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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재정립되어야 할 성화에 관한 연구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재정립되어야 할 성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sanctification that is reestablished by the view points of the biblical theology) 
-성화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고찰과 성경의 주석적 의미의 바른 해석- 
이천우 목사 
구원론에서 다루어지는 성화 교리는 교회 공예배에서의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교회가 갖는 사경회나 기타 각종 집회에서도 자주 가르쳐지고 있고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는 참으로 중요한 교리이다. 그러한 성화 교리의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에서 원리적이면서 또한 실천적으로 적용되는 실질적인 것이 될 것이다. 
성화(聖化)는 조직신학(교의신학)에서 구원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 만큼 성화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가져나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화에 대한 이해는 구원론적인 신앙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회사에서 성화는 종교개혁 이후에서야 비로소 두드러지지만 교부시대에까지 올라간다. 그만큼 성화 교리는 오랜 역사 속에서 다루어져왔다. 그러나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조직신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성화 교리가 바르게 가르쳐져 왔는가에 있어서는 이제는 재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성화 교리의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성경신학은 조직신학과 병행되어져야 한다. 성화 교리는 그런 면에서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바르게 해석되고 설명되어져서 지금까지 조직신학 분야에서 가르쳐져 온 성화 교리가 보다 더 분명하게 그 의미가 잘 드러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Ⅰ. 성화 교리의 출현
1. 웨스트민스터 삼대 표준문서에서의 성화 교리
성화(聖化;Sanctification)는 교회에서 중요한 가르침으로 가르쳐져 왔다. 그것은 성화가 기독교의 구원 교리의 하나로 다루어져 교리 문서로 작성된 것이 크게 영향을 갖고 작용되었기 때문이다. 교리 문서에서 성화 교리로 가장 두드러지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서, 소교리문답서로 되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삼대표준 문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6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성화에 관한 언급을 한다. 
“하나님께서 피택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사(意思)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수단)들을 미리 정하셨다(벧전 1:2; 엡 1:4-5, 2:10; 살후 2:13).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선택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으며(살전 5:9-10; 딛2:14), 때를 따라서 역사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함을 받으며, 양자 되며, 성화 되며(롬8:30; 엡1:5; 살후2:13),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벧전1:5). 오직 피택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양자 되거나, 성화 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요6:64-65, 10:26; 8:47; 요17:9; 롬8:28; 요일2:19.” 여기에 보면,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으며, 때를 따라서 역사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함을 받으며, 양자 되며, 성화 되며,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 
라고 성화에 대한 언급을 구원의 순서에서 다루어지는 다른 것들과 함께 연계해서 말한다. 그리고 이 성화는 제13장 ‘성화에 관하여’로 1-3항에 걸쳐 자세히 다루어진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직접 성화 되며,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리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죽어지고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딘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1항) 
"이 성화는 온 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 금생에서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모든 부분에 얼마간의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로 인하여 계속적이고 화해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려 싸운다.“(2항) 
“그 전쟁에서, 그 남아 있는 부패한 부분이 당분간은 상당히 우세할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는 영으로부터 힘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써,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 되며, 그리하여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3항)
2. 하이델베르교 교리문답에서의 성화 교리
성화 교리는 개혁교회의 일치 세 신조 교리로 알려진 것 중의 하나인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서도 가르쳐지고 있다. 1563년에 작성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1647-48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삼대 표준문서보다 시기적으로는 훨씬 더 이전에 작성된 것이다. 
제 24문 : 사도신경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답 : 셋으로 구분됩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가 그것입니다. 
라고 말하여 성화가 사도신경의 내용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인간 창조 사역과 성자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함께 성령 하나님의 성화 사역으로 사도신경의 구조를 이해한 데 따른 것이다.
3. 벨직 신앙고백서에서의 성화 교리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과 함께 또 하나의 일치 신조인 벨직 신앙고백서(1561년) 24장에서도 성화는 가르쳐지고 있는데 ‘인간의 성화와 선행’의 내용에 의해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로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써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얻게 된 이 참된 신앙이 인간을 중생케 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얻게 하여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의롭다 창함을 받은 이 믿음 때문에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이 태만해져도 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으며, 반대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이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나타나는 생활태도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나 형벌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주장 역시 그릇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이 거룩한 믿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성경에서 일컫는 ‘사랑을 통하여 역사 하는 믿음’이기 때문이요,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서 인간에게 명하신 실천하는 믿음인 것이다. 
이 선한 일들은 마치 좋은 믿음의 뿌리에서 선한 열매가 나오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받으실 만한 착한 행위들로서, 이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데 있어 이 선행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선을 행하기 전일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선행(先行)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선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좋은 나무 열매를 맺으려면 그 나무 자체가 우선 좋아야만 하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결코 그것으로 공적을 쌓기 위함이 아니다(무엇으로 우리에게 공로가 있겠는가?).” 
또한 제27장의 ‘보편적인 기독교 교회’에서는, 
“우리는 어떤 보편적인 혹은 우주적인 교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의 보혈로 죄 씻음 받으며 성령으로 성화 되어 인 치심 받음을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교회는 순간적으로 비록 작아 보이고 인간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마치 아합 왕의 시대와 같은 위급한 경우에라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 두셨던 것같이, 이 악한 세상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보호를 받으며 유지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장소나 특정한 사람에 한정되거나 경계를 이루는, 또는 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에 널리 퍼지는 것이요, 동시에 믿음의 힘에 의하여 동일한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을 모아 하나로 뭉쳐야만 된다는 것이다. “ 
라고 하여서 성화를 거룩한 교회의 내용 속에서 다루고 있다.
4. 개혁파 교회의 조직신학에서 구원의 서정에서의 성화 교리
이러한 성화는 개혁파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조직신학의 구원론에서 구원의 순서
로 다루면서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에 이어서 성화를 다루고 그 뒤로 성도의 견인과 영화를 다룬다.
성경은 이 구원의 순서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에 따라서 구원의 순서는 개혁파 신학자들 간에도 그 이해를 달리하는 사람 간에 입장을 달리하고 있기도 한다. 가령 안토니 A. 후크마는 구원의 순서에서 중생과 회개 사이에 ‘돌이킴’을 두는가 하면, 존 머레이는 회개(또는 회심)을 다루지 않고 믿음(또는 신앙)이 양자 다음에 다루어진다. 그런가 하면 구원의 순서를 중생보다는 칭의로 시작하는가 하면, 신앙을 회심 앞에 두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소명 또는 중생에서 시작하여 회심을 신앙 앞에 두며 칭의를 신앙 다음에 둔다.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이러한 견해적 차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이 순서들이 갖는 유기적 관계성에 대한 이해와 그로 인해서 강조되는 데 따른 것이다. 
성화가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이라고도 불리우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구원의 순서로 다루어짐에 따라서 교회에서와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교리적인 학문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가르쳐지고 있다. 교의신학을 조직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직신학이 성경의 교리적인 원리들을 가르치는 신학을 조직적으로 표현하는데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조직신학은 기독교 교의학인 것이다. 그런데 교의신학이라는 명칭보다 조직신학이라는 명칭이 우리에게서는 더 익숙해 있다. 그것은 미국에서 조직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영향 때문이기도 한 데다가 워필드(Warfield)가 말한 대로 조직신학은 어떤 원리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바람직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교의신학이라는 명칭을 고수한다면 거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신학 사상이 갇혀서 보다 성경적 관점에서 이해한 교리적인 원리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Ⅱ. 교회사적으로 본 성화의 관점
1. 종교개혁 이전의 성화론
성경의 교리적인 원리들을 말해나가며 이를 저술해 나간 것은 3세기 초부터이므로 상당히 오래 전부터 다루어져왔으며 이후 다양한 명칭으로 많은 조직신학이 비중 있게 저술되어 왔다. 그런 까닭에 구원의 순서에서 다루어지는 성화 부분이 교회사적으로 이 시기에서는 어떻게 말해졌는지에 의해서 그 이후에도 성화의 개념과 그 이해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교회사적으로 먼저 종교개혁 이전에 언급되거나 다루어진 성화의 관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고대의 성화관 
박형룡은 그의 저서 ‘박형룡 박사 저작전집 제5권 교의신학 구원론’에서 성화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다루면서, “초대 교회에서는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과 선행에 의뢰할 것을 가르치는 도덕주의의 긴장이 현저히 나타났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주석으로, “세례 받기 전에 범한 죄들은 세례 받을 때에 씻어졌으나 그 후에 범한 죄들을 위하여는 신자가 반드시 고해(告解)와 선행(善行)으로 대비하여야 했다. 그는 반드시 도덕생활을 하여서 주의 시인(是認)을 받을 공로를 세워야 했다. 여기서 자연히 수법주의(守法主義), 성례중시주의(聖禮重視主義), 속계(俗界)에서 세력을 펴려는 성직자의 정략(政略), 과도한 수도사적 경건의 결점 있는 개념들이 자라났다. 고행주의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초대 교회 시대인 고대에서는 고도의 도덕생활을 요하는 도덕주의가 성화의 관념을 띠고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4세기까지의 구원론의 동향에 의한 성화관 
교회사에서 종교개혁 이전에 성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인물은 4-5세기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이다. 그 이전인 초대교회 교부들의 저서에는 성화의 교리에 대한 진술이 거의 없다. 단지 이 당시에는 구원론의 관점에서 그 동향이 어떤 것인지를 통하여 성화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가졌을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신앙과 선행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가르침에서 도덕주의의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세례 받기 전에 범한 죄들은 세례 받을 때에 씻어졌으나 그 이후에 범한 죄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해와 선행으로 준비해야만 한다. 그는 반드시 덕스러운 생활을 해야만 하며 그리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공로를 세워야만 한다. 뻘콥은 이에 대한 스코트(Scott)의 말(The Nicene Theology, p.200)을 소개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이원론(二元論)은 성화의 영역을 단지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과 연관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히 죄에 대한 불완전한 개념, 율법주의, 성례주의, 사제술(司祭術), 지나친 수도사적 헌신을 성장시킨 분야(field)였다” 라고 하였다. 
이 당시는 금욕주의가 크게 중요시하게 된 시기이나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때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관점은 고대의 성화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3) 어거스틴의 성화관 
루이스 뻘콥은 4세기 이후 어거스틴은 성화의 개념을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본다. 박형룡도 뻘콥의 견해를 그대로 인용하여 같은 견해를 보였다. 어거스틴이 가진 성화의 견해들은 중세기 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종교개혁 시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그 영향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아담의 죄와 부패는 자손에게 유전하는 것, 이 죄의 벌로써 죽음이 온 것, 사람은 출생한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참으로 선을 행할 힘이 없는 것, 우리가 선택하여 선을 취하고 이를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 이 은혜는 사람의 공덕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전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되어지는 것으로 이 선택은 확실불변하여 지속의 힘이 있으며 이 은혜는 결코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어거스틴은 선을 행할 힘과 여지가 사람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렇지만 그러한 어거스틴은 사람의 성질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성화를 신적 생명의 새로운 초자연적 부여에 의한 능력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신적 은혜가 사람의 영혼에 새롭게 주입(注入)된 능력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이 은혜는 일종의 ‘부가적 선물’로서 실유(being)를 새로운 수준 또는 보다 더 높은 질서에로 들어오려 하나님을 알고 소유하며 즐기는 천적인 운명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장수민은 그의 저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분석’에 부록으로 실은 기독교강요인명록의 어거스틴에 대한 설명에서, “칭의의 은총은 인간의 재창조이며 갱신이다. 이 은총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의 주입과 자신 안에 초자연적 능력의 전달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초자연적으로 선하게 만들며, 하늘에서 보상을 받게 한다. 이러한 새로운 능력들이 인간에게 진정한 의지의 자유를 부여한다. 즉 초자연적인 선의 연습을 위한 능력을 부여해 준다.” 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이 이와 같은 견해를 갖는 것은 칭의를 단번에 되어지는 사건으로 보는 동시에 계속적으로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으로 보고서, 여기에 성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한 때문이다. 즉, 칭의는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하며 전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의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성화는 여기에 있게 되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역사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으로, 은혜의 선물을 통한 하나님의 행위인 것이다. 어거스틴이 가진 이러한 성화의 관점은 이후에 성화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 신적 능력이 임하여 그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상태에 있게 하는 것으로 인식케 하였다. 
4) 중세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의 성화관 
어거스틴에게서 나타난 성화의 개념은 중세기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가 가진 신학에서 좀 더 그 개념이 명확해진다. 그것은 어거스틴은 성화의 개념을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이었기에 그의 견해들은 중세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에서의 성화관이 어떤 것인지는 이 시대의 신학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들에서 가장 발전된 형식으로 발견되었다. 이 발전 과정 속에서 성화의 은총적이고 에너지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이것이 교회의 성례전적인 시행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분여된다는 교리가 확고해졌다. 그들의 교리는 트렌트공의회의 선언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되었는데, 정상적인 인간성은 죄와 불가분의 관계이고, 인간의 공로만을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초자연적인 은총이 필요한데, 이것은 인간이 이미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본성에 선물로서 더해지는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보다 초자연적인 존재로 승화되며 이로써 하나님을 이해하고 교제하며, 그에게서 오는 복을 누리게 되는데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구원의 은총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보았다. 성화 역시 이러한 신학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즉, 죄인을 성화시키는 은총의 에너지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자원으로 삼아서 교회의 분여를 통하여 성례전이라는 수단을 통로로 죄인들에게 주입되는데, 이것을 통해서 신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게 되고 여기서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신자들의 마음에 주입된 죄인을 성화시키는 은총의 에너지는 신자들을 공덕(supererogation)의 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하여서 자기 자신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보다 더 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이익에 보충할 만한 선행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중세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의 성화관은 그들이 갖는 점진적 과정의 칭의관과 일맥상통하여 점진적 과정의 성화관을 갖는다. 도머(Dom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칭의는 점진적 과정이다. 신자의 생활의 전과정을 통해 계속된다. 죄의 고백과 각종 징계가 칭의를 확보하는데 필요하다. 사람들은 거룩해진 것만큼 의롭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은 현재 생애에서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칭의는 계속 과정이기에 칭의가 기초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도 반드시 계속적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사가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칭의는 이 세상에서 결코 완성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므로 누구도 완전한 의로운 자로 죽을 수 없다. 그래서 연옥설이 있는 것이다.”
2. 종교개혁 시대의 성화론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에서의 성화의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서 신학적인 맥락에서 시도되었다. 성화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종개혁자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다루어져 오면서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 아주 중요한 교리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중요한 인물이 루터와 칼빈이다. 
1) 루터의 성화관 
루터(Martin Luther)의 신학사상을 따르는 루터교의 전통적인 신학적 강조점은 ‘이신칭의’의 신학이다. 그러나 루터의 신학 사상이 항상 믿음만을 강조하는 신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루터교는 ‘Sola Fide'의 성화관, 곧 ‘이신칭의 성화관’을 말한다. 현재 루터교의 ‘이신칭의 성화관’을 대변하는 루터교 신학자는 Gerhard O. Forde가 있다. 그의 논문 내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신칭의 성화관’을 정리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무조건적인 은총의 결과로서의 성화 
① 성화란 칭의와 구별되는 어떠한 새로운 무엇이 추가적으로 첨가 된 것이 아니라, 성화란 칭의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성화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예수님의 공로에 기초한 ‘무조건적인 칭의’의 원리에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② 성화란 인간이 노력해서 성취하는 도덕적인 삶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도덕적인 삶이란 옛사람이 추구하던 바이므로 우리는 옛사람이 추구하던 ‘자기 의(義)’ 포기하고 새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들어가야 한다. 
(2) 성화와 칭의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이 지닌 문제점 
포데(Gehard O. Forde)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전통적인 설명이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칭의는 죄인을 무조건적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고 성화는 인간 편에서 감당해야하는 부분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어떠한 상호 계약의 결과로 간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는 사람이 그것을 성취하는 주체로 오해될 수 있다. 이는 칭의는 종교적 서곡으로 보게되며, 성화를 핵심으로 보게 된다. 그로 인해 계속되는 옛자아의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3) 성화는 칭의의 무조건적인 원리에 속한 것 
포데는 신자의 삶의 방식에는 무조건적인 삶의 방식과 조건적 삶의 방식 이렇게 둘이 있다고 말한다. 조건적인 삶의 방식은 옛사람의 방식으로 여기에는 문제가 있는데, 첫째로는 이는 율법적인 삶으로 나의 의를 강조하게 되며, 둘째로 칭의를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참 성화란 무조건적인 삶의 방식인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 이는 칭의에 추가적으로 첨가된 새로운 실체가 아니며, 무조건적인 칭의의 원리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신칭의 성화관은 믿음의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차이점은 칭의의 개념이 너무 강조되어 성화의 영역에까지 침범한 경향이 없지 않다. 그는 무조건적인 삶의 방식과 조건적인 삶의 방식이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2)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성화 
성화란 말이 용어로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종교개혁 이후이다. 교리적으로 성화가 다루어지고 있는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은 종교개혁의 산물인 개혁교회의 귀중한 유산이다. 그리고 이 용어가 교리화 되는데 영향력을 가장 크게 끼쳐 온 것은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강요 이다. 
그런데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총 4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러한 기독교강요의 어디서부터 성화가 다루어져왔는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칼빈의 성화론은 기독교강요 3권인 구원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W. Niesel은 구원론의 3권에서 3장부터 다루고 있는 회개론에서 성화론이 시작되어 11장의 칭의론에서부터는 성화론이 본격적으로 언급되고 있다고 본다. 그가 이렇게 보는 것은 칼빈이 성화를 회개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버(O. Weber)와 웬델(F. Wendel)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만, 웨버는 칼빈이 중생과 성화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판단하여서 3장부터를 성화론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웬델은 니이젤(W. Niesel)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어서 회개와 성화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3장부터 성화론의 시작으로 보되, 6장의 그리스도인의 생활로부터 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까지 전체를 성화론으로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철하는 3장부터 10장까지를 회개에 의한 중생, 11장에서 13장까지를 칭의론, 그리고 14장부터 19장까지를 본격적인 성화론으로 본다. 
이상에서 성화를 회개, 또는 중생과 동일하게 보는 것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남으로 성화된 자가 되었다고 보고서 그에게서 성화의 시작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화론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칭의론에서는 성화론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그것은 성화된 자는 순결한 삶을 신장(伸張)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의 이중은총을 말한다. 즉 칭의와 성화의 이중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두 속성인 의와 거룩이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칭의와 성화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말하면서, 성화를 칭의의 지속적인 진보의 관계에서 다룬다. 즉 칭의를 받은 자에게서는 또한 거룩에 합당한 순결한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11장 1절 1항에서 칭의 교리의 위치와 그 뜻을 설명해 나가는 중에서 성화를 언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소유하도록 하였으며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써 주로 다음과 같은 이중적(二重的)인 은혜를 받게 하신 것이다. 즉, 첫째로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화해가 되어 우리는 그를 하늘나라에서 심판주가 아니고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모세 되는 것이요,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화(聖化) 되어 우리가 생활의 결백과 순결을 향하여 전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화 되어”(being sanctified by his Spirit)라고 말하고 있어서 그가 기독교강요에서 성화를 말한 사람으로 이해되어 왔다. 
