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중생론
칼뱅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고 있는 중생과 조직신학에서 가르치는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서로 차이가 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이란 조직신학의 용어로써 이것은 단독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킨다. 그러나 칼뱅은 인간 편에서의 응답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을 사용한다. 칼뱅은 회개를 말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의 참여, 즉 자기 부정을 통하여 옛 사람이 끊임없이 날마다 죽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의 참여를 통해서 새 정신, 새 의도, 새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좇는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회개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개를 중생이라고 하며, 이 중생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알미니안 주의에 대항한 칼뱅주의 5개 조항
전적 부패/ 부분 타락
무조건 선택 교리(전적인 은혜)/ 부분 선택(내 속에 무엇인가를 보시고)
제한 속죄(자기 백성을 위한 죽음)/ 보편 속죄(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
불가항력적 은혜(선택된 자는 반드시)/ 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믿음으로 살도록 은혜주심)/ 성도의 타락 가능 (1610 알미니안의 제자들이
알미니안 5개조를 작성)
칼뱅의 구원의 순서
소명 신앙 - 중생 회심 - 성화 - 칭의 - 예정 - 부활
② 중생 : 하나님의 단독 역사,
③ 성화
④ 칭의
⑤ 예정
⑥ 부활
훅스마
칼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알게 되는 하나님의 사역/ 잠재의식에 대해지는 하나님의 사역과, 각성의식에 대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혼동하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
칼뱅에 의한 구원의 서정은 신적 동작보다 인적 동작에 치중하여 주관적임을 면치 못한다.
but 칼뱅의 개혁 순서는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더 잘 표현하고 있다. - 김길성
벌콥
중생의 의미가 세가지 정도로 구분한다.
① 가장 좁은 의미(조직신학) : 하나님의 단독 사역(성령)
② 좁은 의미 : 새 생명(약 1 : 18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벧전 1 :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③ 넓은 의미(칼뱅) : 전 과정
중생(Regeneration by Faith) - 그는 by H.S보다 이렇게 쓰기를 좋아했다.
칼뱅은 믿음으로 되어지는 전 과정을 중생이라고 불렀다. 믿음으로 그렇게 되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회개는 믿음의 결과이기에 믿음이 회개보다 앞선다. 회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계속되는 전체의 과정을 칼뱅은 ‘중생’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정과 용심을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작업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그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고전 9:26-27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 바울은 죽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던 것이다. ; 딤전 1 :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긍휼 ;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관계가 있다. 딤전 1:12-15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칼뱅이 말하는 중생은 오늘날 중생과 같은 것이며, 성화는 중생의 목표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칭의 - 성화와 동시에 일어나지만, 갑없이 의로움을 받는 것...
예정 - 은혜의 문맥 속에 있다.
부활 - 몸의 부활을 이루는...
개혁파의 구원의 순서
박형룡
소명 :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룩된 구원을 신앙으로 수납하도록 초청하시는 은혜
중생 :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소를 심고 영혼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
회심 : 죄인이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변화
신앙 :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영혼의 운동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
칭의 : 죄의 율법적 요구가 만족된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
수양 : 세속적인 모습을 하나님 자신의 가족으로 전입시키시는 행위
성화 : 전 성품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하시는 성령의 사역
성도의 견인 : 택함을 받은 자를 꼭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
영화 :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구원의 완성
루터파
소명 - 조명 - 회심 - 중생 - 신앙 - 칭의 - 신비적 연합 - 갱신 - 보전
알미니안
소명 - 회개, 신앙 - 칭의 - 중생 - 성화 - 견인
칼뱅
소명 신앙 - 중생 회심 - 성화 - 칭의 - 예정 - 부활
벌코프
소명 - 중생 - 회심 - 신앙 - 칭의 - 성화 - 견인
로마교회
충족 은혜 - 협력 은혜 - 주입 은혜 - 성례
펠라기안
회개 - 순종
요한 웨슬레의 완전 성화 비판
성화가 인간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주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영적 성장이 어느 정도 불완전한 상태로 있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영육간에 싸움이 있으며, 완전을 위하여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다. 완전주의자들은 성경이 인간에게 완전이 되라고 한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완전주의자들의 모든 주장은 그 요점을 입증하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중생자와 똑같이 비중생자에게도 성경을 요구하고 계시지만 비중생자가 거룩한 생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범죄치 아니한다는 요한 서신의 진술은 새 사람이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라든가 신자가 죄에서 살지 아니한다는 것을 명백히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상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완전자들을 위해서도 감당치 못할 구절이다.
