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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종말론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
박아론 교수
종말론에 대한 소위 『세기말적인 관심』이 고조되어 그 절정에 달한 듯한 느낌을 받는 이 때에 각종 잘못된 『세기말적 종말론』에 대한 비판들이 속출하고 있으나 막상 그 내용들을 읽어보면 『유행을 좇아가며』고정 관념과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보편적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또 이것이 오늘날 『종말론의 페허』가 기독교에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러움마저 우리에게 안겨다 준다. 
그런고로 우리가 오늘날 모두 알고 소유하기를 원하는바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바르고 균형잡힌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필자는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서 필자가 맡은바 이 주제에 대하여 (1) 철학과 종교에 있어서의 종말사상과 (2) 교회사에 있어서의 종말론과 (3) 종말론의 신학적 위기라는 세 가지 제목으로 나누어서 개별적으로 그러나 간략하게 논술하고자 한다. 
1. 철학과 종교에 있어서의 종말 사상 
종말사상은 기독교에 있어서만 존재하는 특이한 사상이 아니라,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람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꾸준히 물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묻게 될 것이다. 인류의 종말과 내세에 대한 물음을 묻고 그 대답을 얻고자 추구하는 일을 인류가 보편적으로 해 왔으며, 그 중에서도 철학자들과 무수한 종교인들이 인류의 종말과 내세에 대한 물음을 묻고 탐구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1) 철학에 있어서의 종말 사상 
철학자 플라톤(Plato, BC427-347)은 「영혼불멸설」을 말하였고, 스피노자(Spinoza, 1632-1677) 또한 부정하지 않았으며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영혼불멸의 교리에 소극적인 반면 실천이성의 가설로 받아들였다. 19세기와 20세기초의 유심론 철학자(Idealistic Philosophers)들은 영혼의 사후존재와 내세를 거절하였으며, 「세계 순환설」이나 「인류 환생설」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등, 20세기의 철학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은 영혼의 사후 존재와 내세라든가 역사적, 미래적 종말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2) 종교에 있어서의 종말 사상 
종교에 있어서는 종말 및 내세 사상이 강조되고 있음을 본다. 불교에는 열반(Nirvana)사상이 있고, 회교에는 육감적인 낙원사상(Paradise),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행복한 사냥터」로서의 내세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종말 및 내세 사상은 애매하고 불확실한 바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 만은 종말 및 내세 사상이 정확하고 명료하게 신적 권위로서 가르쳐지고 있다. 그 이유는 종말 사상에 대한 근거를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두기 때문이다. 종말 및 내세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교회사에 있어서의 종말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종말과 내세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거나 연구와 논의를 하지 않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어떤 때에는 크게 각광을 받지 못한 때도 있었으나, 최근 15년 또는 20년 동안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 관심이 더욱 커졌고, 「시한부 종말론」이 성행하기도 하였으며, 21세기 전반까지는 교회 역사상 종말과 내세사상의 황금기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1) 초대교회 시대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던 교회의 초기역사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종말과 내세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말론과 내세사상의 윤곽은 잡혀 있었으나 구체적인 검토에 있어서 애매 모호하였고 불분명한 것이 많았으며, 크게 발달하지는 못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2) 어거스틴으로 부터 중세에 이르는 시대 
오리겐(Origen,185-254)과 어거스틴(Augustine,354-430)의 영향을 받아 「천년왕국 부정론」이 교회 안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중세교회는 내세에 대하여 신도들을 교육하는 일에 역점을 두면서, 「중간기 상태」(the intermediate state)에 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하였고 연옥(purgatory)의 교리를 발전시켰고, 중간기 상태에 대한 교회의 개입이 승인되자 「성례전」과 「고해성사」와 죽은자들을 위한 기도와 죄에 대한 사면 등에 관한 교리가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3) 종교개혁으로부터 19세기까지 
종교개혁가들은 「종말론」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하지 않았고, 「천년왕국론」을 무시한 종말론을 수용하였으며, 로마교회의 「연옥 교리」를 의식하여 「중간기 상태」에 대해서는 연구를 많이 하였다. 17, 18세기의 경건주의와 합리주의 사상은 「무미건조한 영혼불멸설」이나 사후의 영혼의 잔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종말론 사상의 전부를 삼았다. 19세기 「진화론」의 출현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종말론」 또는 「내세사상」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고,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을 무시하고 그의 윤리적 교훈들만을 강조하여 「종말론」이 없는 「윤리주의 신학」을 만들어 놓았다. 
(4) 20세기의 기독교 종말론 사상 
이성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뒷전에 돌려졌던 종말론 사상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철학적이며, 상징적인 의미의 종말론을, 슈바이쩌(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을 강조하였으며, 다드(C.H. Dodd, 1884-1973)는 「실현된 종말론 사상」을 주장하였고, 요아킴 에레미아스는 예수의 종말론 설화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종말론적 결단」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존 로빈손(John A.T. Robinson) 같은 신학자는 「개막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희망의 신학」으로 명성을 얻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은 변증법적 사고로 말미암는 「미래지향적인 사상」으로서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을 거절하기 때문에 「종말론」(eschatology)이라기 보다는 「미래론」(futurology)이라고 불러야 합당하다고 사료되는 것이다. 