칼빈이 말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에 의해 성화되어 생활의 결백과 순결을 향하여 전심하게 된다”는 그가 가진 성화의 개념을 말해 준다. 칼빈의 성화관은 죄인은 의롭다 함을 얻고 성화의 은혜로 심령이 변화되어 그 열매로서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화를 지속적인 회개 또는 중생으로 이해하면서, 죽임과 살림으로서의 성화를 먼저 이야기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발전된 개념의 성화를 주장한다. 그것은 곧 적극적인 사랑으로의 성화이며, 내적인 순수성과 외적인 행위까지 포함하는 전체적인 의미에서의 성화이다. 이러한 이해는 벌콥의 견해도 같다. 그는 말하기를,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다시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의 견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 있는 참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어서 우리가 주님을 즐겁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성화라고 한다.” 
칼빈은 성화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를 통하여 우리를 그에게 화해시키고, 값없이 죄를 용서해 주어 의롭게 보아주시는 경우, 동시에(at the same time) 그 은총에 그의 자비를 더하여주신다. 즉 하나님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육신을 날이 갈수록 죽어지게 하여 날마다 성화가 되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화란 생활의 참된 순결 속에서 주님께로 성별되어지는 것이며 이때 우리의 마음은 율법을 순종하도록 틀이 잡혀지게 된다. 이러한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좇고 또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것이 우리의 특별한 뜻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성화를 인간의 자의적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의 열매인 선행은 구원의 공적을 쌓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구원은 행함과 관계없이(마20:1-15) 믿음으로 받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칼빈은 선행을 통해서 영생의 기업, 즉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의 이해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의롭게 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성화되어 율법에 순종하여 선행을 실천하는 ’생활의 거룩함‘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러한 몸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을 요약한 것이기도 하며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 시무하면서 평신도의 신앙의 지도를 위하여 직접 사용하였던 기독교 교리 교본이기도 한 1537년 제네바 교회를 위하여 쓴 신앙안내 및 신앙고백(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을 번역한 일역(日譯)을 참조하여 다시 우리말로 편술한 책인 ‘칼빈의 기독교 신앙안내’에서도 그가 가진 성화관을 잘 알 수가 있다. 거기에 보면, 칭의에 근거한 성화를 언급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하여 우리의 보증이 되시고 자기의 의를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가 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성령에게 우리를 맡기시고 우리를 온전히 성결하게 하여 흠이 없게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령은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하신 은혜로써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시며 스스로 깨닫는 영이시며 심려하시는 영이시며 능력의 영이시며 주를 경외케 하는 영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충만한 데에서 은혜를 받게 되며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에 따라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것이다. 성령의 성화의 사역을 따라 성화되어 가지 않는 자는 성령을 거역하는 자인 것이다. 이는 성경이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뿐만 아니라 성화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화되지 아니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칼빈이 칭의에 근거한 성화의 이해를 가진 것은 하나님은 칭의의 은혜를 주실 때 성화의 은혜도 더불어 주신다며 이 둘의 불가분리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가? 믿음으로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하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관계로 결함되어 있다.”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여러 신학자들에 의하여서 강조되고 있다. 특히 필만(H. Pohlmann)은 말하기를, “성화가 없다면 칭의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헨드릭스 뻘콥(H. Berkhop)도 칭의와 성화의 유기적인 관계를 말하기를, “성화는 구원의 목적인 측면에서는 첫 번째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두 번째 위치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칼 바르트(Karl Barth)는 성화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인 것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로 역설하였다. 또한 칼빈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주해하면서 “전혀 성화에 관심도 없고 성화의 증거도 없는 자는 칭의 된 자가 아니다” 라고 하였으며, 그가 쓴 기독교강요 3권 17장 12항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선행(성화)으로 그 칭의를 증거한다. 성화는 칭의의 증거이다. 칭의는 법정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을 가지나, 동시에 효과적이다. 하나님의 선언은 그 자체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은혜의 동시를 말하지만, 이 둘의 불가분리성의 관계를 칭의는 성화에 선행하고 법적인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Heppe는 칼빈의 칭와와 성화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화는 칭의가 성화의 실제적이고 필수적인 시작이라는 점에서 칭의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가 소명과 구별되는 것처럼 칭의와도 구별된다. 왜냐하면 소명은 중생의 시작인 반면, 성화는 점진적인 완성에로 가는 중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칭의는 인간 밖에서 결과된 하나님의 행위이고, 이 칭의에 의해 하나님은 외적인 의를 사람들에게 배정한다. 반대로 성화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이 부름받은 사람들 속에서 간접적으로 생산되는 효과이다. 칭의는 동일한 방법으로 나눠주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단 한번의 행위로 하고 성화는 개인이 받은 성령의 다양한 방법에 따라서 다양하게 완성되어지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관련은 순전히 피동적이며, 성화는 인간과 협력한다." 
칼빈이 성화를 칭의에 근거하고, 칭의를 성화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면서 칭의와 성화를 서로 구분하고는 있지만,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는 않는다. 윤영래는 ‘칼빈의 성화론 연구’에서 말하기를, “성화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이 말은 성화가 단순히 우리의 금욕적 노력과 헌신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는 은혜이다. 칭의와 성화 모두가 신본적인 차원에 속한다.” 라고 하였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1장 2절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신성함은 하나님의 선택의 근원으로부터 비롯된다.” 
칼빈이 성화의 이해를 칭의에 근거하여 가진 것은 어거스틴을 비롯하여서 중세 교회가 가져온 성화의 개념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중세교회가 가져온 성화의 개념과는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중세교회가 성례전이라는 수단을 통로로 해서 거룩한 삶과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성화의 개념을 가졌으나, 칼빈은 성화를 칭의에 근거하여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이중은총(double grace)으로 보면서, 구원은 행함과 관계없이 믿음으로 받으나 성화의 열매인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늘나라로 인도되는 것으로 알고서 성화를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의 개념으로 보았다. 그가 이렇게 본 것은 신자는 비록 죄책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자이나, 악한 인간의 본성에서 항상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욕망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을 말하면서 완전한 성화는 죽음 이후의 일로 남겨두었다. 
칼빈의 성화에 대한 이해는 개혁교회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칼빈은 개혁교회를 세운 사람이며, 당시에 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 신학 사상의 영향 속에서 함께 개혁교회를 이루어 나감으로써 생긴 개혁교회와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오늘날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교회에서 칼빈주의를 말하지 않는 교회가 없으며, 따라서 칼빈주의적인 교회임을 내세우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화를 말할 때 예외 없이 칼빈이 말한 성화의 개념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종교개혁시대 이후의 성화에 대한 다양한 이해
종교개혁시대 이후에 성화의 개념은 다양한 이해 속에서 각각의 견해가 말해져왔다. 
1) 종교개혁시대를 거친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에서 보는 성화론. 
종교개혁시대를 거친 종교개혁 이후에 성화의 개념은 루터와 칼빈의 신학 사상을 따르는 개혁주의 교회에서 가장 확고하게 정립이 되었다. 그것은 제신조와 교리서에서 분명하게 가르쳐지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다. 개혁교회가 세 일치 신조로 삼고 있는 돌트신조, 벨직신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와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신앙의 표준문서로 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삼대 표준문서에서 성화를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에서 구원의 서정으로 성화 교리를 확고히 가르치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에서 성화 교리는 신자에게서 성령의 사역에 의한 성화적인 삶으로 적용되는데, 이는 성령충만과 관계가 있다. 즉 신자가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 성화적인 삶을 산 것은 성령충만 하여 있는 것이요, 성령충만은 신자를 성화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의 충만케 하시는 사역을 방해하지 말고 잘 순종해서 살므로 성령충만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때 성화의 과정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대항하는 전쟁을 통해 실현이 되며, 그 배경에는 중생한 이후에도 중생자의 전 인격의 각 부분마다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 곧 성품의 부패성이 자리하고 있다. 성령에 의하여 새로운 심령과 영의 창조함을 받은 중생한 신자들은 전 인격적인 성화를 이루어가기 위하여 부패한 죄의 본성과 거룩한 싸움을 실행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이것은 중생한 신자가 중생한 이후에도 남아 있는 부패한 성품에 의해 범하는 죄의 책임과 형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죄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죄책과 형벌의 사하여짐의 사건, 곧 칭의의 사건을 전제로 요청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에서 성화 교리는 점진적이며 발전적이다. 이는 칼빈이 칭의와 성화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발전적인 성화의 생활이라고 주장한 데 따른 것이다. 그것은 성화를 일평생 계속되는 회개의 과정으로서의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회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회개의 의미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이전 마음을(former mind)을 끊어버리고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회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회개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진정 돌이키는 것이다(the true turning of our life). 그 돌이킴이란 순수하고도 진지한 경외심에서 야기된다. 회개는 두 가지 요소로 성립된다. 곧, 육을 죽이는 것(mortification of our flesh)과 영이 소생되는 것(vivification of the spirit)이다. ” 
회개는 인간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이켜서 새로워지는 것이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새롭게 태어나는 신생 곧, 중생인데, 이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구원의 서정으로 동시적인 것으로 다루어진다. 
칼빈은 성화를 일평생 계속되는 회개의 과정으로 보았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그가 기독교강요 3권 3장 1항에서 칭의, 사죄의 은혜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성화됨으로써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伸張)할 수 있게 되는 중생의 은혜를 주신다고 말함으로써 성화와 중생을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강요 3권 3장 9항에서는 회개를 중생으로 본다. 그러므로 성화와 회개를 같은 개념으로 취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회개의 요소를 육의 죽임(mortification of our flesh)과 영의소생되는 것(vivification of the spirit)으로 말하면서 또한 성화의 요소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육의 욕망이 죽고 영이 소생되므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여(겔36:27-28)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의 구성요소와 일치한다. 그래서 중생(회개)의 열매는 반드시 성화의 열매로 나타난다. 
칼빈은 또한 성화의 궁극적인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결하여져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중생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강요 3권 3장 9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양자로 삼으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 이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평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어떤 때는 느린 걸음으로 선택된 자들 속에서 육의 부패를 씻어버리며 그들의 죄책을 깨끗이 없애며 그들을 성전으로 바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진정한 순결에 이르게 하시고 그들의 평생을 통하여 회개를 실천하며 이 싸움은 죽음이 와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바울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고후 4 : 4)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엡 4 : 24 참조) 해석하는 것……은 성장의 여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질수록 그분의 형상은 그의 안에서 더욱 빛난다. 신자들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경주를 하게 하시며, 평생을 두고 달리도록 하신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해주는 개혁교회의 제신조와 교리문답서는 칼빈의 성화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에서 보는 성화론은 일평생 계속되는 과정이라 할 것인데 이는 점진적이고 발전적이라는 견해를 갖는다. 그것은 우리 안에는 타고난 본성의 부패와 아직도 죄악의 불씨 찌꺼기가 남아 있어서 이것이 계속해서 죄의 오염에 우리를 빠지게 하여 믿음의 성장과 거룩한 성품을 방해하므로 육을 죽이고 영이 소생되는 회개의 과정, 성화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온전한 새사람의 모습을 닮아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회개나 성화가 이 세상에서는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예수의 날까지 성화의 사역을 계속하실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벌카우워는 성화를 이루어가기 위한 회개의 과정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과 기도와 죄의 고백으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후크마는 회개를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할 때의 최초의 회개와 그 후 계속되는 회개로 구분하면서 그 계속되는 회개를 성화로 본 것도 성화를 지속적인 진보로서의 성화, 곧 점진적이며 발전적인 성화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에 의하면, 죄인의 죄가 용서되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믿음이나, 회개나, 중생이나 성화 등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성립될 수 없다. 웨슬레(J. Wesley)가 지적한대로 선행도 칭의 전의 선행은 선행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요 명령하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에서 성화 교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 이 말은 성화 과정에서 인간의 행함이 ‘오직 믿음’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여서, 오직 십자가만이 칭의의 공로인 것같이 또한 성화의 근거라고 하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얻은 것 같이, 오직 십자가의 효력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어간다는 것으로, 십자가에서부터 죄를 이기는 능력, 거룩하게 사는 효력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에서 성화 교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성화는 칭의의 증거요, 지속적인 진보이다.”
2) 근, 현대 교회의 인물에서 보는 성화론
종교개혁과 그 시대의 개혁주의 교회를 거친 이 후의 근, 현대에 이르는 동안에는 그동안 받아들여온 성화론을 바탕으로 해서 다양한 이해에 의한 여러 주목한 만한 성화론이 말해져 왔다. 이에 대한 몇 사람의 성화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죤 오웬(John Owen)의 성화론 
죤 오웬(John Owen, 1616-1683)은 영국의 스테드 햄의 옥스퍼드 주에 있는 마을에서 청교도 교구 목사인 헨리 오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12세에 옥스퍼드 퀸즈 칼리지(Queen's College)에 입학하여 19세인 1635년에 M. A(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당시의 옥스퍼드는 알미니안주의와 고교회신학(High Church Theology)이 지배하고 있었다.어서 이러한 신학이 유행했던 옥스퍼드를 1637년에 떠났다. 
오웬은 1637년에 목사가 되었고, 1640년대에 올리버 크롬웰의 자문 목사가 되었다. 1652년에는 옥스포드 대학의 부총장이 되어 온 그는 이 학교를 청교도의 요람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1653년에 이곳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는 성직자 임명 과정을 살피는 감독관으로 임명받아 일했고, 1654년에는 영국 의회 의원으로 피선되어 정부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1656년에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임에 관하여’(Of the Mortification of Sin in Believers)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그가 대학에 거주하면서 공부하던 당시 12-15세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속 강해 설교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1660년 이후로 찰스 2세에 의한 비국교도 탄압으로 힘든 나날을 겪게 되자 그는 사역지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정부의 종교 정책에 대한 반대 입장을 펼치면서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1680년에 ‘로마카톨릭교회, 결코 안전한 안내자가 아니다’란 논문을 썼는데, 그는 이 글에서 찰스 2세가 성공회의 예배 의식보다는 로마카톨리교회의 미신적인 예배를 영국에 소개하려는 정부의 종교 정책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1681년에는 ‘분열 책임에 대한 비국교도의 변호’라는 논문에서 교회 분열의 책임이 청교도에게 있다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 교회 분열의 주범이 영국 교회 당국에 있음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1683년에 찰스 2세의 비국교도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오웬의 책들이 불살라졌다. 그는 말년에 심한 천식과 담석으로 고통스러운 날을 보냈으며,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지인들의 도움으로 ‘의로움’(‘Justification)을 쓸 수 있었고, 또 살아 생전에는 발표할 수 없었던 ’죄와 은혜의 지배‘(A Treatise of the Dominion of Sin and Grace)라는 논문이 그의 미망인에 의해 1688년에 발표되었다. 존 오웬은 1683년에 세상을 떠나 ’Bunhill Fields'에 묻혔다. 
오웬의 글과 가르침에 나타난 신학 사상에서 화두는 ‘성화’, ‘그리스도와의 연합’ , ‘중생’ 등이다. 그는 회중주의자였지만 또한 칼빈주의자였기 때문에 그의 신학이 칼빈과 유사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신학에서 두드러진 주제인 ‘성화’는 그의 두 논문인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임에 관하여(Of the Mortification of Sin in Believers)’와 ‘죄와 은혜의 지배’‘(A Treatise of the Dominion of Sin and Grace)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의 성화론은 그가 이해하고 있는 구원받은 신자인 인간과 죄에 대한 견해에 따른 것이다. 
오웬은 그리스도인을 다음의 네 가지의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첫째로, 구원받은 신자인 그리스도인을 당연한 명제인 인간으로 파악하고서, 인격의 3요소인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죄의 역사 또한 이러한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둘째는, 그리스도인을 구속받은 인간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 영원한 ‘구속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을 중생한 인간, 곧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로 바라보았다. 죄로 죽었던 영혼이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 거듭나 새로운 생명의 법칙과 순종의 습관이 그에게 주입되었으므로 옛사람의 죄와 새사람의 거듭난 생명 간의 전투가 평생에 걸치는 것으로 보았다. 넷째는, 그리스도인을 여전히 타락한 본성을 소유한 인간으로 보았다. 그래서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는 오웬의 성화론의 핵심 요소이다. 그는 이러한 신자 안에 내주하는 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 본성과 의도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다. 입법자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인 복음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의 죄의 법의 직접 대상이다.” 
따라서 죄의 존재와 능력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기혐오와 자기 불신 위에 기초되어서 그 죄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는다. 죄는 비록 신자를 지배할 수 없지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향력이 극대화할 때, 즉 신자가 지속적으로 불순종하고 은혜로부터 떠나 있을 때, 거듭난 신자라도 죄의 지배 상태
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 상대적인 죄의 지배가 극대화되면 죄의 절대적인 지배와 거의 동일한 삶의 결과와 열매를 가져온다. 