칼뱅의 중생관
칼뱅의 구원의 순서 : 소명, 신앙 - 중생, 회심 - 성화 - 칭의 - 예정 - 부활
칼뱅이 말하는 구원의 순서는 개혁주의의 일반적인 순서와 크게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의 구원론을 알미니안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칼뱅이 사용한 어휘에 대한 오해에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소명’이라고 한다.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심에 대해서 사람 편에서의 응답을 신앙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사람이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칼뱅은 중생과 회심을 말했다. 여기에 칼뱅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신앙 다음에 중생이 오므로 알미니안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자들이 말하는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사람을 부르실 때 사람이 그것을 들을 힘이 없다. 알미니안의 경우 죽은 새가 아니라 병든 새로 보는데, 그래서 내가 붙들기만 한면 팔딱거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엡2:1에서 보듯이 분명하게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 우리 속에 믿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칼빈은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을 말한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뱅은 왜 이렇게 말하는가? 믿음으로 어떻게 중생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칼뱅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까지 일평생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일생동안 ‘중생’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되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칼뱅이 말한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죽고 사는’ 이 역사를 일생 동안 계속한다. 곧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의 이 전체 작업을 칼뱅은 중생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죽고 사는 이 작업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 안에 못 박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가 역사가기에 우리는 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성화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칼뱅의 중생’은 훅스마나 카이퍼는 칼뱅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조직신학에서 중생은 성령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다. 우리는 단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과 더불어 받았을 뿐이다. 루터파의 경우 ‘말씀을 통하여’만 강조함으로 성령이 말씀에 매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개혁파는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말씀과 더불어’ 주권적으로 역사하심을 말하기 때문에 말씀이 들려지고 읽혀질 때 성령께서 주관적으로 역사하시는 사역으로 본다.
구약의 성령론
구약에는 ‘성령’이란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신’이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구약에서의 성령은 ① 창조사역, ② 말씀과 예언을 주는 사역, ③ 임무 수행을 위해, ④ 이스라엘의 영적 삶 속에서 역사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근거해서 볼 때 구약에서의 성령은
① 그가 임하시는 사람에게 거룩과 선함의 도덕적, 영적 성질들을 만들어 주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② 그러나 그 사역은 대개의 경우 간헐적이고 수행되어야 할 특정 사역과 관계되어 있다.
③ 그리고 구약에서는 성령에 대한 증언들 속에는 그분의 사역이 더욱 온전히 이뤄질 때가올 것이라는 내용도 있다.
1. 창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바르트는 성령의 사역을 창조에서 시작하지 않고 구속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진 은혜만을 이야기 때문에 보통 은혜는 없고 특별은혜만 있는 것이다. 그는 구속을 먼저이고 다음으로 창조, 타락을 배열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기록을ㄹ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를 설명하는 하나의 설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창조-타락-구속을 말하는 개혁주의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트가 말하는 역사는 사실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의미로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2. 구약시대 성령의 재창조 사역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에서는 믿음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대표적으로 창세기15:6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에 와서 해석된 것이 아니다. 이미율법이 수여되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 그는 오실 메시야를 바라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믿음인 것이다. 시편의 유명한 시인들도 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오실 메시야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 구약에는 재창조의 역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구약시대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사람의 노력 전에 항상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그래서 순서에 있어서 늘 하나님이 먼저다. 율법으로는 우리가 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매달려서 Coram Deo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에는 구약에서 성령의 재창조의 역사가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구약의 재창조의 역사를 말할 때 삼손의 경우도 있고, 사울의 경우도 있다. 즉 성령이 떠나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직무과 관련해서 설명되어야 하며 구원과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명단에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이 함께 제시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사실은 명백하다. 우리는 구약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신 구체적인 예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John Calvin
소명 신앙 - 중생 회심 - 성화 - 칭의 - 예정 - 부활
A. Kuyper
칭의 - 중생 - 소명 - 회심 - 신앙 - 성화
박형룡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수양-성화-견인-영화
박형룡과 다른 개혁파 신학자들의 구원의 순서 비교
오늘날 개혁주의 구원론의 구원의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몇 가지 특이한 점들 때문에 훅스마와 카이퍼 등의 현대의 개혁주의 교의신학자들 중에는 칼빈의 구원의 순서가 비성경적이므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의 비판에 의하면 심지어 칼빈의 구원의 순서는 알미니안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오히려 칼빈의 구원의 순서는 후대의 개혁파 학자들보다 성령의 역동적인 면을 훨씬 더 잘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카이퍼는 칭의를 중생 앞에, 곧 구원의 순서에 있어 맨 앞에 두면서 영원 칭의를 주장한다. 차영배 교수가 비판하듯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카이퍼의 구원순서는 성경적이지 않다.
