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가 전하는 메시지
송영찬 목사
소선지서의 메시지<1>서 론
구약 성경은 크게 모세오경, 선지서, 성문서로 3 구분 됩니다. 그 중 선지서는 전선지서(former prophets)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와 후선지서(latter prophets)로 나누입니다. 후선지서는 다시 대선지서(great prophets)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서와 소선지서(minor prophets)로 나누입니다. 소선지서는 12선지서로 나누이기 때문에 헬라어로 Dodecapropheton 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1.히브리 예언의 성격
예언(prophesy)이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나타내기 위해 인간이라는 대변자를 통하여 말씀이 구두적으로 혹은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서는 성경에 기록된 사건도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역사적 사건 자체도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의 예언이란 예언적 사역에 종사했던 (특별히 선택 받아서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들의 강론에만 국한됩니다. 그러나 이들 선지자들 중에서도 기록을 남기지 않은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메세지가 말로써만 전해젔기 때문에 구술 선지자들(oral prophets)이라고 합니다.반면에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을 정경선지자(wrighting prophets)이라고 합니다.
“예언하다” 라는 히브리어 니바(nibba/ )는 “소환하다,알리다,부르다”라는 뜻으로서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부름 받거나 임명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에서 “불리움 받은자”라는 나비(nabi/ :선지자)라는 독특한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란 자신의 견해를 남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로 부터 온 사신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하여야 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입니다.
선지자를 지칭하는 또다른 단어는 “하나님의 사랑”( )으로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다른 칭호로는 선견자( 또는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물질세계의 거짓된 모양이나 외관에 속지 않고 하나님의 안목으로 문제점들을 사실 그대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이상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실제로 보여주신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2. 선지자의 기능
처음엔 제사장들이 생활의 실제문제에 대한 매일의 행동 규범을 위하여 모세 율법의 의미를 가르쳐 왔었습니다.그러다가 제사장직이 점차 전문화되고 또한 실생활에서 해이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언약관계의 성실성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할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곧 선지자들 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사역이란 단순히 장래일을 미리 말하는 것 이상으로서 다음 네가지로 나타나 집니다.
첫째,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공로나 힘 또는 인간적 동맹 세력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의 자비하심과 구원의 능력만을 의지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들째, 선지자는 안전과 축복은 언약을 신실히 지키는 것을 조건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실성은 교리적 확신뿐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구별된 삶을 영위하겠다는 자신들의 의지의 진실한 순종을 내포하고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언약에 대한 이해와 구별된 삶의 순종이 없이는 아무리 많은 제사나 예배도 하나님을 만족해 할 수 없음을 천명했습니다.
셋째, 선지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격려했습니다. 불과 소수외에는 모두가 완고한 불순종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향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이방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선택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 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 주어질 심판을 경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파멸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선지자들은 진실한 신앙이 궁극적으로 승리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넷째, 선지자들은 성취된 예언을 객관적으로 확인함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권위를 확증하였습니다. 예언적 예언(predictive prophecy)의 성취는 그 예언을 주신 분과 그것을 성취케 하신 분이 동일한 역사의 주시라는 객과적 증거를 선지자들이 제공함으로써 인간 자신의 이성과 합리적인 권위를 굴복시켰던 것입니다.
3. 선지서의 메시지
정경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엘리야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와 엘리사 직후부터 정경 선지자들이 활동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정경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파악하기에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중 첫번째 segment에선 아브라함 다윗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건설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안식이 다윗왕국 건설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약속하심으로써 대적들로부터 대적들로부터 그의 나라를 공고히 하셨고 그 후에야 성전을 건축하시고 안식하시게 됩니다.
두번째 segment에서는 이스라엘의 신정국가가 어떻게 실패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정략 결혼을 통해 우상이 들어오고 자신도 우상숭배에 빠지자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를 시켜 여로보암에게 기름을 붓고 북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시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체가 신정국가였으므로 종교적인 배경이 없이는 국가 자체의 의미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여 벧엘과 단에 성소를 만들고 금송아지를 세우고 절기를 제정하며 레위인이 아닌 평민으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그 결과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바아사 왕조가 들어섰습니다.
바아사 역시 하나님만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여로보암의 뒤를 따랐기에 시므리에 의해 패위되었고 이 시므리를 오므리가 진압하므로 오므리 왕조가 들어서게 됩니다.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은 그 패역이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왕상 16:29-34). 이 때 엘리야가 등장하여 이스라엘 땅에 기근을 선포합니다. 이 기근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인인 사르밧 과부에게 가서 기근을 피합니다. 이방 땅까지도 기근이 들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구원을 베푸심으로써 이스라에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우주적인 구원자이심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한편 아합은 오바댜 장관을 시켜 엘리야를 찾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종교적 대결을 갖자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갈멜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바알을 섬길 것을 촉구합니다(왕상 18:20-21).
갈멜산의 대결은 (1)진정한 신을 찾고 (2)백성들의 신앙을 촉구하는 결판장으로서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불의 응답을 받은 후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신 것을 백성들이 고백하고 진실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런 후 엘리야는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마지막 발악을 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홀로 40일간을 걸어 시내산으로 돌아갑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새로운 메시지를 주십니다.
시내산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계시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순전하게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서약했었습니다. 이곳에 엘리야가 다시 이르른 것은 우상숭배로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탄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극적인 하나님의 개혁을 통해 이스라엘의 심판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가운데 이스라엘을 정화시키실 계획을 선포하셨습니다. 곧 아람의 하사엘을 아람왕으로 세우고 군대장관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으며 엘리사를 엘리야 대신으로 기름부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1)이방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할 것과 (2)예후를 통해 아합왕과 바알 선지자들을 심판할 것과 (3)엘리사를 통해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남은 자”(Remnant)들을 견고히 하시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시내산 언약에 의하여 율법에 따라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불안정한 (ambivalent)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 하에서 이스라엘은 결단코 율법의 요구에 순응하지 못하고 심판에 이르고 맙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새로운 구원 계획을 선포하시게 됩니다. 곧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남은 자”를 택하시어 그의 나라를 견고히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주의 왕이신 것을 만방에 선포하시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서 그의 나라를 정화시키되 “남은 자”를 두시어 그의 의로운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메시지야말로 구속 역사의 대전환점이 될 뿐만 아니라 엘리야를 통한 이 메시지는 이 후 모든 선지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자의 메시지란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심판을 하시되 남은 자를 남겨 두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곧 엘리야를 통해 기름부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데 결국 예후에 의해 아합 왕가가 심판을 받고 바알 선지자들이 철저하게 소탕이 됩니다. 그러나 예후 역시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아니함으로 아람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정화된 뒤에 이스라엘은 중흥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일을 위한 선지자가 요나 선지자였습니다.
4. “남은 자”(REMANT)사상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남기시겠다는 사상은 구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배경적 요소입니다. 특히 선지자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통적 요소인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모든 선지서들은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과연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버릴 수 없습니다. 바로 그 해답이 “남은 자 ” 사상입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 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끋까지 해하시리라”(사10:20-23)
이와같이 비록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기시어 다시 돌아오게 하여 의롭고 공의로운 나라를 재건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다시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욜 2:32)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9:27)라고 하면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 11:5)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남은 자”란 순수한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그 시대를 위해 남겨 주신 자를 이릅니다. 지도자들의 잘못과 그를 따른 백성들은 철저히 심판을 받았지만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위해 남겨 놓으신 자들만 끝까지 믿음의 정조를 지켜 왔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구현하시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그들을 각성시킴으로 새로운 vision을 항상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믿음의 정조를 끝까지 지키는 남은 자를 구원하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부추겨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구약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으며 결국 이들의 구원의 완성자로서 메시야를 완성하셨고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서에서 남은 자 사상을 잃어버린다면 공허한 지식만 얻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남은 자는 어느 시대고 소수의 무리였으며 지금도 역시 이들 “남은 자”를 위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우리들의 믿음의 정조를 지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소선지서의 메시지<2>구약의 선지자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세우신 것은 깊은 섭리가 있어서 였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고, 언약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모세의 율법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히 필요할만한 계시가 주어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서 그 시대에 필요한 계시를 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이 주변국가들로부터 우상과 미신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변 국가들은 우상과 미신을 통해 신탁과 계시를 얻는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그러한 사술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줄 선지자가 필요했습니다. 세째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와의 관계에 있어서 완전해야만 했기에 선지자가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의롭고 완전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러한 삶이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네째는, 이스라엘이 이방과 구별되어야 했기에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출 19: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체가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 역할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택하시어 이방에 대한 이스라엘의 사명을 다하도록 해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선지자 제도는 이방의 선지자 제도와는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기 전에 이방에서도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언자 또는 점술가 등으로서 인간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을 해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신적 기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록 제도면에서나 활동면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구약 역사와의 관계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심”이라는 예언은 역사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알려지기도 하고 수행되기 위해서 예언은 어떤 형태로든지 모든 역사와 병행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각 시대마다 독특하게 나타납니다. 족장 시대는 현현(theophanic)으로 나타납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눈에 보이는 현현체(theopneustic)로 직접 계시하셨습니다. 그 후 모세 시대에는 영감(theopneustic)으로 계시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감된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다 점차 하나님은 영감된 기록을 선지자들을 통해 남겨 놓으시더니 마침내 그리스도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말씀(theologic)으로 계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영감된 기록(벧전4:11)을 통해 영원히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선지자직이 신정국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였으므로 신정국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였으므로 신정국가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선지자직은 신정(神政)을 집행함과, 모세시대의 원제도들을 순수하게 보전함과, 메시야가 싹틀 선택된 씨로서의 그 민족으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할당된 일을 준비하도록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 역할을 담당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직이 신정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하게 발전되고 있음을 구약역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크게 3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1기는 사무엘이 선지자로 불리움 받기 이전까지입니다. 이 기간에는 특별히 선지자라고 세워진 직분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특히 순수한 신정적 성격이었기 때문에 모세나 여호수아 혹은 사사들이 다스리는 것으로도 충분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제도를 만들어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고 직접 그의 종들을 통해 다스렸기 때문에 따로 선지자를 세울 필요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제 2기는 사무엘 시대부터 정경 선지자들이 등장하기까지 입니다. 이 기간에는 주로 구술 선지자들이 활동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재판관(王), 제사장, 선지자로서 신정국가의 3대 요소를 지니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백성들의 요구로 왕직이 설립되자 왕에 대한 견제로서 선지자직이 공식적인 위치에 확립되었습니다. 그 결과 열왕시대에는 선지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선지자들은 주로 그 당시에 당면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제3기는 정경 선지자들의 시대입니다. 이 시기엔 예언을 기록하였으며 점차 현재일 보다는 미래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크게 세 부류의 선지자들로 나누입니다.