그러나 이 신자 안에서의 죄의 지배(상대적인 죄의 지배)는 불법한 것이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적절하게 참회하고 은혜의 수단을 잘 활용해서 죄를 죽이면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는 삶을 회복하게 되고, 그 은혜가 깊어지면 죄 죽임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 오웬이 성화론을 말하게 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간과 죄의 이해이다. 즉, 원리적으로 거듭난 신자는 죄 아래 있지 않고 신자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인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이 은혜가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를 죽임으로 성화가 가능케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웬에게서 성화의 개념은 신자로 하여금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만드는 죄
2), 곧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 죽임(Mortification of Sin in Belivers)이다. 그는 죄 죽임 교리를 바울의 두 가지 메시지를 통하여 정의한다. 먼저 골로새서 3장 5절인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에서 바울은 ‘죽이다’, ‘죽임으로 파괴하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네코우’(νεκ?ω)를 사용했다. 오웬은 그것을 육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모든 부패한 본성을 파괴하는 ‘죄 죽임’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죄 죽임이 죄의 완전한 파괴는 아니며, 죄의 세력과 힘이 약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또 다른 성경 구절은 로마서 8장 13절인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를 근거로 삼았다. 그는 여기에서 ‘싸나투데’(θανατουτε), 즉 ‘죽음에 이르게 함’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여서 “사람을 죽이거나 그는 혹은 어떤 다른 생명체가 모든 그의 힘, 세력, 그리고 그 자신의 원리를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더욱이 오웬은 바울이 그 단어를 현재 시제로 사용한 것은 현재에 항상 일어나야 하는 신자의 의무라는 것을 의도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오웬은 결론 내리기를, “우리의 육체에 내재하는 죄를 죽이는 것
은 이 세상에서의 신자들의 의무”라고 말함으로써 성화를 죄와 싸워나가며 죽이는 것으로 이해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죄를 죽이는 삶을 삶으로써 이루게 되는 성화의 주체를 성령께 돌렸다. 그는 오직 성령만이 죄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고 본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써 에스겔 36장 26절인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를 들어서 성령께서 육체의 모든 열매들을 파괴하는 은혜들을 주심으로 은혜가 죄를 죽인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성령께서는 이 죄 죽임의 성화의 사역을 은혜와 믿음으로 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신자들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신자의 순종의 행위라고 보았다. 그러기에 신자 안에 죄가 죽지 않고 창궐하는 이유는 신자가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고서 말씀 읽기와 기도, 그리고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죄 죽임의 성화를 가능케 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지는 것인데, 실제적인 은혜에 대한 순종의 결여는 어떠한 결과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2) 죤 웨슬레(John Wesley)의 성화론 
성화론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칼빈(John Calvin)과 가장 많이 비교 연구되어서 말해지고 있는 사람은 죤 웨슬레(John Wesley)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서는 좀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웨슬레는 성화론을 논(論)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현재 여기에서’(here and now) 얼마나 깊이 역사하는 것인가를 어느 종교개혁자 보다도 통찰하면서 중요시하였다. 그는 또한 믿는 자의 구원은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웨슬레의 성화론의 특징은 점진적인 발전의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조종남은 그의 이러한 성화론의 특징이 구원의 단계를 죄 문제와 연결시킨 것에서 갖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로, 원죄로 인한 죄책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선행적 은총,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무조건적인 공로로 해결된다. 그러므로 선행적 은총 아래 있는 실존적인 인간은 원죄의 부패성만을 지니고 있다. 이 부패성 때문에 이 실존적인 인간은 자범죄를 짓게 된다. 둘째로, 이 자범죄로 인한 죄책은 칭의에서 용서받아야 한다. 셋째로, 누적된 죄의 부패성은 성화의 과정에서 씻김을 받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웨슬레는 이 성화가 신생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부분적인 씻음) 성화의 과정에서 온전한 성화(온전히 씻김)로 그 성장이 계속되어(Continual Sanctification) 마침내 영화로 완결되었다고 보았다. 넷째로, 이 영화(glorification)의 사건에서는 죄로 인한 모든 흔적, 곧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제약성과 허약성(limitation and infirmities)에서도 해방을 받는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르면, 웨슬레는 구원의 순서를 인간의 완전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이와 같은 목적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구원관은 주로 성화에 대한 관점으로 결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성화는 점진적인 발전의 개념에서 세 단계의 과정으로 되어지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제1단계는 초기의 성화이다. 그리고 제2단계는 온전한 성화이다. 마지막 단계는 영화이다. 즉 웨슬레가 이해하고 있는 성화의 개념은 점진적인 초기의 성화, 온전한 성화, 영화로 구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화의 단계는 서로 다른 종류의 성화를 뜻하지 않고 정도의 차이를 의미한다. 마치 신앙 성장의 단계에 따라 자녀들(baby), 청년들(young man), 아비들(father)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 
① 초기의 성화(Initial Sanctification) 
웨슬레는 성화를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에서 되어지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번의 순간적인 체험의 성화가 있으며 그 첫 번째가 초기의 성화에서 있다고 보았다. 그는 우선 1단계로 초기의 성화(Initial Sanctification)을 말한다. 초기의 성화는 의인과 동시에 일어나는 성화이다. 이것은 불신자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얻는 순간적인 체험으로, 믿는 자의 신앙이 출생 후의 성장과 같이 중생한 후에도 성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중생의 시점을 성화의 단계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이다. 중생은 생명의 탄생이라는 점에서는 하나의 완전하고 독립된 사건이지만, 성결의 관점에서는 시작이다. 웨슬레는 중생은 성화의 시작이요 문이라고 했다. 중생은 성화의 첫 단계요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초기의 성화라고 한다. 웨슬레는 중생은 마치 자연인의 출생과 비슷하다고 비유하였다. 
“모태에 있는 태아는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며, 그의 다른 감각 기능도 불완전하다. 그는 자연적 이해와 지식이 전혀 없다. 태아에 대해서는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가 태어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가 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너무나 비슷하다. 중생하기 전에는 영적 의미에서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그의 다른 영적 감각들도 잠자고 있다.” 
"그는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산 인간이지만 죽은 그리스도인이다. “ 
중생하기 전의 사람에게서는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 일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으나, 중생한 후에는 전혀 달라진다. 중생하면 모든 것이 변화되는데,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땅에 살면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영광을 볼 수 있고,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천사들의 찬양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영적인 변화가 바로 중생이며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고 본다. 
웨슬레는 중생을 각 개인의 영적인 새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래서 성결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단계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생한 자 안에도 아직 악한 성품인 ‘육’이 남아 있음을 웨슬레는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순간 중생함을 얻어 깨끗하게 되고, 성화된다 할질라도, 우리가 완전히 새로워지고,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 것이 아니요, 비록 극복은 되었다 하나 우리 속에는 악한 성품의 씨인 ‘육’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성령을 거스려 싸운다.” 
웨슬레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몰터(Molther)를 중심으로 하는 모라비안교도가 런던에 와서 신비적인 학설을 소개하며 사람은 중생하는 순간에 완전히 성화되어 더 이상 성장의 여지가 없는 양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선악에서나 믿음에서나 또는 성결에 있어서 모두 단계가 있다고 보았고, 인간은 거듭난 후에도 아직 내적인 죄가 남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남아 있는 죄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화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래야 남아 있는 죄성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②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웨슬레는 중생한 자는 초기의 성화에 의해서 더욱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성화의 2단계인 점진적인 성화(Gradual or Progressive Sanctification)에 의한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를 말한다. 웨슬레의 온전한 성화의 개념에서 갖는 점진적인 성장(Gradual Advance)은 순간적인 요소(Instantaneous Element)와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순간에 보다 고차적으로 끌어 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웨슬레의 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부터 거기서 은혜 안에서 성장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날마다 나아가는 점진적인 성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죄가 죽음 전에 그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순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그 변화에는 죄가 존재하는 최후의 순간과 존재하지 않는 최초의 순간이 있어야만 한다. …분명히 말하자면 우리는 점진적인 변화를 진지하게 강조해야 한다. …만약에 죽음 전에 그런 축복받은 변화가 있다면 우리는 모든 신자들에게 그것을 기대하도록 격려해야만 하지 않겠는가?…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자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화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순간적인 변화도 강력하게 주장해야만 한다.” 
웨슬레가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에서 순간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은 순간적인 성화의 기회가 모두 두 번 있는데 첫 번째는 중생을 경험하는 초기의 성화시에 있게 되며, 그 두 번째는 중생한 이후의 신자가 다시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는 것으로,
5) 믿음으로 받는 신앙의 체험이 순간적인 체험으로 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의 단계의 체험을 웨슬레는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 두 번째 변화(second change), 온전한 구원(full salvation),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 등의 여러 가지 말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본질을 완전한 사랑(perfect love), 혹은 순수한 사랑(pure love) 이라고 불렀다. 
웨슬레에 의하면 온전한 성화의 과정에서 겪는 순간적인 체험을 통하여 신자는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 완전한 성화의 체험이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성결의 은혜를 받는 사람도 성도로써 승리할 때까지 계속 전진하여야 한다. 그래서 계속하여 승리롭게 성화하려면 이 온전한 성화(성결)의 체험이 본질적으로 요청된다고 하였다. 
웨슬레가 이처럼 성화의 이해를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에 의한 단계로 보면서 여기에 두 번의 순간적인 변화를 체험하는 성화가 있다고 말한 것은 주관적인 경험이 되는 그의 개인적 신앙 체험을 성화 교리로 연결시킨데 따른 것이다. 
그는 영국에서 청교도인 바돌로뮤 웨슬레(Bartholomew Wesley)의 증손자로서 사무엘 웨슬레(Samuel Wesley)와 스잔나의 열 다섯 번째 아들로 1703년 6월 17일 엡위드(Epworth)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국교회파가 지배적인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지대학에 1720년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교내의 도덕상태에 크게 불만을 느꼈다. 그 후 1725년 22세가 되면서 번민하다가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같은 해 영국교회의 집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웨슬레는 몇 권의 서적을 통해서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 중에 첫 번째는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의 '거룩한 삶의 방법과 연습‘(Rules and Exercices of Holy Living and Holy Dying)이라는 책이었다. 그는 이책을 통해서 의도의 순수성에 관한 것에 감명을 받았는데, 이것은 후일의 웨슬레 신학에서 기독교인의 완전론에 대한 핵심이 되었고, 그가 1783년에 올더스케이트 사건이 있은 후에도 변함이 없이 오히려 더욱 확고해진 그의 신념이 되었다. 두 번째의 책은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Kempis)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The Imitation of Christ)였고, 또 다른 하나의 책은 윌리암 로우(William Low)의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경건과 거룩한 생활에의 엄숙한 부름‘(Serious Call to Devout and Holy Life)으로 이후부터 그는 반 쪽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헌신을 다짐한다. 정리하면, 웨슬레는 제레미 테일러를 통해서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함으로써 선해질 수 있음을 배웠고, 토마스 아켐피스를 통하여 복종은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어야 함을 배웠으며, 윌리암 로우를 통해서는 자기 부정만이 하나님의 율법의 절대적 완성의 길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이 책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좀 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성취하는 방법을 가르침 받은 것이 된 것이다. 
웨슬레는 이러한 영향 속에서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후에 172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그 뒤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대학 강사로 있으면서 동생 찰스(Charles)가 조직한 신성 구락부(Holy Club)을 지도하고 교도소와 빈민굴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등의 활동을 하닥라 1735년 북미 조지아주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때 시몬즈호 위에서 모라비안 형제들을 가까이 대면하고는 그들의 경건이난 선한 행위 뿐 아니라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동요없는 그들의 신앙에 대한 확신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선교를 마치고 1738년 초에 런던으로 돌아와서는 모라비안 선교사인 페터 뵐러(Peter Bohler, 1712-1775)를 만나 그에게서 ‘오직 믿음으로만’ 확신에 찬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실제적인 조직 능력에 관하여 영향을 받았다. 그런 그는 모라비안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통해서 독일의 경건주의를 크게 영향을 받았다. 
페터 뵐러를 통해서 이신칭의의 원리를 알게 된 웨슬레는 그럼에도 단지 그 이해에 있는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서 그 진리를 경험적으로 소유케 됨으로써 그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참된 확신과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통을 누리게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서 그에게 점진적인 발전에 의한, 그리고 순간적인 변화의 체험에 의한 성화의 온전한 성화 사상을 갖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1738년 5월 24일에 겪은 그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의 체험이다. 그때 그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었으며, 어떤 이의 입을 통하여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는 중에 체험한 것인데 그때의 일을 다음의 글에서 볼 수 있다. 
“그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집으로 갔다. 거기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 전 쯤에 내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 속에서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사건에 대해서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나의 마음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으며, 그가 나의 모든 죄를 도말하셨음을, 심지어 나의 죄까지도 도말하시고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음을 확신케 되었다.” 
이러한 마음이 뜨거워지는 극적인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체험은 웨슬레가 그의 율법주의적이고 그의 도적주의적인 고행주의 방식의 실패를 경험한 후에 주어졌다. 도덕적 삶을 위한 신비주의적인 추구들이 웨슬레의 영혼 속에 가져다 준 허탈감,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대한 하나의 돌파구로서 시도했었던 죠지아에서의 선교 사역의 실패들을 경험한 후에 겪은 것으로서 마치 어거스틴계의 수도원에서 엄격한 금욕주의적 고행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려 하다가 그러한 불가능한 시도 가운데서 좌절해 있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그러한 방식의 실패를 경험한 후에 복음의 빛이 비춰졌던 것과 유사한 구조에 의해서 복음의 신앙에 이른 것으로 그의 생애 전반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체험이 되었다. 그리고 웨슬레가 올더스게이트에서 순간적인 변화를 체험한 것은 그의 생애 전반에 전환점을 가져다 줌으로 해서 그의 활동에서 영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고 세계의 역사를 변화 시켜 놓은 사건으로 평가되면서 그의 성화론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이것이 웨슬레의 신학 사상에서 가장 주요한 교리가 되어 점진적인 발전에 의한 성화를 말하면서 두 번에 걸친 순간적인 성화(변화)가 있는 것과 또한 순간적인 변화의 체험에 의한 온전한 성화
를 말하게 된 것이다. 
③ 영화(Glorification)의 성화 
웨슬레는 초기의 성화, 온전한 성화에 이어서 영화의 성화를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온전한 최종적 완전함의 단계에 이른 것인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였다. 
(3) 죤 머레이(John Murray)의 성화론 
성화 개념은 칭의의 범주에 속한 것의 이해에서 구원받은 자의 생활인 성화적인 삶으로 그 이해가 확대되어 오면서 점진적인 발전성을 띠어왔다. 그러한 성화가 웨슬레에 와서는 초기의 성화, 점진적인 성화, 순간적인 성화, 영화의 4단계로 구분되면서 완전성화론을 주장하였다. 웨슬레파나 오순절파는 여기에 있어서 제2의 특별한 성령의 사역이 있어야 한다고 보며 이를 기대한다. 성령의 제2의 사역을 통한 어떠한 영적 경험을 통하여 신자의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웨슬레의 성화 이해에 대한 반응으로 개혁주의 안에서 또 다른 성화론이 나왔다. 그것이 죤 머레이(John Murray)
7)의 ‘결정적 성화 교리’이다.
결정적 성화론에 말하는 ‘결정적 성화’란 그리스도의 삶의 시초에 일어나는 어떤 결정적인 행위, 하나님에 의해 유효하게 부름 받은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의 특징을 이루는 어떤 결정적인 역사를 이르는 것으로, 그것이 단번에 확정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복되지 않는 성화라는 것이다. 가령 베드로전서 4장 1- 2절인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에는 결정적 성화가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육체의 고난, 혹은 육체의 죽음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에게 죄를 그치게 하는, 육체적 삶의 방식에 대한 죽음, 죄에 대한 죽음의 사건이 발생되도록 단번에 결정적으로 발생된 것으로 설명되고 있음은 바로 결정적 성화의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을 좇지 않는 ‘육체의 고난’,. ‘육체의 죽음’, ‘육체의 몸을 벗는 것’ 등의 사건들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는데, 그것이 단번에 발생되었다고 본다. 
죤 머레이는 로마서 6장의 세례를 통해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는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을 가리키는 결정적 성화의 역사가 이미 발생했음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중생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을 경험했고, 따라서 그에게 죄의 통치와 그 세력과의 결정적인 단절이 발생되었음을 가리킨다. 즉 결정적 성화의 역사로 이제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죄를 지속적으로 범하는 죄의 지배아래의 존재로서의 사람을 살 수 없음을 말해준다. 
이 결정적 성화는 또한 점진적 성화를 가능케 해 주는 기초(동인)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곧 점진적 성화의 작업을 유효하게 성취토록 해 주는 근거가 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결정적 성화의 사건이 근거가 되어서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기에 죄의 종으로 살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기에 의의 종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죄와 단절되며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성화의 작업을 성취해 갈 수 있게 되었다. 
죤 머레이의 결정적성화론은 웨슬레의 완전성화론과 차이가 있다. 웨슬레의 완전성화론은 초기의 성화를 말하는 중생에서 시작하여 영화의 단계에서 완전성화의 사건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단계의 과정에서 ‘ 온전한 사랑’을 경험케 되는, 중생과 구별된 완전성화의 사건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신자는 완전성화의 사건을 통해서만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화에 따르면 온전한 사랑을 경험케 되는 완전성화의 사건의 차이에 따라서 신자들 간에 정도의 차이가 있게 되어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소유하지 못한 저급한 믿음의 신자와 완전성화의 사건을 통해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사는 고급의 믿음을 지닌 신자가 있게 되는 것이 된다. 
반면에 죤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론은 웨슬레의 단계적인 성화를 하나로 묶어서 완전주의적인 오해를 극복한다. 모든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의 결정적 성화에 의해서 죄의 세력과의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단절이 발생하여 영적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죤 머레이의 이러한 결정적 성화론은 비록 점진적인 성화를 끌어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단번에 되어지는 결정적 성화가 이후의 점진적 성화의 근거가 되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만, 결정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를 하나로 보는 견해를 갖는다. 그에 의하면, 성화 되었기에, 성화가 튀어 나올 수밖에 없다. 
(4) 칼 바르트(Karl Barth)의 성화론 
칼 바르트(Karl Barth)는 성화(sanctification) 라는 개념이 중생(regeneration), 갱신(renewal), 전환(conversion), 회개(penitence), 제자직(deceipleship)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이 성화라는 말이 다른 개념과 대립하여 거룩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을 취급하며, 하나님이 행동 주체임을 잘 드러내주기 때문에 성화라는 개념을 끝까지 유지한다. 그는 성화론을 의인론과의 관계에서 규명해 나가는데 그가 말하는 견해의 특징은,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은 의인이며, 하나님의 명령의 실현은 인간의 성화라고 본 것이다. 의인과 성화는 그리스도 사건에서 즉각적이고도 동시적으로 성취된 단일한 화해행위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것이므로 자기 의인이나 자기 성화를 말할 수 없다. 의인과 성화에서 얻어지는 의와 거룩은 인간 자신에게 속한,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부에 의한, 세상을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로 인간의 의인과 성화를 모두 동시에 완성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있어서 의인과 성화는 상이한 신적행위들이 아니라 단일한 신적 행위의 상이한 요소들(Momenten)이다. 그에게 있어서 의인과 성화의 지식은 하나님의 화해 행위의 한 전체성의 지식이며, 한 전체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성의 지식이며, 하나님의 한 은혜의 전체성의 지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의인과 성화를 ‘구원의 질서'(Ordo Salutis)의 단계들로 보는 17세기 개신교의 정통신학을 배격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행위의 동시성은 하나의 시간적 순서 속에 풀어 넣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구원의 질서를 상이한 신적행위들의 순서로 이해하지 않고 한 사건의 동시성 안에서 인간에게 경험되는 구원 사건의 상이한 요소들의 질서로 이해한다. 이렇게 구원의 질서를 동시적으로 성취된 구원 행위의 요소들로 봄으로써, 객관적 구원 조성(그리스도의 화해 사건)과 주관적 구원 획득(구속론)의 이원론은 극복되고 구원의 질서, 즉 의인과 성화의 동시성이 인식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의인과 성화는 구원의 한 사건의 다른 국면이다. 이것들의 차이점은 의인이 위에서 아래로의 운동이라면, 성화는 아래서 위로의 운동이다. 하나님의 죄인 사랑의 역사에 있어서 의인은 영원한 측면이고, 후자는 시간적 측면이다. 이는 인간이 의인이면서 죄인인 까닭이다. 시간 안에 종말 이전 안에 사는 인간들은 은혜와 죄의 투쟁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의인과 성화는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인과 성화의 일치는 완전한 구원이 성취될 때, 즉 종말의 때에나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의인은 성화가 아니며, 이와 똑같이 성화는 의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초기 루터 같은 사람은 로마카톨릭의 공적주의 사상과 투쟁하다 보니 의인에 더 중점을 두고서 의인 속에 성화를 해소시켰다. 그러나 그런 루터도 후기에는 이중적 의인, 이중적 성화를 말함으로써 이중적 은혜의 도식을 수립하였다. 바르트는 의인이 성화와의 관계가 무시된다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념이 빠지게 되며 결국 ‘싸구려 은혜’가 되며, 게으른 ‘정적주의’가 되며, 이와 똑같이 성화가 의인과의 관계가 무시된다면 하나님 없이 소외 속에 일하는 인간의 이념이 되며 환상적인 행동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의인과 성화의 상호 종속적인 관계를 칼케돈 신조의 기독론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만일 우리가 칼케돈 신조의 기독론의 신성과 인성을 받아들인다면 의인과 성화는 구분됨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뉘거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바르트에 의하면 의인과 성화의 관계 안에의 질서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질서는 없다. 하나님의 유일한 구속 행위는 시간적 순서로는 쪼개지지 않고 또한 심리적으로도 순서가 있을 수 없으며, 그것들은 동시에 함께 발생하는 것이다. 그는 다만 내용에서 의인과 성화의 발생의 구조에서 보면 의인이 성화의 우위에 있음이 틀림없으며, 그러나 의도상으로 보면(목적으로 보면) 성화가 의인의 상위 질서이고 앞선다. 그래서 의인이 기초로서는 첫째요, 전제로서는 둘째며, 성화가 목적으로서는 첫째요, 결과로서는 둘째이기 때문에 양쪽이 다 우위이며 또한 다 종속적이기도 하다. 또 때로는 서로 공속적이 되기도 한다. 
