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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신학적 세례

신학적 세례


노승수 목사


아무런 해석이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해석없이 성경을 읽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해석이란 무엇인가?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잘 먹고 자~~알 살아라'라는 말을 우리 나라 사람과 우리 말을 갓 배운 외국인은 어떻게 해석할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말을 거의 빈정대는 말로 해석할 것이다. 이에 비해 이런 문맥을 가지지 않은 외국인은 거의 대부분 상대를 축복(?)하는 말로 해석하지 않겠는가? 이런 짧은 문구에도 그 사람이 가진 '전제'가 작용하여서 해석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아무런 해석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럼 해석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신학>에 대해서 사시를 뜨고 본다. 그러나<신학에 대한 부정적 생각>역시 신학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대체로 신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단히 성경적이며 성경대로만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관점 역시 신학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해석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신학인 셈이다. 그럼 도대체 어떤 해석과 어떤 신학이 과연 성경적인가? 한국 교회의 웃지 못할 성경 해석을 예로 하나 들어보자.<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표적 해석은 새벽예배에서 그대로 들어난다. 예배를 인도하다보면, 간혹 일천번제라면서, 소정의 헌금을 매일 새벽예배에서 드리는 신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의 이런 신앙적 행위는 성경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해석을 했을까?<일천번제>를<일천번>제사로 해석한 것이다. 번제는 완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구약의 제사로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가 각을 뜨고 번제단 위에 제물을 바쳐 드리는 제사이다. 그런데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바로 이 번제를 일천 개의 제물을 들여서 드렸다는 뜻이다. 그것은 당일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1000이라는 숫자가 완전을 상징하는 듯이 완전하게 주께 헌신하겠다는 뜻으로 주님께 소 일천 마리를 번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럼 한국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일천 번 제사>로서<일천번제>는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그것은 과거에 우리의 무속신앙 속에서<치성을 드리면 감천 즉, 하늘이 감동한다>는 의미에서 매일 드리는 정성의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무엇으로 해석했는가? 샤머니즘적 사고로 성경의 내용을 해석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이 교회가 2000년간 고백해온 신앙고백 곧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믿을 것인가? 하는 해석과 부딪힐 때, 이들은 곧 잘 신학이 무용하다는 주장을 한다. 이런 터무니 없는 주장과 해석은 그리고 그런 것으로 구성된 신학은 이단 속에서 흔히 발견된다. 마귀를 과대 평가하는 다락방이나, 모든 질병의 배후에 귀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귀신론, 특히 그 귀신은 바로 죽은 조상이라 생각하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신학(?)은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이들의 성경에 대한 이런 해석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해석적 전제>곧<그들의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그게 바로<샤머니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신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신학>곧<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신학>이 없다는 것은 곧<믿음>이 없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반드시<성경에서 부터>나와야 한다. 그래서 신자에게<신학적 세례><신학적 중생>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신학이 성경에 의해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는 불신자일지도 모른다.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실제로 현존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너무나 다른 분일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없고서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의 주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될리 만무하다. 
그럼<신학적 세례>를 받고<바른 신학과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딤후 3:14-17)라고 한다. 두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 배우라는 것이다.<바른 신학>을 가르치는<바른 교회>에서<바른 교사>에게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어느 의학도가 자신은 선배들에게 배우지 않고 혼자 실험을 통해서 질병과 인체에 대해 알아가겠다고 하면 우리는 뭐라 하겠는가? 사람의 육체를 다루는 일도 이와 같거든 하물며 인간의 영혼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성경>을 사도적 전통으로부터 배우지 않겠다는 것은 이와같은 어리석은 의학도와 무엇이 다른가?<배운 것>을 어떻게 확신하게 되는가? 그것은 디모데후서가 말하는 것처럼<성경>을 통해서 그 배운 것을 확신케 되는 것이다.
성경의 해석은 그러므로<신학적>이어야한다.<신학적>이기만 하면 될까? 그렇지 않다. 그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베뢰아 교인들처럼 그러한가 하여 상고하는 일이 필요하다(행 17:11). 이는 문맥에 대한 고려 곧<문법적>해석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문맥은 단순히<문법적>해석보다는 광범위 한 개념이다. 예컨대, 글머리에 제시한 예, '잘 먹고 자~~알 살아라'는 단순히 문법적 해석으로는 그 의미를 간파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그래서 성경은<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의 원래의 저자가 원래의 청중에게 의도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해석이<역사적>해석이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읽으면서 이런<신학적>사고가 우리 속에 자리 잡고 그것에 의해서 성경을 읽게되는 것 그것을<신학적 세례>혹은<신학적 중생>이라고 부른다. 사실 여기에 이르지 않고 누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다는 말인가? 믿음은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다른 말이 아니다. 그리고 이 지식은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성경으로서만 참으로 깨달을 수 있으며 그나마 성령의 조명하심과 믿음이 없이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