<1>북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주로 구술 선지자(엘리야, 엘리사)들이 활동했던 북왕국에선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들이 활동했을 뿐입니다. 아모스는 남 유다 사람이었음에도 복왕국에서 활동했던 것은 대부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주위에 몰려있었기 때문입니다.
<2>이방인들을 위한 선지자들
요나, 나훔, 오바댜가 불리움 받았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신정국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권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 인류의 지배에 대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오바댜는 에돔을 향해 요나와 나훔은 니느웨를 향해 선포했습니다.
<3>유다의 선지자들
이들은 저술 선지자들의 대부분으로서 각기 독특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보다 넓은 시야와 종종 위로를 담고 있음이 특징입니다. 북 이스라엘과 이방인 선지자들이 주로 책망과 무서운 경고를 선포했으나 이들은 소망적인 이상(vision)과 장래의 영광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각기 시대적으로 구분이 되는데 나름대로의 독특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가. 절 정 기
유다 왕국이 통일 왕국에서 분열된 이후에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같은 영화를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열뒤 거의 100여 년 동안에는 상당히 번영을 하였습니다(웃시야와 히스기야 시대까지). 이 기간에는 이사야, 요엘, 미가 선지자들이 활동하였는데 메시야적인 것이 그 특징입니다.
나. 쇠 퇴 기
이후 백여 년 동안은 쇠퇴기로서(시드기야까지) 스바냐와 하박국 선지자들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다가올 유다의 멸망에 대한 강렬한 경고를 선포했습니다.
다. 포 로 기
유다가 풍전등화와 같이 위급할 때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활동했고 마침내 70년 동안 바벨론으로 유배되었을 때는 에스겔과 다니엘이 활동했습니다. 에스겔과 다니엘이 활동했습니다. 에스겔과 다니엘은 주로 환상(vision) 가운데 하나님께서 회복해 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라. 회 복 기
구약의 마지막 시기로서 학개, 스가랴, 말라기 선지자들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신정국가의 정신을 되살리며 그 백성들의 사명을 고무시키기 위해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죄악들을 교정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였습니다.
2. 메시야적 예언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을 보면 3 가지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1) 이 예언은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왔으며, (2) 선지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로부터 받은 메시야만을 선포했으며, (3) 그 메시지는 한 목적을 담고 있는데 곧 메시야에 의해 성취될 미래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메시야”(???)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흔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이 말속에서의 “기름 부음”이란 영속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 메시야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지상에 오실 한 사람으로서 신적인 인간입니다(사 9:5-6). 메시야가 지상에 온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오심을 계시하는 것으로서 그의 오심은 마지막 때를 가리킵니다. 그는 다윗의 후손인 왕으로 오시며 다윗의 다윗의 보좌에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가 오시는 목적은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그는 구세주로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담당할 것입니다.
메시야적 예언은 인간의 죄와 대조하여 이해하여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불순종은 인류를 마음의 부패와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 속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인간은 그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친히 이 일을 해결하시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와와 뱀을 적대 관계에 두리라고 선언하심으로써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대립의 결과로 여자의 후손(씨)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창3:15). 이것이 곧 메시야가 오실 것과 그의 사역이 승리할 것ㅇ르 분명하게 선언한 최초의 예언이었습니다.
이 이후의 계속된 예언은 모두 이 언약 속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 노아를 이어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이어졌고 야곱은 유다에게서 실로가 오시리라고 예언합니다(창 49:1). 그리고 사무엘이 유다의 후손 다윗의 위(位)가 영원히 세워질 것이며 그 위에 앉은 한 주권자가 영원한 왕국을 통치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삼하 7장). 메시야는 영원한 왕국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메시야의 왕국은 영원하며 공의와 정의로 세워지며 백성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이사야서). 그 왕국은 일시적이고 지역적인 이 세상의 왕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메시야의 왕국만이 우주적이며 영원할 것입니다(다니엘서). 그러나 메시야를 왕으로서만 보아서는 정치적인 인물로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메시야의 사역이 이 세상의 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본질상 영적인 것임을 선포합니다. 메시야가 구세주인 것은 확실하지만 자신의 죄의 대가가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하여 슬픔과 고난을 대신 지신 “종”으로 묘사를 하였습니다. 메시야가 그렇게 한 것은 사람들이 자유하며 하나님의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메시야는 고난을 받으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그의 구속 사역의 본질이며 영원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원복음(창 3:15)의 성취인 것입니다.
모세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처럼 모든 선지자들은 오실 그 위대한 선지자(신18:9-22)의 모형이었습니다. 비록 선지자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지금처럼 충분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장차 올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메시야의 사역을 통일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이방 구원에 대한 관심
모든 선지자들이 인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지만 대부분 유대를 중심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방인들이 구원의 메시지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볼 때 그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고 마음이 완악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야를 탄생시킬 통로 역할을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오신 지금은 영원히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LOGOS)에 따라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처음부터 우주적인 것이었습니다. 단지 한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이방 구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요나서).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심판하신 후 그들이 새로운 존재(Being)로 나타난 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도구로 삼으셨던 것입니다(요엘서, 호세아서).##
소선지서가 주는 메시지<3>오바댜의 메시지
오바댜(????)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오바댜는 BC 840 -820 년대 남쪽 유대 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840 년경 여호람 왕이 통치하던 중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침공(대하 21:16-17)할 때 도운 에돔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본래 에돔은 이스라엘의 동남쪽에 위치한 나라로서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렐 즉 야곱의 후손들과는 형제지간입니다. 에돔은 무수한 바위와 산으로 덮여있는 험준한 지대에 위치해 있으므로 외적의 침입이 적었던 천연적인 요새 지대였습니다. 그리고 지혜자들이 많았으며 모압, 암몬, 두로, 시돈 등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국방이 튼튼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에 의해 정복되어(삼하 8:13-14, 대상 18:13)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여호람왕이 우상 숭배에 빠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외적의 침입이 있자 틈을 타 독립을 하였습니다(왕하 8:20). 그리고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침공하자<1>유다를 침공하였고 (11절),<2>유다의 재앙과 고난을 기뻐하며(12절),<3>유다의 고난에 직접적인 가해자가 되었고 (13절),<4>유다의 도망자와 남은 자를 적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14절).
따라서 오바댜는 에돔에 대하여<1>여호와의 사자가 에돔을 칠 것이며 (2절),<2>크게 멸시를 당하게 할 것이며(3절),<3>에돔이 철저하게 수탈을 당하게 될 것이며(4-6절),<4>에돔의 동맹군이 배반할 것이며(7절),<5>지혜자가 없어지겠고 (8절),<6>에돔이 완전히 멸망될 것(9절)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며 회복하시겠다(17절-18절)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 왜 에돔이 멸망을 받아야 하는가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을 섬기도록 불리움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되 먼저는 기근 같은 재앙으로 하시고, 후에 외적을 보내셔서 수탈을 당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징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람왕이 우상 숭배에 빠져 여호와를 떠난 대가로 에돔이 독립한 것(대하 21:8-10)은 하나님의 심판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여호람을 침공한 것도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대하21:16-17).