바르트는 의인과 성화의 이러한 관계 이해에 의해서 성화를 사적(私的)인 차원에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관계와 세력에 단절이 생기는 것으로 말한다. 그는 제자직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에게 응답해 나갈 때 이런 단절이 생긴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공적인 책임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를 통하여 요구되는 명령인 복종을 수행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 관계의 모두에서 일어나는 전인적인 전환이다. 여기에는 십자가의 의미와 그 존귀함을 말하는 중에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다. 이것은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데서 오는 핍박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차원에서만 활동한다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거나 받아도 대수로운 것이 아닐 것인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고자 활동할 때에 세상의 세력들은 필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를 가해 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에게 미움이 되는 일들을 한다는 증거이며, 그것은 곧 그들이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공적인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성화를 의인과 성화의 관계성 뿐 아니라 소명의 차원을 매우 중요시한다. 의인은 소명 앞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의인 받은 자는 세상 나라들을 흔들고 부수면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나타내야 하는 자로서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갖는다.
Ⅲ. 한국 교회의 성화론
한국 교회는 위에 열거한 성화론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통일성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 한국 교회는 각 교파에 의한 교단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각각의 성화론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장로교회는 칼빈주의 신학 사상의 영향 속에 있기 때문에 칼빈의 성화론을 따르면서 또한 마틴 루터, 죤 오웬, 루이스 뻘콥, 죤 머레이 등의 성화론의 견해가 담임하고 있는 목사의 신학 사상의 영향에 의해서 개교회별로 수용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감리교회나 성결교회는 웨슬레의 신학 사상의 영향 속에 있기 때문에 웨슬레의 성화론을 따른다. 또한 기독교장로회에서는 칼 바르트의 성화론을 정치적, 사회적 관점에서 다루어 그리스도인의 책임있는 역량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성화론의 견해를 갖든지 간에 동일하게 일치하는 것이 있다. 첫째는, 성화는 즉각적이면서 또한 점진적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성화는 성화적인 삶, 곧 거룩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성도는 성화된 자로서 성화적인 삶을 사는 것을 통해서 구원을 온전히 이룬다는 것이다. 즉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고 보았다. 
이것에 따라서 한국 교회는 성화의 이해를 구원의 열매로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칭의의 은혜만 주시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화의 은혜도 더불어 주신다고 하면서 의롭다 함을 진정 받은 자는 동시에 성화된다고 본다. 
그래서 신자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해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면 이를 성화적인 삶을 살지 못한 것으로 규정한다. 즉, 구원을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여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회개를 하여야만 하며, 죄 용서를 받고 다시 힘을 얻어 성화적인 삶을 살아야만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의 육을 죽이시고 영을 소생시키므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게 되고 순결한 삶을 살게 되는 성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화론의 견해는 교회사 속에서 가져온 교회가 지녀온 성화에 대한 신학 사상이기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성경에서 성화를 어떻게 말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신학에 의한 성화론을 가지고 성경의 성화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성화론을 가지고 신학에서 말해오고 있는 성화론을 검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론이 성경적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경우에서는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론을 말하기 위해서 성경의 구절을 성화 구절로 삼고 사용하는 식이 되어 왔다.
Ⅵ. 성경의 관점에서 본 성화론
위에서 우리는 교회사적인 관점에서 성화론을 고찰했는데, 여기서는 성경의 관점에서 성화의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성화의 어의
성화란 용어는 사실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구약 성경이든 신약 성경이든 성경 어느 곳에서도 성화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화란 용어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일반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는 것은 교회사에서 등장하는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 등의 신학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여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용하는 대부분의 글과 사용하고 있는 용어 중에서 많은 부분은 칼빈의 글이며, 특히 기독교강요이다. 그러나 그 또한 다른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의 신학이 정립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왔다. 칼빈은 일찍이 1536년판 기독교강요에서 인간 영혼을 다루는 자리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미스티우스, 키케로를 인용할 뿐만 아니라 크리소스톰, 오리겐, 그리고 어거스틴을 인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칼빈은 헬라 교부들 중에서 크리소스톰을 좋아하였다. 그 이유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고대 교부들 중에서 모든 교부들보다 월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어거스틴이었다. 칼빈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거스틴을 인용하였고, 그의 표현을 채택하였다. 교리 면에서 볼 때 칼빈은 어거스틴의 자유의지와 성례관에서 영향을 받았고, 은혜와 예정을 다루는 각 장에서는 전적으로 어거스틴의 논증을 자신의 목적에 사용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어거스틴의 성화관에 대한 인식의 영향 속에서 칼빈의 성화론이 형성되었을 것이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오늘날 칼빈의 신학 사상과 그 교리 체계를 따르는 칼빈주의자들인 개혁주의자들 또한 칼빈을 비롯하여서 그가 영향을 받아왔던 자들이 가졌던 성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신학 사상과 교리 체계에서 말하는 성화에 대한 이해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것이 성경의 관점에서 말해질 수 있느냐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성화가 말해지고 있는지가 다루어져야 한다. 그런 까닭에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성화를 말하는 어의와 함께 성화를 말하는 구절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보면서 그 구절들을 올바르게 주석함으로써 그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통하여 성화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성화를 말하는 구절로 인용하고 있는 성경은 주로 신약이다. 그러기에 주로 신약 성경을 근거로 해서 성화론의 성경적 관점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도 성화를 말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으므로 구약 성경에서의 성화를 다룬 후에 신약 성경에서의 성화를 다루도록 하겠다. 
1) 구약 성경에서의 성화 
우리가 쓰고 있는 용어인 성화(聖化, sanctification)는 성경에서는 주로 거룩과 관련된 의미를 지닌 단어인 ‘거룩하게 하다’(to sanctify)라는 말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인데,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는 ‘카다쉬’( `dq qadash)이며, 이 용어의 명사형은 ‘코데쉬’(vd<q, qodesh)이고, 형용사형은 ‘카도쉬’(v/dq;,,,, qadosh) 이다. 성화와 관련된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을 중심하여 생각할 때, 성화는 거룩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유래되는 것이며, M. Noth가 지적한 바대로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에 관련된 선언이며, 하나님 백성의 특성에 관련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하게 하다’의 카다쉬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이것이 ‘자르다’(to cut)의 의미인 ‘카드’(qad)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보다 더 높은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카다쉬의 본래의 의미는 “다르다, 구별하다”는 뜻으로 히브리어의 뜻은 칼로 베면 둘로 갈라지듯이 무엇을 벤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하다’의 카다쉬는 구별, 성별을 뜻하는데, 이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구별되는 것을 말함으로써 카다쉬는 “떼어 놓다, 자르다, 분리하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거룩하게 하다’는 카다쉬는 분리의 개념이 원래적 의미이다. 따라서 성화란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거룩의 원래적 의미는 ‘구별’(aloofness), ‘분리’(separateness), '위엄‘(majesty)을 나타낸다. 성화, 곧 거룩이라는 의미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이것이 근본적 개념임에 틀림없으며, 이 거룩이 갖는 근본적 개념의 의미가 분리, 구별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그들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을 애귭과 차별 있게 구별하신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너는 내 백성이라.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이 낳은 백성과의 관계성을 ‘거룩’으로 규정하신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레11:44), “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11:45).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화의 근본 개념이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론적 의미에서의 ‘거룩’인 것은 Leonardo Boff의 주장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과 인간에게 함께 사용된 거룩이라는 이 단어는 분리시킴과 동시에 연합”시키는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성화로 말해지고 있는 구약 성경에서의 거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 분리시키고 자신과 연합시켜 세상으로부터 구별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성화라고 말하고 있는 단어는 LXX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명사인 άγιασμος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같은 뿌리인 ά́γιος, ά́γιαζω, ά́γιωσυνη에서 볼 수 있듯이 거룩의 용법으로, 구약에서는 Collin Brown이 주장하듯이 그 기본적 의미는 분리가 아니라 어떤 반응의 양태들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만남이라는 적극적인 사상에 관련되어 있는데, 곧 야웨의 거룩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구약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데, 곧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시간, 장소, 예배, 성물들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너희가 거룩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내가 거룩하니”에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느 이방인과 같이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거룩하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것은 그들이 속한 레위 지파가 거룩하기 때문이며, 레위 지파가 거룩한 것은 그들이 속한 제사장이 거룩하기 때문이며, 제사장이 거룩한 것은 그들이 속한 대제사장이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며, 대제사장이 거룩한 것은 그를 기름부어 거룩한 자 삼으신 하나님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사람이든지 또는 물건이든지 모두가 다 ‘성별’의 개념을 가진다. 
2) 신약 성경에서의 성화 
구약 성경에서의 성화 개념이 갖는 사상은 신약 성경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을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롬1:7)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란 “하나님의 소유,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란 용어는 거룩함의 개념 속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구별임을 말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 성경이 거룩이라는 말을 표현하기 위하여 두 개의 어휘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는 그 모두에서도 확인이 된다. 하나는 ‘하기아스모스’ (άγιασμος)인데, 이 말은 형용사인 ‘하기오스’(?γι??)란 말과 함께 쓰이는 말로서 ‘(가장)거룩한 (사람, 사물)’을 뜻한다. 바울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에 사용된 단어가 ‘하기오스’(?γι??) 이다. 여기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여서 ‘거룩’의 개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인 ‘하기아조’(?γιαξω)가 있다. 이 단어는 동사형으로 ‘거룩하게 하다’ 이다. 이 말은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분리되고 떨어진 상태를 지시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번역한 성경에서 ‘거룩’과 함께 ‘성화’로 번역을 혼용하여 왔다. ‘하기아스모스’(?γιασμ??)를 ASV, RSV에서는 ’거룩‘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KJV 에서는 '거룩‘과 ’성화‘로 혼용하여서 번역하였다. 그러면서 ‘하기아스모스’(?γιασμ??)는 상태로서의 성화(?γιοτη?)나 본질로서의 성화(?γιοσυνη)보다는 성화시킨다(sanctifying)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고서 ‘하기아스모스’(?γιασμ??)가 도덕적 의미로 사용될 경우에는 과정을 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과정의 결과를 뜻하기도 하여 결과로서의 거룩, 성화, 성별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는 번역에서 성화시킨다는 개념을 갖는 것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신약 성경에서의 성화가 갖는 본래의 근본적 개념은 그리스도에 의한 완성된 ‘거룩’으로 이것에 의해서 성령에 의하여 날마다 성취의 개념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하신 성령님의 거룩한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가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영원히 효력 있는 것은 날마다 죄가 나타나지는 우리를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하는데서 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 이다. 그런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산 자로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룬다. 하나님께 죄인 되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의 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 거룩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는 공식이 구약의 경우에서와 같이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성립된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화이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거룩됨(함)으로써의 관계론적 결과이지 과정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2. 성화의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의 주석적 의미에서의 고찰
성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5장 48절, 로마서 6장 1-14절, 고린도후서 7장 1절, 에베소서 4장 22-23절, 빌립보서 2장 12-13절, 히브리서 12장 14절, 베드로전서 1:2; 12; 15; 2:2; 21, 베드로후서 1장 1-11; 3:11; 14 등이다. 이 구절들은 성화를 말하는 구절로 말해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마태복음 5장 48절 : 하나님의 온전에 이르는 것으로서의 성화 
4복음서에는 성화의 용어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성화론자들은 4복음서에서 많은 구절을 성화의 주제로 삼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또한 자신들도 온전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는 생각에서 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삶이어야 하는데, 성령은 신자의 전체 삶에 관련되어 있으면서 죄 없는 완전의 삶으로 성결케 해 나가신다는 것으로 본다. 
그에 대한 실증적인 성경 구절로 마태복음 5장 48절인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Esesqe ou\n uJmei'" tevleioi wJ" oJ path;r uJmw'n oJ oujravnio" tevleiov" ejstin.)를 들어서 성화를 주장한다. 그것은 이 말씀에서 신자의 목표,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목적인 온전함(τελειο?)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온전함은 미래에 성취될 목표로서 하나님 백성 앞에 두어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형용은 그가 쓴 저서 ‘산상보훈 40강’에서 “전(全) 산상보훈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산상보훈처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산상보훈은 타고난 성품에 의존되지 않는다. 산상보훈에서 언급하는 것은 자연적인 성질이 아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은혜로 성취되어지는 기독교인의 특징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기독교인들은 노력을 통해 산상보훈의 특징들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거룩의 완성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 그것들은 성취되어질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이 겉으로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인격 전체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헌집에 페인트만 칠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의 사상, 전말, 행동이 달라지고, 세계관, 인생관, 사회관, 결혼관이 달라진다” 라고 말함으로써 산상보훈의 실천을 성화적 개념을 갖고서 말하였다. 
과연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성화의 개념 속에서 말씀되어진 것인가? 본 구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산상보훈의 일부인 마태복음 5장 43-48절의 한 구절이다. 산상보훈은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7장에 이르기까지 예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주제는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이다. 산상보훈에서 말씀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유대인들에게서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의로도 못 들어간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다. 즉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마5:20).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의로는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성취시키지 못한다. 모세의 율법을 온전한 성취는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으로 율법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되어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는…라고 말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마5:28, 32, 34, 39, 44) 라는 형식을 취하신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율법의 진정한 가르침을 받으며 정신을 보게 되지만 온전히 따르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며, 이런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들의 의를 만들어 나간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지라도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그러니 내게서 물러가라!.”(마7:22-23) 라고 배척을 받게 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결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로는 이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충족시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를 구하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산상보훈은 “나를 인하여 (모욕당하고 핍박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받을 때) 너희는 참으로 행복하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마5:11-12)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해주시고 있는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예수님이시며, 이 의가 미친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의 속에 있는 자이다. 이 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 아들이 택하신 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눅10:28).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저희’에게 제한시키신다.
이렇게 마태복음 5장 48절인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성화를 말하지 않는다. 성화를 말하는 그 어떤 의미도, 요구도 여기에는 들어있지 않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인 ‘율법에 의한 의’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한 가지라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전체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되므로 율법에서 가장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일지라도 이를 어기거나 이를 어기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마5:19).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얻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라고 말했다. 그러한데 그보다 더 나은 의를 사람이 이를 수가 있겠는가? 그럴 수가 없다. 사람은 날마다 자기 죄를 깨달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점차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져간다는 성화란 기대할 수가 없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들도 노력하면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질 수 있다는 성화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너희가 세리나 이방인과 차별되는 것이 무엇이냐를 알게 해 주신다.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전함’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로서 마땅히 추구하여야 할 목표를 뜻할 뿐, 이생에서 우리가 그 목표를 온전하게 성취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듯이(마6:12),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용서를 빌 줄 알아야 한다(마6:12). 
2) 로마서 6장 1-14절 : 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서의 성화 
(*본 글에서 글의 성격상 헬라어 원문을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여 사용하였는데 글자가 깨져 나옴으로 알아 볼 수 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하오니, 깨져 알아볼 수 없는 글은 그냥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 
성화가 말해지고 있는 것으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인 로마서 6장 1-14절에서 이것의 주석적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그 진의(眞意)를 보도록 한다.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신성종은 그의 저서 로마서 강해에서 로마서 6장 1-14절을 성화를 말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성화를 레위기 20장 6절에서 찾는데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으니라”를 들어서, 성화란 “나(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요 ‘구별’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왜 성화되어야 하느냐를 레위기 11장 45절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처럼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서 찾았다. 그는 또한 성화의 방법의 근거를 세 가지로 말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객관적 근거가 된다고 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방법론적 근거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화시켜 주며, 내적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화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가 보는 로마서 6장은 성화장(聖化章)이 되며, 그 전반부인 1-14절은 성화의 기초를 설명하는 것이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성도가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2, 3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역사적으로 일어났으며 실제적으로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났다고 하였다. 둘째, 세례는 영적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즉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4, 5절). 셋째, 성도(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디(4절). 넷째,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즉, 접붙임을 받은 자란 뜻이므로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다(5절). 다섯째, 옛사람(죄의 몸)은 이미 죽었으므로 다시는 죄의 종 노릇을 할 수 없다(6절). 여섯째, 성도는 죄에서 자유한 자(7, 8, 22절)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죄가 성도 위에 주관할 수 없고(9절), 왕 노릇 할 수 없기 때문이다(12절). 여덟째, 성도는 이미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친 자이기 때문이다(13절). 아홉째, 성도는 은혜 아래 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의 글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이기 때문에 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의의 병기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한 자로서 살아야 한다며, 로마서 6장의 전반부인 1-14절은 성화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후반부인 15-23절은 성화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본다. 
김영진은 그의 논문 ‘로마서 6장 1-14절에 나타난 성화의 신학적 기초와 성화의 방법’(The Theological Basis and Method of Sanctification in Romans 6:1-14)에서 그에 대한 주석을 (1) 반대자에 대한 반박 및 근거 제시(1-2절), (2)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하심에 의한 연합(3-5절), (3)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도에게 가져온 결과로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된 것과 의롭다 함을 얻음 및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갖는 기독론적 의미의 설명(6-9절), (4)성도의 구원론적 정체성의 확신(11절), (5)구체적인 성화의 권면, 곧 그리스도인의 의의 병기로서의 성화의 삶의 규정(12-13절)이란 구조분석에 의하여서 하였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의 대비를 통해서 확인하면서,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구원론적 정체성으로 다루며, 12-13절을 성화의 삶으로 연결시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1-11절은 12-13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 성화의 근거가 되는 셈이다. 1-11절을 보는 이러한 이해는 이 구절을 해석하는 자들에게서 동일하다. 그러면 이것에 의해서 12-13절이 성화의 의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주석적 의미를 원문과 영문 및 국문 번역을 대조하며 살펴본다. 
