cf. 마 25:41; 계 21:10, 15). 그러나 영생의 핵심은 양(quantity)의 문제가 아니고 질(quality)의 문제 -- 주님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 -- 이기 때문에, 단순히 생명나무의 열매를 섭취하는 것과 같은 기계적․물리적․생물적 차원으로 격하시켜 생각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생명나무의 본유적 능력 내재 이론 (및 영속화 방지설)을 배척하는 바이다.

 

(4) 필자가 받아들이지 않는 맨 마지막 이론은 지속적 섭취 금지설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아담은 이미 전부터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며 지내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후 더 이상 생명나무에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창 3:22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지속적으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섭취했다는 근거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선악수의 경우와 같이 생명나무의 열매 또한 따먹지 말라는 금령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창 2:16에 보면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분명 생명나무도 포함된다고 본다. 셋째, 창 3:22에 있는 단어 ם󰕀을 “다시”(again)라고 해석함으로써 이미 그 전에도 따먹었던 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각각의 근거를 평가해 보자. 첫째,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금령이 없다는 것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함의하지만 실제로 먹었다는 것까지 증명하지는 못한다. 둘째, 창 2:16 역시 “임의로 먹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허용 방침만을 언급할 따름이지 실제로 먹었다는 사실을 확정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셋째, ם󰕀은 “다시”(again)가 아니라 “또”(also)로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라는 해석은 “22절의 긴박성과 24절의 결정적 성격을 놓치는 셈이 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아담이 그 전부터 지속적으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취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사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는 한 번만 따먹는 것으로서도 그 정해진 목적이 이루어지며, 그 당시까지 그 열매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필자는 이번 II 분단을 통하여 창 3:22에 대한 빗나간 이론으로서 네 가지 -- 악의설, 거짓 생명 불허설, 영속화 방지설, 지속적 섭취 금지설 --를 소개했고, 그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을 노출함으로써 비판을 가했다. 이제 다음 제 III 분단에서는 필자가 지지하는 견해를 상술하도록 할 것이다.

 

III

 

성경을 읽다가 창 3:22에 접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마음에 떠올린다.

 

(i)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과연 선악을 하나님처럼 알게 되었는가? 혹은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 중 하나”는 전혀 딴 대상을 지칭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누구를 염두에 두고 선악을 안다고 말한 것인가? 심지어 선과 악을 안다는 말까지도 무슨 숨은 뜻을 가진 것은 아닐까?

(ii)아담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자 했는데, 그 당시 생명나무 실과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있었는가? 그는 전에도 이 실과를 먹은 적이 있었는가? 아니면 알고는 있었지만 먹지는 않았는가? 그것도 아니면 과거에는 생명나무의 실과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일까?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이렇게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자 했다고 묘사한 것일까? 도대체 과연 생명나무는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느닷없이 여기에 등장하는 것일까?

(iii)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계셨을까? 언뜻 보기에 시기 내지는 불안해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그런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반응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식의 바람직하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이 금지 조치에 또 다른 무슨 숨은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상기한 모든 질문에 대해서 속 시원히 답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고, 또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II 분단에서는 필자가 동의하지 않는 이론들을 소개하면서 몇 가지 사항 -- 특히 (ii)와 (iii)에 등장하는 질문들 -- 에 대해서는 비록 간접적이나마 답변을 시도한 셈이 되었다. 이번 분단에서는 이 문제들 가운데 핵심되는 것 몇 가지를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1) 생명나무의 정체

무엇보다도, 생명나무는 그 당시 시공간 내에 실재하던 하나의 수종이었다. 이로써 필자는 생명나무에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째, 생명나무는 그것이 존재하는 인적․자연적 환경과 더불어 역사상으로 실존하던 바였다. 에덴 동산은 신화와 전설에만 등장하는 그런 식의 장소와 환경이 아니다. 아담은 실제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인간이었다. 생명나무 역시 어떤 신비스런 상징물 정도가 아니요, 인간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체(entity)였다.

 

둘째, 생명나무는 자연적 수종 가운데 어느 하나였다. 생명나무는 동산에 있던 여러 나무들 -- 사과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등 -- 가운데 어느 하나였지, 이러한 수종과 구별되는 전혀 별도의 나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에덴 동산의 환경 가운데 자라나던 여러 수종 가운데 하나로서 생물학적 분류 체계에 종속되고 학명을 가지는 그러한 나무였다.