카이퍼에 비교해 보았을 때 박형룡의 구원순서는 포괄적이며, 또한 구원의 순서로서 비교적 완전하다. 특히 중생 다음에 칭의를 둠으로써 택자들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올바로 전개하고 있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구원의 순서는 바빙크에서 벌콥으로, 벌콥에서 박형룡으로 가면서 이전 학자의 이론을 집대성하여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모습들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박형룡의 구원순서를 타 교파의 것과 비교하라
1.John Calvin
소명 신앙 - 중생 회심 - 성화 - 칭의 - 예정 - 부활
2. A. Kuyper
칭의 - 중생 - 소명 - 회심 - 신앙 - 성화
3. H. Bavinck
소명 - 신앙 회심 - 칭의 - 성화 - 영화
4. C. Hodge
소명 - 중생 - 신앙 - 칭의 - 성화
5. L. Berkhof
(신비적연합)-외적소명-중생, 유효적소명-회심-신앙-칭의-성화-견인
6. 박형룡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수양-성화-견인-영화
개혁파 학자들의 구원의 순서
위에 제시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구원의 순서는 일치되지 않지만,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순서는 논리적 순서이지, 시간적 순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구원의 순서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구원론에 있어 구원의 순서를 다루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속죄함이 택함을 받은 개인에게 어떻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관적으로 적용되는가 하는 과정을 살피기 위함이다. 박형룡 박사의 경우 아홉 단계로 구원의 순서를 가르쳤는데, 이것은 구원의 기쁨의 단계이지 각각 분리된 단계들이 아니다. 그것은 꿰어놓은 구슬 같아서 토막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1. 타교단의 구원의 순서와의 비교
⑴ 루터파의 견해 : 소명-조명-회심-중생-신앙-칭의-신비적 연합-갱신-보전
루터파는 중생 앞에 소명, 조명, 회심을 넣었다. 루터파에서는 성경을 특히 강조하되 ‘성경을 통하여’를 강조하므로, 성령의 역사를 성경 속에 가두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미 기록된 말씀 속에서 조명의 역사를 강조하고, 그에 대해 사람의 응답인 회심을 강조하고 다음에야 중생을 말한다. 이는 사람 편에서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알미니안적 요소 때문에 루터파의 구원론은 개혁주의의 것과는 다르다.
⑵ 로마 교회의 견해 : 충족은혜-주입은혜-협력은혜
로마교회는 교리 공부가 충족은혜로 이끌어 간다고 말한다. 교리 공부를 통해 충족 은혜의 상태에 도달하면 세례받기에 충분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다음으로 사제를 통해 세례가 행해질 때 사제의 손끝을 통해 은혜가 주입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협력 은혜를 말한다. 즉,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서 선을 계소 이루어 나가야지, 선을 이루지 않으면 언제든지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이처럼 저들은 충족 은혜를 말하지만 동시에 은혜가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다고 본다. 선행과 더불어 미사에 참여함으로 은혜가 계속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개혁주의 구원론과 다르다.
⑶ 알미니안의 견해 : 소명-회개-신앙-의로 전가-중생-성화-견인
알미니안도 중생 앞에 회개와 신앙을 두었다. 이 점은 루터파의 견해와 비슷하다. 알미니안은 사람의 의지, 회개와 신앙을 중생 앞에 놓는다. 특히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가항력적 은혜를 강조하고, 인간의 신앙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과,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은 부정되고 만다. 하년 웨슬리파도 보편적인 속죄를 주장하여 이와 유사한 견해를 가진다. 따라서 알미니안과 웨슬리안은 모두 구원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부인함으로 개혁주의 구원론과는 다르다.