(1) 로마서 6장 1-14절의 원문과 영문 및 국문 번역의 대조에 의한 주석적 의미 
1절 /“What shall we say, then? Shall we go on sinning so that grace may increase?.”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한글개역) 
“그러면 우리가 뭐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도록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해서 머물러야 되겠습니까?.”(의역) 
바울은 6장 이전인 5장 20절의 “죄가 더 증가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나타났다”는 논증에 대한 반대자들의 논박을 예측한 수사학적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죄가 넘치는 중에 은혜가 넘치게 된다면 단순 논리로,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 가운데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절 / “By no means! We died to sin; how can we live in it any longer?.”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한글개역)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던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그 속에서 더 살겠습니까?.”(의역) 
예측하고 있는 질문에 대해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바울이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는 원어는 mh; gevnoito로 아주 강한 부정(否定)이다. 바울은 그 대답의 이유를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던 자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 더 이상 머물러 살 수 있겠느냐는 신자의 정체성을 단호히 규정짓는 것에서 하고 있다. 바울이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도 볼 수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을 하고 있는 데에는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5장에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생명을 의롭게 하시고 생명에 이르게 하신 것을 언급하였다(롬5:12-18). 그러면서 이를 율법과의 대조에서 그 차이를 설명한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0-21). 율법은 우리의 죄를 낱낱이 들춰낸다. 율법의 등장으로 사람은 죄를 쌓는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공로가 우리의 죄를 사(赦)하실 것이고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이르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를 더 이상 정죄(定罪)하지 못하며(롬8:1, 34), 따라서 죽음의 심판(審判)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이것의 근거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에서 ‘죽은’이 ajpeqavnomen란 부정 과거 시상(不定過去時相)으로 말해주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단번에 된 사건, 곧 십자가 골고다에서 그리스도에게 대표되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역사적 사건에 있다. 그리고 단번에 되어진 그리스도의 그 역사적 사건인 십자가의 구속의 피 공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하늘의 총회에 가입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죄 사함의 효력으로 영원히 미쳐서 그 피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히9:12).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죄에서 해방시켜 기쁜 마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킨다(히9:14).
1) 
3절 / “Or don't you know that all of us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한글개역)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는 그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의역) 
1-2절에서 우리가 결코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인 사실을 들었는데, 본 절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는 데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와 ’세례‘는 같은 개념의 말이다. 세례란 말의 의미가 ’연합‘(결합)
2) 이기 때문이다. F. F. Bruce는 로마서 6장 3절의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와 함께 고린도전서 12장 3절인 “우리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갈라디아서 3장 27-28절인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를 인용하여서 신자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기 시작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죽음과 부활이 그들의 영적 체험의 일부가 된다면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능력으로 성령 안에서 받은 세례는 그들을 그리스도와 한몸으로 결합시켜준다고 세례를 연합(결합)으로 말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이 얼마나 감격스런 영광된 것인지를 D. M. Lloyed-Jones는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의 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교리가 기독교 진리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극적이고, 가장 위안을 주는 것 중 하나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오히려 유쾌한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합니다. 만일 합당하게 파악하고 이해한다면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처럼 큰 확신과 위안을 주는 교리 체계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받은 세례는 ‘’그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받은 세례‘로 말해지고 있다. 박윤선은 이에 대해 주석하기를 “죽으심과 합하여”란 말은 “죽으심 속으로”라는 것이라고 하면서 “죽으심 속에서 세례 받음은 믿는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신 공로를 누림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예수께서 우리 신자들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으니 만큼 죄와 우리와의 관계도 죽은 것처럼 결국은 단절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죄와의 단절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죄와 상관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여서 죄를 도무지 발휘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3),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고도 살게 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지어야 되겠는가? 라고 바울은 묻고 있기 때문이다(1-3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우리를 죄 사하여 주셨다는 것이 우리가 죄를 더 이상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의 올바른 이해는 죄를 사랑하던 우리가 이제는 죄를 사랑하지 않고서 살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죄 받는 일이 결코 없으며, 따라서 더 이상 죄의 노예 상태가 아니다(롬7:25, 8:1). 따라서 본 절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받은 세례가 우리를 죄를 행하지 않고 의를 행하는 거룩한 자로 만들어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화적인 존재를 말해주는 구절로 삼을 수 없다. 
4절 / “We were therefore buried with him through baptism into death in order that, jus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through the glory of the Father, we too may live a new life.”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한글개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죽으심과 연합한 세례를 통하여 그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로운 생명 안에서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의역) 
‘함께 장사되었나니’(sunetavfhmen)는 '함께 묻혔다‘는 것으로 생명이 아주 끊어져 소생할 수 없이 무덤에 묻어 버림이 된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으로, 그 죽음의 효과는 우리가 죄 값으로 죽을 죽음을 완전히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죽을 죽음이 이제는 매장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함께 장사되었나니‘는 죄 값으로 당할 죽음의 완전한 해결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그 이유를 말해 주고 있는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th'" dovxh" tou' patrov")는 하나님의 권능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것 같이, 하나님의 권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매장하셨다. 
5절 / “If we have been united with him like this in his death, we will certainly also be united with him in his resurrection.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한글개역)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동일한 모양으로 연합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에 대해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의역) 
이 어귀에서 '연합한 자(‘suvmfutoi)란 “접붙인다”는 뜻으로 질이 전혀 다른 두 나무가 결합하여 같은 질의 나무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자가 이와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한 것은 죽으심만이 아니라 또한 부활하심에서도 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된 것이며, 부활을 기다린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으면서 죄인 되고 하나님과 원수 된 자인데, 이러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가 쏟아져 죄 사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켜 가신다. 따라서 우리의 ’거룩됨‘은 우리에게 있지 않으며, 우리에 의해서도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거룩됨‘은 우리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과 연합하여 한몸이 될 수 있게 자신 안에 두심으로써 실현시켜 가시는 것이다. 
6-7절 / “For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of sin might be done away with,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freed from sin.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한글개역) 
“우리가 이것, 즉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소멸되도록 하여, (그 결과로서)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으려 함을 압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죄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의역) 
‘우리가 알거니와’ 에서의 ginwvskonte"는 원형이 ginwvskw로서 본능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속의 복음이 가져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자는 그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은 자, 곧 죄로부터 해방된 자이기 때문에 죄가 더 이상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므로 죄를 사랑하던 그의 육신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거나 죄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 당함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것에 연합된 몸으로서 죄의 몸이 완전한 구속, 곧 부활에 이를 때까지 계속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옛사람의 죽음은 날마다 경험하는 것이다. 옛사람에게서는 성화된 것이 없으며 또한 성화되어가는 것도 없다. 날마다 죽어야만 하는 죄의 사람인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을 것을 권한 것은 성화적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은 옛사람의 악한 욕망이 분출되는 모든 것에서 이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새사람의 입음이 실현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이다. 
8-9절 / “Now if we died with Christ, we believe that we will also live with him. For we know that since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he cannot die again; death no longer has mastery over him.”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한글개역)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믿습니다. 이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죽음이 그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의역) 
본 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믿는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죽음이 그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11절 / “The death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but the life he lives, he lives to God. In the same way, count yourselves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한글개역) 
”왜냐하면 그가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것이며, 그가 사신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도 자신들을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기십시오.“(의역) 
여기서 ‘단번에’로 사용되고 있는 헬라 원어인 ejfavpax는 once for all으로 그 뜻은 ‘한 번으로 영원히’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단 한 번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희생제물에 의한 피 흘림을 완성하여 영원히 효력있게 미치신 사실을 뜻한다(참조. 히7:27).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여 죽으신 것은 죄를 꺾기 위해서 단 한번 죽으셨지만 그 피의 영원한 효력으로 지금은 하나님과 영원히 살아계신 것을 들어서 그 결과 우리들도 자신을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산 자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을 권한다. 
12-14절 /
"Therefore do not let sin reign in your mortal body so that you obey its evil desires. Do not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to sin, as instruments of wickedness, but rather offer yourselves to God, as those who have been brought from death to life; and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to him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For sin shall not be your master, because you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한글개역)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들로 하여금) 몸의 욕망들에 순종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여러분의 지체들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맡기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여러분의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으므로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의역) 
이 구절에 대한 일관적인 해석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주권적 행위로,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새 생명을 삶 가운데 드러내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임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인식하고서 이에 합당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성도는 죄의 세력에서 하나님의 주권으로의 지배세력이 뒤바뀌었으며, 따라서 죄의 법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새로운 조건과 질서 속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조건 하에서 변하게 된 성도의 구원론적 정체성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종으로 여기에 일치하는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헌신의 의무를 말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성화적인 삶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11절의 ‘여길지어다’를 하나님의 지시, 명령으로 보고 이를 강조함으로써 이것이 12, 13절의 성화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의 인식론적 토대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사람의 정체성에 합당하도록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지체를 그 분을 섬기고 헌신하는 일에 드림으로써 우리의 거룩을 드러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죄악으로 더불어 싸워야 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서, 이를 성화적인 삶을 살아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11절에서의 ‘여길지어다’인 logivzesqe는 count이며, 그 뜻은 ‘셈하다’는 개념이 아닌 ‘간주하다’로 맹약적(盟約的)으로 태도를 결정하고 간주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간주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산 자가 되신 것을 그와 연합한 우리와의 관계에서 심사숙고하여 생각한 가운데서 고려하여 갖는 것으로서, 14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대로 우리는 죄의 법인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생명의 법인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어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라는 것은 더 이상 우리 몸을 죽음으로 끌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을 죄의 지배에 맡겨 악의 도구가 되어서 쓰여질 이유가 없다는 것과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려 의의 도구가 되게 하실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의 주인이 죄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11절의 ‘여길지어다’는 12-13절에서 우리에 대한 삶의 책임과 의무를 요구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성화를 지시하시는 것으로 말해주고자 하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해주고자 하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2) 로마서 6장 1-14절의 이해 
로마서 6장은 성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연합’을 다루며, 이 중에서 1-14절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 받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다가가서 그와 연합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일방적으로 연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에 의하여 우리가 연합 당한 것이다. 이 연합 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 이 연합 당함으로 우리는 주인이 바뀌었다. 죄의 종 되었던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다.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종으로 삼아 주시니 우리가 의의 종이 된 것이다. 
이것은 의로운 행동을 할 때만 의의 종으로 삼아 준다는 계약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에 의해 의와 악을 구분하는 세계에서는 이미 ‘죽은 자’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려내었다는 것은 내 쪽에서 취소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된 것이 우리의 희망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죄의 힘에 의해서 되어졌듯이, 우리가 의의 종이 된 것은 우리의 희망 사항이나 우리가 선택한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결과이다. 로마서 6장 19절, 22절에서는 이 의의 종이 된 것을 거룩함에 이른 것으로 표현하여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의 종 삼으시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려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심을 받아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셨다. 
3) 고린도후서 7장 1절 : 성결로서의 성화 
성화를 말하는 구절로 삼는 것으로는 고린도후서 7장 1절이 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성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성화의 개념으로 주로 갖는 것은 ‘성결’이다.
아마도 성화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이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즉각적으로 되어지고 이후 점진성을 띤다고 한다. 그것은 구원은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때 그는 성화되었으며, 이후 신자가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체험의 성화가 있다고 본다.
2) 
성화에 대한 견해는 성화의 개념을 최초로 발전시킨 신학자로 여기는 Augustine에서 보게 된다. 그는 칭의와 성화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았지만 칭의는 구원받은 죄인을 의롭게 하신 하나의 사건임과 동시에 계속적으로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으로 성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서 성화가 칭의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사람의 성질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성화를 신적 생명의 새로운 초자연적 부여로, 즉 독점적으로 교회의 경계에서 성례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새롭게 주입된 능력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세례는 가장 기본이 되는 성례였다. 그는 성인이든 유아든 구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례 받을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의 세례에 대한 이해는 죄 씻음 이외에도 성령의 역사로 인한 적극적인 성화의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을 가진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연합되고 동화된다고 믿음으로써 성찬으로 성화가 이루어지며, 또한 이 성찬의 참여를 통하여서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어 봉헌되고 성화의 삶이 있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견해들은 중세기 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의 다양한 성화의 견해가 나올 때까지의 성화의 개념은 신적 권능에 의한 성화적 은혜가 성도의 영혼에 주어져서 성도의 새 생명은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 인한 덕성들의 열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 개혁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진 성화의 개념은 구원받은 자에게서 칭의와 성화를 명백히 구분하여 전자를 사람의 법정적 신분에 영향을 주는 신적 은혜의 법적인 행동으로 간주하였고 후자를 사람의 내면적 성질을 변화시키는 도덕적 또는 재창조적 사역으로 간주하면서도 이 둘의 불가분리적인 연결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성화를 사람의 도덕적 성격 속에서 다룸으로써 선행들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초자연적이고 은혜스러운 사역으로 간주되는 경향으로 갔다. 그것은 원래 성화는 영혼 속에서의 신적 사역이 변화된다면 생(生)의 주위(periphery)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고린도후서 5장 17절, 로마서 6장 12절, 고린도전서 6장 15절, 20절 등에서 성경은 성화가 신체와 영혼에 미친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도 한 이유이다. 
그에 따라서 성화는 즉각적이면서도 점진적인 개념으로 가져갔다. 비록 이를 다른 표현으로 묘사하였을지라도, 즉 J. Wesley가 성화를 초기의 성화와 온전한 성화란 단계에서 보고, J. Murray가 결정적인 성화를 말하고, S. M. Horton, H. C. Thiessen이 신분적인 성화를 말하고, 최영교가 지위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와 궁극적 성화를 말하는 등 다양하게 말해지고 있어도 결국은 즉각적이면서도 점진적인 성화라는 성격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화의 개념에는 성결로서의 성화도 말해지고 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인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도 바로 이 성결로서의 성화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그러면 이 구절의 주석적 의미는 과연 성결로서의 성화를 말하고 있는가? 이를 헬라어 원문과 영어의 대조에 의해서 보도록 하겠다. 
;Since we have these promises, dear friends, let us purify ourselves from everything that contaminates body and spirit, perfecting holiness out of reverence for God. 
여기의 ‘사랑하는 자들’인 ajgaphtoi는 직역하면 ‘사랑함을 입은 자들이여’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애(贖罪愛 )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들은 ‘이 약속’(ejpaggeliva")을 받은 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약속’은 앞 절인 6장 18절의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하신 전능하신 주의 말씀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약속을 받은 자인만큼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두려움 속에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에서 두려움( fovbo")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공경)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ejpitelou'nte" aJgiwsuvnhn)고 권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앞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상관이 있다. 공동번역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고 하였으며, 표준새번역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 가운데서 완전하게 거룩하게 됩시다”고 하였고, 현대인의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생활을 합시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해서 볼 때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의한 관계성 이다. 왜냐하면 이는 필연적으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것이다”는 거룩성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음에 의해서 갖게 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은 곧 그들의 거룩함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말과 동일한 개념의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약속을 받았으니 육과 영(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권하는 것은 육과 영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거룩한 생활을 합시다’ 라거나,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라는 말의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아버지가 되신 것에 의해서 자녀에게 갖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 거룩과 상반되는 악은 그 모양이라도 가까이하지 말고 멀리해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거룩한 생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우리를 향하신 뜻을 성취하신다. 그것이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이다. 
따라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는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가 인격 전체가 깨끗해야 될 것에서 성결 할 것을 요구하며 성화를 이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입고서 날마다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안 되며 의를 입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거룩 속에 두시고서 사죄와 칭의의 은혜를 입히시며 우리의 생명을 보전해 가신다. 
성결이란 우리가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거기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그만큼 성결한 사람이 되어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리고는 그 위에서 더욱더 성결해져야 가야 하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마침내는 완전한 성화에 이르는 성결한 자가 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성경에서 ‘거룩’으로 말해지는 성화란 우리 자신에게서는 발견되어질 수가 없고, 내 안에 새로운 사람인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다시는 죄가 지배하지 못하는 정죄 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정죄를 받을 것이 없는 것을 두 글자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거룩’이요, 그 거룩한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이미 거룩한 자이다. 따라서 성화는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으로서의 거룩의 문제가 아니다. 
4) 에베소서 4장 22-24절 :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으로서의 성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이 구절은 성화 교리를 말하는데 가장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사실, 에베소서에서는 이 구절에서만 아니라 더욱 많은 구절에서 이와 같은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에베소서 4장에서 5장에 이르는 많은 분량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자랄 것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을 말하는 성화를 언급하여 주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에베소서 4장 13-16절에서 성화를 말한다고 본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 앞 절과의 연관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가 된 한몸의 지체들로서 이들이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 있도록 그리스도로 완전히 충만한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게 이들 모두에게 성령을 통해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통해서 온몸이 서로 완전히 어울려서 각기 다른 지체를 도움으로 온몸이 성장하여 사랑으로 충만할 것을 이야기 한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구원인 것을 말하면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히 하나 되게 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바울의 이 권면은 지금 교회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란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인데, 이 하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성령에 의지하여 하나가 되게 하시는 능력(은사)이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여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엡3:20-21). 그리스도와 하나된 몸인 교회란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불러 모은 '몸의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이 몸으로 온전히 하나 되게 성령께서 힘쓰신다. 여기서 이것을 가지고 교회의 자라감, 곧 교회의 성숙을 말할 때에도 한 개인의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것으로서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성화 개념이 아닌,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다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는 것에 있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연결하여 위로 쌓아져 올라감으로써 온전한 집의 모양을 드러내듯이, 또는 모자이크 된 종이 하나하나가 맞추어져서 온전한 그림의 모양을 드러내듯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다 그리스도의 한몸인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이해를 가진다면 본 구절은 성화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할 것에 대한 어떤 가르침도 없다. 
이제 에베소서 4장 22-24절을 보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이 구절을 성화를 말하는 것으로 삼는 자들은 이것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성화를 말해준다고 한다. 