 

셋째, 생명나무는 그것이 자연 수종 가운데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실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수종 가운데 어느 나무 하나를 정하셔서 “생명”을 나타내는 표시(sign)로 사용하시고자 했다. 그 나무 자체에 본유적인 생명의 활력이 있거나 어느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생명력을 주입 받았기 때문에 생명나무라고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 대한 아담의 관계가 순종을 통해 “생명의 교제”라는 극치에 도달했을 때 그것을 가시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생명나무가 된 것이다.

 

이렇게 생명나무는 역사상 실제로 존재했던 나무로서, 여러 자연적 수종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하나님의 특수한 목적을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그런 나무였다.

 

(2) 창 3:22에 대한 올바른 해석

창 3:22의 해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바는, 이 구절에 나타난 진술이 하나님의 궁리 행위(deliberation)에 대한 것이고, 또 그 내용을 기술함에 있어서도 불완전한 문장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에 있다.

 

(i) 창 3:22은 그것이 하나님의 내적 의식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궁리 모습은, 일종의 내적 대화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되어 있다. 데일 페트릭(Dale Patrick)은 창 3-11장 사이에서 하나님의 궁리 모습을 5회(3:22; 5:3, 7; 8:21-22; 11:6-7) 찾아 낸 후 다음과 같은 설명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드라마적 기술(dramatic technique) 그 자체이다. 창세기 저자는 독자를 하나님의 내적 대화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이 생각하고 그와 같이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게다가 그가 생각하는 방식 자체도 매우 드라마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의 능력과 특권을 찬탈할까봐 두려움을 표명한다 (3:22; 11:7) … 야훼의 내적 대화에 대한 이러한 대담한 묘사는 그의 임재를 강력하게 또 감동적으로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궁리 내용은 제일 먼저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로 나타나 있다. 필자는 그 뒤에 나타나는 궁리 내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기 때문에 전반부에 대해서는 긴 논의를 피하고자 한다. “우리 중 하나”는 그저 지칭상의 관습 -- 하나의 인격적 존재가 자신을 단수로서도 표현하고 복수로서도 표현하는 일 -- 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궁극적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 -- 비록 이 구절에서는 희미하게 그림자처럼 나타났지만 -- 의 내적 교류와 대화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히 여겨진다.

 

또 “선악을 아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선뿐 아니고 악 또한 경험하는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아담은 타락과 더불어 -- 뱀이 꼬드기고(창 3:5) 하나님이 인정하셨듯(창 3:22) --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일단 악을 알고 나서부터는 그 악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ii) 창 3:22은 문장의 형식에 있어서도 불완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밀턴(Victor P. Hamilton)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문장은 하나의 연속체를 이루지 못한 채 뚝 끊어지고 만다. 영어의 개역표준역(RSV) 및 기타 역본들은 이 절을 그런 식으로 옳게 독해함으로써 문장의 끝에 대시(dash) 표시를 하고 있다. 이 구절은 파격(破格) 구문(anacoluthon)의 한 예로 간주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결국 이 문장은 하나의 진술문이 아니고 오히려 신적 궁리(divine deliberation), 곧 일종의 내적 대화 … 인 셈이다 [강조는 필자의 것].

 

개역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에는 창 3:22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Then the LORD God said, “Behold, the man has become like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 ever” ―

 

