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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신앙과 감정

신앙과 감정


노승수 목사


조나단 에드워즈는 '대체로 참된 신앙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때 에드워즈가 사용한 단어는 affection이란 단어입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남자가 여자에게 맹목적으로 이끌리는 것과 같은 상태를 표현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영혼의 두 가지 기능이 보이는 현상에 대한 설명입니다.<지성 Mind>과<의지 Will>라는 영혼의 두 기능이 하나님에 대해서는<이끌림>을 보이고 죄에 대해서는<혐오>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감정>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영어에서도 '믿는다'는 단어는 동사구의 형태로 believe in으로 사용이 되는 것처럼 헬라어에서도<믿음>이란 단어는 주로 into라는 전치사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이란 결국 무엇인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지요 그리고 여기서<감정>이란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것을 단순히<passion>과 같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류의 감정이 아니라<지성>와<의지>의 이끌림이라는 점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칼빈이<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의를 설명할 때, 이<연합>의 도구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냥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믿는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속했구나 하는 사실을 지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2000년 전의 십자가의 사건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건이 아니라 나의 사건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와 함께>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연합의 본질입니다. 또한 믿음은 우리 영혼을 고양시키어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그리스도와 함께 앉게 합니다(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러므로 믿음이란 단순히 어떤 사실에 대해서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 특별히 그의 구속의 사역과 내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연합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이 가능할까요? 또는 우리의 아무런 헌신이 없이 그저 구경꾼처럼 지켜보게만 할까요?<지성>과<의지>의 이끌림이라는 사실을 다시 주목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항상<헌신>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심리학자 바론 코헨은<자폐증이란 공감능력이 극단적으로 부족하고 체계화 능력만 발달한 병인데 공감 능력과 체계화 능력은 상호 배치된다.>고 했습니다.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은<공감>의 능력이 전혀 없는 반면 체계화 능력은 극도로 발달한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폐를 가진 아이들은 특별한 능력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처음 듣고 보는 피아노 연주를 그대로 따라서 한다든지 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이지만 다른 이들의 아픔 사람들 간의 감정적 교류에 대해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적절한 비유일지는 몰라도 신앙에서 고백의 내용이 되는<교의>는 일종의 체계화입니다. 그런데 이 체계화가 지나칠 정도로 엄밀해지면 원래 신학의 기본 전제인<유한자는 무한자를 담을 수 없다>는 전제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됩니다. 마치 엄지손톱으로 달을 가리우려 들게 되겠지요. 성경을 따라 체계화를 해야 하지만 지나친 체계화는 오히려 하나님의 신비를 훼손합니다. 마치 다 아는 듯이 굴게 되겠지요. 뿐만 아니라 이런 체계화는 코헨이 말한 바처럼 공감능력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경우를 불러 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 공감능력과 체계화능력은 상호 배치되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체계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에 비해 하와에게는 그를 잘 돕도록<공감 능력>을 주셨습니다. 실제로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높은 공감의 능력을 보입니다. 여성의 뇌는 좌뇌와 우뇌의 정보교류를 담당하는 뇌간이 남성에 비해 현저히 발달해 있습니다. 이에 비해 남성의 뇌는 편측성(dominance) 즉, 한 쪽 뇌를 중심적으로 발달하면서 체계화 능력을 보입니다. 인간에게 이 두 가능이 상호 배치되게 하신 까닭은 아마도 남녀가 서로 협력하라고 하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찌되었든지, 이 두 기능은 인간에게 있어 균형이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은 우리 마음에 선물로 주신 믿음의 결과 그의 사역에 우리가 깊이 공감하게 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헌신>이란 공감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대로<극단적 체계화>가 자폐이듯이, 성경의 체계를 극단적으로 체계화하게 되면 실제로 하나님과도 소통되지 않고, 이웃과도 소통되지 않는<종교적 자폐>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신앙적 지식은 높아가는데<헌신>이 부족하다면, 나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는 바리새적 외식의 다른 형태이기도 하겠지요. 주님이 이것을 꼭 집어서 지적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5-6)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 십일조의 유전과 맞물려 자기 중심적 체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전으로 율법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을 폐하게 된 것이지요. 지독한 신앙적 열심을 보임에도<헌신의 결여>를 보인다면 그는 분명<종교적 자폐>인<외식>이란 질병에 감염이 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있습니다.<자폐>가 흔히 소통의 부재이듯이, 다른 어느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듣는다는 점입니다.<이단>사상에 감염된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특징이지요. 도대체가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상식선에서 논리를 가지고 또 온정을 가지고 이야기 함에도 자기 방식의 해석의 틀은 들은 내용을 왜곡합니다.<있는 그대로>듣거나 보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지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일은<이단>안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보수적이며 건강한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신앙이 좋다는 성도들이 오히려 꽉 막혀 이야기가 더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을 계시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성을 사용하여서 신학적 사색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계시의존사색>이라고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비가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비에 닿는 길은<믿음이라 불리는 공감 능력>외에 달리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씀하는<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입니다. 
반대로<체계화 된 지식>이 없이<공감 능력>만 극도로 발달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겠지요. 이런 경우들은 대체로<성경>에 의지해서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지요? 분명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에 충분하고 완전한 계시입니다. 현대의 대부분의 이단적 사상은 바로 이 성경의<자증성>과<충분성>을 믿지 못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완전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신앙을 보면, 이런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이 보이는 공감은 하나님과의 동조라고 보기 어렵지요. 오히려 자기 마음과의 동조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명백이 성경과 그가 증거하는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데, 우리 마음의 종교는 늘 뭔가 부족하다고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은 성경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목소리이지요? 보통, 이런 분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감>입니다. 그러나 아시는대로 인간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고 아직 그 신비가 다 벗어지지 않은 상태라 자신의 신앙을 튼튼한 기초 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 위에 두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경우를 흔히<신비주의>라고 하지요.<지식>이 없는 열정은 망하는 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무지한 헌신은 헌신을 할수록 더 어긋난 길을 가게 합니다. 마르다의 많은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의 분주함으로 주님께 칭찬을 얻지 못하고 마리아의 작은 귀기울임이 더 큰 칭찬을 얻었습니다(눅 10:40-42).
그러므로<믿음>은 항상 체계화 된 성경의 지식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에 대한 깊은 공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세상이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누가 뭐라고 해도 여전히 사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랑이란 공감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을 그저<지성>이나<의지>의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신비입니다. 공감이란 나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가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참으로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이 사랑이 이기적인 자기 중심적 사랑이 되지 않으려면 바로<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저<열정>이 아닌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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