여기서 옛사람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에서인가? 그것은 앞 절인 17-21절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있는 존재이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말하였다(골3:2-3).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닫혀 있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구원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을 악한 죄에 내맡기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악한 생각과 무분별한 욕망에 이끌려 사는 생활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음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 그와 같이 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이 권면하는 것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만일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을 배웠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그 믿음에 있다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진리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는 음성을 듣고 그 가르침을 좇아서 우리의 낡고 악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옛날의 생활 방식, 곧 거짓된 욕망으로 부패해 가는 (악한 인간성의)옛사람’(현대인의성경),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공동번역성경), ‘지난 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사람’(표준새번역성경)이 우리의 모습이다. 만일에 이런 모습에 여전히 머물러 산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리의 가르침에 위배되게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태도와 생각을 뽑아 버리고 그와는 전혀 다른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으로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한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너희가 어떤 자들인지, 그 존재성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는 그들의 세계에서 살아야 할 삶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진 마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반응으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몸된 성격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교회에 다양한 은사의 나타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사람에 머물러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에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우리의 옛사람의 욕망으로 거스르지 말라는, 그래서 성령의 일하심을 훼방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러면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옛사람의 벗어버림은 우리가 그렇게 하고자 생각한다고 해서 되어지고,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옛사람은 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를 들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의 사상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세례에 의해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 당함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것에 연합된 몸으로서 죄의 몸이 완전한 구속, 곧 부활에 이를 때까지 계속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옛사람의 죽음은 어떤 한 순간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날마다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옛사람의 죄성이 발동될 때마다 옛사람은 죽고 대신에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서는 산 자인 새사람이 사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옛사람을 날마다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지, 옛사람이 죽은 새사람이기 때문에 새사람에 합당한 생활을 사는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서만 있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더 이상의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없어야 하며, 또한 더 이상의 새사람을 입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날마다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옛사람을 날마다 죽게 하시며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의 성취를 날마다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에서 보는 것이다.
이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는 것이 우리, 곧 그리스도와 한몸인 교회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 22-24절은 에베소서의 여느 구절이 그렇듯이 성화를 말해주고 있는 구절이 아니다. 날마다 옛사람에 대해서는 죽고 날마다 새사람에 대해서는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서는 성화된 것이 없으며 또한 성화되어가는 것도 없다. 다만 날마다 죽어야만 하는 죄의 사람인 자신을 보는 것이며, 그런 죄인된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을 사는 법칙을 배워 앎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온전함에 있지 못하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용납하시고 용서를 베푸심으로 새사람을 이루게 하신다.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은 옛사람의 악한 욕망이 분출되는 모든 것에서 이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새사람의 입음이 실현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이다. 따라서 바울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을 것을 권한 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으로써의 성화적 사건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5) 빌립보서 2장 12-13절 :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것으로써의 성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는 빌립보서 2장 12절은 성화의 근거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를 '우리가 받은 구원을 더욱 온전히 이루어가라(만들어가라)', 그래서 '우리가 받은 구원을 힘써 완성시켜 나가라'는, 또는 '힘써 구원의 완성의 자리에까지 나아가라'는 뜻에서 한 것으로 이해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갈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서 구원을 이룸으로써의 성화를 말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문맥을 통해서 앎으로써 사실은 쉽게 풀어진다. 바울이 말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이것만 가지고 해석하면 안 된다. 바울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빌립보교회에 권면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 말을 한 진정한 의미는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신자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이 늘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따라 주었다는 것을 기억시키면서 이제 자신이 비록 이들을 떠나가게 되더라도 이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자인 것을 주지시키고 그런 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에 더욱더 힘써 주기를 바란다는 권면을 하는 것으로 하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두렵고 떨림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서 그 해야 할 일에 더욱더 힘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다음 구절인 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빌립보교회의 신자들 안에 계시면서 그들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일으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해 나가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신자들에게 이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여 나가시는 하나님의 일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빌립보교회는 지금 그 하나님 앞에 그리고 하나님이 하실 일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빌립보교회는 마땅히 이런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잘 이해하고 하나님을 섬겨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의 가르침은 성화적 개념의 차원에서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받은 구원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이를 순종으로 잘 받들어 나가야 할 마땅함을 권면하는 것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이지, 이것으로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구원, 또는 인격, 성품, 삶을 얼마나 더 온전히 만들어가서 마침내 구원의 온전함에 이르러야 할 것을 말해주는 성화를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6) 히브리서 12장 14절 : 하나님의 품성인 거룩을 닮아가는 것으로서의 성화 
그리스도인이 순결(성결)에 힘씀으로써 순결한 자가 되어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가 보려고 하는 성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온전함을 죄 사함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서 보지를 않고 우리 인격의 변화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할 것을 말씀하는 구절이 나오면 이를 모두 성화의 관점에서 본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서 12장 14절의 경우에서도 보게 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를 하나님의 품성인 거룩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시며 이를 명령하시는 성화를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 주석을 쓴 최세창은 그의 히브리서에서 12장 14절을 Thyers와 J. E. Frame의 말을 인용하여 주석하기를 “화평함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거룩함을 좇으라의 거룩함은 하기아스몬(aJgiasmovn)으로서 ‘정화’, ‘신성화’, ‘헌신’, ’성결‘, 거룩‘(롬6:19; 고전1:30; 살전4:3, 7) 등을 뜻한다. 이 낱말은 원래 거룩하게 하는 것, 죄에서 떠나 하나님을 향하여 도덕적으로 순수하게 되는 역사와 성결의 결과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성화의 과정과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한 W. Barclay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이 낱말은 하기아스모스(aJgiasmov")이다. 아스모스로 끝나는 모든 헬라어는 완성된 상태를 말하지 않고 과정을 말한다. 성화도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이것은 성결로 가는 길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렸을 때, 그는 거기서 정지하여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번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고 나면, 그는 성화의 과정 곧 성결로 가는 길을 출발한 것이다”라고 하면서성화의 주체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거룩해지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거룩함을 좇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히브리서 12장 14절을 성화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주석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말 성경도 이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글개역성경을 비롯하여서 우리말의 번역 성경 모두에서 볼 수 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며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 거룩해지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공동번역).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표준새번역).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현대인의성경). 이는 이 성경들이 번역을 위한 성경으로 삼고 있는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를 비롯해서 영어 성경에 따른 것인데, 한글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거룩이라는 단어가 라틴 벌게이트를 비롯해서 ASV, NASB, WEB, LSG에서는 sanctification으로, KJV, NKJV, NIV, RSV, NRSV, DBY, DOUAY, LBE, Webster는 holiness, 또는 holy으로, NLT는 a clean and holy life으로 번역을 하였다. 그러나 YLT는 separation으로 번역을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영어성경이든 한글성경이든 성화의 개념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aJgiasmovn이다. 이것은 남성 명사 aJgiasmov"의 단수, 목적격으로 ‘거룩함을’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Eijrhvnhn diwvkete meta; pavntwn kai; to;n aJgiasmovn)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ou| cwri;" oujdei;" o[yetai to;n kuvrion)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아야 할 이유는 주를 보게 될 것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이야기를 하는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열거하면서(히11:) 이들이 하나 같이 바라본 것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라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것을 말하는가 하면, 믿음의 인물들이 ‘믿음으로’ 살아온 그들의 삶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으로’ 바라보고 온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그들의 구원이시기 때문이다(히12:2).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는 (원문)으로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 첫째는, ajrchgo;n 은 ajrcή와 ἄgω의 합성형으로 “앞서 인도하는 자”(chief or leader)의 뜻이며, 따라서 우리 번역과 같은 뜻으로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둘째는, 그러나 이 낱말의 어근이 ‘처음’인 ajrcή이므로 이 어귀를 /“믿음의 창설자”(the author and finisher or our faith)로 이해하는 견해도 유력하다. 공동번역성경, 표준새번역성경, 현대인의성경, 현대어성경은 모두 이 견해를 따른다. 영어번역성경으로는 KJV, NKJV, AV가 이 해석을 따른다. 그러나 NIV, RSV 등의 다른 영어번역성경은 첫째의 경우를 따른다. 이 두 견해에서 후자인 둘째의 경우가 유력해 보인다. 그것은 ‘처음’(ajrcή)과 ‘끝’(telo"j)이란 반대어를 살려서 예수는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란 것으로 예수에게서 믿음은 출발하고 또 그에게서 믿음은 완성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의 ’시작‘은 ’근원‘의 개념이다. 이것이 문맥의 흐름에도 맞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되고 있는 분들의 ‘믿음으로’ 들어와, 그들을 ‘믿음으로’ 주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이 14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믿음으로’ 바라보게 될 주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이신 예수만 바라보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앞서 말해온 옛언약이 목표해왔던 새언약의 중보자시오 최고의 증인이시므로 이 한 초점을 향해 주의 깊게 응시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곧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계신다(히12:2). 만일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지치거나 낙심케 되거든 죄인들의 무서운 만행을 참고 견디신 예수님이 당하신 일을 생각하고 인내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히12:3-4).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훈계와 그에 따르는 징계의 혹독한 시련을 참아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자녀에게 하여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히12:5-13). 하나님은 자기 자녀된 자를 육을 쳐 복종하게 하여 영의 일을 생각하고 바라보게 하신다. 
그리고 이것의 이야기에 의해서 14절인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는 고난을 받게 하셨으나 그를 높여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하시고는 그의 온전함에 그를 믿는 자들을 두시고는 그들의 믿음을 이끌고 가신다. 그들에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쓸 것을 말씀하신 것은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 그들의 화평치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를 다루시면서 우리가 죄의 유혹과 맞서서 싸움으로 겪는 고난,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받는 징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모두가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상처에서 나음을 입고, 화평 하고 거룩 하는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대속주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심판을 대신 받으신 까닭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공로를 은혜로 입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며 거룩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화평함과 거룩함’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가 화평에 힘쓰고 거룩에 힘쓴 그 선한 행위에 의해서 화평을 이루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성화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화평과 거룩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하시며,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게 하심으로써 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의 주가 되셔서 그들의 화평과 거룩을 다스려 가신다. 이것은 성화의 개념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발생하는 죄에 대하여서 그 죄가 그를 정죄하여 죽음의 심판으로 이끌고 가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달려 구속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의가 막아 나서 변론하시며 보호하시는 까닭에서 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케 하신데서 이다. 이런 그는 성화되어갈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 나라의 백성으로 온전한 자이다.
이것의 근거가 지금 믿는 자들의 주(머리)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오른편 보좌에 앉아계신 사실에 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룩을 추구하며 거룩한 행실을 가져 거룩에 힘쓸 것이라든가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형식의 구절은 베드로의 서신에서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베드로전서 1장 2절, 12절, 15절, 2장 2절, 21절, 베드로후서 3장 11절, 14절에서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모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성화의 과정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알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날까지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은, 곧 경건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래서 그들이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P. E. Hughes가 쓴 히브리서 주석에서 소개하고 있는 르페브르 테타플이 한 말은 옳다. “마음이 거룩하고 순결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손실이며 가장 궁극적인 불행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불러 모으신 자들을 자신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9:2; 벧전1:16)는 언약의 성취된 관계성 속에 두시고서 거룩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주로 모시고 섬기면서 따르는 자들이 거룩에 힘써 나가게 하시면서 그들이 이르지 못하는 거룩의 온전함으로 나타나 자신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자들의 온전한 거룩이 되어 그들을 또한 거룩하게 하신다. 바울은 이 신비의 비밀을 에베소서 5장 26절, 27절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교회의 관계를 가지고서 알려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씻어 거룩하게 정결하게 하시려고 목숨까지 버리셨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하신 것은 한 점의 티나 주름도 없고 영광스러운 교회로서 맞아들이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은 믿는 자들이 아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시며, 믿는 자들의 거룩은 그들이 거룩한 행실을 갖고 거룩에 힘써 거룩한 삶을 살고, 그래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거룩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따르지 못함으로 결코 거룩에 이르지 못하는, 그래서 전혀 거룩하지 못한 그들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거룩 속에 두시고서 그들에게 거룩하라고 하신 그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심으로써 그 거룩이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자들의 거룩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무슨 성화의 과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Ⅵ. 성화론의 바른 이해를 위한 정립의 필요성 
지금까지 성화 교리의 출현으로부터 시작해서 교회사적으로 본 성화의 관점, 종교개혁시대의 성화론, 종교개혁시대 이후의 다양한 견해에 의한 성화론, 한국 교회의 성화론을 고찰하면서 우리 한국 교회를 비롯한 이 땅에서의 교회가 가져온 성화에 대한 견해가 어떤 이해 속에서 가져온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경의 해석적 관점에서 본 성화론을 통해서는, 교회가 말해오면서 가져온 성화론이 과연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으로서의 이해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서 성화를 말하는 것으로 근거를 삼는 성경 구절을 해석하여서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까지 교회가 신학, 특히 조직신학의 분야로 삼고 있는 성화론이 성경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전혀 성화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에, 성화론이 바른 이해에 의하여서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된다.
1. 성화의 용어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함
우리 말의 성화는 한문은 ‘聖化’이며, 영어는 ‘sanctification’ 이다. 그러나 우리 말 성경에는 ‘성화’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히브리어 명사 ‘거룩함’(holiness)인 ‘하기오테스’(ἁγιότης), '하기오쉬네‘(ἁγιωσύνη), ’하기아스모스‘(ἁγιασμός), 형용사 ‘거룩한’(holy)인 ‘하기오스’(ἁγιός), 동사 ‘거룩하게 하다’(make holy)인 ‘하기아조’(ἁγιάζω)가 각각 ‘거룩’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단어의 뜻을 성화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이를 신학적 용어인 성화로 사용하여 말해오고 있다. 이에 따라서, 각 단어들이 사람이나 사물에게 적용되어서 사용됨으로 인해 성별, 봉헌, 성결로 말해지는 것에도 이를 모두 성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에 있어 왔다. 
그런데 그 모든 단어의 공통점은 그 반의어가 ‘세속적’ 혹은 ‘통속적’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분간)하는 것에서 거룩이 말해지는데, 근본적으로 거룩함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존재, 혹은 활동 영역에 속하는, 그리고 통속적이거나 세속적인 것과 구별되는 본질적 속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다음의 구절은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11:9).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거룩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레11:44)라고 자신을 두고 거룩을 말하여 거룩의 개념을 세우셨다. 출애굽의 이적을 홍해에서 경험한 이스라엘은 모세와 더불어 하나님만이 거룩하심을 노래하였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15:11). 
이러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 안에 그의 택하신 자를 두고 거룩을 규정하셨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 “그리고 그와 함께 그에게 속한 모든 것도 또한 거룩할 것을 규정하셨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 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4-45). 하나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다.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그것이 짐승이든, 그것이 사물이든 그 모두는 다 속되다. 하나님 외에 거룩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는 처음부터 성화의 개념이 있을 수가 없다. 사람에게서는 거룩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속해 있는 모든 것도 또한 거룩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 안에 자기의 택한 백성을 두시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들을 또한 거룩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는 그들이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거룩에 그들이 속해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는 거룩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거룩이 아닌 속된 것이다.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하나님의 이 거룩이 속된 사람을 덮고 거룩하게 하신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자는 거룩하다. 하나님이 이들을 거룩하다고 하시는 것은 이들이 거룩한 자로 성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거룩함은 ‘거룩한 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은 그들에게 거룩해져 갈 것을 원하며 이를 요구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래서 성화되어 갈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거룩한 자’가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인 거룩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셨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들은 죄에 의하여서 부정하게 될 수 없는 자라고 하는 것에서, 그래서 부정함으로 하나님의 이름(거룩)을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럼에도 만일 그들이 자신을 스스로 더럽히면, 그래서 부정한 자가 되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악한 죄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효를 바라보며 의지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악한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 속에 두고서 그 관계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가져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 스스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어 나가지 못함으로 인해서 도무지 하나님의 거룩을 충족시켜 나갈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날마다 충족시켜 가시는 것이다. 이 은혜를 날마다 입고 있는 것이 우리이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자기의 보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을 통해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날마다 입히신다. 그리고 그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도 함께 거룩으로 다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이 다 거룩하다. 
이제 우리는 성화에 대한 바른 이해에 의해서 올바른 성화론을 정립해야 한다. 성화란 용어의 말이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서 오랜 세월을 같이 해온 것이기 때문에 이 말 자체를 터부 하며 배제하는 것이 옳을 것인가 하는 것은 고려해야만 할 일이다. 잘못된 개념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성화란 용어를 할 수 있는 한에는 사용하지 않으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화란 용어를 어느 사람의 몇 몇에 의해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자들에게서 사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사람들의 뇌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으며, 습관처럼 자주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한 것을 사용 여부 문제로는 해결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화란 용어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를 재해석하고 설명하여서 그들 안에서 새롭게 정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 것이다.
1) 기존의 고정 관념인 구원의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띤 이해가 아니라, 그래서 거룩한 자로 만들어져 가는 것으로서의 성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의로운 자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했으며 따라서 선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으로서의 성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예정하신 우리를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우리를 또한 영화롭게 하신(롬8:29-30) 그 모두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고 이를 전하는 것에서 성화의 이해를 가져나가야 한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다.
2. 칼빈을 중심한 개혁주의 성화론에서의 성화 개념을 바르게 가져할 필요성이 있음.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11장 1절 1항에서 칭의 교리의 위치와 그 뜻을 설명해 나가는 중에서 성화를 언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소유하도록 하였으며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써 주로 다음과 같은 이중적(二重的)인 은혜를 받게 하신 것이다. 즉, 첫째로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화해가 되어 우리는 그를 하늘나라에서 심판주가 아니고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모시게 되는 것이요,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화(聖化) 되어 우리가 생활의 결백과 순결을 향하여 전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이 말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에 의해 성화되어 생활의 결백과 순결을 향하여 전심하게 된다”는 그가 가진 성화의 개념을 말해 준다. 칼빈의 성화관은 죄인은 의롭다 함을 얻고 성화의 은혜로 심령이 변화되어 그 열매로서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화를 지속적인 회개 또는 중생으로 이해하면서, 죽임과 살림으로서의 성화를 먼저 이야기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발전된 개념의 성화를 주장한다. 그것은 곧 적극적인 사랑으로의 성화이며, 내적인 순수성과 외적인 행위까지 포함하는 전체적인 의미에서의 성화이다. 
그런데 칼빈의 성화에 대한 이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는 아직 성화 되지 못했는데 성화되어 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이미 성화됨으로써 되어지는 실현, 곧 성화를 이루어가는 성화의 실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칼빈이 말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화 되어”(being sanctified by his Spirit)란 표현은,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소유한 자는 하나님과 화해하였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성결한 삶, 곧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해지고 있듯이 성화는 성결한 삶의 원인이 된다. 그러니까 성화됨으로써 성결한 삶을 전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 그렇다면, 성결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칼빈에게서도 성화가 갖는 개념의 본질은 ‘거룩 됨’이다. 그리고 이 거룩 됨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 되어진 개념이며, 또한 하나님께 용납을 받은 개념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구속의 피의 공효를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덧입혀 거룩한 자로 삼으신 데 따른 것이며 이로써 그는 하나님께 용납이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화의 개념이 거룩 됨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자라고 하는 사실은 칼빈 이전의 여러 사람들의 신학 사상인 글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간의 형상 개념에서이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첫째 사람 아담 안에서 깨어져 버린 영생의 가능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성취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회복은 인류뿐만 아니라 전우주에서도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희생제사에 의한 헌제사역으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셨다는 구원관을 가졌다. 이러한 사상은 설명의 차이는 있지만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대바질(Basil the Great),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요한 크리소스톰(Johe Chrysostom), 터툴리안(Tertullian), 키프리안(Cyprian), 힐라리(Hilray), 암브로시우스(Ambrose)가 가진 공통된 사상이었다. 