여러 주석가들은 창 3:22의 특이한 문장 구조를 파격 구문으로 규정한다. “파격 구문”(anacoluthon)은 ἀν-(not) + ἀκολουθέω(to follow)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따라오지 않음”이다. 이는 “문법적 전후 관계가 결여된 문장이나 구문” 혹은 “문장 내에 존재하는 구문상의 모순이나 불일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창 3:22은 파격 구문 가운데에서도 돈절법(頓絶法, aposiopesis)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ἀπό-(from) + σιωπή(silence)의 합성어로서 “갑작스런 중단으로 인해 생각이 불완전한 상태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고든 웬함(Gordon J. Wenham)은 이런 식의 돈절법이 하나님의 진술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문장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하면서, “여기에서 결론이 생락된 것은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행동의 급속함을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한다. 칼빈 역시 이 문장에서 결여 현상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부 -- “이제 앞으로 그는 생명나무의 열매로 나아가는 일이 금지되어야 한다” --로써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iii) 그렇다면 이제 창 3:22의 내용 -- 그 중에서 특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의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을 좀 더 세밀히 살필 때가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의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라는 진술은, 아담 자신의 표현이 아니고 아담의 상태 -- 그가 타락한 죄인으로서 이제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를 맘 속 깊이 동경하고 목말라한다는 것 -- 에 대한 하나님의 혼잣말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 아담은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생명나무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을 것이고 아마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에게 계시된 것은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17) 뿐이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금령(禁令)을 지켰다면, 그리하여 순종의 테스트 용으로 채택된 이 나무의 열매를 일정한 테스트 기간 동안 따먹지 않았다면, 그는 피조물에게 허락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상급 -- 영원한 생명 --을 부여 받았을 것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런 영적 실상의 표시인 생명나무로 어떤 수종을 의중에 두고 있었는지 계시하셨을 것이고, 아담은 이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따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테스트에서 실패했다. 그는 이제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고 죄인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의중에 두신 생명나무가 어떤 수종인지 아담에게 계시하는 일이나, 또 이 계시를 통해 생명나무로 지목되었던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심판의 메시지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 -- 이제는 과거와 달리 향유의 가능성이 사라졌는데 -- 가 목마르게 그리워졌다. 타락 이후에 오히려 그의 마음 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전 3:11)이 더욱 용솟음쳤던 것이다. 사실 선악과의 열매를 통한 테스트 이전에는 아담이 “선”만 알고 있었으므로 이미 어느 정도 하나님과의 교제 -- 비록 완전한 정도의 생명적 관계는 아니었지만 --를 누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악수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불순종한 후부터는 “선”과 “악”을 함께 알게 되었고, 악의 영향 밑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담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동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iv) 바로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필자의 해석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할 것이다. 첫째, “당신은 아담이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했는데, 성경에는 이미 창 2:9부터 ‘생명나무’가 언급되어 있지 않소? 이것은 아담이 선악수의 열매를 통한 테스트 이전부터 이미 생명나무에 관해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오?”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인식 범위 안에 있는 것과 아담의 인식 범위 안에 있는 것 사이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질문이다. 창 2:9에 기술된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바 -- 아담이 선악수의 열매에 관한 테스트를 통과하여 생명의 교제를 확립할 경우 그 표시로서 어떤 수종을 생명나무로 채택할 지에 대한 것 --를 기술한 것이지, 이것이 결코 아담의 지식 내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만일 이것이 아담과 하와 -- 처음에는 아담만 알았다 하더라도 곧 어떤 식으로든 하와에게도 전달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의 지식 내용이었다면, 뱀이 동산 나무에 대해서 시험하듯 물었을 때 하와는 생명나무와 관련하여 작은 힌트라도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것 같다.

 

창 2:9에 언급되었다고 해서 꼭 아담이 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음은 선악수의 경우를 고려해 볼 때에도 자명히 드러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테스트를 하는 수단으로 어떤 특정한 수종을 사용할지 미리부터 의중에 두고 계셨다 -- 이것이 바로 창 2:9, “동산 가운데에는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 의 내용이다. 그러나 아담은 그런 테스트의 계획이나 테스트의 수단이 될 나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창 2:17에 가서야 비로소 테스트의 계획과 더불어 어느 나무가 테스트의 수단이 될지 알게 되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중을 밝히신 까닭이다. 이 경우 아담이 선악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은 창 2:9의 기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 2:17의 내용을 아담에게 계시한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선악수와 생명나무의 차이가 있다. 선악수는 아담 편에서의 순종 여부를 테스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담의 인식 대상일 필요가 있었지만, 생명나무는 그렇지 않았다. 만일 아담이 순종의 테스트를 통과하여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영구적으로 확립되었다면, 그 표시인 생명나무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죄에 빠진 이상 --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적인 생명이 단절되어 있으므로 -- 그 표시인 생명나무에 대해서 알 필요도 없었고 또 알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생명나무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질문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연이어 두 번째 질문이 제기된다: “당신의 말처럼 아담이 생명나무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왜 창 3:22에는 흡사 아담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라고 되어 있소? 오히려 당신의 말과 달리 아담은 생명나무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일부는 이미 앞의 (iii) 부분에 주어져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창 3:22에 나타난 내용이 아담의 진술이 아니고 하나님의 내적 궁리라는 사실이다.

