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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친밀감과 존중감

친밀감과 존중감


노승수 목사


우리는 대체로 친밀감을 위해서 자신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을 상당히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문화는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을 그리 반기거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랑을 늘어 놓는 사람들을 은근히 재수없어 하면서 그들을 따돌립니다. 그렇죠 사실 자기 자랑이나 잘난체를 일삼는 사람들이 반갑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성경적이지도 않구요. 그래서 친밀한 관계를 원하거나 혹은 어느 모임에서나 조직에서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유능감이나 자신감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을 보이는 것이 좋고 원만한 관계의 시발점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런데 관계에 있어서 그것이 조직 안에서의 관계이든지, 아니면 그냥 친구나 연인 관계이든지, 가족관계이든지,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완화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친밀함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친밀한 관계에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관계란 그저 친밀함 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단 두 개별자 사이에 경계가 흐려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가족 관계나 익숙한 연인 관계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문제는 친밀감의 부족이라기보다 지나치게 친밀하여서 문제가 생깁니다. 관계의 깨어짐의 원인이 친밀감의 과다에서 생겼다기보다 친밀함이 지나쳐서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럴 때 본능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적절한 거리두리를 시도하는데, 문제는 정확한 파악이 되지 않은 채로 적절한 거리두기만을 하게 됨으로 관계는 소원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친밀감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존중감입니다. 존중감은 상대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배려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입니다. 그리고 이것의 결여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흔히<수동공격성>의 전형인<천사표 컴플렉스>를 가진 경우,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의 어떤 무시하는 행동이나 결례에 대해서도 그에 적절한 피드백을 상대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럼 점차 관계에서 그런 잘못된 행동은 관례화됩니다. 결국 이것이 힘든<천사컴플렉스>를 가진 사람은 공격적(?) 표현을 할 수 없음으로 인해, 태업이나 게으름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게 되고 결국 그 주변에 사람들이 떠나고 없게 됩니다. 결국 자신에 대한 존중감의 결여가 관계를 해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연애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상대를 사랑하고 그로 인해<헌신>이란 것을 하게 됩니다. 무엇을 해도 상대에게 맞춰주고 자기 스케줄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정을 상대에게 맞추는 것이지요. 대체로 이런 역할은<공감능력>이 남성보다 두드러진 여성들에게서 자주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배려가 남성에게 헌신이나 배려의 메시지로 전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고, 그 결과 무시하는 태도를 유발하게 됩니다. 여성들은 자신이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물론 남자들도 처음부터 여자를 무시하려는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고 친밀감을 위해서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의 상당한 정도의 포기와 그에 따른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계속적으로 전달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이것은 정반대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고전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상대방에게 인정받는 일은 소중한 경험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어린 시절 곧 아동기적 경험의 반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장과정과 양육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하기 보다 누군가의 칭찬이나 인정에 기대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정도의 보상과 만족을 줍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그 기준점이 다른 사람의 평가와 판단에서부터 점차 자기 자신의 평가와 판단으로 옮겨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가치 있다고 믿는 일에 헌신하고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결정해서 행하는 것 그것이 성숙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말하는<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는 단순히 물리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그 심리적이며 내적인 거리두기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삶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인정해줄<부모 역할을 할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없을 뿐더러 그 결과가 만족스럽거나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즉,<존중감>의 정도가 성숙의 정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성숙도는 인간적 성숙도를 의미하는 것이지, 성경적이며 영적 성숙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존중감>은 모든 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왜냐하면<존중감>이라는 것 자체가<관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전의 부모와의 관계 속에 우리가 학습한 마음(Conditioning Mind)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존중감>은 자신의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친밀감>을 해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관계의 진전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독불장군처럼 자기 혼자 옳다는 식의<자존심>때문이지요. 앞서 말한 것처럼 누가<잘난 척>만 하는 사람이 이뻐 보이겠습니까? 우리가 직장이나 여러 관계 속에서<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은 오히려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을 경험하는데, 이는 그것이<건강한 의미의 자존심>이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적절한 친밀감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친밀감이 관계를 무너뜨리도록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때때로 양해하는 일은 가능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삶에서 반복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인격적 교제>란 바로 이 두 가지가<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그저 아무렇게나 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도 "오냐 오냐하면 손주가 할아버지 수염을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친밀하다고 무엇이나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손주가 이렇게 행동하는데는 할아버지의<허용의 신호>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굳이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로만 국한해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성경적 개념에서<존중>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만 그런 종류의 유교적 미덕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들을 존중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유능함>을 드러내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우리들의 덕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친밀감>은<존중감>으로부터 나오며, 정말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친밀함>을 드러내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