그리고 히포 레기우스(Hippo Rejius)의 감독으로서 고대 기독교 사상의 완성자로 불리우며 후대 기독교 신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 어거스틴(Augustine)의 신학에서 나타나는 구원관에서는 성화의 개념이 용어의 사용에서 나타나고 있다. 어거스틴 당시 동방교회나 서방교회에서는 성화를 의미하는 용어로 ‘신화’(deification)나 ‘신성화’(divinization)가 있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동일본체라는 공통된 신학적 이해 속에서 인간적인 공로나 노력에 의하여 도달하려는 점진적인 성화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경우에서는 이러한 신학적 이해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거스틴은 칭의의 맥락에서 성화를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칭의는 하나의 사건임과 동시에 계속적으로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으로 성화의 의미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고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를 하고서 이런 맥락에서 칭의를 선언적 의미보다는 의를 만들어 간다는 의미로 이해를 하였다. 이럴 경우 칭의는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하며, 신자의 전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의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칭의의 과정으로 성화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성화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행위였다. 따라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성화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뿐이라고 믿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행위의 개념이었다. 그런 그의 성화적 개념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이지만, 필연적으로 ‘거룩되게 하시는’ 과정을 지니고 있어서, 성화를 구원의 과정으로 굳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단지 인간적 공로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행위에 의하여 결과 되어지는 것으로 이다. 
칼빈은 이 모든 분들에게서 신학 사상의 영향을 받아 왔다. 특히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은 칼빈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런 그에게서도 칭의의 개념에서 성화의 의미도 함께 말해지는 듯한 인식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칼빈의 글에서 그러한 표현적 묘사가 있으면 그것을 무조건 성화의 개념으로 본다는 데 있다. 이수영은 “성화의 은혜는 우리가 흠 없고 순결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면서, 칼빈의 글을 인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고,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더 죽이시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원하게 된다.”(3권 14장 9절). 여기에 보면, 성화란 그 자체의 말은 없다. 그럼에도 당연히 성화의 인식을 갖는 것은 여기서는 ‘sanctified’을 성결케 된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11장 2절에서 보듯이 때에 따라서는 성화로도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결과 성화를 같은 의미로 보고 있는 것이며, 이 경우 성화는 성결케 되어 가는, 곧 깨끗해져 가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에 따라서 칼빈은 성화를 ‘거룩 됨’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거룩하게 되어 가는 것’을 말해온 자로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이수영은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옛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인정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의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가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의롭고 성결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의 변화가 참 구원의 증표이다”고 말하였다. 다만, 그는 성화를 “우리의 구원은 의롭고 성결한 삶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은혜의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구원의 은혜를 입은 이의 삶은 반드시 의롭고 성결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사람의 힘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택에 의한 구원의 결과로서 있게 되는 삶으로 말할 뿐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의 칭의 부분에서 ‘sanctify'를 우리 말 번역서들은 한결같이 ’성결하다‘와 함께 대부분은 '성화하다’의 의미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갖는 용어적 오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적 오해는 곧 그것에 갖는 그들의 신학적 견해로 굳어졌으며, 또한 신학 사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칼빈의 글에서 그리스도인이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새롭게 되는 삶을 말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이를 성화의 개념으로 보게 된다. 김남준은 “부패한 본성의 파괴와 새로운 본성의 형성은 죄를 죽이는 사람의 실천과 은혜를 살리는 삶의 실천으로 구체화된다. 존 칼빈은 이 두 가지가 신자의 성화의 두 축이라고 보았다. 즉 죄에 대하여 죽는 것과 은혜 살림 이다. 성령께서는 진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신자의 마음과 영혼에 은혜를 강화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시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모습대로 살아가게 하신다. 성령에 의해 옛 본성이 파괴되는 그곳에는 언제나 거듭난 새 성품이 형성된다. 옛 성품을 지닌 채 죄악의 삶을 살던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형성된 본성을 통해 의덕(義德)의 삶을 살아가게 되며, 이 삶은 곧 하나님께 대한 순명(順命)의 삶이니 이를 통하여 신자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고 한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말에서 보듯이, 칼빈이 성화의 의미를 그러한 개념으로 이해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가 어거스틴을 비롯한 신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자로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하지만, 칭의에 대한 이해를 확고하게 이해하고 있는 그로써 성화를 칭의로 말미암은 점진적 의의 변화를 갖는 과정으로 있게 되는 성결의 차원에서 이해하였을 것이라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롭게 되어 가는 것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칭의에 근거한 것일지라도 분명히 그렇다. 칼빈이 말한 성화의 개념은 칭의에 근거하여서 갖게 되는 의로움, 곧 의롭게 되어 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칼빈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하신다는 생각에서 하나님의 ‘이중은총’(double grace)으로 보고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선행(성화)으로 그 칭의를 증거한다. 성화는 칭의의 증거이다”(기독교강요 3권 17장 12항) 라는 견해를 가졌다. 그에게 있어서 성화는 칭의에 근거하여 있게 되는 불가분리의 관계인데, 구원은 행함과 관계없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아 되어지는 것이나, 성화는 그 의에 근거하여 나오게 되는 것으로 성화의 열매인 선행을 통해서 성화된 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늘나라로 인도되는 것으로 알고서 성화를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의 개념으로 보았다. 
칼빈이 성화의 이해를 이렇게 본 것은 성화를 구원의 과정 속에 두고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옛 사람과 새 사람 문제로 본 것은 성화를 시작과 과정과 결말로 보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구원받은 자가 구원 이후에의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을 말하면서 완전한 성화는 죽음 이후인 구원의 완성으로 다룬다. 
그러나 칭의에 근거하여 성화를 말하며, 성화로 칭의의 증거를 말하는 것은 구원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로 나타나는 십자가의 구속에 의해서 되어지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사람의 행위가 완전히 배제된다. 왜냐하면 구원의 서정으로 말해지는 전 과정은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예정, 칭의, 양자됨, 영화롭게 하심 모두가 하나님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해주신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게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롬8:29-31).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논리적 순서의 과정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일 뿐이지 구원의 진행적 순서의 과정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의 예정과 칭의와 양자됨과 영화롭게 하심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구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확정시켜 ‘구원의 마침’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죄인된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죄로 정죄를 받게 하고 죽음의 심판에 이르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성화의 과정은 전혀 개입될 수가 없다. 
성화를 말하는 신학은 그리스도인은 성결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나, 과연 그럴 수가 있는가는 다음의 한 예에서 판명된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면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마6:24)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말씀한 재물을 섬기지 않고, 곧 재물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하여 섬길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이 재물을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자로 살아가면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은 그 누구에게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비록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고 할지라도 단 한 순간도, 그리고 그 한 순간의 어느 때에서도 재물을 놓고서 살아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결코 재물을 사랑하는 것을 아무런 미련 없이 놓고 그것을 뛰어 넘어서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의한 ’의‘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으니, 다만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만이 그 자신이 하신 말씀을 성취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즉 그리스도만이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하신 말씀을 온전히 이루신 분이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으로 그 말씀을 온전히 이루셨는가?를 나타내신 것이 십자가의 피이다. 즉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로 자기 몸을 희생하여 흘린 그 피를 중보로 내세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재물을 사랑하는 죄가 발생하는 그 모든 것에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입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성결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 이를 주장하며 성결한 삶을 산다고 해서 그것이 성화가 되고 그를 의로운 자가 되게 하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성결한 삶을 산 그에게는 여전히 의지해야 할 무엇이 흘러야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하여 흘리신 속죄의 피이다. 이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인에게서 지금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즉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인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성결한 삶을 산 그에게 속죄가 요구되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죄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의 확정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서 성결한 삶을 살고자 선을 행하는 그에게 또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그 죄가 다시는 정죄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그래서 그 죄가 그를 죽음의 형벌의 심판으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하시는, 그래서 죄가 그 권세를 전혀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의 효력이 미치고 있다는 것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 공로로 베푸신 죄 용서의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죄에서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칼빈을 중심으로 성화를 말해온 모든 분들에게서 그들이 말한 성화 개념을 바르게 잡아 가져할 필요성이 있다.3) 이 분들이 말한 주장, 곧 그 견해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인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아갈 때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간다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의 뜻을 좇아 그와 같이 살아가서 성결한 삶을 보일지라도 그것이 그를 성화된 자로 만드는 것이 아님은 그에게서는 여전히 언제나 죄가 나오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인 십자가의 피 공로 속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속에 두시고서 거룩한 자로 관계해 가신다. 그러므로 성화란 용어를 부득불 사용하여 말할지라도 그 개념은 구원의 과정에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들어옴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에서여야 한다. 바울은 이런 자를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함으로써 그들이 ‘거룩한 (무리의)사람’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롬1:7).
3. 성화론이 갖는 핵심적 오류는 성화에 대한 바른 이해의 필요성을 더욱 갖게 함.
성화론이 갖는 오류에서 핵심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한 피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새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산 자로서 죄에서 벗어나 의로운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서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자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동안 성도되기 이전에 의를 행하지 못한 것은 죄의 통치 안에 놓여 있는 의지력 때문인데 이제는 성도가 되었기 때문에 의를 행할 수 있는 의지력이 제대로 회복되었다는 점에다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가 죄와 싸워 이기고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으로 연결한다. 이러한 이해는 성도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지만, 성령께서는 성도의 순종과 더불어 일하시지 혼자 일하시지 않는다며 성도 안에서의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작용이 있다는 생각을 갖는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사람의 출생과 관련해서 설명하려든다. 부모를 통해서 출생한 갖난 아기는 그 부모의 자녀로 양육 받아 유아기와 소년기,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는데 장년과 노년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화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혜를 입은 중생 이후 성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힘입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을 성화론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의에 대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변화 된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 하게 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서는 죽었다. 그래서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의에 대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논리를 말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이를 이기는 자여야 한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의를 행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그래서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의 시점으로 가지고 가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로부터 단번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죄만이 아니라, 현재 짓고 있는 죄도, 그리고 앞으로 지을 미래의 죄까지도 모두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구원의 성격을 오해한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려서 당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 단번에 되어진 것이며 이것은 또한 영원성의 성격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그 죽음이 가져다 주는 구속의 효력은, 즉 죄 사하시는 은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죄에 영원히 미친다. 그래서 죄가 그를 정죄하지 못하며, 죽음으로 끌고 가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죄 사함은 죄가 발휘되는 것에 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속함을 받았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여전히 권능 있게 발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권능이 결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고 죽음의 형벌을 가져다 주는 심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하는 그 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대속하시는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베풀어져서 그를 믿는 자들의 영화롭게 되심에 이르기까지 항상 ‘현재적’이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의 예정에서부터 칭의, 양자됨, 영화롭게 됨의 모두가 창세 전의 그리스도 안에서 정해지고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확정되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 때까지 효력 있게 미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에, 그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그리스도의 대속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에서 벗어나고 의를 행할 수 있는 자로 변화된 상태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를 좇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고 행하여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에서 나오는 것은 언제나 죄요 의를 행치 않는 불순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의 대속으로부터 오는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행하신 의를 입혀 주시는 것이다. 흔히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이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산 것을 가지고 죄와 싸워서 이기고 의를 행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천국의 의’가 아닌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내가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내가 또 무엇을 가지고 의를 행하여야 하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지고 나는 오늘도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악한 자입니다”를 깨닫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의 주이시며,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한 몸으로 돌보아 살펴주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하신 주님의 뜻을 늘 만족시켜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나는 오늘도 사랑의 법에 온전하신 주님에게서 봅니다. 나는 이렇게 악한 자입니다. 그런 나는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에 열심을 갖고 철저히 하려고 하지만,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에서 구원받지 않으면 결코 선할 수가 없는 것을 의존하지 않고, 내가 행하여 온 것에만 관심을 갖고 이것으로 구원의 의를 삼으려고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악한 자입니다.” 하는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를 그가 믿는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에 연합시켜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에 들어와 있게 하신다. 그것은 죄가 있는 ‘날마다’ 이며, 하나님의 의를 행치 않는 ‘날마다’ 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보다 더 의롭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의로는 ‘천국의 의’가 되지 못함을 이야기하심으로 ‘천국의 의’는 따로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셨는데(마5:20), 그 의는 “내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쓴 책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예수님 자신 스스로의 증거로 입증하신다(롬5:17).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의는 믿는 자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믿는 자의 순종을 통해서 있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믿는 자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순종해서 성결한 삶을 사는 등의 선행을 하는 의를 행하였다고 해서 그 의가 그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의, 곧 천국의 의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의해서 성화를 말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것으로 성화를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를 행한다는 것을 내세워서, 곧 그리스도를 등에 업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의를 주장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성화된 자의 삶을 산 데 따라서 더욱 성화 되어진 것에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는 천국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절망에 십자가에서 행한 그리스도의 의가 입혀지는 은혜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성화론은 그 자체가 죄인이 ‘의인’된 것에서 출발한다. 죄인에게서는 성화되어가는 삶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의와 함께 성화되었음을 말하며, 더욱 온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기 위하여 자신들 안에 거하신 성령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있다고 보고서 그 능력을 사용하여서 성화된 자의 삶을 살므로 마침내 성화의 완성에 이르고자 한다. 그리고 거기서 구원의 완성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를 항상 죄인에게서 출발하며, 그러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한다. 우리에게 새 사람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상태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며 여기에 맞는 삶의 목적을 요구하면서 여기에 따라서 온전히 행할 것을 말씀해 주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자유한 자가 되었기에 자유한 법을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서 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놓여져 있는데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갈라디아서 5장에서의 성령의 소욕을 좇은 사람으로서 말하게 되는 예인 9가지의 성령의 열매는 사형에 해당하다는 육체의 열매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말씀되고 있다. 성령의 소욕이 아닌 육체의 소욕(욕망)을 좇는 자는 십자가를 대적하는 것이니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다. 하지만 성령의 소욕을 좇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 그에게서 보게 되는 성령의 열매 9가지에서 알 수 있듯이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들의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데 따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면 모든 생활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명예와 인기를 얻고자 질투하거나 악한 감정을 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갈6:25).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면 모든 생활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하는데, 여기에서 9가지의 성령의 열매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뜻의 온전한 성취를 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육체에 현저한 열매 따위는 맺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것으로 성화를 말하는 자는 이것에 의한 성화된 자의 삶을 살아 성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문제를 무엇 때문에 언급하시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신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의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악한 욕망의 본성이 발휘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우리를 자신이 못 박힌 십자가에로 이끌고 가서 자신과 함께 우리를 못 박아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좇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좇은 것에 대해서, 성령의 소욕을 온전히 좇아야 하는데 거기에 온전히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에 따라서 성령의 열매 9가지에서 보게 되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에서 자유한 자가 되게 해주시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모든 것에서의 수고와 그 무거운 짐으로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에서 흐르는 구속의 피가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 9가지는 실상 이 모든 것에서의 온전함이 되시는 그리스도 자신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내세울지라도 우리에게서는 성화를 기대할 수가 없다. 성화적 삶으로 이 시대에서의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변형된 유대주의자이며, 율법행위론자일 뿐이다. 따라서 성화론이 갖고 있는 핵심적 오류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구원의 원리에서 잘 파악하고 분별하여 성화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나가야 한다.
4. 성화를 교리화 한다면 구원론에서 구원의 순서에 의한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교회론에서 교회의 본질적 이해를 갖는 속성으로 다루어져야 함.
성화는 그 정의가 ‘거룩됨’이며, 그것의 본질적 이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가져나가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화를 기독교의 교리요 신학으로 다루어간다면 이것은 구원론의 구원의 순서에서 구원의 한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교회론의 교회의 속성에서 다루는 것이 옳다. 교회의 속성들은 주로 무형교회에 속한다. 이 무형교회만이 진정한 보편적교회(the real catholic Church)이다. 교회는 모든 신자를 회원으로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 지체인 한 몸의 통일체이므로 영적 성격을 가진다. 교회의 모든 신자는 객관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보고, 또 주관적으로는 원리에서 거룩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교회의 속성을 ‘교회의 통일성’과 그리고 ‘교회의 보편성’과 함께 ‘교회의 거룩성’으로 말한다. 이렇게 교회의 거룩성을 교회론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교회의 속성으로 교회의 거룩성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됨의 개념이 있으므로 굳이 성화란 용어를 사용할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굳이 ‘성화’란 용어를 버리지 않고 사용한다고 하면 교회의 거룩됨이 성화라고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신자들은 하늘에 있는 자이든 땅에 있는 자이든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자이신 것처럼 그들 또한 거룩한 자이다. 비록 땅에 있는 자들일지라도 이들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한 몸을 이룬 지체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날마다 죄의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그들의 육의 본성에서 나오는 악한 죄의 부패성으로 옛사람의 특성이 늘 발휘되고 있으나, 그들이 믿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성으로 언제나 새사람을 입는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자 간에 거룩된 자의 관계성이 맺어지고 있는 것이 신자이다. 따라서 교회론에서 교회의 속성으로 교회의 거룩성이 다루어지고 있으며, 이 교회의 거룩성은 곧 성화란 말이 지니고 있는 '거룩됨'의 개념과 같은 것이므로 성화란 말을 여전히 사용한다고 하면 구원론의 구원의 순서에 의한 구원의 한 과정으로 말을 할 것이 아니다. 성화를 부득불 교리화 하여서 말하려고 한다면 성화는 교회론의 교회의 속성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화는 기독교에서 구원의 교리요 신학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인 만큼 조직신학을 다루는 신학자들이 교리와 신학을 바르게 세우는 작업으로 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에 성경신학을 말하는 신학자들의 협력도 함께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화는 단지 교리로나 신학으로만 그 정당성이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관점에 의한 해석에서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 따르는 것에서 말해질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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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종 신학과 교리가 성경의 관점과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신학과 교리는 성경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때 일반적으로는 신학과 교리를 고수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보수주의 신학’을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생각을 달리한다. 신학과 고리가 성경의 관점과 다를 경우, 우리는 신학과 교리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신학과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보다 우선하거나 더 중시 여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이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오직 성경으로’의 모토에 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교회에 두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한 전파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를 말하고자 한 것도 이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성결한 삶, 곧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말해지고 있듯이 성화는 성결한 삶의 원인이 된다. 그러니까 성화 됨으로써 성결한 삶을 전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서 성결한 삶의 원인이 성화인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그 성화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그렇다면 성결한 삶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면 성화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성결한 삶을 성화의 삶(성화적인 삶)으로 종종 표현하여 말하는데, 이는 신자가 그렇게 살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노력해서 행한 데 따라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성화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영의 뜻이 실현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곧, 앞에서 언급한 “성화됨으로써 되어지는 실현이다.” 사실 칼빈에게서도 성화의 개념은 ‘거룩 됨’이다. 따라서 신자는 성결한 삶을 얼마나 잘 살았는지, 또는 성결한 삶을 얼마나 많이 가져나갔는지를 보여 나가는 것에서 성화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에게 가지신 거룩한 뜻을 실현하여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 각 개인의 인격과 그들의 원함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에게 품으신 성령의 거룩한 뜻을 좇아 행하게 하신 데 따라서 나타나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 되어 가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성화의 개념과 이해를 구원론과 연결시켜서 칭의 이후에 영화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으로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3) 우리는 칼빈을 비롯해서 성화를 말해온 분들의 주장과 그 견해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성화를 말해온 그 ‘말함’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엇을 말해왔는가를 알고 배우는 것이 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말해온 ‘성화론’에서 그것을 성경에 의해서 어떻게 개념 정리가 되어야 할 것인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Ⅶ. 결론
지금까지 신학의 한 분야인 구원론에서 구원의 서정으로 다루고 있는 성화를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성화는 구원론에서의 구원의 서정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교리 중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성화는 교리로서만이 아니라 성화 구절로 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 내용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사실 확인 작업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갖고서 고찰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교리이거나 신학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요구되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믿는 교리와 신학이 만들어져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엇을 믿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며, 교회의 역사에서 논쟁되어 왔던 것들을 정립해 주는 것으로서 이다. 