따라서 에돔이 이스라엘의 수하에서 떠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바댜는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렇다면 오바댜의 메시지에 담겨진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다스림(통치)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만은 하나님께서 대리자를 택하셔서 다스려 오셨습니다. 그 대리자가 곧 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율례와 법도(이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에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려야만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 가장 유력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은 사람이 다윗왕 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왕으로 세움 받은것에 대한 확실한 사명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점차 이웃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함으로써 이방 국가들도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방 국가들이 다윗에 의해 정복을 당함으로써 다윗의 통치를 받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으로만 다윗의 휘하에 있는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방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람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구약에선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되어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이방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하셧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돔이 유다 왕국의 속국이 된 것은 “하나님의 나라”로서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에돔은 지금까지 자기네들이 갖고 있던 법과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도와 습관을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허락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율법을 따라 살면 구원에 이르도록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돔이 이제는 더이상 유다의 통치를 받지 않고 독립하겠다고 그 그늘을 떠나버린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독립을 한 것으로 보아선 안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더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 자기네들의 법도와 습관을 따라 살겠다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비록 다윗에 의해 강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유다의 손에서 떠나 버리게 되면 구원의 길마저도 포기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오바댜의 예언속에 나타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면에서 에돔이 형제 국가인 유다를 돕지 않고 괴롭혔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너무 협소하게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더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고 떠나버린 대가인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사명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이방인에 대한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지 교훈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로 살았고 범죄하지 않았다면 에돔이 독립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에돔이 계속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았다면 에돔 사람들도 하나님을 여전히 섬김으로써 구원의 길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은 곧 주위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가리켜 제사장적 사명이라고 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되었던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에는 그러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이스라엘의 사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온전한 삶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나아가 이방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시며 왕이신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배워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제사장적인 역할을 위하여 불리움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할 때 이방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됨으로써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한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바로 살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고 그들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섬기게 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제사장적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다면 어느 구석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먼저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때만이 사회가 구원에 이르게 되며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3.남은자와 기업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다 할지라도 철저하게 심판은 하시되 어느 시대든지 “남은 자”를 남겨 두십니다.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이 멸절되어 버린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이스라엘을 남겨 두십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것과 구별하여 남겨두신 의미에서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중흥을 계획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에돔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한 대가로 심판을 받았지만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것”(17절)이라는 말씀은 따라서 오바댜서의 핵심이 됩니다.
특히 기업(possessions)을 받는다는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업이란 조상으로부터 받은 땅을 말하는데 이스라엘의 땅은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의를 요합니다. 그들이 비로소 가나안에 정착할 때에야 하나님은 각 족속들에게 땅을 분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들이 가나안에서 땅을 기업으로 분배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그 기업을 팔거나 양도할 수 없었습니다. 기업을 양도한다는 것은 더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나붓의 포도원을 팔라고 위협을 했어도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21:3)하면서 목숨을 걸고 지켰던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받았다는 것은 장차 임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도 기업을 받을 것이라는 보증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업을 이어 받으면서 언젠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기업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결코 져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의 기업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 7:6, 9:26,29).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신약의 백성들에게 기업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히 9:15).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기업을 얻었음에 대한 보증이라고 선포합니다(엡 1:13).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업을 받았다는 증표이며 이것은 나아가 영원한 새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것이라는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자 들에게 약속된 기업은 매우 의미심장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기업을 받게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었다는 것이며 장차 그들을 통해 등장할 후손들에게도 역시 구원의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선 기업으로 받은 땅이 생명보다 고귀했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기억할 것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21절)는 오바댜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모든 구원이 여호와께 있고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은 메시지입니다. 온전히 여호와의 다스림을 받는 자만이 진정한 남은 자로 남아있을 것이며 여호와의 기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하셨습니다. 곧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자만이 진정한 기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
소선지서가 주는 메시지<4>요엘이 전한 메시지
요엘(???)이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요엘은 BC 830년대 요아스가 7세에 유다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을 떄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당시는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몰락하고 예후에 의해 이세벨이 살해된 직후였습니다. 특히 아합의 딸 아달랴는 자기 아들 아하시야 왕이 예후에 의해 죽자 모든 왕자들을 죽이고 유다 왕국의 정권을 쥐고자 했습니다(왕하11:1-3). 그러나 요아스만이 구출되어 숙부이자 제사장인 여호야다에 의해 6년 동안 성전에서 숨기워져 양육을 받았습니다(대하 22:10-12). 그리고 요아스가 7세가 되자 여호야다는 유다의 정통을 잇는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왕상 11:9-12).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요아스는 숙부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야다는 제사장으로 무엇보다도 아달랴에 의해 폐쇄된 성전의 재건을 도모했습니다. 비록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조모 아달랴가 곳곳에 세워둔 바알 신당과 우상숭배만은 제거하질 못했습니다(왕하 12:1-3). 그리고 대부분의 중대한 일은 여호야다에 의해 결정되었으므로 요아스의 세력은 미약할 수 밖에 없었으며 유약한 상태로 유다를 다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외부적으로는 페니키아, 블레셋, 애굽, 에돔등 주변 나라들이 호시탐탐 불안한 유다를 침공하고자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요엘이 등장하여 여호와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순전한 모양으로 돌아설 것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1. 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가?
요엘 선지자는 메뚜기 재앙이 임함과 같이 여호와의 심판날이 임하기 전에 금식을 선포하고 여호와께 통회하라고 선포합니다(욜 1:14-15).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자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다고 선포합니다(2:1). 그리고 마침내 이방 군대가 침입하여 초개와 같이 이스라엘을 불사르고 잔혹한 학살이 전개됩니다. 그 날은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2:10) 함과 같이 크고 두려운 날이라서 아무도 벗어날 사람이 없었습니다(2:11).
그렇다면 이와 같은 메뚜기 재앙이나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곤고를 왜 이스라엘이 당해야만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방나라들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데 왜 이스라엘만은 혹독한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가는 지금 우리들에게도 중대한 문제입니다.
본래 전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버림받은 상태 아래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곧 노아 홍수로 멸절당할 만큼 악했을 뿐만 아니라 심판을 받아도 마땅할 만큼 버림받은 것이 사람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셨고 그 후손 중에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거대한 나라를 건설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2:1-3). 그 약속에 따라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중다하게 번성시킨 후 이스라엘 민족으로 만드시고 가나안 땅으로 불러들여 이스라엘 민족으로 만드시고 가나안 땅으로 불러들여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나라임을 선포하시고 율법을 통해 이방 국가들과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국가는 세상 이방 나라들처럼 권세를 잡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왕의 뜻에 따라 나라가 운영되고 다스려지는 것이 아닌 특별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운영되는 나라가 곧 이스라엘 국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인간 보다는 하나님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하여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삶의 방법대로만 살아야 했습니다.
대신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ㅇ르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세상 이방 나라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유업을 위해 땅을 사거나 전쟁을 통해 탈취하여 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거나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것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기업은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도 똑같은 유업을 받을 것이라는 증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장차 임할 영원한 메시야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러한 삶을 잊어버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방 사람들처럼 변화되고 말았습니다. 곧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중단해 버린 것이 그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돌아올 것을 권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악해진 이스라엘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머뭇거릴 뿐입니다(왕상 18:21).
하나님은 먼저 재앙을 내리시면서 이스라엘이 돌아설 것을 권고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돌아서지 않을 경우 이방 나라를 동원하여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었습니다(출 19:4-6).
2. 심판의 의미
요아스가 유다의 정통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아달랴에 의해 세워진 바알신당과 각종 신당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심지어 아달랴에 의해 철폐된 성전이 아직도 회복되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제사까지도 드려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러자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네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2:12-14)
재앙과 이방의 침략을 통해 황폐해져가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촉구하는 요엘의 외침은 오히려 강퍅해질 대로 강퍅해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더라도 이스라엘이 그러한 자리에서 돌아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복을 주실 것이라고 선포함을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징계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그처럼 곤고한 날을 통하여 하나님께 통회한다면 (2:15-17) 그리고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하여 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함을 보아서도 (2:18-20)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원 상태로 회복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이것을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약속의 증표입니다. 그들이 잠시 하나님을 떠난 대가로 그 땅에 외적이 침입했지만 진정으로 통회하며 그 기업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타인에게 기업을 넘기지 않고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그 기업을 얻었다는 것은 예전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장차 임할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으리라는 보증을 확인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구별된 선민으로서의 성결의 모습을 찾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징계 이상으로서 먼저는 그의 백성을 깨끗케 하고 원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숨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탕자 비유에서 가르쳐 주신 교훈과도 같습니다(눅15:11-24).
또 하나의 의미는 이러한 심판을 통하여 진정으로 하나님의 왕이신 것을 나타내시며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나아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의 교만한 나라까지도 심판하시는 전능자이심을 증거함으로써(3:9-13) 우주적인 하나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가나안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시며 전능자이심을 이방에게 선포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요엘 선지자는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호와의 날”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날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지며 마침내 그 종국에 가서의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에 대하여 보여주고 그 날이 임하기 전에 이스라엘의 통회를 촉구하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엘서를 이해하기 위해선 “여호와의 날”에 댛나 바른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먽 요엘은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메뚜기 재앙과 같이 곤고한 알로서 묘사합니다. 당시에 메뚜기가 수도 없이 날아들어 각종 푸른 것을 다 갉아 버리면 그 타격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더 나아가 한발까지 임하여 모든 초목이 불타는 것 같은 가뭄이 계속되는 모습이란 비참하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1:15-20). 요엘은 먼저 이러한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심판인 것을 선포하고 그 고난이 극심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인데 메뚜기 떼와 같이 많고 강한 이방의 침략이 그것이라고 말합니다(2:1-3). 그리고 그 날의 곤고한 모습을 말하면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선포합니다(2:11).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함을 선포하면서도 요엘 선지자는 최후까지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줌으로써(2:12-14)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의 풍요로움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모든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부어주시어(2:23) 온 땅에 밀이 가득하고 포도송이가 가득하며 메뚜기 떼가 먹은 것을 그 이상으로 갚아 주시되 다시는 이방으로부터 어떠한 수치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해 줍니다(2:21-27). 그리고 이러한 날(말세)에 이르러 하나님은 그의 신(神)을 모든 백성들에게 부어주어 꿈과 이상이 가득찰 것이라고 말합니다(2:28-30).
