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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설교는 설득이다.

설교는 설득이다. 

노승수 목사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는<불타는 논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불타는>은 열정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감정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설득이 되려면 그것은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이라고 해서 상대가 승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합리적이어서 받아들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함에도 우리는 승복을 거부할 때가 있고, 정말 바보스럽게도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논리가 성립하지 않지요. 그것은 전혀 비효율적이며 비생산적이기까지 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헌신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설득된다는 것은 그저 논리적인 설득만을 의미하지 않고,<설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설득될 뿐 아니라 복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설교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의 언약의 백성을 설득하고 복종케 하는 하나님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연약한 존재를 당신의 대언자로 세우셔서 사람들을 설득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드린대로 설득은 그저 논리적이며 이지적이고 냉정한 논리의 잔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에는 삼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가 그것입니다. 로고스는 말 그대로 논리를 의미합니다. 파토스는 설교자의 감정과 열정을 의미하며, 에토스는 설교의 삶의 모본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건조한 논리는 성도를 메마르게 합니다. 내용과 지식이 없는 감상적 설교는 성도를 헛된 열심에 들뜨게 합니다. 지식도 열정도 없는 도덕과 윤리강화로서 설교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율법주의적 외식을 불러 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인격전체의 투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리는 기본이어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설교는 설교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설교는 한 사람의 내면의 고민과 삶을 담아 내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는 적용이라고 합니다. 적용은 사실 우리의 감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적용을 흔히 행동의 문제로 생각하기 쉽지만 적용은 바로 우리 내면의 감정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논리에 의해서만 설득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감정에 의해서 더 잘 설득이 됩니다. 논리는 오히려 싸움의 기술입니다. 논리가 사람을 설득한다면, 모든 사랑은 논리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논리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자신이 손해 볼 줄을 알면서도, 혹은 자신이 죽을 줄을 알면서도 희생을 감행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논리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사랑에는 이처럼 무모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모함 때문에 인생의 활력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가 죄인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일이 어떻게 논리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이런 것을 '파토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명의 방식은 논리적이되, 이 파토스 사람의 심정의 깊은 곳을 건드리고 이끌어내는 이 힘을 무시하게 되면 설교는 매우 무미건조한 것이 됩니다. 설교는 그것이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쉬우면 사람들이 잘 이해합니까? 쉽다고 은혜스런 설교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의 백미는 로이드 존스의 표현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논리적이되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불타는 사랑은 내용상 전달되기 보다 형식상 전달됩니다. 사랑을 말로 하는 것이기보다 느끼는 것이지요. 설교자의 기세와 품위 이런 데에서 그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베여 나오는 것이지요. 이것에 사람들이 설득됩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를 보며, 나에게는 왜 저런 사랑이 없는가? 도대체 무엇이 저를 그토록 사랑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을 청중으로 하여금 가지게 합니다.
설득에서 세번째 요소는 '에토스'입니다. 에토스란 실천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이 '에토스'는 사실 앞의 두 가지 요소 '로고스'와 '파토스'의 결과입니다. 사람은 지성적으로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옳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행동을 하도록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일까요? '파토스'적 요소가 없이는 사실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헌금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설교가 논리적이라서 헌금을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헌금을 하지요. 그럼 이 파토스와 에토스를 잊는 가교가 무엇일까요?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6-7세 정도된 아이들은 정말 다루기 힘듭니다. 그 아이들은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지요. 그가 권위를 부여하는 이는 유치원 선생님이나 부모님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들이 영향력이 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한 사람이 헌신을 하고 그와 같은 행동으로 자신이 신앙을 나타내보이려면 설교는 설교시간에만 이루어지고 성도들과 긴밀한 관계가 없다면 그들은 제가 장담하건대, 100% 머리와 귀만 커지는 신자가 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위로부터의 교제 곧 그리스도와 연결된 지체들이 그의 말씀 안에서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밀히 성화는 공동체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교제의 권역이 커지게 되면 실제 영적 성장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사람은 보통 평균적으로 250명 정도의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보다 범위가 커지면 형식적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에서 실천이란 과제는 영향력의 정도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즉, 설교는 강단 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강단 밑에서 목회자와의 나눔, 성도간의 나눔과 교제를 통해서 영향력으로 들어나고 실천적 동기를 갖게됩니다. 사람이 언제 배우는가? 그들이 들을 때 배우지 않고 그들이 나눌 때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설교의 '에토스'라고 할 수있습니다.
이 세가지가 서로 하모니를 이루어야 진정한 우리 영혼을 경성케 하는 설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지성과 감성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일깨우는 강력한 수단인 설교 그것은 그래서 매주 계속되어야 하고 지난 주에 다 하지 못한 것을 다음 주에 다시 가르쳐야 하며, 배운 것을 반복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대개 논리적인 설교가들은 반복을 두려워합니다. 그에 반해 감성적 설교가들은 새로운 논리가 없고 늘 같은 소리만 합니다. 놀랍게도 늘 같은 소리는 아무리 감동적인 이야기더라도 식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감성의 특성입니다. 감성은 늘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이성은 올곧고 바른 것을 요구합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내면에서 이룰 때 그것이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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