그러나 교회가 만든 교리와 신학에 교회 스스로 갇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구원론에서의 성화가 그 하나이다. 
지금까지 교회가 가져온 성화의 교리, 성화의 신학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처럼 다루어져왔다. 지금까지 교회가 말하고 가르쳐온 것으로서 성화를 말하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신학을 왜곡시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교회가 말하여 온 성화의 교리, 성화의 신학이 교회가 믿는 바인 참된 진리인가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으로이어야 한다. 사실 성화를 말하는 자들이 성경의 말씀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할 리는 없다. 그럼에도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으로 성화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를 볼 때는 그렇지가 않다.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성화를 말한다고 해서 성화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성화를 말하더라도 성화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성화를 말할 수가 있다. 성화의 교리, 성화의 신학이 그렇다. 
지금까지 성화는 어거스틴이 말해 왔고, 칼빈이 말하여 왔고, 개혁교회가 말하여온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래서 성화론은 개혁주의 교회의 교리요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사실만으로 교회는 성화론을 받아들이고 그 이해에 의해서 신앙화하여 왔다. 그리고 성화를 말하는 것으로 삼는 성경 구절을 그 이해에 의해서 해석하고 설명하여 오는 일을 교회는 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서 바르게 해석하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여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성경신학의 발전이다. 성경신학자는 성경 본문을 성경의 계시사적 관점에서 봄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파악하여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데 기여했다. Geerhardos Vos는 “성경신학이란 성경에 담겨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발전 과정을 다루는 주경신학의 한 분야이다”라고 정의하였으며, 이는 성경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보려는 시도를 노력 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성화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것도 이러한 경향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성화를 단지 기독교의 교리로나 신학으로 가져나가는 것으로 가져나갔던 것에서 성경신학의 관점을 통하여 재정립함으로써 성화란 용어가 갖는 본래의 의미도 올바르게 세우는 한편 성화란 용어로 덮었던 수건을 벗겨 성화 구절로 이용되었던 것에서 하나님이 전하시는 본래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 알 수 있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도, 곧 성경신학의 관점에 의해서 성경을 바로 보고 이를 신학으로 정립하려는 경향은 비단 성화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동안 조직신학에서와 주경신학에서, 그리고 여기에서 더 확장한다면 실천신학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져왔던 모든 분야에서도 행해져야만 한다. 그럴 경우 성경의 바른 이해에 의한 참된 신앙에 교회가 있게 함으로써 교회가 상속 받을 신앙에 있게 하는 것이 될 것인 동시에 그동안 신학으로 가르쳐져 왔던 많은 것에서 신학을 보다 올바르게 정립하여 이를 교회 신학의 유산으로 남길 수 있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신앙과 신학의 계승과 발전을 가져오는 기여가 있게 된다. 개혁교회의 신앙,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적 정통성과 진정성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질 것이다. 
1) 필자는 구원의 순서가 구원의 시간적 순서의 차원에서가 아닌 구원의 방식과 그 적용의 논리적이고 질서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 칼빈신학교 교장이며 조직신학 교수로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의 영향을 끼치며 우리 나라에서도 널리 소개되어 존경받고 있는 뻘콥의 견해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의 순서를 말할 때 각 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적용하는 사역은 단일적인 과정임을 잊지는 않으나, 단지 다양한 움직임들이 그 과정에서 구별될 수 있다는 것과 구속 적용의 사역이 명확하고 합리적인 순서로 진행된다는 것, 또한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충만함을 단일한 행동으로 죄인에게 분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단일 구원을 단번에 주셨다면 구속의 사역은 그 모든 국면과 그 모든 신적 충만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의식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보다 더 제한된 의미로 다양한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채택된 용어들을 종종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뻘콥, 고영민역, ‘뻘콥 조직신학 제5권 구원론’, 기독교문사, 1979, pp.13-14.). 
2) 조직신학이 아닌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순서는 로마서 8장 29-30절에서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구원의 예정에 따른 선택, 소명, 칭의, 영화이다. 그러한 것을 조직신학에서는 더욱 세분적으로 조직화하여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에 이어서 성화도 다루고 그 뒤로 성도의 견인과 영화를 다루고 있다. 
3) 거듭난 신자에게서의 죄의 지배 상태는 ‘죄의 상대적인 지배’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거듭나기 전의 인간에게 죄가 지배하는 상태인 ‘죄의 절대적인 지배’와 구분된다. 
4) 오웬은 신자가 은혜 아래 있을 때 신자 안에 역사하는 죄를 두 부류로 나눈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죄가 있고, 은혜의 지배 아래 살아가면 없어지는 죄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죄로서 죄의 지배에 적게 영향을 미치는 죄이다. 성경에 의하면 신자가 아무리 뛰어난 은혜의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죄가 있으니(시19:12), 이것은 우리의 내면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우리의 지식으로 찾아낼 수 없는 죄들이고 따라서 회개하기도 힘든 죄들이라는 것이 오웬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책임을 덜 물으신다고 보았다. 신자들이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 존재하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는 죄이기 때문에 그런 죄들은 우리의 영적 활기를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비록 그것들도 죄이므로 어느 정도 신자의 영혼에 영향을 주겠지만 그것은 매우 미미하다고 보았다. 죄의 부류에 있어서 다른 하나는 그러나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죄로서 인간에 의하여 파악되고 통제될 수 있는 죄이다. 이 죄가 신자로 하여금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만든다. 
5) 오웬에게 있어서 '죄 죽임'은 다음의 두 가지로 말해 진다. 첫째, 죄와 정욕을 끊임없이 약화시키는 것이다. 둘째, 죄에 대항하여 지속적인 싸움을 벌여 나가는 것이다. 
6) 온전한 성화란 웨슬레가 사용한 Entire Sanctification의 번역이다. 이것은 중생 다음의 체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성결의 체험’이라 불리어 왔다 
7) 웨슬레는 이것을 ‘신자의 회개’라고 불러 거듭나게 하는 회개와 구분한다. 
8) 온전한 성화는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되고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사람, 그 자체를 두고서 하는 말이 아니다., 곧 인간성이 완전하다는 것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항상 점진적인 역사하심이 있는 것을 의식한 성결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9) 죤 머레이(J. Murray)는 미국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에서 30여년간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활동했던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10) 죤 머레이 자신은 결정적 성화 교리가 역사상의 어떠한 특정한 견해에 대한 반응이라고 주장하였던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1952년 Keswick운동의 교과서적인 So Great Salvation의 서평을 통하여 그 책에서 제시된 성화관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성경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그리고 1967년에 '어떤 순간적이며 확정적인 경험상의 변화’에 대한 성경의 본문들을 좀더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성경적 성화관을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것으로 보아서 그 연관성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11) 우리 말 개역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개역혼영, 또 다른 번역 성경인 개역한자, 개역한글침례,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에서도 동일하다. 반면에서 우리 말의 새로운 또 다른 번역인 공동번역 성경은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주신”이라고 번역하였으며, 현대어 성경은 더욱 설명을 붙여서 “하나님의 소유,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다”로 번역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을 하나님의 소유적 개념으로 설명하여서, 이와 상대적 개념이 되는 사단의 소유적 개념으로부터 구별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창세기 3장 15절인 “여자의 후손은 사단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이다. 
12)개혁주의 신학에서 구원론은 칼빈의 5대교리를 따른다. 전적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a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를 말하는 칼빈의 5대교리는 그 머릿글자인 Tulip으로도 불리운다. 칼빈의 5대교리의 하나는 무조건적 선택인데, 이것은 모든 사람을 다 선택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제한속죄에서 말해지고 있듯이 속죄는 제한되었다. 이는 속죄를 받는 자의 그 수는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신부만이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조건을 갖춘 후 되어진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흠이 없이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되어진 것으로 ‘사랑 안에’ 예정되어진 데 따라서 되어졌기 때문에 무조건적이다. 이는 ‘하나님에 의한 사랑’이 성도 외에는 다른 어떤 자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3)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이른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의 실행으로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정도의 사랑은 세리들도, 또 이방인들도 한다면서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며 그들의 온전치 못한 의를 지적하셨다(마5:43-48). 
14)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우리 육신에서 발휘되고 있는 모든 ‘죄로부터’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발휘되고 있는 우리 육신에 속한 마음, 죄가 행해지고 있는 우리 생활에서 그 죄의 사함을 주신다. 그래서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바라보고 의존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이것이 달라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몸을 부정케 하는 의미에서 이다. 
15)세례의 의미는 주로 죄 씻음, 죽음과 새 생명, 연합 등으로 다양하게 말해지고 있으나, 세례의 본질적 개념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 외의 것은 이 연합에 의해 있게 되는 결과적 의미들이다. 여기서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있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됨을 말한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 안에 있었던 것 같이 우리가 지금 두 번째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다(참조. 롬5:17). 종종 세례를 구약의 할례와 동일시하는 견해를 말하는 자들이 있으나, 이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구약의 할례는 손으로 행하는 것으로 그것이 죄에 대하여 피 흘림에 의한 죽음의 심판을 예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의 세례는 손으로 하지 않은 전혀 영적인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에 의한 죄 씻음과 새 생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Ladd는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동일한 상관관계의 것이 아닌 전혀 대조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말하였다(G. E.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신성종, 이한수 옮김,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p.616.) 
16)죄와의 단절의 역설적인 것으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을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의 설명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곧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로서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담에게서는 나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성은 전혀 가질 수가 없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는 전혀 발휘되지 못한다. 그와 같이 만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받은 세례 받음을,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을 죄와의 단절로 이해하게 되면, 이러한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결코 죄성에 의한 악한 죄가 발휘될 수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게 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며(롬6:2), 마음속으로는 올바른 일을 할 것을 생각하면서도 육신은 원치 않는 미워하는 짓을 행한다(롬7:15). 바울은 자기가 원치 않는 이 악한 일을 시키는 것은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죄임을 말한다(롬7:17). 그러기에 바울은 자기 육신 안에는 의는 하나도 없으며, 죄가 아직도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이것이 인간의 형편이라고 말한다(롬7:18-24). 
17)대부분의 주석은 hJ aJmartiva를 주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Hagen은 hJ aJmartiva를 주어로 번역해야 하며, 이 경우 본절은 윤리적 요구가 아니라 죄의 지배가 금지되었다는 확고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8)바울이 로마서 6장 19절, 22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인 ‘거룩함(holiness)은 aJgiasmovn 이다. 19절에서 말하고 있는 “거룩함에 이르라”는 ‘slavery to righteousness leading to holiness’으로서 앞 절들에서 말하고 있는 ‘의에게 종이 된 것’으로, 죄라는 옛 주인에게 해방되어 의라는 새 주인의 종이 된 것의 관계성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I put this in human terms because you are weak in your natural selves. Just as you used to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in slavery to impurity and to ever-increasing wickedness, so now offer them in slavery to righteousness leading to holiness.), 그리고 22절의 “거룩함에 이르러”는 ‘the benefit (which) you reap leads to holiness'으로서 앞에서 말하고 있는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로 인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인 거룩, 곧 마침내 영생을 누리게 된 것을 말한다.(But now that you have been set free from sin and have become slaves to God, the benefit you reap leads to holiness, and the result is eternal life.) 따라서 성경에서의 ’거룩함‘을 그 의미의 바른 이해가 없이 ’성화‘란 용어로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19)‘성화’란 용어는 영어로는 ‘sanctification'이다. 이 용어는 헬라어 ἁγιασμος를 번역한 것으로 그 뜻은 ’거룩함‘이다. 그러나 모든 번역 성경은 동일하게 ‘sanctification'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가령 베드로전서3장 15의 “”너희 마음에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를 KJV은 ”But sanctify the Lord God in your hearts:“로 번역하였으나, NIV는 “But in your hearts set apart Christ as Lord.”로, 그리고 RSV는 “but in your hearts reverence Christ as Lord.” 라고 각각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가 kuvrion de; to;n Cristo;n aJgiavsate인데 ‘거룩하게 하고’인 aJgiavsate의 원형인 aJgiavzw의(to sactify)의미가 ‘거룩하게 하다’로 여기에는 ‘깨끗하다’, ‘성별하다’, ‘경외(숭배)하다’의 뜻을 포함하고 있어서 문맥의 내용을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한글개역)로 번역하기도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공동번역), 또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높이며’(표준새번역) 등으로 번역이 다양하다. 그리고 그 번역에서 ‘거룩’의 공통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서 거룩 되어져 가는 것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경외하는 것으로서의 개념으로 거룩을 다루고 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거룩’은 성경 번역에서 ‘sanctification'으로 번역하기도 하는가 하면(YLT), 또는 ’holiness'로도 번역하였는데(KJV, NIV, RSV 등), 이를 한글개역성경에서는 ‘거룩’으로 번역한 것을 사람들이 용어로 사용함에 있어서는 ‘성화’로 다루어 왔다. 이렇게 ‘거룩’이란 말은 ‘성화의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으며, 성화를 ’성결‘로 동일시하는 경향에 있다. 
20)칼빈을 비롯한 신학자들의 성화론에 대한 견해는 성화의 시작을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칭의와 함께 보면서 완전한 성화를 영화의 단계에서 본다. 그러므로 성화는 칭의와 함께 되어진 것인 동시에 또한 성화의 과정을 요구하는 불완전한 성화의 개념을 갖는다. 그것은 L. Berkhop가 말한 대로 “성화는 온전하면서도 아직 발전되지 못한 새 사람으로서의 완전한 크기까지 성장해야만 한다. 새로 태어난 어린아이는 예외 없이 부분적으로 완전하지만 의도되는 발전의 정도에 있어서는 완전하지 못하다. 이와 같이 새 사람은 부분적으로 완전하지만 현세에서 영적인 정도에 있어서는 불완전한 채로 남아 있다. 신자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동안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화의 이해는 웨슬레에 이르러서는 성화의 단계를 사람이 거듭날 때 성화가 시작된다는 초기의 성화(initial sanctification)와 그 후에 오는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라는 견해를 갖게 하였다. 그가 성화의 단계를 이 둘로 보게 된 것은 거듭남으로 인하여 성화의 단계에 들어섰으나 온전한 성화에 이르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온전한 성화는 초기의 성화를 경험한 자가 이후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체험에 의해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21)Anthony A. Hoekema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속에 죄가 계속 현존하기 때문에 신자의 성화는 계속적인 과정이어야 한다”면서 옛사람이 주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죄에 대하여는 죽고 새생명 가운데서의 성장을 포함한 점진적인 성화”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의 견해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서는 산 자가 된 것이 말하는 십자가의 공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성도는 오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그만큼 새사람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 그래서 그가 새사람이 된 것만큼 새사람의 성품이 발휘되는 것이 아닌, 여전히 새사람이 되는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안 되는 옛사람의 악한 죄성을 지닌 것이다. 성도가 새사람인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연합한 자를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 속에 두고서 옛사람이 발휘되는 그를 새사람으로 다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신 후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죄 사함과 의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 
22)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온전함’은 그가 성숙한 자로 성장하여가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몸으로 하나 된 데 있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의 몸으로 온전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엡3:20-22, 4:13-16). 
23)최세창은 그의 신약주석시리즈 히브리서에서 P. E. Hughes가 쓴 히브리서 주석에서 소개하고 있는 르페브르 테타플이 페브르 테타플가 한 말인 “마음이 거룩하고 순결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를 오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순결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성화되어 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24) 오늘날에 있어서 신학은 다양하다. 주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신학을 말한다. 그것은 성경신학이다. 이 성경신학은 일반적으로는 조직신학, 또는 주경신학의 한 부분으로 말하여지고 있다. 그것은 비교적 역사가 짧은 성경신학이 조직신학에서 한 분과 신학 분야처럼 다루어져 온데다가 주경신학인 성경을 주해하는 것에서 있게 되는 신학의 관심사를 구약신학의 관점 또는 신약신학의 관점으로 다루게 된 것이 성경신학이기 때문이다. 성경신학의 효시는 종교개혁 후기에 와서 학자들이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리에서 벗어나 있음으로 인하여 성경을 완전히 의존하는 데서 빗나가 있는 것에 대한 반향으로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조직신학적인 원리를 지지하는 성경본문(proof-texts) 모음(수집록)-Collegia Biblica-을 만들어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꾀한 것에서 찾으며, 그 다음에는 독일 경건주의자(pietists)들이 당시 메마르고 딱딱한 교의학에 대항하여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 성경신학이다. 그리고 성경신학은 18세기 이후 점차 조직신학에서 독립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성경신학이 독립된 신학으로 출발하는 획기적인 계기는 J. P. Gabler(1753-1826)가 1783년 3월 31일 Altdort 대학교 취임 연설로 한 특강 “Oratio de iusto discriminine theologicae biblicae et dogmaticae regundisque recte utriusque finibus"(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올바른 구분과 그들 과목의 목표에 대한 바른 정의에 대하여)이다(황창기, ‘성경신학의 입문’, 고신대학논문집 제15집, 1987, pp.254-255.). 한편, 주경신학에서 성경신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에는 ‘성경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G. Vos가 1893년 가을부터 Princeton 신학교 교수회의에서 성경신학 교수로 임명된 데서부터 찾아진다(Ibid., p.259.). 그리고 J. Murray를 비롯한 Westminster 신학교 교수와 그를 통해 배운 출신자들에 의해서 이어져왔다. 그런데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는 종종 충돌한다. 그것은 조직신학이 성경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어떤 주제를 진리의 체계 속에서 교리로 세워나가는 일을 하는 것에서 성경을 바르게 주해한 것에 의한 주경신학의 연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 필연적이나 논리적 이해와 그 기술(記述)에 의존함으로써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많이 개입된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관점에서 다시 새롭게 보아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며, 이로 인해 성경신학에서 다루어지는 구약과 신약에서의 신학의 주제가 되는 문제 의식은 조직신학이 다루는 주제와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성경신학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성경신학은 그동안 교회가 말해왔던 조직신학이 갖는 교리와 신학을 보다 더 보완하고 보충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교리와 신학은 고쳐서 바르게 세우는 일도 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신학에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소스(source)를 제공해 주는 역할과 기능을 하는 것이 성경신학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