 

역시 전기했듯이 아담은 이제 죄에 빠진 채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 -- 곧 영생 -- 만을 목마르게 기다리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아담의 내적 상태를 하나님께서 혼잣말 하듯이 기술한 것이 바로 창 3:22의 뒷부분이다. 이런 식의 표현과 묘사를 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독자들로 하여금 영생을 잃은 비참한 상태를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생명나무에 대한 금지 묘사”가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심중에 생명나무를 표시로 사용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으므로, 타락한 아담의 심령 상태를 얼마든지 자기 인식의 관점에서 -- 이는 생명나무의 언급을 필요로 하는데 -- 기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과 생명나무에의 접근 금지는 “영생”을 잃은 표지로서 서로 간 상통하는 점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전자를 묘사할 때 “생명나무” 또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레 느껴졌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질문 때문에 아담이 생명나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주장을 철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3) 생명나무의 성례적 의미

필자는 생명나무가 역사적 환경에서 자라난 자연 수종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의도를 전달하는 도구적 수단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된 “하나님의 의도”란 영생, 혹은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에 대한 표시(sign) 역할을 하는 것임 또한 밝혔다.

 

(i) 그런데 생명나무를 이렇게 영생에 대한 표시로 간주하는 것을 가리켜 생명나무를 성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벌코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 나무[생명나무]의 열매를, 아담의 신체에 영생 불멸을 일으키는 마술적이거나 의료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선물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 있었다. 십중팔구 생명나무는 생명에 대한 지정된 상징(symbol)이나 인(seal)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생명의) 약속을 상실했을 때 그 표시(sign)에의 접근 또한 금지되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창 3:22의 말들은 반드시 성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강조는 필자의 것].

 

그러덤 역시 영생과 생명나무의 관계를 성례적으로 설명한다.

 

이 축복은 죽음을 당하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는데, 함축하는 바인즉 “죽음”의 반대이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함없는 신체적 생명과 하나님과 영구 지속적 관계라는 측면에서의 영적 생명이 포함된다. “…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 나무” (창 2:9)의 존재 역시, 만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정한 테스트 기간의 만료 시까지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언약 관계에서의 조건을 충족시켰더라면 하나님과 더불어 누렸을,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표시하는 것이다 [강조 필자의 것].

 

이제 생명나무를 성례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명확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왕 내친 김에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요소(elements) -- 떡과 포도주 --를 예로 듦으로써, 더욱 확실한 설명을 시도해 보자.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가 다른 자연산의 것과 생물학적으로 구별되는 독특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동시에 어떤 특정한 떡과 포도주가 성찬식에서 사용된다고 해서 그 물질 자체에 무슨 신비한 효능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온당한 신앙의 자세 없이 그저 떡과 포도주를 맛보았다고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마술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담에게 있어 생명나무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영생을 얻게 되어 있었는데, 그 영생을 누린다는 표시로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실 것이었다. 즉, 이미 아담에게 영생에 대한 자격이 있을 때에 생명나무가 주어지는 것이지, 아무런 합당한 자격이나 권리도 없는데 그저 생명나무의 열매만 먹으면 영생을 누리게 되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모든 내용을 아마도 보스(Geerhardus Vos)만큼 확실히 -- 그러면서도 축약적으로 -- 기술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생명나무의 특정한 용도는 일반적인 나무의 중요성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창 3:22로부터 미루어 보건대 인간은 타락 이전에 그 열매를 먹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한편 생명나무에 대해 어떤 금지 조항도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 나무의 용도가 미래를 위해 마련된 것 -- 후에 그것에 귀속되는 종말론적 의미 심장성과도 일치하는데 -- 임을 이해하도록 해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나무는 테스트(probation)를 거쳐 순종함으로써 확보되는, 그러한 더 높고, 불변하며, 영원한 생명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 전에 열매를 향유함으로써 영생의 결과를 기대하는 일은 그것의 성례적 특성과 배치되는 바였다. 인간에게 최고의 생명이 확보된 연후에라면, 그 나무는 그 최고의 생명을 전달하는 합당한 성례적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후 인간에게 열매를 빼앗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셨는데, 이런 충동은 하나님의 목적에 위배되는 바였다. 그러나 바로 이런 욕구가, 생명나무는 테스트 이후의 시간을 위한 생명적 성례의 표(life-sacrament)였음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 주는 것이다 [강조는 필자의 것].