3. 종말론의 교리적 신학적 위기 
과거에는 종말론이 신학적으로 본격적으로 각광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종말론을 「성도의 영화」라든가 「그리스도의 통치의 완성」등 개념 또는 교리를 취급한다고 하여 「교의신학」에 있어서 「구원론」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종말론」을 「교의신학의 왕관이요 머릿돌」로 인식하는 견해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종말론」이 매우 중요한 것은 「종말론」이 「교의신학」의 다른 분야들에서의 연구가 충족시키지 못한 질문들에 대하여 그 대답들을 공급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성경적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계의 종말과 관련된 논의를 하는 「일반종말론」과 인간들의 「개인적 종말」 즉 개인의 사망과 부활 사이에 존재하는 개인의 영혼의 거처 및 상태를 논의하는 「개인 종말론」으로 구성된다. 성경은 양자를 다 말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어느 한 편에 치우친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안팍에서 존재하는 「종말론」의 교리적 신학적 위기는 「성경적 종말론」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한 부분이 되는 「개인 종말론」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활발치 못한 것이며 심지어는 무시해 버리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이 우리 「종말론」을 『반쪽 종말론』 또는 『절름발이 종말론』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우리가 「개인 종말론」의 이슈들을 검토연구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사망한 개인들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다음에 오게되는 영생 또는 영벌의 내세적 세계와 연관시켜 주는 일을 할 수가 없다(롬5:12, 고전15:22, 히12:6, 계14:13, 고후5:1, 사26:19, 단12:2, 시17:15, 욥19:25,26, 행1:11, 마24:30, 살전4:16,17, 행3:20,21, 마24:9-13, 딤후3;1-5, 요일2:18,22,23, 눅23:43, 고후12:2,4, 마13:50, 계21:4, 22:3,4,5, 막9:48,49, 마25:46, 계20:1-15, 계21:1-3등) 
오늘날 우리가 마지하고 있는 「종말론」에 있어서의 또 다른 교리적 신학적 위기는 「일반적 종말론」분야에 있어서 『성경적 종말 연구』가 다루어야 할 「그리스도의 재림」과「천년기」와 「죽은자의 부활」과 「최종심판」과 「최후상태」중에서 유독히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그것도 『지상적 천년왕국』의 이슈와 관련된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 『과열된 관심』과 『매우 주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접근과 해석』의 결과로서 성경적이 아니고 개혁주의적이 아닌 『사이비 종말론』 또는 『크게 잘못된 종말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있다. 
(1) 세대주의 종말론은 바른 천년기전 재림론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평신도들 중에는 세대주의적인 성경연구를 터득하여 본 교회 목사님의 설교나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우습게 여기는 일이 많다. 또 적지 않은 수의 부흥강사들과 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잘못된 세대주의 이론을 분별하지 못한 채 교인들에게 세대주의적 재림도표를 그려놓고서 가르치는 진풍경이 자주 연출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취급하다 못해 거의 기계적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구약시대를 5시대로, 신약시대를 2시대로 인위적으로 구분하여 7시대 원리로 해석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하여 성경에 예언된 모든 사건들을 전부 여자적(如字的) 으로만 해석하여 여러 사건들의 순서를 복잡하게 기계적으로 정하여 놓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도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으로 구분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지상재림하신 후 천년왕국이 펼쳐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대주의는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7년 휴거를 주장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이미 비밀리에 휴거가 진행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여 불안과 공포심에 떨게끔 한다. 
(2) 시한부 종말론은 성경적인 입장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시기를 놓고 언제 어느 때이다 라고 시한을 확정하는 것은 성경적인 바른 종말론도 아니고 또 더욱이 우리 교단의 신학적 전통도 아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가 종말적 시대를 살고 있음과 또 그리스도께서 언제라도 다시 오실 수 있음에 대하여 누누히 말씀하지만, 그 때와 기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아모스 3: 7 의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라는 말씀을 마치 하나님께서 선지자 자신에게는 재림시기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는 식으로 해석하면서 재림의 시기를 안다고 떠들어대게 되면, 잘못된 영에 빠지게 되면서 사회적 종교적으로 큰 혼란을 가중시키게 된다. 그런 피해들은 이제까지 교회사에서 계속 있어 왔고, 우리 시대에도 우리가 경험해 왔으며, 현금에도 우리 교계에서 심심챦게 목격하는 것들이다. 시한부 종말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주님의 재림을 슬기롭게 깨어 준비하는 입장이 바로 우리 교단의 종말론적 전통이요 성경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부언하는 바는 이와 같은 우리 교단의 종말론적 전통은 고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 제7권 「내세론」의 내용에 입각하는 바가 크다는 사실이다. 
끝맺는 말 
역사적 천년기전재림론은 우리교회와 교단의 신학적 전통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그리스도의 지상 천년통치가 있고 그 다음에 『대 백보좌 앞에서의 심판』과 신천신지, 새 예루살렘의 도래와 의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영벌의 멸망』으로 들어가는 최후 상태가 존재하는 것을 믿는 입장이다. 우리 교단의 신학적 전통은 총신의 전신인 구 평양신학교의 신학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그런데 구 평양신학교의 신학과 총신 초창기의 신학을 이어주는 신학자는 박형룡이다. 따라서 우리가 박형룡의 종말론적 사상 또는 견해가 역사적 천년기전재림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역사적 천년기전재림론이 우리 교단의 종말론 분야에 있어서의 신학적 전통이 된다는 것은 명심할만한 것이다. 물론 「무천년기 재림론」이나 「천년기 후 재림론」이 이단은 아니다. 또 『불건전한 종말론』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바람직스럽지 않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천년왕국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도 정통개혁주의 신학은 신앙의 양심과 학문연구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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