즉 경고-심판-위로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요엘은 또 다른 “여호와의 날”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곧 영원한 나라가 임하기 직전의 최후 심판에 대한 경고가 그것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2:31-32)라는 경고의 말씀은 모든 열국을 심판하시는 모습에서 성취가 되며 (3:14-17) 마침내 영원한 새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선포(3:18)함으로써 대 장정을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영원한 심판에 대한 경고-최후 심판-새 하늘과 새 땅의성취로 이어지는 “여호와의 날”을 기묘한 방법으로 연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3:21)는 말씀이야말로 우주적인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이심을 단적으로 표해주는 선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 앞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의 심판을 견딜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오직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3:16)는 말씀처럼 그의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생명이 되심을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소선지서가 전하는 메시지<5>요나가 전한 메시지
요나(????)라는 말은 비둘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는 여로보암 II세(BC 793-753)가 쓰러져가는 이스라엘 왕국을 부흥할 것을 예언하고 있음을 보아 780년대 선지자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왕하 14:25). 당시는 엘리야 선지자의 뒤를 이은 엘리사에 의해 바알 숭배가 철폐된 후였습니다. 그리고 아람 왕 하사엘에 의해 아합 왕가가 무너졌고 마침내 예후에 의해 이세벨과 모든 바알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한 이후였습니다. 이처럼 바알숭배가 철폐되고 아람의 침략이 무디어지자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부흥을 하게 됩니다.
특히 니느웨에 수도를 둔 앗수르가 부강해지면서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아람왕 하사엘을 죽이고 호시탐탐 아람을 공략하고자 하므로 아람은 이스라엘을 침략할 수 없었습니다.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침공보다는 앗수르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온갖 힘을 쏟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새롭게 이스라엘 왕으로 등장한 여로보암 II세는 부국강병책을 써서 다메섹을 공격하고 많은 영토를 확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때가 북이스라엘 왕국이 가장 부강했을 시기입니다.
1. 요나의 불순종에 대하여
이 무렵 하나님은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가 죄악이 관영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요나 선지자의 의아한 반응을 이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요나가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1:3) 멀리 도망가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번 기회에 니느웨가 완전히 멸망함으로써 다시는 이스라엘이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보기엔 아람의 벤하닷 보다는 니느웨가 훨씬 강하여서 이스라엘을 침공한다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하여 다시스로 도망간 것 이라기 보다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되기를 바랬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곧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기가 힘이들거나 싫어서가 아니라 그 마음속에 조국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요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선민 의식의 발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 이방인들을 업신여기는 영적 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자기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자부심과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특권 의식 때문에 이방인들과 상종하기를 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이방 니느웨에 대하여 그처럼 무관심했고 심지어는 은근히 멸망을 기대한 것은 이스라엘의 영적 교만을 표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스올의 경험이 주는 의미
이처럼 이방 구원에 대해 무관심한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안에서 큰 폭풍을 만나 마침내 바다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신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회심하도록 하십니다. 요나는 회심의 기도를 통해 “내가 주의 목적에서 쫓겨났사오니”(2:4,필자의 역)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흑암의 깊음에 빠져 죽게되었다고 말합니다(2:5). 그렇지만 요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2:6)고 하면서 온전히 자신이 변화되어 여호와만을 생각하고 의뢰한다고 고백합니다(2:7). 그러면서 끝으로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2;9)고 결단하면서 자신의 본연의 사명 의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에서 우리는 요나가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곧 1>하나님께 버림을 받고(2:4) 2>하나님께서 죽음에 이르게 되며(2:5) 3>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요나를 살리셨고(2:6) 4>전혀 새롭게 변화되어(2:7) 5>마침내 사명을 완수하게 됨(2:9)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2:9)라고 종지부를 찍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요나의 스올의 경험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가끔 요나의 표적을 이야기하시면서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40)고 하심을 보아서도 스올의 경험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전에 요나가 바다에 빠질 때의 상황을 잠시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가 심지에 뽑혀 바다에 던지우게 될 때까지만 해도 그 배안에 있던 사람들은 요나가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던지워지게 되자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자”(1:9)라고 자신을 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당하는 이 죽음이 어떤 경로로 이르게 되었는지 말할 때 각국 사람들은 여호와를 심이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가 바다에 던지워지자 풍랑이 멈춘 것을 보자 그들은 “여화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화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1:16)하게 됩니다. 곧 요나의 죽음을 통해 이방에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가 죽음에서 나와 니느웨에 으르러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고 하자 니느웨는 즉각 회개하고 여화와께 부르짖게 됩니다(3:8-9). 그러자 하나님은 니느웨에 대한 뜻을 돌이키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3: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요나의 죽음과 하나님의 이방에 대한 구원을 베푸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요나의 죽음을 통해 이방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죽음 후의 요나의 회심을 통하여 이방이 구원에 이르게 됨은 매우 의미심장 합니다.
요나의 죽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여호와께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증표가 됩니다. 그런 후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 살리시어 구원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선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2:9)고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인류를 구원하시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굳이 요나의 표적을 비추어서 자신의 사명을 밝히심에는 이러한 의도가 담겨있었습니다. 곧 자신이 죽으심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때문이요 자신이 살아난 이후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가 담고 있는 메시지에서 요나의 스올의 경험이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가 됩니다. 결국 요나는 스올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민 의식이 철저히 깨어지고 온전히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1.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나라이며 2.이방에 하나님을 나타내며 이방의 구원을 위한 제사장적 사명을 위해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출19:4-6참조). 그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표가 되어 이방인들을 두렵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단코 이스라엘을 멸절시키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준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패한 이스라엘 중에서 남은 자(Remnant)를 남기시어 새로운 이스라엘로 삼으시겠다고 엘리야를 통해 밝혀 주셨습니다(왕상19:18).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요나의 스올의 경험을 통하여 전혀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실 것을 밝혀 주십니다.(요나서의 의미). 곧 요나가 죽음에 내려갔다가 다시 살아난후 이방에 하나님을 불순종한 대가로 철저하게 심판을 받아 죽었다가 새로운 존재(Being)로 드러나야 할 것을 요나서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1.요나가 발다의 폭풍에 빠짐=이스라엘이 정치적 혼돈에 빠져 멸망함. 2.요나의 회심=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봄. 3.하나님이 요나를 살리심=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심. 4.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선포함=이스라엘이 이방에게 복음을 전함. 의 연관 관계를 지을 수 있습니다.
3.이스라엘의 회복(새로운 존재)이 갖는 의미
이스라엘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철저한 심판을 받아 죽음을 통과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서 이전에 가졌던 자신들의 구원을 지향하는 선민 의식과 특권 의식을 버리고 우주를 향한 우주적인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회복을 받게 되는 것은 단순히 선민이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남들보다 더 많이 받는 특권이라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회복된 이스라엘을 통해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 계획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이스라엘을 끝까지 회복하시는 것은 이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약속을 끝까지 성취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신실한 약속의 성취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참으로 은혜로운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나 선지자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심판을 받을 것과 마침내 회복하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깊이 관심을 갖고 있음에 대하여 주의를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최후의 궁극적인 성취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방법으로 심판이 예언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가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존재에 대하여 호세아는 광야에서 새로운 세대로 이스라엘이 등장 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사야는 새로운 출애굽으로, 예레미야는 새로운 존재로 등장해야 함을 예언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잇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지서들이 이방의 구원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4.선지서의 종합적 의미
이상을 종합해 보면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존하시어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실 것을 보여 주셨고 요나를 통해 죽음을 지난 새로운 탄생의 이스라엘이 이방 구원의 원동력이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후 모든 선지서들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다가 새로운 존재로 바뀌고 이방의 구원을 완성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와 요나의 메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선지서들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전 우주적인 광대한 구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 계획은 마침내 요나의 표적과 함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이후부턴 이방인이라는 개념조차도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예언한 선지자가 곧 예레미야 선지자 였습니다.(렘31장).
선지서가 전한 메시지<6>아모스가 전한 메시지 I
아모스(????)라는 이름은 ‘짐지는 자’라는 뜻입니다. 아모스는 베들레헴 남쪽의 드고아에서 목자로 있었습니다. 그가 남유다 사람으로서 북 이스라엘을 향하여 BC 670년경 선지자로 불리움 받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북 이스라엘엔 여화와의 말씀과 이상이 희귀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8:11). 이 당시엔 남유다 왕국의 웃시야 왕이 주변국가들을 정복하여 왕성하였고(대하26장),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II세의 말기로서 가장 부강한 상태였습니다(요나서 서론 참조). 따라서 빈부의 격차가 점차 심화되기 시작했고 물질주의 탐욕이 팽배하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더욱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난한 자들과 하류층 사람들을 수탈했고 멸시를 했습니다. 나아가 성정인 방종이 심화되었고 종교적 예배는 형식 치레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부패해진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아모스를 통해 선포하시면서(4장) 여로보암II세가 죽을 것과(7:11)이스라엘이 철저하게 멸망되어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7:17)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있을 것이며(8:11-14) 그후에 그들이 애통을 하게 될 것과(8:5-6), 하나님은 결코 그의 백성들은 따로 선별하여 남기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9:11-12).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기업이 주어질 것이며(9:12) 포로에서 귀환하게 되어 이스라엘의 회복이 있을 것을 통해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축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9:14-15).