 

(ii) 그러나 아담과 연관한 생명나무를 성례적으로 이해한다고 하여서 아담의 생명나무와 오늘날의 성찬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생명나무를 대하는 아담의 상태와 성찬에 참여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상태가 죄성의 측면에서 볼 때 어마어마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즉, 아담이 생명나무를 앞에 두고 있을 때, 비록 원의를 부여 받아 온전한 상태의 인간이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완성될 천국에서의 영적 상태 -- 죄를 범할래야 범할 수 없는 최고의 상태 --를 누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만일 불순종하면 타락할 수도 있는 미결정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결국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의 길을 택했다. 이제 그는 영원히 생명나무에의 기회를 잃었다. 그것이 바로 범죄하자마자 부각되는 아담의 처지요, 창 3:22가 나타내는 바이다.

 

따라서 이제 아담은 처음과 같은 조건 -- 다시금 범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테스트 이전의 상태 -- 으로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논리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이제 영생 향유의 길이 다른 방식으로 마련되었으면 모르겠거니와 --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런 길이 있음 (cf. 창 3:15)을 알리셨다! -- 테스트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길은 불가능했다. 생명나무가 아담에게 성례적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생명나무에의 참여는 영단번 주어지는 기회라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의 성찬 참여와 천양지판의 차이를 나타낸다.

 

바로 이 점을 확실히 하지 않기 때문에 생명나무와 관련하여 합당치 않은 설명이 등장하곤 한다. 만일 우리가 아담의 생명나무와 관련하여 성례적 견해를 지지한다면 -- 대부분의 개혁파 신학자들이 그러한데 -- 아담이 범죄한 이후 다시금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본다는 내용의 진술은 마땅히 피해야 한다. 즉, “만일 아담이 타락 이후에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하는 식의 진술은 성립조차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 바르트의 설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아담]가 범죄자가 되었을 때에도 그는 그것[생명나무]을 건드리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즉,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더라면: 필자 주], 하나님의 직접적 실재를 이해하려는 교만하고 사악한 시도에 의해, 즉 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에 의해, 그는 자신의 범죄로부터 연유하는 타락을 증대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자기 스스로 자초한 운명을 신격화하는 일이었으니, 자기가 범죄자로서 얽매게 된 죽음 자체에 자신을 주는 것, 그리하여 영원한 죽음 -- 아리러니컬하게도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의미와 특성이 되었다! -- 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었다 [강조는 필자의 것].

 

바르트는 여기에서 타락한 아담이 다시금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생명나무의 열매를 성례적으로 해석한 자신의 방침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이미 생명나무가 그 성례적 의미를 상실했는데 그 열매를 따먹는 것이 -- 혹은 따먹지 않는 것이 -- 아담의 영적 상태에 무슨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아니할 말로 아담이 범죄 후 어찌어찌 하여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로 선택한 그 수종을 알아내었다고 하자. 그리하여 그 열매를 따먹었다고 하자. 바르트에 의하면 그 열매를 먹는 순간 아담은 지옥을 연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측이 생명나무를 성례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합당치 않다. 아담이 불순종의 길을 택한 그 순간 그는 영생을 상실했고, 동시에 그 영생의 표시인 생명나무조차 상실한 것이었다. 혹시 그 생명나무로 정해진 열매를 먹는다고 해도 그것이 아담이 초래한 재난을 더 악화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동시에 사태의 개선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반(反)사실적 조건문(counterfactual conditionals) -- 실제 일어난 사태와 다른 내용을 가정하여 발하는 진술 --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진술은 성경에도 나타나고, 또 신학적 논변에도 종종 등장하는 바이다. 문제는 이러한 조건문에 있어서 전제절(前提節, protasis)의 내용이 얼마나 건실한가 하는 것이다. 이 점을 좀 더 명료히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예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CS1) 만일 송인규가 휴학을 한 번 더 했더라면 [전제절], 합신 1기생이 되었을 것이다 [귀결절].