⑷ 칼 바르트
칼 바르트는 영원에서의 하나님의 작정에 있어서 선택과 유기는 전혀 잘못된 사실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항상 자유로우며 새로이 결정하시는데, 오늘 선택된 사람이 내일 기각될 수 있고, 오늘 기각된 사람이 내일 선택될 수 있다고 하면서 결국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택함받고 또 모든 사람이 유기함을 받았다는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로마서 8장 30절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구원의 순서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바로 구원의 순서의 기초이다. 소명과 영화의 중간이 칭의다. 그러나 각 교파별로 그리고 학자별로 구원의 순서가 일반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같은 개혁파 안에서도 각자의 견해에 따라 구원의 순서에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구절에 치중하여 구원의 순서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성경 전체를 바라보면서 개인의 구원 역사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유추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성령의 사역을 유추해 나가면 박형룡 박사의 구원의 서정이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여진다. 흔히 보수 개혁 신학에서 가르치는 일반적인 구원의 순서는 앞에서 보았듯이 9단계이다.
성령의 특별사역과 일반사역에 대해
성령의 일반사역은 창조에 근거를 둔 것으로 자연계에 속한 모든 영역에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말한다. 이것은 구원과 관계없는 성령의 사역이다. 반면 특별사역은 오직 택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진 구속 사역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에게 중생, 칭의, 성화 등 구속 사역을 하는 성령의 사역을 말한다.
보통은혜 또는 일반 은총이란 구원과 관계없는 성령의 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사역은 자연과 인간 생활의 기성질서에 속하는 사역이다. 성령은 일반은총을 통해 인간을 도덕적으로 감화시켜 죄를 억제하며,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시민의 정의를 증진시킨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별 없이 자기에게 선하게 보이시는 대로 그 축복들을 나누어 주신다.
특별은총이란 구원과 관계되는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말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죄를 제거하고, 신자를 정화한다. 특별은총은 택자 모두에게 역사하며, 중생과 구원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특별은총을 위한 성령의 역사는 모두 열 가지로 요약된다. ① 성령세례, ② 성령충만, ③ 성령의 내주, ④ 성령의 기름부음, ⑤ 성령의 인치심, ⑥ 성령의 보증, ⑦ 성령의 조명, ⑧ 성령의 증언, ⑨ 성령의 중재 간구, ⑩ 성령의 인도이다.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별된다.
① 일반은총에서는 영적 변화가 불가능하지만 특별은총에서는 영적 변화가 가능하다.
② 일반은총은 이성적, 도덕적으로 역사하여 인간 의지에 동기를 준다. 반면 특별은총은 영적, 창조적 역사로 인간의 전 성격을 갱신하여 영적 과실을 맺게 한다.
③ 일반은총은 인간의 저항이 가능하지만, 특별은총은 인간 저항이 불가능하다.
Historia Salutis vs Ordo Salutis
오순절 사건의 해석
개혁주의 신학은 전통적으로 구속 역사적 관점을 강조해왔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을 구속 역사적 관점을 구속 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but 원역사와 상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구속 역사적 관점의 강조는 또 다른 위험을 가지고 있다.
▶구속 역사적 관점 : 카이퍼, 워필드, 개핀 - 구속 역사적 관점에서 오순절 사건은 단회적이다. 이것은 십자가 구원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에 단회적이다. - 이것이 구속역사의 종례의 주장
▶구속 순서적 관점 : but 은사파, 오순절, 웨슬리안 등의 교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해 ‘이미 중생한 신자에게 중생 또는 회심 이후에 주어지는 개인적 체험이다’라고 강조한다. 방언이 강조되었고, 은사가 강조되었다. 이 경우 오순절 성령 강림은 모자라는 것이 채워지는 것으로 간주
but 이러한 주장의 경우 순간적 체험, 위기의 체험 등, 다소간의 개인적 차이를 지닌다.
▶두 견해를 다 취하는 관점 : 로이드 존스 - 중생한 사람이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체험하는 것이다. 그는 은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를 위한 능력을 받는 것으로 이해했다. 중생 이후 성령강림을 받는다는 점에서 오순절에 가까우나, 은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적인 능력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구속 역사적 관점을 지녔다.
선중생 후성령세례 but 은사주의가 아니며, 목회적 관점에서의 능력을 강조...
▶안영복 교수(고신대 교수) :
차영배 : 중생 이후에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성령 세례가 있다.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각양 은사를 받게 된다. but 칼빈의 중생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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