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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심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심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내가 찾아서 비로소 생명을 구한다는 사상이 아니라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중생이라는 사실이 하나님께로부터 그 대권 하에서 오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사람은 아무도 거기에 관계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걸 받는 사람 자신도 그때 반드시 아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라고 주장하고 나올 때에 우리는 비로소 거기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아무 날에 중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생명이 그이 속에 그날 심겼다는 것보다는 그 생명이 자기의 전(全) 의식을 비로소 움직여서 자기 자신에게 동시에 이 거대한 변개(···{헬라어 생략}···)가 일어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과 생명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당신의 대권 하에서 전담적으로 주신다는 말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더러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해 놓고 또 여기서는 ‘생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본인이 거절할 수 없는 은혜로 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가만히 있어도 생명이 올 것인데, 뭐 힘쓰고 말 것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우리의 죄를 속(贖)하시고 동시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신다는 이 두 가지 큰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인데, 그와 동시에 자신이 은혜 가운데 들어갔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방도(means of grace)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수단 혹은 방법으로 심히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객관적인 사실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신께서 쓰실 때에 말씀은 비로소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냥 말로만 존재할 때에는 개념의 전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신께서 말씀을 쓰시는 동시에 그 성신께서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심어 주시는 사실이 내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나타나서 내 전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할 때에 제일 먼저 발생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신호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위시해서 필요한 모든 은혜를 더욱더 가해 주시기 위한 거룩한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이 신앙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처음에는 광범위하지 않고 퍽 미미한 것이어서 다만 ‘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불쌍히 여기심을 받고 죄 사람을 받았다.’ 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특별히 우리 한국에서는 그런 정도의 생각에 많이 주저앉아 있습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나에게 주셔서 나는 새사람이 됐다.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가 됐다.’는 그러한 사실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전도자가 신실히 그 모든 사실을 전달해 줌으로써, 전도자가 전달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성신께서 유효하게 사용하셔서 그 안에서 발생하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미미하고 기본적인 소(小) 범위의 개념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신앙을 우리는 믿음의 씨(semen fidei)라는 말로써 표시하는데, 이 믿음의 씨가 들어갔을 때 그것이 나중에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법칙에 의해서 장성하는 것입니다. 결코 가만히 앉아서 ‘주여, 믿음 줍소서. 주여, 믿음 줍소서.’ 하면 지금까지 못 믿던 것이 홀연히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려고 하면 자기 영혼의 기능에 그것을 그렇게 믿지 아니할 수 없는 외증(外證)과 내증(內證)이 늘 필요한 것입니다. 그만한 크라이테리아(criteria)들을 얻어야 하고 그만한 자료들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한 주를 부를 수도 없고 알지 못하는 주를 내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롬 10:14 참조)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항상 설교가 필요하고, 혹은 설교뿐 아니라 전도(···{헬라어 생략}···)라는 것이 또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그 말을 듣고서 그로 인해 내 마음 가운데 성신님의 역사로 비로소 ‘아, 그렇구나.’ 하고서 그걸 수긍하고 그 길을 좇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하는 인지와 그 길을 좇아 나가려고 하는 이 태도가 변개의 첫째 과정입니다. 
물론 개혁자들이 16세기의 아주 난숙한 개혁 운동 시대에 형성했던 신학으로 볼 때에는,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세밀하게 나눠서 가르치지는 않았을 때라도, 가령 칼빈 선생 자신도 그걸 세밀하게 나누지 않고 대범하게, 그가 깨닫고 그것을 받고 ‘그렇구나.’ 하고 믿고 그 다음부터 그 위를 향해서 나아가는 그 전체를 중생이라는 말로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엄격하게 말할 때에 중생이라고 하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대권으로 친히 전담적으로 아무런 용훼(容喙)도 용허치 아니하시고 심어 주시는 그 사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 김홍전 [산상보훈 강해 제4권: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열매] 163쪽 1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