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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근대는 인식론의 시대

근대는 서양철학에서 인식론의 시대이다. 동양은 인식론이 없는데 서양은 어쩌다 인식론의 시대를 열었을까? 인식론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인식론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데카르트의 어거스틴 오마쥬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근대 인식론을 정초한다. 이는 15세기 흑사병의 창궐 이후 르네상스가 가져온 문예부흥이 과학기술의 진보를 낳았고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 중세 천년의 과학 천동설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흑사병으로부터 실추되기 시작한 교회의 권위는 천동설의 붕괴와 함께 계시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체계화한 계시의 체계로서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 외 다른 방법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의 방법론은 하늘은 완전의 모형으로 구나 원의 형태를 띠고 우리는 그 모사로 이해되었다. 삼위일채를 설명하는 페리코레시스 역시 천체의 원운동과 지구 궤도 안 쪽의 행성들의 교차 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플라톤은 예술 중 무용을 제일 높이 평가했으며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이 천체 운동을 모사하는 윤무를 최고의 예술로 평가했는데 바오 이 개념을 빌려서 세례를 베푼 것이 갑바도기아 파더들의 페리코레시스다. 이 단어의 원 뜻이 윤무(輪舞)라는 것도 이런 사실을 방증한다.
그런데 이런 체계로서 하늘이 무너지자 진리의 새로운 기초를 놓으려는 시도가 근대 인식론의 출발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방법은 의심을 통해서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의 기초로 자아를 근거로 둔 것이다. 그는 여기서부터 신까지 연역을 통해 진리를 확장한다. 그는 알려진 대로 가톨릭 신부였으며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미적분학을 처음 발견한 수학자이기도 하다. 뉴톤이 먼저 발견했으나 발표를 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실제 뉴톤의 일화들은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지구의 공전주기를 계산해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답신을 바로 했는데 "어 그거 내가 예전에 다 계산해 뒀어" 뭐 이런 식이었다.
다시 논지로 돌아가서 데카르트가 어거스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ergo sum)를 오마쥬하면서 진리의 기초로 정초한 것이 자아였다. 이는 근대의 공통적 특징이기도 한데 칸트가 물 자체와 현상계의 인식 구조는 사물을 사물 자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인식하게 했고 이 대상은 의식 내부의 것으로 대상은 곧 보는 자에 대한 투영으로 관찰의 대상일 수 없었던 나를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민들었다. 이를 초월 철학이라 하고 이처럼 초월 철학의 주제가 자신이 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이런 물자채와 현상계의 이중 구조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로 이어지고 이 의지를 그대로 받은 니체와 의지를 옥망으로 받은 프로이트로 이어진다. 근대의 진리는 이처럼 자아의 진리였다.
그럼에도 현대에는 중세로부터 받은 형이상학이 여전히 존재했다. 진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아라는 함정에 빠진 근대는 진리를 정초할 수 없었고 후기 근대, 즉 다양성과 상대성, 해체를 통해 사실을 드러내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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