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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선조들의 지혜

조선 시대 예문관의 사관들은 왕의 언행을 기록했다. 기록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정서해서 한부를 춘추관에 제출하면 이것을 사초라 했다. 그리고 집에 남은 사초를 가장사초(家藏史草)라 하였다. 가장사초를 만들게 한 이유는 사초의 정리가 미비할 때를 대비한 방책이며 이렇게 정리된 사초는 왕이 죽은 후에 실록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임시로 실록청을 세우고 사초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 승정원이 쓴 '승정원 일기' 등을 모아서 일단 초초를 기록하고, 다시 고쳐서 중초를 쓰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고쳐서 정초한 것이 왕조실록이다. 그리고 기록 후에 남은 자료들은 세검정에서 씻어서 볼 수 없게 했는데 이것을 세초라 한다. 이렇게 기록된 왕조 실록은 4군데의 사고로 보내져 따로 보관케 했다. 임금이라도 사초는 볼 수 없으며 직전 선대왕의 실록을 볼 수 없다.

이는 기록의 공정성 때문인데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란 사초가 유출되어서 무오사화가 일기도 했다. 조의제문은 제사문으로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을 추모하는 글이었으나 이것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 이를 비꼬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이것을 적어 넣었고 원래는 볼 수 없었던 성종실록을 연산군이 이것을 보면서 사화로 번졌다. 실록을 본 인물이 또 있는데 효종이다. 효종 원년에 인조실록이 작성되었는데 원래는 열조였다가 8일 후 인조로 개정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인조가 반정으로 추대된 인물이라 열등감과 의심이 많았다. 사관들은 그에게 열조(烈祖)라는 묘호를 붙였으나 8일 뒤 인조(仁祖)로 개정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빛나는 기록 문화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세계 어디에서도 이렇게 공정한 기록 문화를 찾기 어려울 거 같다. 그런데 그 후손인 이 땅의 언론은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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