(CS2) 만일 내가 소돔에서 기적을 행했더라면 [전제절], 오늘날까지 소돔성이 건재했을 것이다 [귀결절].

(CS3) 만일 사도 바울이 오늘날 한국의 교회 현장에 나타난다면 [전제절], 우리를 보고 통탄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귀결절].

(CS4) 만일 둥근 네모가 가능하다면 [전제절], 우주는 콩알보다도 더 작게 축소되었을 것이다 [귀결절].

(CS5) 만일 아담이 범죄 후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 불가능한데 따먹을 수 있었다면 [전제절], 아담은 영원히 지옥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귀결절].

 

상기한 다섯 가지 진술은 그 형식으로 보아서는 모두 동일하게 반사실적 조건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CS1), (CS2), (CS3)와 (CS4)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비록 (CS1), (CS2), (CS3)가 모두 반사실적 진술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전제절에는 모순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특히 (CS1)의 경우는 전제절의 내용이 실제 사태에 매우 근사하기 때문에, 더욱 큰 설득력을 갖는다. 또 (CS2)와 (CS3)는 비록 (CS1)만큼은 실제 사태와 유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제절에 무슨 모순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대로 타당한 진술이라고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CS4)의 경우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CS4)의 전제절에는 명백한 모순 -- 둥그런 네모는 불가능한데 가능하다고 가정하므로 -- 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건실성을 갖추지 못한 진술이라고밖에 평가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CS5)의 경우는 어떠한가? (CS5)는 (CS1), (CS2), (CS3)와 동류에 속하는가? 아니면 (CS4) 쪽에 가까운가? 불행하게도 (CS5)는 (CS4) 식의 반사실적 조건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CS5)의 전제절에는 모순이 포함되어 -- 아담이 일단 선악수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영생을 상실했고 이로써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 불가능한데, 따먹을 수 있다고 연이어 말하는 것은 분명 모순을 함의한다 --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모순을 칼 바르트(Karl Barth)와 에드워드 영(Edward J. Young)이 범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여기에서 반사실적 조건문 자체나 그러한 조건문을 사용하는 반사실적 논증(counterfactual argument)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제동을 거는 것이 아니다. 역시, 전기했듯이 이러한 조건문의 논증적 사용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고, 또 모든 이론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이다. 단지 그런 조건문의 전제절에 모순이 포함되어 있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여 말하거니와, 만일 어떤 이가 생명나무에 대해서 성례적 해석을 취하지 않고 본유적 효능 내재설을 지지한다면, (CS5)의 전제절에는 아무 모순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이 적어도 성례적 해석을 취하는 이들 -- 개혁파 신학자들을 포함하여 -- 에게는 닫혀 있다.

 

IV

 

이제 필자는 이 논문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필자는 창 3:22의 생명나무와 관련하여 성례적 해석을 취하여야 함을 역설했다. 그런데 사실 아담의 테스트와 관련하여 행위 언약을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성례적 해석이 너무나 당연하고 잘 맞아 들어간다. 왜냐하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권리는 결국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주어지는 약속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물론 개혁파 학자라고 하여 행위 언약의 존재를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 역시 아담의 대표성만큼은 대체로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담의 법적 대표성만 인정한다고 해도 생명나무에 대한 성례적 견해와는 조화로운 관계를 가질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일 어떤 이가 아담의 법적 대표성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럴 경우에는 생명나무에 대한 성례적 해석을 취할 수도 있고, 본유적 효능설 쪽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쪽을 취하든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성례적 해석이 아담의 법적 대표성과 매우 정합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본유적 효능설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이가 행위 언약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생명나무의 본유적 내재 이론을 주장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반드시 성례적 해석이 등장해야 한다.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한 일이다.

 

(끝)

2005. 1. 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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