이상을 보면 요나가 겪은 스올의 경험이 그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아모스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는데(5:4-5)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5:5)는 말씀은 모세 율법의 정수라는 점에서 신명기 6장4-5절을 되새기게 됩니다.
1. 이방이 당할 심판의 의미
아모스가 심판을 선포한 다메섹,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국가는 모두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던 나라들이었습니다. 이 나라들은 한때 다윗에 의해 정복이 되었다가 이스라엘이 소란한 틈을 타 모두 독립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들은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습니다(박윤선 성경주석 소선지서 175 이하 참조).
그런데 아모스는 이러한 행위 즉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불의를 행하는 행위 때문에 이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왜 이방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이방이 이스라엘을 침략했다는 이유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의 관심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런 뜻에서 이스라엘을 지상에 건설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정치적인 제도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꼭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기 위해 제정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군대 제도가 없었습니다. 어느 때든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만 하면 결단코 외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볼 때 농사를 짓기 위한 수리 관계 시설을 제대로 갖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봄과 가을에 적당한 양의 비가 오질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가나안 땅에서 농사가 잘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이른비와 늦은비를 적당히 내려주는것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생업을 위한 농사가 순조롭기 위해선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없이 안전된 삶을 살기 위해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간섭이 절대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가뭄 때문에 흉년이 든다든가 외적의 침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외면하신 심판의 증표였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지는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에 규정된 대로 사느냐에 따라 달려 있었습니다. 그 율법에 따라 절기마다 제사를 드리고 가난한 자들과 이웃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시고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 빠지고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할 때 하나님은 한 발을 통해 경고하시고 때로는 주위 이방 국가들을 사용하시어 이스라엘을 침략하도록 하십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다시 찾고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하나님은 이방 국가를 물리쳐 주십니다.
그러나 이방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는 그네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이스라엘을 징벌한다는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기네들의 이익 관계를 따져서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입을 때조차도 어떻게든지 이스라엘을 속박하고 노략했으며 더 나아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절시키고 자기들의 종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바로 이점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요소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지상에 건설된 하나님의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이방 국가들은 자기네들이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다스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전면으로 거역하는 것이며 나아가 지상에 건설된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멸절시키려는 사탄의 흉계의 발로였습니다.(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나훔서의 메시지 중 1.“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도 그들을 주장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방은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멸절 시킴으로서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구현인 하나님 나라까지도 지상에서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방이 이런것 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사탄의 흉계는 이처럼 미묘하여서 이스라엘을 송두리째 삼켜 버리려 하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유일한 도구로 선택된 특별한 나라였기 때문에 사탄은 어느 때고 이스라엘을 멸절 시키려 했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자 메시야가 오는 날에는 사단이 완전히 패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네들의 정치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의 구현을 저지하려는 사탄의 음모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나라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고하여 교만에 빠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한 대가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의 배후에 있는 사탄이 심판을 받는 것과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단코 사탄은 그 어느 모양으로든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 없음을 이방이 당할 심판에서 알 수 있게 됩니다.
2.북 이스라엘의 선민 의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국가를 심판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전세계를 다스리심을 나타내 주는 증표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 주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방 국가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주적인 통치다 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방이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유독 특별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침략한 대가로 여겨선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 국가들까지도 모두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열방들 중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을 선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타 국가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이 다스림을 떠난다면 이방이 당할 심판과 꼭 같은 심판을 받는 법입니다. 오히려 이방은 하나님의 나라를 침략하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된 대가로 심판을 받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대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암2:4-5)는 말씀을 보아서도 이방과는 다른 이유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오히려 이방보다도 먼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방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않는 한 그것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을 침략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대가로 재앙을 받거나 이방의 침략을 당하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단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심판을 통하여 이방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선포하고 이방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사용하실 뿐입니다. 또한 이방의 구원을 위하여 언제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중에서도 의로운 남은 자를 남겨 주신다는 점에서 이방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십니다.
곧 이방을 심판하실 때는 사탄의 앞잡이가 됨으로 철저하게 파괴하시지만,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경우에는 오히려 정화를 목적으로 하신다는 점입니다. 그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시며 쭉정이를 걸러 내고 알곡만을 모아들이는 선별 작업을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아모스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암9:7-9).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 구별된 알곡 즉 남은 자를 남겨 두시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계속 보존하십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이방과는 다르므로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지나쳐 마침내 잘못된 선민 의식으로 자라났고 드디어는 국수주의로 발전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에 대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로 여긴 반면에 자기들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한 복과 기업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암9:10).
이스라엘이나 이방이나 하나님을 거역하면 꼭 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오히려 북 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 II세가 건국할 때부터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우상 숭배를 자행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왔었습니다. 더 나아가 아합시대에는 아예 하나님께 대한 인식마저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이 외쳤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찌니라”(왕상18:21)는 신앙의 촉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북 이스라엘 왕국은 마침내 이방과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멸절되고야 말았습니다.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암4:11)
그러한 이스라엘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암5:15).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심판은 영원히 하나님과의 단절이었습니다(암8:11-14).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슴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제 7 강
아모스가 전한 메시지 II
3. 이스라엘의 예배와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근거로 제시한 증거는 아모스 2장6-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주자가 한 젊은 여자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게 하며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암2:6-8)
그리고 이 일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의 근거로 아모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3:1-2)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타민족과 다르게 생각하여 심판하시는 것은 열방중에서 특별하게 이스라엘만을 선별하시어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모세가 전해준 경고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의 이스라엘에게 유언으로 남긴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선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값을 주고 삼)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기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보응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신7:6-11).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고 영원한 상속자(기업을 이을 자)로 삼으셨음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 조상(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위함이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내셨으되 응당의 대가(속량)를 치루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일에 대하여 모세는 노래하기를 “이스라엘이여 들으라 너는 행복 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이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2:29)고 했습니다.
이처럼 특별한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은 세상 어느 민족보다도 그들을 아끼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주장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스라엘을 탐하거나 업수히 여길 수 없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을 탐낸다면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을 업수히 여긴다면 그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러한 도전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냉철하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사랑을 받든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했습니다. 이제부턴 자신들의 삶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이익과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모든 기준을 하나님께 두고 궁극적인 목적까지도 하나님께 두는 새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중심주의적인 삶을 표상화 한 것이 곧 예배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 사랑에 감복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는 결단코 주술적인 성격을 띠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위하여 예배 행위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디까지나 온전한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내 자신을 신령과 진정으로(요4:23-24)드리는 것이지 무엇을 더 받으려고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르켜 바울 사도는 “거룩한 산 제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들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만이 주인이시며 자기 자신을 다스리시는 유일한 왕이심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으로 예배를 하고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자신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온당한 요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가리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6:24)고 하면서 자기는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갈2:20).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즉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의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삶은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의뢰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떠맡긴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모양과 내용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전정으로 하나님 백성이 가져야 할 삶인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살도록 불리움 받은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고 살되 하나님께선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전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을 따를 것을 다음과 같이 촉구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예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30:19-20).
이렇게 불리움 받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받은 것이 곧 기업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기업을 받고 있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져 주셔야 했으며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도 꼭 같은 기업을 보장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과연 모세의 가르침대로 살지를 못했습니다.(사사기). 그리고 이스라엘 왕국이 건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자기들의 편안함과 안위를 위하여 살았고 우상 숭배를 즐거워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예배 형식을 갖추면서 자기들이 특별히 선택된 민족임을 자랑하면서 깊은 우월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여로보암II세 시대에 갑자기 나라가 부강해지고 외부의 침략이 약해지자 이스라엘은 더욱 형식 치레의 예배만을 일삼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을 전혀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하여 세겔을 크게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콀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암8:5-6)는 아모스의 징책을 보아서도 그러한 이스라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월삭은 특별히 하나님께 번제드리는 절기였으며(민28>11) 안식일은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속히 이 날이 지날 것을 기대하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착취랄 것에 골몰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요소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궁리만을 일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바는 곡식을 되어주는 용기인데 이것을 적게 들어가도록 속여서 이익을 많이 내는 방법을 골똘히 연구하는데는 정신이 없으면서 막상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제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저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부패함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악덕 행위가 얼마나 심했던지 땅이 치를 떨며 온 백성이 애통해 한다고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부패함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암8:8). 그들이 일삼는 것은 이미 초두에서 보았듯이 1.뇌물을 받고 의인을 정죄하며 2.가난한 자를 멸시하며 3.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즐기는 음란과 4.신성모독의 잔악 무도한 일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였던 것입니다.(암2:6-8).
이러한 사악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 아모스를 농하여 질책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 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찐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5:21-23)고 하면서 거짓으로 위장된 예배를 가증히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겉치레적인 예배나 제사 의식이나 찬양보다는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암5:24)고 선언하십니다.
형식을 앞세운 예배보다는 의인을 의인으로 인정하고 가난한 자를 도우며 불의와 탐욕과 음란과 사악함을 떠나 정의가 구현되는 삶에서부터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아모스는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향한 참된 예배는 먼저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례와 법도에 따라 사는 삶에서 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내 삶에서 부터 불의하다면 아무리 고결한 예식을 갖춘 예배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에서는 자신의 부도덕과 불의한 것과는 상관없이 신에 대한 예식만 치루는 것으로 훌륭한 예배가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선 결코 용납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삶 그 자체가 예배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지 아니하고서는 어떤 예배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비록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다면 결단코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의 예배를 용납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어떤 공로를 내세우거나 정성을 앞세우는 예배보다는 자신의 불의함과 무력함과 부도덕함과 무지함을 순전하게 내보이며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는 삶과 예배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될 것입니다.
