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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인죄론의 변화, 그럼에도 속지 말아야 할 것...

가톨릭 교회는 죄를 대죄와 소죄로 구분한다. 대죄란 세 가지 조건에 의해서 성립한다. 첫째, 중대한 문재와 관련한 죄(materia gravis et insuper)일 경우로,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이에 대한 충분한 지식(plena conscientia)이 있음에도 어기는 죄를 의미한다. 셋째,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deliberato consensu) 죄라는 조건을 충족하면 이를 중대한 죄, 혹은 치명적인 죄라 하여서 "대죄"라고 한다. 개혁파 신학에서도 죄의 경중을 전혀 따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51문은 더 악한 죄를 정의하기도 한다. 어쨌든, 가톨릭 교리는 이와같은 치명적이고 중대한 죄를 7개의 치명적 죄로 구분하기도 했다. 교만(superbia), 탐욕(avaritia), 음욕(luxuria), 분노(ira), 질투(indivia), 식탐(gula), 그리고 낙심 혹은 게으름(pigritia seu acedia)이다. 

 

이에 비해서 소죄(peccata venialia)는 일시적인 형벌에 이르는 죄로 십계명에 걸리지는 않지만 양심에 걸리는 죄로 가벼운 문제(in materia levi)에 대해 죄거나 치명적인 죄라 하더라도 충분한 지식이 없거나(in materia gravi sine plena cognitione) 중대한 죄임에도 의도적으로 행함이 없이(vel sine pleno consensu) 행하는 경우, 이를 소죄라 했다. 그러나 소죄라 하더라도 이는 사랑을 약화시키고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행할 경우, 그것은 치명적이 죄를 범하도록 점점 죄인을 이끌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죄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해치지 않는다(Peccatum veniale caritatem debilitae ... Peccatum veniale deliberatum et sine poenitentia permanens nos ;aulatim disponit ad peccatum committendum mortale. Tamen peccatum veniale Foedus non disrumpit cum Deo.)고 보았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20세기, 제2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일부분 변화를 맞는다. 16세기의 경우, 대죄는, 죄책(culpae)은 모두 사하지만 형벌(poena)은 영원한 것에서 일시적인 것으로 바뀐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보속 교리가 나온 것이다. 고해 후, 사제의 명에 따라 보속을 시행하고 이 보속이 안 될 시, 연옥행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에 비해 소죄는 죄책과 형벌이 모두 죄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자기 몫으로 남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상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적시는 안 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 가운데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형벌 자체가 온전히 타락한 죄인과 거듭난 신자의 몫이다. 대죄의 결과로 야기된 영원한 형벌이 변화된 일시적 형벌과 소죄에서 비롯된 죄책과 형벌은 모두 신자가 자기 힘으로 갚아야 했던 자기 몫의 죄짐인 셈이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20세기에 이르러 제2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대죄의 경우, 죄책과 형벌을 모두 사하는 것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소죄의 경우, 16세기와 같은 입장이다.  이 부분은 개신교의 교리와 일정부분 가까워진 부분이다. 이 때문에 루터파 진영과 교회 일치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서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를 일컫던 "이단자"라는 용어를 "갈라진 형제"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루터파뿐만 아니라 성공회 등과도 활발할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는 숨겨진 문제가 있다. 

 

대죄의 경우, 언약을 파기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은혜의 회복에는 반드시 "고해의 성사"가 필요하다. 결국, 고해가 없는 다른 형제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회개의 내용을 고해하고 사제가 명하는 보속을 행하고 사면의 선언을 사제에게 받는 이 과정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이기 때문에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 개신교도들은 기본적으로 언약과 연결될 수 있는 방편이 없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유화적 제스쳐들에도 불구하고 또 교리적으로 개신교회의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 체계 속에 개신교도의 구원의 길은 없다. 

 

이미 대요리 문답을 통해서 보았듯이 개혁교회는 죄의 구분 즉 치명적인 죄와 사소한 죄의 구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의 형벌에 있어서 영원한 형벌과 일시적 형벌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구분은 도입하는 즉시, 연옥 교리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것이 영원한 형벌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경이 지지하는 바이기도 하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 그럼에도 굳이 구분하고자 한다면 영원한 형벌 내에서 차이를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독방에 같이 사형수와 감옥 내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형수의 차이 정도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사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아마도, 회개의 구체적 행위를 염두에 두고 형벌을 인간의 몫으로 남겼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을 당시,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루터의 신학에 대한 일관된 비난은 교회를 비도덕적 집단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학은 펠라기우스주의로 경도되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원천적으로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이 바로 "칭의와 성화의 구분"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비난과 달리, 종교개혁 전통은 칭의에서 우리 죄책과 형벌을 모두 그리스도가 해결하신 것으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성화에서 "은혜의 주입" 교리를 말함으로 칭의로 말미암은 구체적 열매로서 "행위"를 도입해서 설명했다. 대요리 문답 77문에서 성화에서의 은혜의 주입 교리가 이 구조를 설명해준다. 칭의에서는 "주입"을 극도로 꺼려 하다가(WCF.11.1.) 성화에서 주입 교리를 따라 붙인다. 이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한 것이 아니라 의화 교리를 구분해서 칭의와 성화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다. 

 

행위언약과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게 되면 그것은 곧 바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로의 회귀를 의미하게 된다. 속죄의 효력과 범위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대죄의 죄책과 형벌을 모두 그리스도 속죄하셨다고 한 것은 큰 진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죄의 형벌은 신자의 몫이며 대죄로 인해서 언약이 깨어진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고해"라는 은혜의 방편이 없이는 이 언약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인 제사장"의 교리에서 우리는 누구라도 회개를 통해서 돌아갈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대죄라 하더라도 그것이 참 신자, 곧 택자들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할 수 없다. 잠시 잠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은 그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다. 모든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것이 택자 교리의 실체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율주의자들인 페더럴 비전과 새관점주의자들만 행위언약과 능동순종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정 반대편에 있는 반율주의자들도 이를 부정한다. 행위언약과 능동순종은 그 자체로 율법의 요구에 대한 성취 곧 율법의 제3용도로서 열매를 맺는 삶을 전제하기 때문에 반율주의자들은 이것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이를 부정한다. 반대로 신율주의자들은 이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자를 비도덕적 존재로 만들 거라는 우려 때문에 이를 주장한다. 실제로 그들의 우려는 이 반율주의자들에게서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싱클래어 퍼거슨 박사가 신율과 반율이 이란성 쌍둥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며, 새관점의 저격수라던 서철원 일파가 새관점주의자들과 같이 능동순종과 행위언약을 부정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1500 년경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 Hieronymus Bosch(1450년경~1516) 가 그린 「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마지막 사건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 Four Last  Thing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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