호세아가 전한 메시지
송영찬 목사
호세아(????)란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는 여로보암II세의 말기(BC 750년경)부터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된 BC 722년 이후까지 활동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 였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미묘하여서 막강한 부를 이루었던 여로보암 II세가 죽자 계속된 찬탈로 인해 급격히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모스 선지자가 선포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심히 부패하여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을 호세아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고질적으로 앓고 있던 병인 우상숭배가 마침내 그 도가 지나쳤고 그 동안 하나님은 여러 차례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하여 회개하고 돌아설 것을 경고했으나 이스라엘은 더욱 패역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형식적인 하나님께 대한 예배마저도 잊어버리고 우상에 깊이 빠져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변질되고야 말았습니다(호4:11-14). 이처럼 여호와 좇기를 그치자(호4:10)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택하시어 최후의 경고를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1:9).
1.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 한 것은 솔로몬이 나이가 많아지자 외국과 맺은 정략결혼으로 혼인한 처첩들의 우상예배에 참여하면서 부터 였습니다.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게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기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왕상11:4-11)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솔로몬에게서 10지파를 떼어 여로보암에게 주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도록 하셨습니다(왕상12:20).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다에게서 이스라엘을 떼어내 새 나라를 만드시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운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참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기의 지위가 확고하지 않음을 염려하여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도록 하였습니다(왕상12:25-33).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너의 이전 사람들 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뒤에 버렸도다”(왕상14:9)고 책망하시면서 철저하게 여로보암을 쳐 멸절시키시겠다고 선언 하십니다(왕상14:9-16).
그러나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 왕들은 한결같이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아합은 여호와의 단을 헐고 바알과 아세라 신당을 세우고 제사장들을 세웠습니다(왕상16:30-33). 그후 이스라엘은 심각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해음함이니라”(호1:2).
끝내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바라며 의뢰하는 삶을 얻지 못하고 배역하고 맙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네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고 저주하시며 지상에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제거해 버리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화 있을찐저 저희가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저희가 내게 범죄 하였음이니라 내가 저희를 구속하려 하나 저희가 나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호7:13-14).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고 말것이라고 호세아는 선포합니다(호8:8).
2.이스라엘의 멸망이 주는 교훈
점차 패역해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가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 새긴 우상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이스라엘 열지파의 대표)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팔로 안을찌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것을 두었었노라”(호11:1-4).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애굽을 동경하면서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앗수르에게 이스라엘을 넘기기로 하셨던 것입니다(호11:5-7). 그렇지만 하나님은 결단코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내놓겠느냐(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할 때 함께 멸망된 도시임-신29:2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8).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사랑하셨습니다. 마치 호세아가 고멜의 돌아옴을 기다리며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호3:3)고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이제라도 하나님께 돌아설것을 오래토록 기다려 오셨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1-3).
하나님은 결단코 그의 백성을 버리시질 않습니다. 아무리 만신차잉가 될 정도로 패역하고 하나님을 거역할 찌라도 어느때든지 돌아올것을 기다리고ㅓ 계십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 갈길로 내닫기만 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서이라고 한다면 누구를 위해 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데도 도무지 하나님을 찾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불안하면 애굽을 향하여 도와달라 하고(왕하17:4) 그것도 안될것 같으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받쳐서라도 이스라엘을 지키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지키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의 주인이신 하아님보다는 이방을 의뢰하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그들을 책망합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닌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호7:10). 그처럼 핍절한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도무지 돌아설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처럼 철두철미하게 내던져 버린 민족은 역사상에 이스라엘 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부패한 모습이 얼마나 악독한 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죄로 인하여 부패한 인간의 심성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회유하시고 기다리시고 심지어는 매를 때려서라도 회개할 것을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결단코 그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 타락한 인간성의 본연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무리 애서도 돌이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생명이신 하나님으 ㄹ떠나버리는 것이 부패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순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사악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있음면서도 거역할 정도로 우매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간성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그 역사적 증표가 곧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사랑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의 한계안에 있는 이스라엘은 마침내 멸절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구원을 얻을 뿐입니다.
3.새 인간성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이스라엘의 철저한 파괴는 마치 요나가 경험한 스올의 경험과 같이 살벌한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BC 722년 역사상에서 영원히 감춰지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사라을 거부한 댓가이며 부패된 인간성의 종국이 곧 심판과 죽음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스올의 죽음 속에서 깊히 침잠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일하시고 계셨습니다. 마치 깊음의 혼돈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시던 것처럼 죽음과 같은 흑암속에 버려진 이스라엘을 전혀 새로운 존재로 재 창조 하시고있었습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향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호13:14)는 하나님의 선포는 진정 참 생명의 주인이 누군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14:4)는 말씀은 이제새롭게 태어날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았던 죄수에게 최종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과 같습니다. 다시는 이스라엘의 죄를 힐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심으로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은 죽음 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수없이 회개하고 돌아설 것을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한 댓가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이 갑자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일이 아닙니다. 본래 우리들도 이스라엘과 같이 진노라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완벽하게 단절된 상태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느날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존재로 바뀐것 뿐입니다. 우리가 애써 새생명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는 말씀과 같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ㅛ고 그 증표까지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어는날 그 증표를 손에 쥐고 나서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는 천군천사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사단이 꿈도 꾸ㅠ지 못랄 기묘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죽음의 댓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서(구속)새 생명을 주실지를(구원)누가 알겠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바울 사도는 “영원부터 말물을 창조하신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엡13;9)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볼래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창1:26). 그 형상이 인간성의 부패로 인하여 사라지자 이제 하나님께선 형상이 아닌 직접 하나님 본체이신 성령으로 우리안에 내즈사심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혼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ㅇ느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고 못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육신의 이스라엘을 멸절시키시려고 신형한 이스라엘을 새롭게 건설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곧 새로운 인간성의 창조이며 죽음으로써 죽음을 초월라게 하시는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권능인 것입니다(롬5:11).
미가가 전한 메시지
송영찬 목사
미가(????)란 말은 “누가 여호와 같으리요”라는 뜻입니다. 미가는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습니다. 당시엔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이 유다를 다스리던 때로서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고(BC 722) 아하스(BC 736-728)가 하나님을 떠나 악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앗수르의 침략위협과 종교적, 정치적 부패로 인하여 불의가 팽배하더 ㄴ시기였습니다.
더군다나 아하스는 유다의 왕이되자 “바알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힌놈의 아들 골빠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ㅇ 자손 앞에서 쫒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 자녀를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위와 모든 푸른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한지라”(대하28:2-4).하나님은 아람군대와 이스라엘 군대를 동원하여 아하스를 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혼란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지도자들과 선지자들의 부정은 날로 깊어만 갔습니다.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함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미2:11)고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죄악이 팽배하고 부패가 성행하여지자 미가 선지자는 사회개혁을 부르짖고 나섰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3:8).
1.사회개혁에 대하여
미가 선지자는 먼저 이스라엘 족속이 멸망할 것을 선포합니다(미1:7). 그런후 유다의 개혁을 위해 선언합니다. 첫째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한 것을 지적 합니다(미2:1-2). 둘째는 치리자들의 부정부패를 지적합니다(3:1-3). 세째는 거짓 선지자들의 사리사욕을 지적합니다(3:5). 그리고 이들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합니다(3:9-12).
이들은 모두 사회의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거나 지배받는 계급이 아닙니다. 이들이 부패함으로 나라는 점점 어둠에 바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부정과 부패를 일삼기 위한 사회구조적 모순이 심화되기만 합니다. 그 결과 피지배 계급은 날로 착취를 당하며 지배 계급에게 갈수록 유리한 제도아래 점점 얽매여 갈 뿐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공의가 무너진 시대에선 오히려 불이익만 얻을 뿐입니다. 어딜가나 돈과 제도와 권위가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부패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미가는 먼저 하아님께 정당한 예배를 드리라고 경고합니다(6:6-8). 정당한 예배를 위해선 합당한 제물과 정성어린 제물과 귀중한 제물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물을 준비하여 예배를 통하여 바치게 하신 목저은 단순히 의식적인 행위에서 떠나 참히개와 영적 각성을 통한 헌신을 요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삶의 모양을 갖춘 것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냐”(6:8)는 말씀처럼 1.의를 행하며 2.이웃에 대해 인자하며 3.하나님을 겸손히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참 회개와 신앙이 신앙이 가져다 주는 열매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신6:5).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사람으로서 사람의 본문을 다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때 사회의 구조악과 부정과부패는 자연스럽게 개혁이 됩니다.
우리는 언뜻 나타난 현상을 고치면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외형적으로 나타난 사회구조를 개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역사가 증멸해 주듯이 사회구조 자체가 인간을 속박하거나 착취하는것이 아닙니다. 그 구조를 운영하는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자기들의 권익과 명분만을 위하기 때문에 사회가 악해져 왔습니다.그러므로 진정한 사회개혁은 구조악을 제거하기 보다는 먼저 인간성의 회복이 앞서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성이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따라서만 회복될 수 있을 뿐입니다.
비로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찾을 때 공의가 나타나며 인자가 널리 퍼지며 하나님께 대한 겸손안에서 사랑이 실현될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사회개혁이란 구조적 측면을 변혁시키는 것이 아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에로 회복시키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움 받았으므로 정치, 경제, 사회 모두가 하나님과 나누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곧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선 어떤 모양과 형식을 갖춘 정치, 경제, 사회일지라도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들이 꾸며낸 각종제도와 경영과 윤리로도 인간들을 가꾸고 장성하도록 도울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각종제도의 개선으로도 얼마든 좋은 환경을 만들수 ㅇ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들이 바라는 보락의 세계 즉 유토피아를 건설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을 체계화 시킨 작업이 곧 막스와 레닌에 의해 주창된 공산주의 입니다. 그들은 막스주의와 헤닌주의를 가리켜 인류의 유토피아의 현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제도나 이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불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주장하는 이면은 그에게나 해당되고 정당하고 가치있는 것이지 전 인류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알맞는 이념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념을 형상회 시키기 위한 실력 행사를 하게 되는데 이거승ㄹ 기리켜 이데올로기(Ideology)라고 합니다. 이념은 그것을 주장하는 자들에겐 생명이요 유토피아 이지만 다른 이념 집단에겐 이데올로기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이념을 갖는 사람들끼리 이데올로기 전쟁으 ㄹ합니다. 예를 들면 자봊주의와 공산주의 싸움이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이념이든지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수능ㄹ 최소화 한다는 이유 때문에 또 다른 모순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사회구조 자체가 악이 아닐지라도 또 다른 모순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 결과 한 이념 집단 안에서도 어떤이들에겐 선인것이 다른 이들에겐 악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분재응 ㄹ하게 되며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권일다툼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계속 그 보장을 위해 더 애를 쓰며,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은 이에서 벗어나려고 행동을 취합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분쟁이되고 더 나아가면 혁명이 됩니다. 그렇지만 혁명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반대의 양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분쟁이 야기되며 결국 또 하나의 혁명을 가져오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제정한 어떤 이념에 근거한 제도 일지라도 절대로 전 인류에게 안정과 평화와 만족을 제공하지 ㅁㅅ합니다.
그래서 마가 선지자는 부자들과 통치자들과 제사장들을 타파하는 사회구조적 측면에서의 개혁을 부르짖지 아니하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인간성의 회복이 앞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ㄴ다. 만일 사회 개혁이 구조적 픅면의 개혁 이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몇번이고 정치자들과 사업가들과 종교가들을 갈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바꾸었다 해서 사회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직 사람들이 본연의 모습을 찾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 올 대만이 참다운 사회개혁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하고 말았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맙니다.
2.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 원리
이스라엘 자체는 종교와 정치가 모두 하나였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운영되었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사회개혁을 부르짖었을 때는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졌기 때문에 왕에 대한 책임보다는 하나님께대한 책임이 항상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왕의 권위에 따라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 왕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따라 왕의 다스림에 순복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나라는 구약의 이스라엘과는 그 향편이 매우 다륿니다. 우리나라에는 하나니믜 백성으로 구성된 교회가 존재하며, 대한민국 이라는 영토안에 있는 백성으로 구성된 국가가 별도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교인은 국가의 국민이기는 하지만 국민이 모두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국민이 모두 교회였으며 국가와 교회는 별도로 존재하질 않았습니다. 그 안에 왕직과 제사장직과 선지자직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국가와 교회가 하나였으며 그 안에서의 직능상 서로 다른 제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지상 국가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처럼 국가가 곧 교회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할 때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첮째. 그리스도인은 양심기관이어야 합니다. 국가가 부패하고 사회정의가 무너졌을 때 가장 양심적 기관으로서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교회는 부패하지 않도록 순수성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부패한 상태로 국가를 개혁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먼저 순결함을 우지하기 위해 자신을 항상 살피며 개혁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만 하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가르치고 저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그 말씀에 따라 살때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전하는데서 나타내집니다. 또한 그 말씀을 거역했을 때 하나님의 심파능 ㄹ받아 모든 사람들에게 경각심과 두려움을 주는 것도 공의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말씀에 따라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거슬리는데도 아무런 꺼리낌 없이 교회가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감추는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고 굴복해야만 합니다. 그럴때 국가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님을 따르겠습니까?
세째, 국가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국가를 세워 교회를 보존하고 교회가 불의할 때 교회를 쳐서 다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시고자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인것은 절대 아닙니다. 국가는 국가의 헌법이 있습니다. 그 헌법대로 다스려지는 것이 정당합니다. 반면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헌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의 헌법을 준행하여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헌법도 준수해야 합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이 그 본연의 자세에 합당하게 행할때 국가는 개혁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정당할 때 사회는 변혁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회참여입니다.
미가가 전한 메시지 II
송영찬 목사
3.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상에는 영여긍ㄹ 가진 국가가 존재하고 하나님은 국가를 세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세게적인 공동체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국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고회는 하나님의 재배를 받는 특수한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은 지상에 있는동안 지상 국가의 영향력 아래 교회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것은 국가를 운영하시는 분이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물론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드이 입버을 하고 정치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국민들을 주장하시는 부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국가를 간섭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교회의 순결성을 보전하시기 위해 국가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곧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도록 함으로써 교회가 교회로써의 모양을 잘 갖추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부패했을 경우엔 국가로 하여금 교회를 간섭하고 정화하기 위해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믿는다면 국가 역시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점을 인정하고 국가의 권위에 승복해야 합니다(롬13:1-2). 그러나 만일 국가가 타락하여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교회를 핍박한다고 하면 교회는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께 국가를 탄원해야 합니다. 교회는 칼과 창으로 무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ㅇ 이스라엘에 군대가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무장하여 국가를 정복하거나 무너뜨려선 안됩니다. 국가를 세우시고 멸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사회제도나 구조에 대하서도 마차낙지 입니다. 사회적 구조악이 팽배하다 할찌라도 교회가 사회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 구조악이 하나님의 공의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방해 한다면 교회는 하나님께 탄원함으로써 사회구조를 개혁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시며 권능이 충만하심을 믿는 교회라면 하나님께서 사회를 개혀개 주심을 기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서으로서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사회를 개혁한다는 이유로서 행동을 앞세워선 안됩니다. 만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인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물론 그가 국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한 일원으로써 개혁을 주장하거나 행동을 표면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럴경우 그는 교회라는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한 일원으로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잉ㅂ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며 주권자가 되십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교회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민주화를 이유로 교회를 사용한다면 한나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운 나라 건설은 포기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건설한 것이 아닌 나라는 어떤 나라이든 참된 민주화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디까지나 그 사람이 주장하는 민주화 일수는 있으되 타인에게는 그처럼 지독한 독재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저으로 민주화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건설하실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백성으로 장성할 때 참된 민주화는 자연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사회참여만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이며 자기이상을 구현하는 나라를 건설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 것입니다.
4.새로운 왕국 건설을 위한 왕의 임재
하나님의 백서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이 끝내 그 부름에 합당한 삶을 갖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요나가 경험한 스올의 경험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댓가로 스올으 빠져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을 전혀 새로운 존재로 회복 시키시기 위한 메시지가 요나서 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이방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우주적인 구원이 완성될 것을 하나님으 ㄴ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패역을 지적하고 철저한 심판(죽음)이 예고 되었고 호세아 선지자르 ㄹ통해 죽은 이스라엘을 새로운 존재(인간성 회복)로 변화시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절시키심으로 암흑속에 던지시면서 이제 남유다 왕국에 최후통첩을 미가 선지자를 통해 촉구하고 계십니다. 먼저 사회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전국가의 지배층부터 하나님께 대한 정다한 예배를 시행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정당한 예배란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부터 시작되며 나아가 이웃을 사랑함에서 부터 시작되면 나아가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모습으로(마22:37-40) 표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로 개혁되지 않고서는 심판과 멸망을 벗어날 수 없다고 경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부터 부패해버린 이스라엘은 끚내 하나님의 최후 통첩을 거부하고 맙니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2:12).
이처럼 철저하게 죽음에 빠지자 하나님은 새롭게 탄생할 이스라엘을 취해 태동을 허락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쫒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 오리라”(4:6-8)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새로운 나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잡혀 갔다가(4:9-13) 돌아와 새롭게 건설 될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의 인간이 다스리는 왕제도가 아닌 전혀 새로운 왕이 다스릴 것입니다.
그 왕(메시야)이 오시는 날에 바로 이 약속된 새로운 나라가 건설 될 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중에 작을 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메시야)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메시야)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Peace:샬롬)이 될 것이라”(5:2-5).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남은자(5:7,8)가 메시야 안에서 모아져 메시야가 왕이된 나라를 건설하게 되는 새로운 나라는 지금까지의 제도나 사화구조와는 전혀 새로운 나라가 될것입니다. 이 나라에 대하여 미가는 다음고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이르러는 내가 너의 말(馬)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며 너의 병거를 훼파하며 너의 땅의 성읍들을 멸하며 너의 모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린 것이며 내가 또 복술을 너의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장이가 없게 될것이며 내가 너의 새긴 우상과 주장의 너의 중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손으로 만든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5:10-13).
하나님은 새 나랄가 건설될때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제도가 될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그렇지 않는자들에겐 심판이 올것을 선포하십니다(5:14-15). 그날이 오면 하나님을 대적했던 모든 나라들이 진흙같이 밟힐 것이며(7:10)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앞에서 “열방이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려서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오며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 하리이다”(7:16-17)함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 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웅장하게 건설되는 새로운 왕국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선 불의도 없고 부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롭게 인간성을 회복한 하나님의 남은자들 만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사회제도를 개혁하고 사회구조악을 개선하여 이루고자 했던 유토피아는 얼마나 볼품없고 미려난 것인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성이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복귀를 통해 회복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유토피아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철저하게 거듭난 새 인간성을 가진 “남은자”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진정한 평강(5:5)이 약속될 것입니다.
다시는 전쟁으 ㄹ위한 말과 병거와 견고한 성이 필요 없ㅇ며 하나님을 대신할 아무것도 없는 새왕국에서는 오직 여호와 한 분 만으로도 그 이상의 만족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는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타인을 압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불의한 모습을 볼 수 없으 ㄹ뿐만 아니라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의만을 볼 것입니다. 그 나라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는 비록 보잘 것 업슨 작은 성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지만(5:2) 그의 통치권(kingship)은 창대하여 온 우주를 재배할 것입니다(5:4). 그리고 아무도 그 왕을 대적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너무 자기 이념마을 내세웠습니다. 자기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두 실패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메시야의 웅장하게 임하는 새 왕국 앞에서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고 큰소리쳤던 모든 사람들은 부끄러워 감히 왕이신 메시야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할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선지자와는 다리 미가서에서는 메시야의 임함과 새 왕국이 건설될 것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이 특이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 있는 미가 선지서는 머지않아 남 유다 왕국도 멸망할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심판이 오기전에 통회하고 돌아설것을 선포 하지만 부패한 인간성의 완악함을 알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인간성 말살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그 뒤에 올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선 결단코 다시는 패역하지 않고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에 의해 다스려질 평강을 선포하며 소망의 날을 바라 보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미가는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니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으 ㄹ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7:18-20).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이 인류에게 주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소선지서가 전한 메시지<11>나훔이 전한 메시지
나훔(////)이라는 이름은 “위로”라는 뜻입니다. 나훔선지자는 다른 선지자와는 달리, 잔인하기로 유명한 앗수르 제국의 멸망에 대하여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BC 630년경에 활동하였었는데 이때는 앗수르의 왕인 아수르바니팔(Ashurbanipal, BC 669-627)이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호시탐탐 유다를 침략할 준비가 다 되었었습니다. 그의 능력이 대단하였으므로 모든 나라들이 두려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침략할 경우 광포한 행위를 일삼았으며 피정복의 국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대거 이동시키는 정책을 폄으로서 다시는 국가가 서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BC 722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산헤립왕에 의해 점령되자 앗수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타국으로 이주시키고 이방 사람들을 가나안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습니다(왕하17:24). 그 결과 가나안에 남아있던 소수의 볼품없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 결합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후손은 이스라엘 민족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접촉을 금했으며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방인과 혼혈된 잡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는 그 뒤에도 계속해서 유다를 침략했습니다. 히스기야왕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며 “열국의 모든 신 중에 누가 그 땅을 내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왕하18:35)고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에 십팔만 오천명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버렸고(왕하19:35) 앗수르왕 산헤립은 고국에서 모반을 당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왕하19:37).
그후 므낫세(BC 680-640) 시대에도 앗수르가 침략한 적이 있었습니다. 므낫세는 부친 히스기야 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히스기야와는 달리 바알과 아세라 상을 세우며 앗수르의 종교인 일월성신을 섬겼고 인신제사와 신접한 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므낫세를 멸하시기로 하시고 앗수르를 통해 예루살렘을 쳐 포로로 잡아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대하33:11). 그러나 므낫세가 통회하자 하나님은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대하33:12-13). 그러나 므낫세는 또다시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그 뒤를 이은 아몬 역시 므낫세의 뒤를 이어 우상 숭배와 악을 행하자 신복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대하33:21-25).
이 처럼 온 나라가 사술과 우상 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어린 요시아가 8세에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다행히 요시야는 의로운 다윗의 뒤를 따라 모든 우상을 철폐하고 일월성신(바벨론 종교)을 파괴하고 그 동안 버려져 있던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는등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잔인한 앗수르왕 앗수르바니팔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등장하여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을 선포한 선지자가 곧 나훔이었습니다.
1.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호위하면서 히스기야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열국의 신들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자가 있느냐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열국의 모든 신중에 누가 그 땅을 내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왕하18:33-35).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마치 들의 풀 같고 나물 같고 지붕의 풀 같고 자라기 전에 마른 곡초 같으니라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아노니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에 꿰고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왕하19:26-28). 그리고 하나님은 유다를 향해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유다 족속의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가 서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찌라 남은 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왕하19:30-31). 그리고 그날 밤에 앗수르 군대는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왕하19:35-37).
물론 지금까지 앗수르가 침략한 나라들의 신들은 앗수르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침략을 당하자 그 국민들과 함께 신들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국가의 운명과 그들이 숭배한 신들의 운명은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달랐습니다. 이방 국가의 신들과는 달리 여호와는 인격을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국가의 운명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방 신들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절하실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결단코 국가의 운명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앗수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치시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주장하시는 분이었습니다(나1:3-5). 하늘과 산과 바다와 바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천하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상의 모든 나라들도 다스리십니다. 앗수르 역시 그 나라들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앗수르는 하나님을 대적하기를 여는 이방 신들 중의 하나일거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의 국가 수호신 또는 작은 나라의 수호신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왕이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말인데 따라서 그 어떤 대적들도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훔 선지자는 앗수르를 향하여 “그들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할찌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1:12)고 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을 선언합니다.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1:14).
결국 하나님은 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하시면서 그들의 신(일월성신)들을 멸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점을 볼 때 단순히 국가만의 싸움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과 앗수르 신들과의 싸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싸움은 이미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하면서 하나님께 도전할 때부터 시작된 싸움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양상은 앗수르와 이스라엘간의 전쟁으로 보여지지만 그 배후에 숨겨진 앗수르의 태양신과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간의 내면적인 싸움인 것입니다. 특히 앗수르의 태양신은 사탄의 표면화된 모형임을 생각해 볼 때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려는 사단의 책동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구태여 하나님께서 앗수르왕을 상대로 말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신을 저주하는 것은 이 싸움의 내면에 담겨진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사단의 흉계를 철저하게 파과시키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에덴동산을 파괴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에 정면 대결하더니만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속박하려고 했고 이제는 이스라엘을 쳐 멸절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사단의 그 어떤 흉계와 모략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은 기필코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훔 선지자는 “볼찌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 찌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며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1:15)고 하면서 앗수르의 강력한 군대일찌라도 결단코 하나님께서 대적하여 진멸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앗수르를 멸절시키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실 것이며(2:1) 그 후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다시 모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겠다고 선포합니다(2:3).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대적자 일찌라도 하나님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고 그 능력에 맞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2.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하나님이 우주의 왕이시라면 지상의 역사를 주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어야 합니다. 나훔은 이 지상의 역사까지도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고 있음을 예언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대적한 앗수르를 궤멸시킬 새로운 군대가 강력하게 등장하여 앗수르를 침략하도록 합니다(2:1-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정명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며 그 모든 시녀가 가슴을 치며 비둘기같이 슬피 우는도다”(2:6-7)는 말씀처럼 바벨론 군대가 앗수르를 칠 때는 놀랍게도 그 수도인 니느웨가 홍수로 인해 성문과 왕궁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의해 그처럼 견고하던 나라가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BC 612).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대적이 되어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너의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너의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라”(2:13)는 나훔의 외침과 같이 앗수르는 영원히 지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특히 하나님은 앗수르의 죄악에 대하여서도 모른다 하지 아니하시고 일일이 열거하심으로써 공의로우신 통치자임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3:1-4). 이 처럼 앗수르는 이웃 나라들을 도와준다고 약조를 하고선 실상은 속여서 그 나라를 침략하는 궤휼을 일삼았으며 그들은 침략하여 갖은 강포를 행하여 악행을 일삼고 철저하게 노략을 일삼아 왔습니다. 그러한 앗수르였기에 주변 모든 나라들은 앗수르의 침략에 대하여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는 일월성신을 우상으로 삼고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잔악하고 우상에 빠져있는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자 모든 나라들은 그 심판을 공의로운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3:7)는 말씀과 같이 앗수르의 멸망은 오히려 환영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둘째는 그의 심판이 이방 나라들까지도 기뻐하는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이방 모든 나라들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무자비한 침략자를 철저하게 궤멸시킴으로써 공의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더 나아가 어떤 모양의 사탄의 침공일 찌라도 결단코 용납하지 아니하시며 철저하게 대적하심으로써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자가 없음이 아니냐”(3:18-19)는 최후의 권고는 지금도 사탄의 앞잡이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선언이기도 합니다.
'성경신학 > 구약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가서의 성경신학적 해석의 가능성들 (0) | 2018.04.22 |
---|---|
생명나무 (1) | 2018.04.05 |
창세기 1-2장의 해석에서 고려할 점 (0) | 2018.02.10 |
성경이 진술하는 '창조'에 대한 칼빈의 이해 (0) | 2018.02.10 |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0) | 2018.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